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2주일 요한 1,35-42
찬미예수님, 한 주일동안 잘 지내셨나요?
어느 기사를 보니, 대서양 해저 2마일 지점(약 7854 Km)에 열수구가 있는데, 이 배출구의 온도는 섭씨 407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뜨거운 열수구 근처에서 사는 새우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무한한 우주에 우주선을 보내고, 저 깊은 심해에 탐사선을 보내어 새로운 생물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같은 탐색을 통해, 인간을, 세상을 알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첫번째 제자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한의 두 제자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고,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두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36절),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왜 두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따라갈까요? 자신들이 찾고자 하는 갈망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처음부터 알고 따라 나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두 제자가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38절)고 묻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입을 여시는(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요한 복음을 읽는 우리에게 요한 복음을 통해서, “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오늘 지금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지금, 이곳에서 무엇을 찾느냐?” 이 질문은 우리 내면 깊은 갈망과 욕구를 꿰뚫고 묻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진실되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찾느냐?”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싶나요? 우리 각자는 예수님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갈망이 있을 겁니다.
이곳에 나오신 우리는 돈이나, 명예, 지식. 이런 세상적인 것을 찾고자 나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뭔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알고자, 추구하고자 여기에 오셨습니다. 그런 내적인 갈망이 각자 있을 겁니다. 우리는 그 내적 갈망을 채워줄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은 38절을 보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38절)라고 묻습니다. 이런 저런 갈망에 대해 질문하지 않고,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어디에 묵고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묻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이 묵는 곳을 알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이 말씀에는 “예수님, 당신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알 때, 그 갈망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와서 보아라”(39절)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주지 않고, “와서 보라”고 초대만 하십니다. 와서 당신과 함께 지내다보면, 우리의 갈망과 욕구의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주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묵으신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지냈습니다.(39절) 그리고 난뒤, 그들은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복음사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초대에 응해서,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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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마더 데레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조금 부유해 보이는 중년부인이 근심어린 얼굴로 데레사 수녀를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여인이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수녀님, 저의 삶은 너무나 권태롭습니다. 그날이 그날인 것 같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을 바에야 차라리 죽는게 낫다는 생각만 듭니다.”
데레사 수녀는 여인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인도로 오십시오. 제가 살고 있는 인도로 오시면, 진정한 삶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 부인은 처음에는 무작정 인도로 오라는 수녀님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을 한번 믿어 보자는 생각으로 여인은 인도로 갔습니다. 그녀가 물어물어 데레사 수녀님을 찾아간 곳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불구자,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이 가득 모여 사는 곳이었습니다. 부인은 데레사 수녀님이 늙은 몸을 이끌고 열심히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인은 그날부터 데레사 수녀님 옆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부인은 기쁨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그녀의 얼굴엔 어느새 생기가 가득했습니다. 하루종일 눈코 뜰새 없이 보냈던 그녀가 하루를 정리하면서 수녀님에게 말했습니다.
“수녀님, 수녀님의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여 그것에 힘쓰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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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에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했고, 그 부인은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곳에서 수많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그곳에서 자신이 지닌 갈망의 답을 찾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우리를 “와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과 함께 지내자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공부나, 기도나, 활동이나, 미사참례나, 피정이나, 연수를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도와주고, 함께 슬퍼하고, 인내하고, 희생하고, 용서해주고, 모욕을 달게 받고, 이런저런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물어보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너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 당신입니다.”, “예,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나요?
우리는 인생의 갈망과 욕구를 채워주실 분이 예수님이라고 알고 고백할 수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 고백을 할수 있을 때까지 “와서 보아라”고 예수님의 초대에 계속 응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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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보아라” 이 말씀을 다른 관점으로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통해, 다른 이를 초대하길 촉구합니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해서 메시아신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자기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초대하고 있고,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부유한 부인을 예수님께 초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 초대해야 합니다.
어떤 학창시절 선배가 “나와 함께 성당에 가보지 않겠나!”라고 했답니다. 이 한마디를 통해 그가 성당에 나가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난 뒤 그가 수만명의 영혼을 구해내는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께 초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무엇을 찾고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처럼, 그들에게 “와서 보시오”하고 초대해봅시다.
오늘 예수님이 “무엇을 찾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이 물음에 예수님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예, 저는 예수님을 아는게 전부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