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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탕 여행2 - 수향 시탕(서당)에서 남문으로 시탕구전에 입장해 운하를 걷다!
2023년 10월 28일 퉁리(同里 동리)에서 저우좡(주장 )에 도착해 운하를 구경하고는 다음날 다시
운해탑과 대운하를 보고는 숙소로 돌아와 체크아웃후 주인 아저씨에게
시탕(西塘 서당)으로 간다면서 택시를 불러 달라며 요금을 물으니 60위안 정도 나올 것이랍니다.
아저씨는 시탕의 호텔 주소를 달라더니 휴대폰으로 위치를 검색해 택시회사에 전화를 하고는
시탕 까지는 20공리( 公里 km) 니까 83위안 정도 나올 것이라고 말했지만 택시
기사는 시탕에 도착해 저우좡에서 시탕까지 호텔 픽업차량 비용을 준용해 125위안을 달랍니다.
저우좡은 장쑤성(강소성) 쑤저우시 안에 현급시인 쿤산시의 저우좡진이지만 시탕은 절강성(浙江省)
자싱시(가흥시) 자산현(가선현)의 시탕진으로 쑤저우나 상하이 그리고 항저우에서는
시외버스나 기차도 있지만..... 저 저우좡과 시탕은 서로 생활권이 다른 관계로 버스가 없나 봅니다.
Ji 호텔 자싱 시탕에 체크인후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가니 유객복무중심이 나오고 입장료 문표는 95위안나
60세 이상과 20세 미만은 절반인 47.5 위안이며 70세 이상과 초등학생(145cm 미만) 은 무료입니다.
시탕고전(西塘古镇 서당고진)은 절강성(浙江省)에 속하며, 고대 오월(吴越) 문화의 발상지 중의 하나라고 하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로 입장후 남쪽인 호수에 이르러 구경을 하고 올라가니 옛 거리가 보이는
데... 운하가 흐르니 우린 다리를 건너서 왼쪽 길 탑만가로 들어서는데 나중에 보니 오른쪽 길이 중심가 입니다.
시탕(西塘) 은 중국 6대 수향마을 중 하나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오래된 수향 마을이니
망명에서 돌아온 오나라 대부 "오자서" 가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오자당' 이라는
연못을 파고 인근 서산 북쪽 물을 끌어들여 만들었으니 고대에는 쉬탕이라 하였답니다.
오자서는 춘추전국시대 오(吳)나라의 정치가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에 따라 자신의 가족을 죽인
초나라에 잔혹한 복수를 하였고, 자신을 받아준 데다가 복수를 도와준 오나라에게는 비록
배신당하고 버림받았어도 최후까지 충성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춘추시대의 영웅호걸 입니다.
역사에서도 길이 남을 복수를 성공시킨 복수귀에다가 파란만장한 일생 때문에 여러 고사성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니 오자서에게서 직접 유래한 것만 쳐도 동병상련, 굴묘편시, 일모도원, 부관참시, 도행
역시, 심복지환(心腹之患)으로 6개에 그가 영향을 미친 와신상담에 오월동주까지 합치면 무려 8개입니다.
오자서의 가문은 대대로 초(楚)나라왕을 보필한 명문가로 초 장왕의 용장이자 필 전투의 영웅인 오삼(伍參)을
배출했고, 오자서의 할아버지는 초 영왕의 충신이자 명신으로 춘추시대의 강대국으로 위상을 떨치게
만든 오거(伍擧)였으며, 아버지 오사 (伍奢) 역시 조정 고관으로서 태자 웅건의 스승겸 보좌역인 태부 였습니다.
