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신약교회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하는가? (계 3:10) 개역: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계 3:10) 흠정역: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권위역: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기 때문에, 나도 시험의 시각부터 너를 지킬 것이니, 그 시험은 온 세상을 덮쳐,
땅에 거주하는 자들을 시험하려고 올 것이다. KJV: Because thou hast kept the word of my patience, I also will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 which shall come upon all the world, to try them that dwell upon the earth.
1. keep ~ from과 keep 요한계시록 3:10 말씀을 흠정역은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번역하였고, 권위역에서는 "시험의 시각부터 너를 지킬 것이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원래 영어킹제임스성경에는 "keep thee from the hour of temptation"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각기 다르게 번역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날들에 있을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권위역의 번역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keep ~ from 이라는 숙어는 "~하지 않도록 지키다, ~하는 것을 금하다"라는 뜻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keep thee"가 하나의 의미 단위가 되고 "from the hour of temptation"은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keep ~ from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시험의 시각부터 너를 지킬 것이니", 즉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하되 그 시각부터 주께서 성도들을 보호해주신다."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두 입장의 차이를 살펴보면, 환난 전 휴거를 믿는 입장에서는 신약교회 성도들이 환난 전에 공중으로 채여올라가서 공중에서 주를 만나서 이 땅에 쏟아지는 환난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주께서 성도들을 지키시는(keep) 것이라고 믿습니다. 반면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해야 한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환난기에 임할 모든 환난들을 성도들이 겪게 되지만 우리 주님께서 성도들을 보호해 주시는 것이 지키시는(keep)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입장 모두 주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데에 대해서는 아무 이견이 없습니다. 차이가 나는 부분은 환난을 면하고 휴거되느냐, 땅에 쏟아지는 환난을 고스란히 다 받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양 측의 믿음은 모두 주께서 그분의 성도들을 지켜주신다(keep)라는 데 대해서는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도대체 keep이 무엇을 의미하며, 킹제임스성경에서 keep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요한계시록 3:10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를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가꾸고 지키게 하셨더라(창 2:15).
And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to the garden of Eden to dress it and to keep it. => 에덴 동산을 지키는 것은 "그 동산이 황폐하지 않게, 빼앗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So he drove out the man; and he placed at the east of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a flaming sword which turned every way,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fe. =>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못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이브가 또 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나 가인은 땅을 가는 자였더라(창 4:2).
And she again bare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keeper of sheep, but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 아벨이 양을 지키는 것은 "양이 다치지 않도록, 병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주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매(창 4:9)
And the LORD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 가인의 말은 자기가 동생을 "다치지 않도록, 잃지 않도록" 지킬 책임이 있는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공중의 날짐승 중에서도 수컷과 암컷을 일곱 마리씩 취하여 씨가 온 지면 위에 살아남게 하라(창 7:3).
Of fowls also of the air by sevens, the male and the female; to keep seed alive upon the face of all the earth. => keep seed 는 씨가 "죽지 않도록, 멸종되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이 다가올 그 좋은 해 동안에 모든 식량을 거두고 그 곡식을 파라오의 손 밑에 쌓아 두어 도시들 안에 식량을 간직하게 하소서(창 41:35).
And let them gather all the food of those good years that come, and lay up corn under the hand of Pharaoh, and let them keep food in the cities. => keep food는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낭비되지 않도록, 썩지 않도록" 지켜 보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대언의 말씀들을 읽는 자와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그것들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때가 가깝기 때문이라(계 1:3).
Blessed is he that readeth, and they that hear the words of this prophecy, and keep those things which are written therein: for the time is at hand. => 기록된 말씀들을 지킨다는 것은 그 말씀을 "변개되지 않도록, 어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400구절이 넘는 용례들을 일일이 다 검토할 수 없어서 몇 가지만 소개했습니다. 나머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행이 우리가 저축한 돈을 keep 하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둑맞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들을 지킨다는 것(keep WORDS)은 그 말씀이 "변개되지 않도록, 훼손되지 않도록,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keep 이라는 단어는 from 이 있거나 없거나 그에 상관없이 그 단어 속에 이미 "~ 하지 않도록 지키다, ~ 하지 않도록 보호하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하지 않도록"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의미는 from 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keep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록 3:10 말씀은 keep ~ from 으로 해석을 하거나, keep 단독으로 해석하거나 어쨌든 "~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성도들이 환난을 겪지 않도록" 지켜주신다고 번역한 흠정역의 번역에는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주께서 성도들을 "시험의 시각부터" 지켜주신다는 번역이 더 어색합니다. 그렇다면 환난기 이전에는 주께서 결코 자기 성도들을 지켜주지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시험의 시각부터가 아니라) 항상, 영원토록 보존해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너희의 행실을 탐욕이 없게 하고 너희가 가진 것들로 만족하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주께서 너의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보존하시리로다(시 121:8).
