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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익희 지음
먹고 사는 문제에 매우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돈의 흐름을 관장하는 금융이다. 저자는 현재 세계의 금융을 주무르고 있는 유대인의 역사를 파헤쳐서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책은 2부로 나누어져 1부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중세까지 고난의 역사를 다룬다. 2부는 15세기 대항해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유대인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책은 660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이곳에서는 중심되는 몇 가지를 2번에 걸쳐 살펴본다.
1. 디아스포라
유대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리 그들이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독특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 이런 믿음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늘로부터 부름을 받아 수메르 문명이 발달했던 메소프타미아의 우르지역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를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계약을 맺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이름인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명령도 함께한다. 아브라함의 '아브'는 아버지라는 뜻이고 '함'은 민족이라는 뜻이다. 즉 '민족의 아버지'가 되고 이때부터 유대민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민족이라는 독특한 믿음을 마음에 품게 된다.
아브라함 이후 유대인은 '유대교'라는 믿음을 지니며 인류는 하느님이 계획한 운명을 지니는데 유대인이 이 계획에 동참한다는 '선민의식'을 유지하고 발전시켜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4천년의 기간에 걸쳐 유랑과 핍박의 길을 걸어간다. '디아스포라'의 길이다. 디아스포라란 유대인들이 세계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사는 현상을 말한다.
유대인은 4백년간의 이집트 종살이, 이집트 탈출 후 40년의 광야생활, 아시리아와 바빌론으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포로시대, 로마제국에 의해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2천여년의 디아스포라라는 험난한 삶을 살아온 민족이다.
유대인이 나라 없이 세계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험난한 삶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민족성을 유지하고 세계 경제의 핵심 역할을 맡아온 밑바탕은 선민의식과 함께 실질적으로 그들의 삶을 묶어주는 '토라'라는 경전과 교육방식이다.
토라는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이끌고 나온 유대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포함한 유대인의 율법인 모세오경을 말한다. 토라에 의해서 유대인에게 구원이라는 믿음과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세대에 걸쳐 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독특한 '안식일'이라는 개념이 알려지고 이것이 오늘날 일요일이라는 휴일로 정착되었다. 그 당시 혹독한 노동환경에서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휴식을 취하도록 하는 혜택이 돌아간 것이다. 또한 율법에 명시된 위생관련 사항은 유대인들을 흑사병과 같은 죽음의 전염병에서 구해 주었다.
유대인들이 나라 없이 흩어져 살게 된 까닭에 그들은 성전 대신 생활 속에서 믿음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방식을 채택했다. 사제가 없는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에서 율법학자인 랍비를 중심으로 율법낭독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의식을 계속하게 된다. 이 같은 시나고그는 유대인 생활의 중심이 되는데 이 곳에서 종교 뿐 아니라 교육, 정치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유대교에서는 열세살에 성인식을 치루고 나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토라를 읽어야 한다. 이 같은 의무에 따라 유대인은 일찍부터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반면 다른 민족이나 기독교도들은 대다수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상태로 역사가 진행된다.
유대인들이 토라공부를 통해 민족성과 종교 뿐 아니라 글을 읽고 쓸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실은 이후 유대인의 삶에 다른 민족에 비해 월등한 위치를 갖게 한다.
로마에 의해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 후 유대인들은 2000년에 걸쳐 유럽 각 지역으로 흩어져 살게 되는데 그들은 많은 박해와 고난을 받는다. 이차대전 중 나치독일의 히틀러가 저지른 6백만의 유대인학살은 너무 잔혹한 역사다. 왜 유대인들은 이런 박해를 받아야했는가.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에서 신으로 모시는 예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자기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신성모독죄를 씌어 죽인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갖 박해와 고난을 받으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 온 것이다.
2. 고대 페니키아와 로마시대
기원전 1300년경 유대인들이 살았던 가나안지역은 지중해의 동부지역으로 페니키아인과 유대인이 함께 살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해상무역이 발달된 곳으로 자유와 개방이라는 생각이 널리 펼쳐졌다. 또한 지중해 무역을 담당한 그리스인들과 함께 페니키아와 유대인들은 자유를 숭상하고 부의 축적을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한 진취적인 자세를 유지하였다. 이 사상이 자본주의를 이루는 그리스 히브리 사상의 근간이 된다.
특히 그들 스스로는 '가나안 사람들'이라고 부른 페니키아인들은 장사한 내용을 기록하기 위해서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인의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알파벳 문자를 만들었다. 기원전 9세기경 그리스인들이 페니키아 언어에 모음을 더해 그리스어를 만들고 이것이 로마에 계승되어 현재의 알파벳으로 발전한다.
가나안땅에 살던 초기 유대인들은 농업과 목축을 위주로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 기간 중 사해의 소금으로 교역을 시작하여 해상무역을 하는 등 점차 경제적으로 부유한 길을 찾아 나선다. 이 당시 소금은 매우 귀해서 금값에 버금갔을 정도이다.
