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김씨 출신의 왕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로
아버지 김만기는 광성부원군으로 시호는 문충공이다.
1672년(현종14년)에 양관 대재학, 1673년에 병조판서와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74년에 예조판서에서 정헌대부로 승진되었다가 숙종의 국구(왕의 장인)로
광성부원군에 책봉되고, 도총관 호위대장과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
어머니는 서원 부부인 청주한씨 사이에서
4남3녀중 장녀로, 한성부 회현방 사저에서 세 번째로 태어났다.
예학의 대가로 예문의 종장이라 불리며,
유교의 동국 18명현의① 한분이신 문원공 사계 김장생의 현손이다.
할머니 해평윤씨는② 윤두수(선조때 영의정)의 아들 윤방(인조때 영의정)의 손녀로
정혜옹주(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의 딸이다.
인경왕후는 숙종의 첮째 왕비였지만 후사도 없이 안타갑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문효공 서포 김만중(구운몽의 저자)은 숙부가 되며 아버지 만기와 형제다.
두 형제가 학자와 인격자로 최고의 관직인
양관대제학과(만기:현종, 만중:숙종)③ 판서를 지냈으며,
사후에 두 형제가 불천위가④ 되었다.
또한 두 형제분이 숙종의 묘정(종묘)에 배향되어
사후에도, 숙종의 신하로 가문의 영광과 명예를 드높였다.
충문공 김춘택은
친정조카로 훗날 인현왕후의 복위(復位)에 적극 참여한다.
1670년(현종11년) 10세 때, 왕세자 빈에 간택되어 의동 별궁에 들어갔다.
1671년 음력 3월 인경왕후는 숙종이 세자로 있을 때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674년 (현종15년)에 시아버지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1676년 (숙종2년)에 16세 나이로 정식 왕비에 책봉되었다.
숙종과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지나 자식 복이 없는 박복한 왕후였다.
1677~1780년까지 숙종 3년과 숙종 5년에 2명의 공주를 낳았으나 모두 죽었다.
세 번째 임신하였으나
유산하여 후손을 남겨두지 못한 불운의 왕비였다
일찍 세상을 요절한 두 공주와 용정 마져 유산하니 상심속에,
1680년(숙종6년) 음력 10월 26일 2경(오후 9시~11시)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 하셨다,
천연두로 인해 발병 8일만에 19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야했다.
인경왕후가 승하 하셨을 때 숙종도 병에 걸렸다.
숙종은 창덕궁에서, 인경왕후는 경덕궁에 따로 떨어져 있었다.
대신들이 인경왕후의 승하(昇遐)를 숙종에게 알리고자 하니,
명성왕후(숙종의 어머니)가 “주상이 밤에 구토를하고,
가슴과 배가 통증에 시달리다
이제 겨우 잠들었으니, 중궁의 승하를 아침에 알려라.”하였다.
숙종은 인경왕후의 부음을 아침에 듣게 되었다.
다섯 왕비의 릉이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중의 하나가 익릉(翼陵)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왕후가 떠난 1년 뒤 1681년 2월22일에 익릉에 안장된다.
1713년 인경왕후의 존호는 광열, 1722년(경종 2년)휘호가 효장명현이,
1753년(영조 29년) 존호가 선목,
1776년 존호 혜성이 각각 올려졌고 릉호는 익릉이다.
시호가 광열 효장명현 선목 혜성(光㤠 孝莊明顯 宣穆 惠聖)이다.
1970년 5월26일 대한민국 사적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번지에있다
※2022년 12월 16일
익릉에서 제342주기 인경왕후 기신제를 봉행했다
광산김씨 대종회에서도 매년 참석하고 있다.
(아래 2023년 1월31일 종보기사.)
※ 21세 광산군 한노(병조판서, 홍문관 대제학)공의 따님이
태종 8년에 양녕대군과의 혼사로 세자빈이 되었으나,
양녕대군이 패 세자가 되어 세종에게 자리를 양위하자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본강좌 34번 광산군 환노 참조)
① 조선의 유교에도 학문의 도가 깊고 후세에도 표상이 될
18분을 엄선하여 지방 향교와 성균관에서 명현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27세 문원공 사계 김장생, 28세 문경공 신독재 김 집,
부자분이 명현 반열에 오른 유일한 가문이 광산김씨다.
② 본강좌 140번, 29세 익겸 配, 정경부인 해평윤씨( 서포 김만중 母) 참조
③조선조 대제학은 61가문에 합이 133명을 배출되었다.
평균 2명 꼴로, 2명이상 배출한 가문이 29 본이다.
21세 김한노 광산군이 세종 때 대제학을 할 때는 홍문관 대제학 뿐이었다.
그 후 홍문관에서 예문관이 생겨나서 양관 대제학을 겸함으로 양관대제학으로 불렀다
광산군과 신임사화로 벼슬이 박탈된 31세 아계 김일경과 합치면 9명이 된다.
(본강좌 111번.아계참조)
사후 83년째 순조2년(1908년)에 신원되고 관직이 복작되었다.
. 7명이상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
(전주이씨 7명, 광산김씨8명, 연안이씨 7명.)
권력과 권세으로 된 높은 벼슬의 양반가문의 수가 많아,
당시 사회 유생들은
대제학 수로 양반가 문의 우열을 가리는 척도로 삼았다.
28세 신독재 김 집 문경공이 종묘 배향과 성균관 문묘 배향이 되었는데
종묘와 문묘에 배향된 가문이 조선조에 6가문으로 6대 국반이라
칭하여 부르며 나라에서 인정하는 조선 초고의 양반 가문이다.
④불천위는 덕망이 높고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영원히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나라 가 허가한 사람으로,
가문 대대로 자랑거리며 명에와 영광의 상징이다.
출처: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계몽사 한국위인전집,
광산김씨사, 광산김씨 종보. 편집자 善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