2. 사도행전 14:22은 우리가 마지막 날들의 환난을 겪는다는 뜻인가?
어떤 분들은 사도행전 14:22 말씀을 환난통과설의 근거로 인용합니다.
제자들의 혼을 굳건하게 하며 그들을 권면하여 믿음 안에 거하게 하고 또 우리가 반드시 많은 환난을 거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야 하리라 하더라(행 14:22).
그러나 이것은 김용묵 형제님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마지막 날들에 있을 환난"과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받는 "핍박이나 환난"을 혼동한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는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 3:12)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환난들로 인해 낙심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참으로 우리가 환난 당할 것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고 너희가 그것을 아느니라(살전 3:4).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핍박과 환난 속에서 드러난 너희의 인내와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들에서 직접 너희를 자랑하노라(살후 1:4).
디모데후서 3:12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받게 되는 핍박을 말하고, 에베소서 3:13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겪은 환난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4:22에 기록된 것과 동일한 내용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미리 일러주었습니다.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많은 환난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4을 보면, 바울이 말한 바대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예고한 바와 같이 큰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과연 마지막 날들에 있을 큰 환난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을 보면 이것은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겪었던 세상으로부터, 불신자들로부터 당한 핍박과 박해를 말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4:22 말씀을 환난통과설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사도행전 14:22에서 제자들에게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을까요? 문맥을 파악하기 위하여 그 앞에 나오는 말씀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그 형제들에게 악한 생각을 품게 하니라.
[5]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치리자들과 함께 악의를 품고 그들을 대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매 [19] 어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움에서 거기로 와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돌로 바울을 친 뒤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는 도시 밖으로 그를 끌어내니라(행 14:2,5,19) 사도행전 14:22 앞에 나오는 2절, 5절, 19절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실제로 동족들에게 배척당하고, 돌에 맞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그런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려면, 자기처럼 많은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려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4에서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환난을 당할 것을" 미리 말해 준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14:22 말씀은 거듭난 성도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겪게 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마지막 날들에 있을 큰 환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3. 요한계시록 16:15 말씀은 환난 통과설이나 환난 중 재림설을 지지하는가?
요한계시록 16:15 말씀은 여섯째 천사가 자기 병을 쏟아붓고, 일곱째 천사가 병을 쏟아붓기 전에 그 중간에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나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키고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여 그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얼핏 이 구절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마치 신약교회 성도들은 지금 땅에서 큰 환난을 겪고 있고, 예수님은 "조금만 더 환난을 겪으면서 깨어 기다려라. 내가 잠시 후면 도둑같이 임하여 너희를 데려가겠다."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건이 진행되는 중간에, 주께서 "이처럼 마지막 날들에는 땅에 큰 환난이 임할 것이니 깨어 있으라."라고 경계하시는 말씀이지 성도들이 환난을 겪고 있으면 나중에 데리러 가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16:15은 요한계시록 3:3-4에서 이미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고 굳게 붙잡아 회개하라. 그런즉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이르리니 내가 어느 시각에 네게 이를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들이니라(계 3:3-4).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주의 재림과 성도들의 휴거에 대한 것이므로, 여섯째 천사가 병을 쏟아부은 후 일곱째 천사의 병이 쏟아지기 전, 하늘의 성전에서 왕좌로부터 "다 이루어졌도다."라는 음성이 나오기 전, 다시 한 번 "주께서 도적같이 오실 것이니 깨어 있으라."고 경계하신 것이지, 성도들이 환난받는 중에 주께서 재림하신다거나, 계시록 3장에서도 재림하고 계시록 16장에서 또 재림한다는 것으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6:15에 "도둑같이 임하시는 주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더 들어있다고 해서 이것을 별개의 구절로 해석하는 것은 창세기 1:1과 창세기 2:4을 별개의 창조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또한 창세기 1:27에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창세기 2장에서 재차 그 과정을 다시 설명했다고 해서 아담 이전에 이미 원시 인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도둑같이 임한다는 주의 날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합니다(살전 5:2-4).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완전히 아느니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 같이 갑작스런 파멸이 그들에게 임하나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살전 5:2-4). 