로마가 발전한 이유 중 하나도 소금이었다. 기원전 640년에 로마인들은 로마 인근 바닷가에 염전을 만들어 하천을 통해 소금을 유통시켰다. 이로써 로마는 소금유통의 중심지가 되어 소금을 대륙으로 수출했는데 이 수출하는 길이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 된 그 유명한 소금길 '비아 살라리아'이다. 월급을 뜻하는 영어 '샐러리'가 라틴어로 소금을 뜻하는 '살라리움'에서 나온 것도 그 당시 관료나 군인에게 준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은 기원전 37년부터 팔레스타인에 자치 통치를 허락했다. 그러나 헤롯 왕이 죽고 나서 로마제국의 직접통치로 바뀌었다. 유대인들은 기원 후 66년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132년에 2차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에 패해 유대인의 3분의 2 이상이 죽게 된다. 로마와의 전쟁으로 제사장 지파인 사두개파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강경파인 엣세네파와 열심당원들마져 멸절된다. 이후 평신도로서 율법학자들인 바리새파가 유대민족의 스승 직을 계승한다. 랍비를 중심으로 하는 유대공동체는 토라와 '탈무드'에 의한 삶을 유지하는데 특히 자녀교육을 못할 정도로 가난한 유대인을 방치하는 유대공동체는 유대율법에 위반되며 유대인은 누구든지 유대인사회의 도움을 청하고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지시킨다. 또한 자녀들의 교육기관을 만들어 경영할 의무와 함께 가난한 가정아이들은 무료로 교육시키고 인재양성을 위한 장학제도 등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 '탈무드'는 입으로 전해져 온 율법과 이에 대한 해석을 담은 책으로써 유대인의 모든 제도와 생활일반에 대한 법률서이다.
3. 대항해시대 이후 18세기
로마 멸망 이후 지중해 해상권은 이슬람세력으로 넘어간다. 622년 이슬람 왕국을 건설한 아랍인들을 페르시아와 비잔틴제국을 정복하고 아프리카 북부지역과 이베리아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슬람교는 유대인에 대해 관대하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추방된 많은 유대인들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하여 상업 및 교역활동을 발전시켰다. 특히 유대인들은 문맹인 현지인들과 달리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계산에도 능해 상업적 재능을 꽃피운다.
이 시대에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전쟁이 많았으나 유대인은 전쟁과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무역업이 그들의 독무대가 되어 지중해무역을 번성시켰다. 그러나 12세기 중엽 이슬람근본주의 왕조가 이베리아에 상륙하여 유대인 탄압을 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베리아반도 북부의 스페인왕국으로 피신한다. 유대인들이 떠나자 이슬람왕국의 상업적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교환경제의 쇠퇴와 함께 사회적 기반도 쇠퇴했다. 유대인들은 돈의 중요성을 알고 부를 이루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을 헤치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는 근심, 말다툼, 그리고 빈 지갑이다'와 '몸의 모든 부분은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은 돈지갑에 의존한다'는 유대인 속담이 이런 생각을 알려준다.
1492년 이베리아반도를 통일한 스페인의 이사벨여왕은 유대인을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한다. 이 때 유대인들은 화폐와 금, 은은\을 가져갈 수 없도록 했다. 유대인 추방결과 그들이 많이 살았던 주요도시의 집세가 반으로 폭락하고 은행들이 대개 파산했다. 금융업과 상업이 몰락하면서 면직물 산업 등도 내리막길을 걸었으며 생산과 유통기반이 무너지면서 스페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 쫓겨나 네델란드와 벨기에로 몰려온 유대인들은 피난 당시 갖고 온 보석, 특히 다이아몬드 보석사업을 시작하여 부를 축적하게 된다. 15세기 중엽 이후 네델란드는 청어사업으로 경제강국의 기틀을 잡는다. 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잡는 즉시 내장을 꺼내고 소금에 절여 보관하는 염장법을 개발한다. 냉장고가 없던 당시 소금에 절인 청어는 전 유럽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 때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던 이베리아반도의 소금을 사들여 대규모의 청어절임사업을 기업화한다. 이것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은 유럽의 소금 중계무역기지가 된다.
16세기말 스페인에 맞서 네델란드가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유대인을 주축으로 한 네델란드인들이 이베리아반도의 주요 소금생산지를 봉쇄했고 펠리페 2세 치하의 스페인은 파산지경에 이른다.
1602년 네델란드의 유대인들이 주축이 되어 동인도회사를 설립한다. 동인도회사는 주식회사형태를 통해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증권거래소를 설립하여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제도와 함께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하여 은행권 사용을 일반화 시켜 이후 영란은행, 미국 연방은행제도와 같은 현대의 중앙은행의 모델이 되었다.