그러나 성왕이 터를 닦고 목왕과 장왕이 쌓아올린 강대한 초나라의 패업도 언릉전투 이후에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왕실의 내분은 일상사가 되었고, 어질고 총명한 왕으로 촉망
받던 평왕 역시 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간신을 가까이 하고 국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 왕실의 인척들은 속국들에게 가혹한 뇌물을 요구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며, 초나라가 썩어가는 와중에 동쪽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으니 강대국 진(秦)의 힘을 빌려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계획이 입안되었고, 이후 초의 태자 건과 진의 공주를 혼인시켜 동맹을 맺는 것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며느리 될 진의 공주 맹영(孟嬴) 이 굉장한 미인이라 당나라 현종 처럼 시아버지 평왕이 반해
버린 것이니, 측근 비무기(費無忌)는 오히려 왕을 부추겨 결국 왕이 며느리를 가로채게 만들었고
그 대신에 태자 건에게는 공주를 따라온 제나라 출신 시녀를 공주라고 속여서 혼인을 시켜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평왕과 맹영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날 즈음 비무기는 늙은 평왕이 죽은 뒤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 건이 자신이 평왕을 꼬드긴걸 알고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 해 평왕을
부추겨서 태자와 그 후견인인 오사 및 명문가로 유명한 오씨 집안 자체를 뿌리 뽑고자 했습니다.
평왕은 비무기의 지속된 간언에 넘어가 결국 건을 죽이고자 했고 음모를 눈치챈 태자 건은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정나라로 도주하자 숙청의 칼날은 오씨 삼부자에게도 향했는데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오사가 불려간 시기는 태자 건이 나라를 벗어나기 전으로 나옵니다.
오사는 왕이 비무기의 간언에 완전히 넘어갔으니 자신이 죽을걸 알았으나 충심 탓인지 아니면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서인지 오자서에게 태자와 왕손을 보필해 초나라를 탈출하도록
시킨 뒤 장남인 오상(尙)과 둘이서 왕의 부름에 답해 왕성으로 향했고 이내 처형당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태자 건이 가솔들을 데리고 도주한 뒤 평왕은 오사를 인질로 잡고 두 아들들에게
두 명이 희생하면 아버지를 살려주겠다는 교지를 보내니, 오자서는 형에게 이대로 가봤자
개죽음 밖에 안된다며 우리도 태자처럼 피신해 복수하자며 부르짖지만 형인 오상은
오자서에게 자신의 몫까지 복수를 맡기고.... 그대로 왕성으로 떠나 아버지와 같이 처형 당합니다.
전형적인 '고지식한 충신' 이었던 오사는 아들들에게 복수를 바라지도 않았고,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일체의 두려움이나 억울함은 가지지 않았지만, 둘째 아들의 심리와 재능을 꿰뚫어 보고 충언인지
경고인지 오자서가 살아 도망쳤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당연히 평왕도 오자서를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 오사 생전 부터 문무겸비에 강직한 데다가 의지가 강한
인물로 소문난 오자서가 그저 도망치고 끝날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의 복수를 사전에 차단
하고자 자객을 풀었지만 오자서는 왕이 보낸 추격을 죄다 떨쳐내고 그대로 인접국인 정나라로 향합니다.
《열국지》에는 자객들이 따라 잡았으나 오자서가 죄다 활로 쏴 죽여 버렸다는데, 그 상황에서 굳이
한 명을 살려 보내면서 "평왕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전해라" 고 불필요한 짓을
하는 바람에 도피 행각이 더욱 고달파졌다는데.... 부상당해 돌아온 자객에게서 전해들은
평왕은 이데는 진짜로 오자서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두려울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 입니다.
오자서는 정나라로 탈출한 태자 웅건을 만나 그의 부하가 되었는데 정나라는 명재상으로 이름날린 자산이
있었으니 강력한 외교 카드로 태자를 섭섭치 않게 대해줄 거라 생각했지만, 불운하게도 오자서가
정나라에 입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산이 병사하고 그뒤 정나라는 내적으로 큰 혼란을 거듭하게 됩니다.