위 말씀을 자세히 읽고 주의 날이 누구에게 도둑같이 임하는지, 갑작스런 파멸이 누구에게 임하는지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도둑같이 임하는 그 갑작스런 파멸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던 "그들에게" 임한다고 했지 갑작스런 파멸이 "너희에게 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둑같이 임하는 그 날은 "너희를 덮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주의 날이 도둑같이 갑자기 임하는 것은 맞지만, 갑작스런 파멸은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지 않으며, 주께서 오시면 우리는 다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므로 그 날이 우리를 덮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환난 통과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요한계시록 16:15 말씀이 지금 땅에서 환난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주께서 "너희들이 지금 땅에서 환난을 겪고 있는데 내가 도둑같이 갑자기 올테니 깨어 있어서 수치를 당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주장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실 겁니다. 만약 지금 요한계시록 16장에서 신약교회 성도들이 땅에서 환난을 겪고 있고, 환난 통과설을 주장하는 분들의 주장대로 성도들이 모든 환난을 다 통과한 후에 재림한다면, 환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환난기간이 7년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에 들어간 사람들 중에 환난 중 휴거를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환난이 시작된 후부터 3년 6개월을 기다리면 주님이 온다고 생각하면 되고, 그들 중에 환난 통과설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환난 시작 후부터 7년을 계수하면 되므로 그 환난이 언제 끝나며 그들이 기다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6:15의 도둑같이 온다는 주님은 결코 그 환난에 들어가 있는 자들에게는 도둑같이 올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즉 이 말씀은 환난 통과설을 주장하는 분들의 말처럼 땅에서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6:15 말씀은 성도들이 환난을 통과한 후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주장이나, 7년 환난의 중간에 성도들이 휴거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주의 재림이 갑자기 있을 것이니 깨어 있으라고 하신 요한계시록 3:3-4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4. 환난 통과설의 문제점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환난 통과설은 옳지 않으며, 환난통과설이라는 교리를 받아들이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점에 빠지게 됩니다.
첫째, 교회와 이스라엘을 바르게 나누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7:4은 분명히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봉인된 자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지 신약교회 성도들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7:14에 기록된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은 "야곱의 환난의 때"를 거친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지 신약교회 성도들이 아닙니다.
[4]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14] 내가 그에게 이르되, 장로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와 자기 예복을 씻고 어린양의 피로 그것을 희게 한 자들이니라(계 7:4,14).
제가 이 글의 제목을 "신약교회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하는가?"라고 붙인 것도 "신약교회 성도"와 "마지막 날들에 큰 환난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환난기 성도)을 혼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성도들(saints)이라고 불리웠기 때문입니다(시 16:3).
땅에 있는 성도들과 뛰어난 자들에게는 미치오니 나의 모든 기쁨이 그들에게 있나이다, 하였도다(시 16:3).
둘째, 일부 교회의 지도자들이나 이단들은 환난 통과설을 가지고 신도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믿는 사람도 끝까지 인내해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등불과 기름을 예비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안 된다, 믿음이 좋아야 한다,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교주님의 명령을 잘 따라야 한다." 그러다보니 이런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 자기가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이 "자기 의"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결코 환난 통과설을 믿는 분들이 그런 잘못된 믿음이나 그릇된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거짓 교사들이 환난 통과설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사람들을 압박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은 "신약교회 성도"가 환난기에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문을 당하고 순교해서 자기의 인내와 믿음을 증명한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과연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 분의 성도들을 환난기에 하나님의 진노에 내버려두시고는 하늘 위에서 웃고 계시면서 "이를 악물고 조금만 더 버텨라. 내가 곧 구하러 가겠다."라고 하실까요? 그렇다면 다가올 진노에서 우리를 이미 건져내셨다는 우리 주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신 겁니까?(살전 1:10)
셋째, 환난 통과설은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말씀과도 어긋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미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큰 환난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고했고, 그 예고대로 그들은 모진 환난과 핍박을 받았습니다(살전 3:4). 너무 심한 환난을 당하다보니 이것이 정말 마지막 날들에 임한다는 그 환난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런 환난 가운데서 먼저 죽은 성도들도 있었기에 그들은 크게 낙심을 하고 있었습니다(살전 4:13).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는 휴거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슬퍼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살전 4:16-17).
