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너와 내 안의 사제는 평신자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사제는 현세의 고통을 면케 해달라는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을 때 고통을 너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고 나는 가지만 쳐줄 뿐이기의 말씀을 따라 그 가지만 쳐주시는 분임을 믿으십시오. 결국, 사제는 현세와 양다리를 자주 걸칠 수밖에 없는 평신자와 달리 더욱더 깊이 그리고 넓게 영원한 생명으로 주소를 두고 기도 지향을 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와 주파수가 달라 서로 아프게 할 수도 있고 이때에 흥분이나 화냄은 금물일 때가 잦습니다. 화를 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나약한 우리 평신자들은 화냄보다 부드럽고, 때론 설득조차 어려운 불합리한 세상사 속에서 그 사람 안의 예수님께 다만 무엇을 말할까, 무엇을 생각할까의 의지조차 체념 가운데 주님께 의탁함으로써 커다란 역전의 기적을 체험하기도 할 것입니다.
가끔 한꺼번에 정리 해고를 하는 사제들도 있을 수 있지요. 이때에도 보다 충분한 기도를 통한 사제와의 대화가 어렵다면 다시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사제와의 대화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의 대화를 묵상하시어 절대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도록 냉정함을 유지하시어 매듭을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흥분이나 화냄으로 대사를 그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에 물든 졸부들을 보면 이러한 냉정성이 강하여 순진하고 저돌적인 한국인들 특히 서민들을 많이 짓밟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자들은 이때의 냉정보다 온정이 더 중요함을 믿을 것입니다.
냉정은 결국 유아독존 또는 고립감으로 이어질 때가 잦고 온정은 웃음, 엔도르핀 등과 함께 잠자는 이웃들도 깨우는 효과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들이 잘못했다. 나가라! 하면 작전상 후퇴도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되돌아와 다만 선과 악의 영적 싸움 의지로 언젠가 찾아오던지 말든지 할 대화의 타이밍을 맞춰 열 배의 공격을 하면 그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사생활이라는 용서와 화해의 탄창으로 이뤄진 사랑의 총의 성능이 아무래도 사제의 그것보다 약할 수 있으니 칼을 제대로 가르셔야 할 것입니다.
쌍날칼이신 주님의 권능에 내어 맡기면 그것이 진실이고 또한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1당 100, 1당 1,000인 사제와의 과정과 결과를 맞힌다는 것은 아무래도 평신자로서도 또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아이들 우리 아들도 그렇고 친구 따라 욕설도 입에 자주 담는 모습을 보는데 저 같은 경우는 방관에 가깝도록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만 때론 엄한 사제를 두려워하여 성당 가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제이기 이전에 부모 책임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편 신자인 우리는 그 부모가 성 부모님으로 보는 과정이기도 한데 과연 누구 책임일까요? 저는 이때에 답이 과연 필요한지 모르겠다. 생각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발걸음은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른들인 우리 싸움에 아기 예수님을 낙태, 또는 발달 장애로 태어나게 하시거나 신앙의 초보인 기복신앙으로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면 이는 분명히 우리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는 감정적이었던 베드로과인 어준선님은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하늘나라는 즉 주님의 나라인 이곳 또한 양도 질도 필요 없을 경우가 더 많다는 것도 기억해 두셔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건데 과연 사제에게 아이를 맡겨야 할 것인가? 내가 아이를 돌보아야 할 것인가? 가 관건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맛있는 마음의 양식을 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으나 사제의 성체 지향과 평신자 부모들 또한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가중시키고 있는 주일학교 내 아이들 문제도 함께 반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학교보다 세상사 더 큰 걱정거리를 가중시킬 수 있는 학원 우선, 장차 돈 잘 벌기 우선의 아이 양육도 근본으로 재고해야 할 것이기에 우리가 또한 작은 관심으로부터 기적을 주님과 함께 창(창은 항시 주님 몫)출(조력은 ''나''의 몫)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악 속에서도 선이 내재해 있음을 보며 그 사람인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선교 또는 전교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결국, 어준선님의 지론은 선교보다 더 위대한 이 전교성월이자 묵주기도 성월에 보내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내 자아들 역시 선교보다 우월한 전교로 이끌어야 할 것인데 묵주기도와 미사로서 푸시길 권고 드립니다.
문제지를 제출해주신 사제와 문제를 거론해 주신 어준선님께 감사를 전하며 누군가는 나서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횟수는 삼 분의 일로 줄이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부족하고 죄 많은 우리이기에 삼위일체 원리로 세 가지를 한가지 횟수로 줄이자는 이야기지요. 특히 사제에 대한 성토가 그렇다고 봅니다. 왜냐면 전교 성월의 우리의 그 의지를 역행하게 하는 점입가경의 마귀의 공작들을 통한 성당을 더 멀리하게 하는 사람들의 양산 또한 만만치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라 봅니다. 이를 또한 우리 안의 마각(마귀의 생각)이라 할 수 있잖습니까?
아무튼, 한국 사람들 낙태, 제왕절개율, 교통사고, 이혼율이 세계 1, 2위면서 은하수, 시나브로, 사랑으로라는 세 개의 단어를 가장 좋아하는 것은 놀라우신 천주존재 은총이라 사료됩니다.
海棠.
신부님을 보호하는 우리들...
어느 성인께서 환시를 보셨다.
환시 가운데서 사제관 두개를 보았는데,
사제관에는 마귀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첫 번째 사제관에 신자들이 계속 화살기도를 보내주니
마귀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두 번째 사제관을 위해서는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마귀들이 점점 더 달라붙어 나중에는 조그만 틈을 타고
마귀가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환시에서 성인이 확신한 것은
본당신부가 성인이 되느냐 아니냐는
신자들의 기도에 99.9%가 달려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사제가 예수님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다.
사제 한 분에게서는 예수님의 한 조각만을 보자.
예를 들어, 다른 것은 못하지만
가정 방문을 잘 하는 신부님에게서는 그것만을 보고,
면담을 잘 해주시는 분에게서는 또 그것만을 보자.
어떤 신부님은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어떤 신부님은 말씀으로,
또 어떤 신부님은 한없는 선함을 보여 주신다.
도화지에 그 조각조각을 모자이크 해 채워보자.
그러면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 만들어 질 것이다.
내가 피정에 다니면서 제일 가슴 아픈 얘기가
서품 받은 지 얼마 안 된 신부들이 환속했다는 소식이다.
요즘은 점점 더 많아진다.
사제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데...
신학교의 온실 속에서 이제 막 나온 보좌신부들을
신자들은 기도의 벽으로 감싸주어야 한다.
사제들이라고 왜 약점이 없겠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부분이 왜 없겠는가?
신학교에서 10년 공부했다고 100% 인격적으로
성숙이 되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이것 저것 겪으면서 체험을 하는 건데,
어렵고 약점이 보일 때 마다 그것을 내리치면
사제는 기댈 데가 없다.
사제가 아무리 사목이 힘들어도 ''''''''지금 이 순간에도 날 위해
기도해 주는 마리아 할머니가 계시겠지!''''''''하는 생각을 하면
신이 나는 것이다.
▒ 김웅열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