그래도 정공과 집권 세력은 태자 일행을 보호해 주었는데 그러나 복수와 권력에 눈이 먼 태자는
이 와중에 정나라 공작 위를 찬탈한 뒤 정나라 군대를 동원해 초나라를 쳐 왕위를 되찾는
다는 정말로 어이없는 계획을 세웠고 오자서는 결사반대를 하며 이런 이유를 들었다고 합니다.
1. 정나라는 힘이 약해 도저히 초나라를 칠 수 없다. 애초에 초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눈치나 보던 정나라
였다. 2. 무엇보다 떠돌이 거지 꼴인 태자를 받아주고 국빈으로서 후한 대우를 한 정공을 배신
하는데 천하가 우리를 따르겠느냐? 정공을 차지한다고 해도 반감이 심해 결국 뒤엎어지는 일만 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정상적인 이유를 들어 막으려 했지만 태자 건은 기어코 이걸 묵살해버렸으며 결국 이 계획을 첩보
를 통해 안 정공은 격렬하게 노해 태자와 그의 아내를 처형해 버렸으며 오자서는 한 발 앞서 태자의
아들 웅승을 데리고 도주한 덕분에 살아남지만, 초나라에 이어 정나라에서 까지 지명수배를 당해 버립니다.
오자서는 도주하긴 했지만 가족의 복수는 물론이요 자신이 맡게 된 태손 '승' 도 훌륭히 키워야 할 의무를
짊어진 셈이었는데, 도망자 신세에 급하게 나오느라 여비가 될만한 귀중품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니..... 결국 오자서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한창 위세를 떨치는 오(吳) 나라에 의탁하기로 합니다.
초나라에 입국은 마침 수비대장을 맡고 있던 친우 신포서의 배려로 성공했으나 이후 무일푼으로
횡단하느라 때로는 사냥꾼으로 때로는 구걸로, 때로는 뱃사람으로 위장하며 근근이 하루
하루 버텨 가면서 가까스로 초·오 국경 지대에 도착했지만 한창 분쟁이 심한 오나라
와의 국경 지대의 방비는 엄청 견고했기 때문에..... 오나라로 밀입국하기 매우 힘들었습니다.
탈출 과정을 다룬 일화로는 자신이 추격대에게 쫓기던 와중에 강 때문에 도주로가 가로막히자
포기하려던 찰나, 어느 늙은 뱃사공이 배에 태워 강 너머로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오자서는 뱃사공에게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보검을 넘겨주려 했으나, 뱃사공은
지금 오자서란 사람을 잡으면 천금을 준다던데 그깟 보검이 뭐 대수냐며 받기를 거부합니다.
이름이라도 알려는 오자서에게 둘 중 하나가 잡히면 다른 하나 이름 안불거라고 확신하느냐? 그냥 모른채로
가자며 쿨하게 떠났으며 오자서는 이런 그에게 무릎을 끓고 감사를 표한 뒤 본인도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느 야사에서는 위의 일화와 정반대로 구해준 뒤에도 오자서가 세 번을 그를 의심하며 질문하자 이에
빡친 뱃사공이 '죽음으로 믿음을 증명하면 되겠느냐' 며 그대로 강에 뛰어들어 익사했고
이에 오자서가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때 오자서가 검을 끌러 보답을
하려 했다하여 일화를 기리기 위해 훗날 만든 해검정(解劍亭) 이라는 정자 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열국지》에서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할 때의 묘사가 더 추가되었으니 오자서는 우연히 동고공이라는 노인
의 도움을 얻게 되었는데, 이 때 동고공이 한 가지 묘책을 고안해 주었으니 동고공의 지인인 황보눌
을 변장시켜서 관문의 병사들이 오자서로 오인하게 만들었고.... 그 혼란을 틈타 빠져나가게 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오자서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으며 그후 오자서가 복수에 성공한 후 동고공에게 보답
하기 위해 거처를 방문했으나, 이미 동고공은 어디론가 떠나서 사라 졌다는 이야기로 끝나며
어부가 오자서를 살려보냈다는데는 뒷이야기가 있으니 먼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헌공이 온 나라에 위기를 발령합니다.