성도들은 모두 공중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되는데(살전 4:17), 성도들의 머리 위로 환난기의 재앙이 떨어질 리가 없습니다. 만약 공중에서 "주와 함께 있는 성도들" 머리 위로 환난기의 그 환난이 쏟아진다고 주장하면, 휴거된 성도들과 "함께 계신" 예수님 머리 위에도 그 환난이 쏟아진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따르자면 예수님이 환난기를 통과한다는 전대미문의 새로운 교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영광의 왕으로, 심판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고난을 받는다거나, 성도들과 함께 환난기를 통과한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말씀에 이어서 1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8).
그러지 않아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에서 모진 박해를 받고 있는데, 바울이 "너희들은 장차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지고, 그것을 통과해야 한다. 그 환난은 지금 너희가 받는 핍박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엄청난 것이다. 부디 악착같이 버티고 인내해서 다들 잘 살아남기 바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이게 교회 성도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4:16-17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모두 휴거되기 때문에 장차 이 세상에 임할 환난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18절에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과연 주의 날은 언제 임할 것인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했습니다(살후 2:1-2). 바울은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일어나고, 멸망의 아들이 드러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멸망의 아들이 그의 때에 드러나도록 교회가 저지하고 있으며(살후 2:6), 불법의 신비가 이미 활동 중이지만 성령님께서 그것을 막고 계십니다(살후 2:7). 만약 교회가 휴거되어 그 불법의 세력들을 막는 것이 없어지면 멸망의 아들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임할 큰 환난은 교회가 휴거된 이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 임할 큰 환난에 대해서 염려하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넷째, 환난 통과설의 주장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진노에 이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보면 환난기에 이 땅에 쏟아질 재앙들은 "하나님의 진노(wrath)"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산들과 바위들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왕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와 어린양의 진노(the wrath of the Lamb)에서 우리를 숨기라. 그분의 진노의 큰 날(the great day of his wrath)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6-17).
또 내가 하늘에 있는 크고 놀라운 다른 표적을 보니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졌더라.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가 그것들 안에 가득 채워져 있더라(계 15:1).
네 짐승들 중의 하나가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the wrath of God)를 가득히 담은 일곱 금병을 일곱 천사에게 주니라(계 15:7).
그런데 데살로니가전서 1:10과 5:9에는 우리 성도들이 이런 하나님의 진노(wrath)에 이르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 주나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wrath)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 예수님이시니라(살전 1: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wrath)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 5:9).
특히 데살로니가전서 1:10은 시제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delivered us from the wrath to come" 라는 말씀은 "다가 올 진노(wrath)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아직 이 땅에 쏟아지지 않았고 장차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직 임하지도 않은 그 진노로부터 이미 우리를 "건져내셨다"(과거형)고 확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미 그분의 성도들을 진노(wrath)로부터 건져내셨다면 성도들은 환난기에 있을 진노를 겪을까요, 겪지 않을까요? 만약 주께서 그 분의 성도들을 환난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받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를 그 진노로부터 "건져내셨다"고 하신 데살로니가전서 1:10의 말씀은 틀린 것이 됩니다.
이 말씀들에 의하면, "주께서 시험의 시각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주장이나 "환난기 중간에 성도들을 건져낸다"는 주장이나 "성도들이 전체 환난기를 모두 통과한다"는 주장은 다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을 믿는 성도들을 장차 이 땅에 임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이미 건져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기에 이 땅에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는 구원받은 신약교회 성도들에게는 임하지 않습니다. 즉 이 말씀들에 의하면 환난 통과설은 옳지 않으며, 성도들은 환난 전에 휴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나라 가지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죄악 역 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없어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제가 교회에 처음 다닐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수많은 복음성가나 CCM과 같은 음악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제외하면 주로 몇 가지 안 되는 복음성가들을 불렀습니다. 세 개의 못,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주님 고대가, 돈으로도 못 가요, 구원 열차 등...
그 중에서도 <구원 열차> 노래가 가장 인상깊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늘나라까지 가는 여정을 열차 여행에 비유한 노래지요. 김용묵 형제님만큼 저도 열차를 좋아합니다. 열차는 안전하고, 빠르고, 편리할 뿐만 아니라, 고속버스와는 달리 도중에 화장실 가느라, 먹을 것을 사느라 내릴 필요가 전혀 없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열차를 타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딱 두 가지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첫째는 내가 열차를 맞게 탔느냐 하는 것입니다. 대전에서 서울로 가려면 서울행을 타야 하는데, 부산행을 타면 안 됩니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서울로 가고 있다."라고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생각이 열차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정말 그 열차가 내가 원하는 하늘나라로 가는 열차가 맞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선행, 종교의식, 자기수행, 도덕, 철학 등은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려다주지 못합니다. 열차가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도 넓습니다(마 7:13). 그러나 그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자신이 과연 바른 길, 바른 열차를 선택했는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the way)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 14:6).