4. 영국과 산업혁명 시대
유럽의 작은 섬나라 영국은 16세기 말까지만 해도 스페인이나 네델란드에 밀리는 변방국이었다. 당시 영국 해외무역의 대부분은 모험상인이라 불리는 유대인 모직수출상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1558년 영국여왕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는 30년이 지난 시기에 스페인의 무적함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때부터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세계경제를 주무르게 된다. 이후 청교도혁명을 통해 공화정을 설립한 크롬웰정권은 실용주의를 채택하고 17세기 중반 유대인의 영국 이주를 허용한다.
영국으로 건너온 유대인들은 런던의 구도심지역을 경제특구로 배정받아 은행업, 무역업, 의사 등 전문직업가로 활동하며 이후 영국경제를 이끄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 특구가 오늘날 런던내의 금융가인 '더 시티'가 되었다.
명예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윌리암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비용을 위해 유대금융가들에게 자금요청을 한다. 유대인들은 자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은행권'을 발권할 수 있는 민간은행 설립을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킨다. 화폐주조권을 손에 넣은 유대인들은 최초의 민간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을 설립한다. 잉글랜드은행은 화폐의 발행과 정부의 국채를 묶어놓는 시스템을 개발하여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영국에서 유대인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유대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유대인은 소매업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유대인들은 소매업 대신 도매업, 유통업, 무역업, 금융업, 재정분야에 주력했는데 이로 인해 오히려 부가가치가 더 높은 분야에서 종사하게 되었다.
17세기 영국의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들의 부당한 고리대금업을 견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협조하여 유대인들이 시장금리를 떨어뜨리고 대규모 자본을 조달한 후로 영국의 산업혁명 확산과 과학기술이 뒤따르고 영국이 세계경제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18세기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흑인노예 무역에 종사하여 자본을 축적하였다. 또한 인도의 원면을 수입하여 면직들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면직물산업에서도 크게 활동하여 산업혁명을 이끌어낸다.
산업혁명의 시기에 유대인 활동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산업의 장악이다. 마이어 로스차일드의 셋째 아들은 런던의 잉글랜드은행을 장악하였다. 첫째는 독일, 둘째는 오스트리아, 넷째는 이탈리아, 막내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하는 등 유럽 전역의 금융을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이들은 정보 및 수송네트워크를 구축하였는데 예를 들어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한 소식을 다른 사람들보다 하루 먼저 접하여 채권을 미리 팔아치우고 그날 저녁에 폭락한 채권을 헐값에 사들여 어마어마한 부를 획득하였다.
5. 20세기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인의 활동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진출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위시한 많은 유대인들이 금융업과 무역업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금융업의 제이피모건은 금융업에 이어 철도업, 그리고 제너럴 일렉트릭의 탄생 등 미국 산업의 굵직한 발전을 이룬다. 또한 유대인들은 뉴욕타임스를 인수하여 언론계를 장악하고 미국연방준비은행을 설립하였다. 록펠러 가문은 석유시장을 석권하였으며, 유대계 금융인인 샌디웨일은 시티그룹을 탄생시켰고 골드만은 사위와 함께 골드만삭스라는 투자은행을 세워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였다.
이 외에도 연예계의 스필버그, 연방준비은행 총재인 버냉키, 헤지펀드의 대부 소로스, 키신저 전 국무장관, 루빈 전 재무장관,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이 활약 중이다. 미국 상원의 경우 2012년 기준으로 13퍼센트가 유대인이고 미국 정치인들이 선거자금 모금과 언론의 지지를 위해 가장 먼저 유대인 공동체를 찾는데서 유대인들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이 이처럼 금융, 언론, 정치, 문화 예술 등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몇 가지 답이다. 첫째, 탈무드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의 종교와 교육이 있다. 다른 민족들이 문맹을 벗어나지 못한 시기에 유대인은 탈무드 교육을 통하여 그들의 지성을 갈고 닦은 누적효과가 발휘되었다. 둘째, 유대인들은 유대공동체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모두 '한 가족'이라는 개념을 어려서부터 마음에 품고 살게 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가족의 자녀는 공동체가 나서서 무료로 교육을 시키고 뛰어난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두뇌개발을 시킨 공동체의 노력이 있었다. 셋째,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유대공동체간에 소통과 협력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 이를 통해 무역업이나 정보교류 등으로 남보다 앞선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넷째, 유대인의 현실세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다. 현실에서 부를 획득하고 잘 사는 것은 하늘의 축복을 받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일하고 부의 축적에 힘을 기울였다. 다섯째, 세상의 부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원리를 일찍이 터득한 것이다. 고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높은 품질을 위한 혁신과 능률적인 방식을 찾고 상품가격을 낮추는 등 경영합리화를 실시하여 고객가치를 창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소로스의 투자핵심이론을 보자. 소로스는 런던정경대학을 다닐 때 세계적 석학인 칼 포퍼 교수로부터 받은 사상에 자신의 생각을 더해 '오류성'과 '상호작용성'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 오류성이란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세상을 인지하는데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며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틀리기 쉬우며 남은 물론 자신의 판단도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투자에 임하는 것이다. 상호작용성은 기대와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투자에 있어서도 서로 상대방의 행동과 그에 따른 결과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