이때 한 젊은 어부가 배 젓는 노 하나를 들고서 오자서의 도피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부르며
오나라 군영으로 혼자 들어갔으니 젊은 어부는 바로 사공의 아들이었던 것이라,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섬찟한 오자서는 어부가 진 노가 옛날 그 사공이 쓰던 노임을 알아보고 "그때의
일이 없었으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터.… 분하지만 은혜를 갚기 위해 군사를 물리겠다"
며 진격을 중지했고 정헌공은 어부를 대부로 모셨으니 사람들은 '어대부(漁大夫)' 라 불렀답니다.
온갖 고생 끝에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환대를 받았으니 초나라의 명문이던 '오' 씨 가문의
명성은 신생국가인 오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심지어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도주한뒤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음도 알고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나라는 이런 오자서를 환영했으나 오자서는 이 환영을 순수히 즐기지 않고 한동안은 승을 보살피며
조용히 농사일을 하면서 보냈다고 하는데..... 그리고 오랜 인내의 끝에 오자서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 벌어지게 되니 다름이 아니고 우연이 겹친 끝에 오나라에 왕위 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선대인 수몽은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며 딱히 누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나, 재능이 뛰어난 넷째 '계찰'
을 유독 총애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기를 바랬고 계찰의 세 형들도 권력욕이
약했는지 아니면 계찰을 그만큼 아끼고 인정했는지 몰라도 이런 수몽의 뜻에 일심동체로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계찰은 나이도 어리고 왕위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어쩔 수 없이 일단은 맏형인
제번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제번과 둘째인 여제, 셋째인 여매 모두 아들이 아닌 동생에게 왕위를 계승
시키며 어떻게든 계찰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 했는데, 그러나 계찰은 제번, 여제, 여매까지
차례로 죽어버린 뒤에도 끝끝내 왕이 되길 거절했고 결국 셋째인 여매의 아들 료가 왕위를 승계합니다.
수몽의 장남 제번의 아들이자 후일 합려라 불리게 될 광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숨겼지만
오자서는 이런 광의 본심을 꿰뜷어 봤고, 야심가인 데다가 능력은 확실하나 입지가 불확실한 그를 지원
하는게 자신의 복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거라 여겨 측근으로 들어가 그를 보좌하며 쿠데타를 성공시킵니다.
왕위에 오른 광은 오왕 합려(闔閭) 라 칭하게 되었고 당연히 최대 공신인 오자서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서
측근으로 삼으니, 재상에 취임한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준비했으니 쑤저우(소주)의 오나라는
이민족의 나라지만 위세를 자랑하며 성장하던 상황에 오자서까지 나서며 각국에서 인재들이 몰려옵니다.
이 중에서 특히 유명한 두명이 훗날 손자병법을 만들며 현재까지 최고의 군략가로 꼽히는 손무
와 내정의 명인인 백비였으니..... 오나라는 이런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급속도로 성장을 거듭해 수년 만에 초나라와 겨룰수 있을 정도로 국력을 키우는데 성공합니다.
드디어 기원전 506년, 손무와 오자서가 함께 이끄는 오군이 주변 동맹국의 군과 함께 초나라로 진격을
개시했으니 빠른 진격 앞에 초군은 그야말로 지옥을 맛보았고, 영윤 낭와와 사마 심윤술이 이끄는
초군은 백거 전투에서 크게 패해 불과 3개월 만에 수도 코 앞까지 적군의 침입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초의 수도는 초 문왕 시대에 건설되어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영(郢) 이었으나 손무 의
수공(水攻) 에 허무하게 함락되었으며 왕과 몇몇 대신들만 간신히 탈출에
성공 하였고 그 후 수도에 오군이 입성한 이후에 대규모의 방화·약탈·강간이 이루어 졌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손무는《손자병법》에서 민심을 얻는 것을 강조했으나, 정작 본인이 참전한
전쟁에서는 학살을 막지 못했으니 이러한 학살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 때문에
전쟁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고 마는데, 이것은 그만큼 오자서의 집념이
손무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했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고우영 십팔사략
이때 오자서 일가를 몰살시킨 초 평왕과 비무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였으니 영성을 함락시킨 뒤 평왕의
능을 찾아가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찾아낸뒤 구리 채찍으로 수백대를 쳐 형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겨우
매질을 그쳤다고 하니..... 바로 '굴묘편시'(掘墓鞭屍) 의 고사로 가족을 잃은 지 16년 만에 이룬 복수였습니다.