둘째는 내가 그 열차에 탈 자격을 갖추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열차를 골랐다면 이제는 그 열차를 타기 위해 필요한 차표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열차 청소를 해 드릴테니 제발 태워주세요."라고 하거나 "열차표 대신에 이 어린양을 드릴테니 태워주세요."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철도공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열차표를 가진 사람만이 해당 열차에 탈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구원 열차는 "믿음"이라는 열차표를 필요로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소용없습니다. 믿음이란 "약 2천년 전에 예수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자기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요 1:12).
그분을 받아들인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요 1:12)
그 열차가 안전하다고 믿고, 그 열차를 타면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여러분이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결코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자가 아니라, 그 복음의 말씀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위의 두 가지 조건을 다 만족시켰다면, 즉 하늘나라로 가는 열차를 제대로 선택했고, 믿음으로 그 열차에 오르셨다면,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확실하게 보장된 것이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떤 분은 열차 밖의 풍경이 낯설어서 이게 정말 목적지까지 가는 것인지 의심할 수도 있고, 어떤 분은 열차 안에서 뛰다가 넘어져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어떤 분은 피곤해서 곧장 잠이 들어버리는 분도 있고, 어떤 이는 기대감에 부풀어서 기쁘게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간식을 먹으며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열차를 타고 가다가 대환난을 만날 것이 두려워서 한 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며 가기도 하고, 어떤 분은 혹시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차표를 잃어버려서 열차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불안한 안색으로 여행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열차를 타신 분이 하늘나라로 가는 구원열차에 믿음을 가지고 타셨다면 어찌 되었건 상관 없습니다. 여러분이 뭐라고 생각하거나, 의심을 하거나 말거나, 걱정을 하거나 말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불안한 표정을 짓거나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주님의 구원 열차는 의심많은 자, 넘어진 자, 졸고 있는 자, 여행을 즐기는 자, 불안해하는 자, 걱정하는 자들을 태우고 여전히 하늘나라를 향해 갈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혹시 구원이 취소되면 어떡하나, 대환난을 만나서 핍박에 못 이겨 주의 이름을 부인하면 어떻게 하나 등의 쓸데없는 걱정으로 머리 싸매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그 무엇보다도 안전하고 확실한 구원 열차에 오르셨으니,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구원에 감사하며, 구원의 주님께 찬양드리며,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지내게 될 형제 자매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오늘도 즐겁고 유쾌한 여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요 10:28-29).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 5:24).
또 그 증거는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분의 아들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는지 보여 주나니 이분은 곧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건져 내신" 예수님이시니라(살전 1: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노에 이르도록 정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정하셨느니라(살전 5:9).
*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환난을 통과하지 않고 환난 전에 휴거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이지 제가 증명해서 보여드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토론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혹시 환난 통과설을 믿으시는 분들 중에서 이 글을 읽고 거북하게 여겨진다면 안 받아들이시면 그만입니다. 이 글의 내용을 제발 믿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니 믿거나 말거나는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이런 글이 부담이 되신다면 안 읽으시면 됩니다. 굳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기와는 맞지 않는 이런 글을 읽고 스스로 심적인 괴로움을 자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울러 정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성도라면, 환난 통과설을 믿으시거나 환난 전 휴거를 믿으시거나 환난 중 휴거(7년 환난기의 중간에 휴거된다는 주장)를 믿으시거나 구원받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비록 이 부분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다를지라도 저는 거듭난 성도들이라면 다같이 믿음으로 구원열차를 타신 한 형제 자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견해 차이로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분들과 괜히 서로 다투고 적대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개인의 몫이고, 각자의 자유의지에 달린 것이니, 각자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는 알아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www.keepbible.com / 김문수
|
다음검색
출처: 빌라델피아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빌라델비아교회
첫댓글 환난전휴거에 대한 성경말씀 근거를 알려달라고 하셔서 올렸습니다.
샬롬 반갑습니다.
그런데 언제 머리가 나실런지?
ㅋㅋ
휴거의 시기에 대해서 의견이 틀리다고 적대시할 필요는 없겠지요
같은 순례자의 길을가는 주님의 아름다운 지체들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이니깐요
환난 통과설에 대해 제기된 문제점들에 대한 작은 반박을 해 봅니다(원빈님에 대한 것이 아님. ㅋㅋ).
지적한 첫번째 문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에 대한 것은 144000만이 아니라 각 나라와 민족, 이방에서 수없이 나온다고 증거하시기 때문에 위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계 7:9-14).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둘째 믿음 외에 자기가 무엇을 해야한다고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심판은 행위대로 받습니다.
즉 믿는다면 행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 믿으면 반드시 행위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단이 성경대로 주장한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더 큰 미혹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목베임을 당한 자들이 살아서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말씀합니다(계20:4). 이것은 환난 날에 믿음을 지켜 목 베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을 성도의 인내로 믿음을 지켰다고 말씀하며 이런 자들이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도 하는데,
기록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계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와 같이 7년 환난이 끝나기 까지 성도가 있으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목 베임을 당하지 않고 우상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셋째
환난 전 휴거가 된다고 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휴거된 성도와 주님 머리에 환난이 떨어질리가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전 4:16-17 을 정확히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일단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죽은자가 먼저 그리고 살아 남아있는 자들이 들려 공중에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영접하시어 데려 가심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마 24:29-31에서 보아도 환난 후 재림하실 때, 사방에서 모으신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서만이 아닙니다.
넷째 실제로 빌라델피아 교회 같이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진노에서 피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도 능히 피하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환난을 통과 한다고 해서 몸으로 맞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도피를 통해서 진노를 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계 19:2-8을 보게 되면 마지막 재앙인 일곱 진노의 대접이 다 부어진 후 심판하사 갚으셨다고 하셨으며, 그 후에야 비로소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이 다 마친 후에나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있는 것입니다. 환난 전이나 중간에 휴거가 된다면 성경 자체가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계 19:2)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계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계 3:10절의 말씀 중에 <지키다> 라는 단어를
기록된 말씀들을 지킨다는 것은 그 말씀을 "변개되지 않도록, 어기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해석했는데...
잘못 된 해석이라 생각 됩니다.
성경에는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기록 되었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다른 말씀들은 변개 시켜도 인내의 말씀만 변개 시키지 않는다면 된다는 뜻이 됩니다.
<지키다>라는 의미는 '보존하다'가 아닌 '순종해다', '행하다'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원어에서는 순종하다, 행하다라는 동사가 아니라 지키다(테레오)로 씌여있습니다. 선교사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다, 행하다라고 번역을 하면 성경을 변개시키는 것이지요.
공인본문 헬라어 직역 신약성경을 참고해 보면 "인내의 말을 보존하여 지켰기 때문에"로 직역하였네요.
바이블렉스에서 보니 '테레오'의 의미를 보존하다. 유의하다, 조심하다, 주의하다, 보호하다, 복종하다.... 등으로 되어 있네요. 그러므로 보존하여 지키다라고 보는 것이 무난 하지 않을 까요?
요한계시록 다른곳에서 <테레오>도 '보존하다'가 아닌 '행하다'는 의미로 로 쓰였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계 16:15절의 말씀 역시 환난 후 휴거를 지지하는 말씀입니다.
여섯째 대접 심판은 대환난 중에서도 후삼년반에 속하며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라고 하셨는데...
이때까지 주님이 오시지 않은것이 증명 되는 것 입니다.
주님 오셔야 성도들 휴거 됩니다.
윗글에 이미 그 부분에 대하여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다시 잘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살전 5장에서 말하는 그날은 4장의 말씀과 이어집니다.
그 날은 주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이 울리는마24장에서 말하는 환난의 날들 이후입니다.
살전 5:4절에서 말하는 그날은 환난 이전에 있을 공중 재림의 날이라 할 수 없습니다.
환난 이전에 공중재림 자체가 없습니다.
성도들을 압박하는것은 환난 후 휴거가 아닙니다.
환난 전 휴거 주장하는 분들이 성도들 압박하는 수단으로 환난을 말합니다.
휴거되지 못하면 지옥같은 큰 환난을겪어야 한다고...
또 휴거 될 신부의 수가 아주 적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주님 언제 오시든지 믿음 있는 성도들은 받드시 휴거 됩니다.
특별한 성도만 휴거 되는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전체가 환난 후에 주님 오시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혼인잔치가 있습니다.
환난 이전에 순교당한 성도들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휴거된 성도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