이때 신포서는 오자서가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에 채찍질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인간된 도리로 차마 못 할 짓이 아니오!' 라고 호되게 꾸짖었다는데,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다(도행역시)' 라고 답변했다는데 즉, ' 오나라
국력만으로는 초나라를 그리 오래 점령 못하니까, 잔혹하지만 할수 있는 일을 먼저 해놓는다' 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吳)도 안심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으니 몰래 탈출한 초 소왕을 대신해 공자 신은 일종
의 분조를 이끌며 지방에서 게릴라를 조직하여 오나라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오기
시작했고, 오자서에게 실망한 신포서도 서방의 강대국 진(秦)에 사신으로 가 원군을 얻어냅니다.
오자서는 함께 망명하였던 왕손 승(王孫勝)을 초나라의 왕위에 앉히고, 자신이 초나라의 재상에 취임하여 초를
오나라 속국으로 재건하려 했으나, 초나라의 부귀에 맛을 들인 오왕 합려는 초나라의 본토를 포기할 생각
이 없었기에 시간을 질질 끌다 반격을 허용하게 되었고, 진(秦)·초 연합군과 오군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손무는 오나라로 회군해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백비는 이에 따르지 않았고 같은 생각이었던 오왕 합려도
백비에게 10,000명의 군사를 주어 진·초 연합군을 치게 하였으나 결국 진나라 명장 화련에게 격파
당하고 손무가 파견한 전의 장군의 구조로 귀환하는데, 이러한 대패의 결과로 합려의 동생 부개
가 반란을 일으키니 오왕 합려는 손무와 오자서 등 몇몇 장수들을 남기고 모반을 평정하러 돌아갑니다.
손무의 뛰어난 전술, 전략으로 초나라를 대파하여 깨뜨렸지만, 연이은 연승의 진격과 단맛에 방심하고 손무의
진언을 어겨가며 과욕을 부리다 일을 그르쳤으니 초나라 를 멸망시켜 오에 복속시키거나 혹은 왕손 승을
이용한 괴뢰국으로 재편해 오의 속국 으로 편입시키고자 했던 당초의 목표를 달성시킬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나라가 거둔 대승은 대승이라, 오는 결국 본토로 철수하기로
하는 대신에 초가 막대한 재물을 오에게 매년 바치기로 한 조공의 약조와
왕손 승을 백공 (白公) 으로 세워 맞아들이는 것으로 화의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으니 일설에는
산책하던중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가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 까지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승은 초나라로 귀환한 뒤에 나름대로 대우 받으며 살았으나, 훗날 아버지인 건의 복수를 위해 정나라
를 치고자 하였지만.... 그러나 혜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초나라의 왕위를 빼앗아
서라도 정나라를 쳐 복수를 완수하고자 반란을 일으켰고 심제량에게 저지 당하자 자살하였습니다.
당초의 목표인 초나라를 완벽하게 복속시키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러나 사실상 초나라
군대를괴멸시켰고 이를 통해 오나라는 중원 진출도 넘볼 수 있는 강대국으로 성장
했음을 보여줬으며...... 이에 따라 오왕 합려의 자신감도 자연스럽게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신감도 얼마 가지 못했으니 오나라와 초나라 양국이 싸우는 동안 묵묵히 성장하던 월(越)나라
를 계속 눈여겨본 합려가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군을 일으켜 월을 정벌코자 친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월의 책략가 범려의 계략에 넘어가 대패하고 본인도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오나라로 돌아오지도
못한채 사망했는데.... 합려에겐 적자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레 후계 문제가 불거졌고 오의
실세나 다름없던 오자서가 합려의 차남인 부차를 지지 함으로서 그대로 부차가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한을 갚겠다며 국력을 키워 월에게 복수하고자 했고 오자서도 같은 복수귀 동지 끼리
통한게 있는지 이번에는 부차의 친정을 막지 않고 오히려 자신까지 따라갔으니 만반의 준비를 한데다가
방심도 하지않는 오나라 군대는 지난번 승리로 오만해진 월왕 구천의 군대를 쳐부수고 압승했으나 범려
의 모략으로 구천이 부차 앞에 무릎을 꿇어가며 사정사정했고 부차는 월나라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강화의 결과로 월왕 구천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왔지만, 온갖 아첨과 뇌물을 총동원 하여 오왕
부차를 설득하는데 성공하여 끝내는 월나라로 귀환해서는 오나라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게 되는데.... 오와 월의 전쟁이 종전된 뒤 오자서는 월나라로 부터는 집중적으로 노려지게 됩니다.
월나라를 뿌리뽑아야 한다며 강경히 주장하던 이 노신(老臣) 을 남겨두다가 부차가 오자서의 말에 혹해버리면
그대로 월나라가 사라질 수 있기 때문 이었으니, 월의 범려와 대부 문종은 오자서 못지 않은 지위를 갖고
있던 백비에게 많은 뇌물을 갖다바쳐 조정 내에서 오자서의 영향력을 조금씩 갉아먹는 한편, 오자서
를 어려워하던...... 오왕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이니 미녀 서시를 바친 것입니다.
당시 잇따른 승리로 교만해진 오왕 부차는 중원의 제후들을 소집해 패자에 오르겠다는 헛된 야망을 품었고,
반대하는 오자서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되었으니 그래도 오자서를 자기 손으로 죽이기는 꺼림직
했던 부차는 제나라에 대해 말도 안 되는 협박장을 써서 오자서에게 들려 보네니 借刀殺人(차도살인) 이라?
제나라의 손으로 오자서를 죽이게 하고 이를 구실로 제나라를 침공하겠다는 뜻이었는 데....
그러나 이를 간파하고 있던 제나라는 오히려 오자서를 융숭히 대접하여 돌려
보냈으니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오왕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屬鏤)를 내려 자결을 명합니다.
오자서는 그 자리에서 간신 백비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내가 죽으면 부차의 관짝
을 짜도록 하기 위해 무덤에다 가래나무를 심고, 오가 월에게 멸망당하는 것 을 보게하기 위해
내 두 눈을 뽑아 동쪽 성문에 걸어두라" 는 유언을 남긴 다음 촉루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고 합니다.
이 유언을 전해듣고 부차는 대노하여 이런 불충한 자에게 무덤 같은 것도 필요없다며 그 시체
를 가죽 부대에 넣은채로 장강에 던져버려서 찾지 못하게 하여 저승에서도 결코 편히
쉴 수 없을 꼴로 만들었지만..... 주민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후 월의 신하 범려는, 구천이 오 정벌에 성공한 이후 구천의 성격을 간파하여 문종 등
의 공신들이 주살 당하기 전에 하야하여 제나라로 건너갔고, 숙적 오자서의
비극적인 최후를 추모하는 마음에서 '치이자피'(鴟夷子皮) 라고 개명했다고 전해집니다.
오자서 사후 10년이 지나지도 않아 그의 유언대로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했으니, 제나라를
굴복시킨 부차가 패자로 인정받고자 회맹을 벌이던 와중에 후방인 월나라가 오나라의
수도인 고소(쑤저우) 를 말그대로 빈집털이 해버린 것이니 부차는 이를 듣고 급하게
군대를 이끌고 귀환해 월나라에 맞섰지만 처참하게 패배한 뒤 포위당해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그후 구천은 부차에게 '너도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나도 한번 정도는 못 살려줄 것도 없다' 며 100호 정도의
장으로 봉해준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부차는 이를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는
말만 남긴채 천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뒤 자결했으며 백비는 오나라가 멸망하자 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간청했으나 오히려 구천에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간신배' 라는 이유로 공개처형 당했습니다.
먼 훗날 삼국시대 동오의 권신 손침이 오자서의 사당을 훼손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죽어서는
자신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당한 셈인데, 그후 손침은 경제 손휴에게 암살당했고,
손휴도 5년 뒤에 요절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당을 훼손한
손침이 속했던 오(吳)나라도 자신을 죽인 부차의 오나라와 한자까지 같은 국호를 사용했습니다.
오나라 멸망후 중국 4대 미인으로 구천이 부차에게 바친 서시의 행적에 대해 오자서를 본래 사모했던 까닭에
임무를 마친후 죄책감에 자결했다는 설이 있으니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 차용했으며 혹은 범려와
함께 태호로 숨었다거나 또는 오나라에서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처형당해다고 하니 傾國之色(경국지색) 이라?
쑤저우의 호구에서 감천이란 우물을 보면서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귀가 따갑게 들은 “지성이면 감천” 이란
말이 우리나라 속담인줄 알았다가 중국의 감천을 보며 풀이 죽었었는데 塞翁之馬(새옹지마) 등의
고사성어며.....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속담들이 모두 중국문화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복수를 위해 충(忠) 을 버린 사람이다.' 라는 평가와 '폭군을
몰아내는것은 충(忠) 을 저버리는 일이 아니다.' 라는 평가가 상존하니 사실
오자서가 비판을 받은 이유는 왕을 죽여서가 아니라 시체를 훼손한 것 때문이 훨씬
크며 이룬 업적에 인생역정이 비장미가 넘치다보니 후대에도 이름을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또 유교라고 해서 왕에게 무조건 굴종하는 것을 충이라고 하지는 않으니 “맹자” 에도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
不聽 則易位 (임금이 큰 잘못을 저지르면 간언을 하고, 반복해도 듣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바꾼다.
<만장 하>)' 라고 나와 있듯이..... 자격 없는 왕은 왕이 아니라고 하며 오자서의 고사를 드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는 일본 개화기에 조슈번(야마구치현) 의 요시다 쇼인이 막부타도를 위해 존왕양이론을 주창하고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송하촌숙) 라는 학숙을 세워 “맹자” 를 강의해 1년반 동안 90명의 제자
를 길렀는데.... 이토 히로부미등 수상 4명에 이노우에에 가오루등 대신 10여명과 하세가와
요시미치, 야마가타 아리토모,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 3명과 장군만도 수십명을 배출합니다.
신포서를 만났을 때 복수를 위한 집념을 절대 단념하지 않겠다고 한 표현인 '일모도원'(日暮途遠)
은 순리와 역리를 가리지 않는 의지 관철의 위험성을 암시하기도 하니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많은 굴욕을 참았단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꼈는지 사마천이 유독 높게 평가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기》의 열전은 여러 인물이 엮여서 하나의 열전이 되지만 오자서의 경우 단독으로 열전을 편찬
했으며 그 내용도 타 열전에 비하면 상당히 알차고 사론에서도 '소의(小義)를 버리고 큰 치욕을 갚아
명성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모든 고초를 참고 견디며 공명을 이룬 강인한 대장부' 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후에도 오자서에 대한 칭송은 이어져 사후 1,000년 후 송나라 시대에 영렬왕 (英烈王)으로 추존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장쑤성 쑤저우(소주: 蘇州) 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세운 사당인 오상사(伍相祠) 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