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국사교과서나 역사책에서 일제시대는 일종의 '사라진 역사'이다.
한국인들에게 조선말기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세상에 다시없는 악마요
평화롭게 살아가던 우리민족을 침략해 착취하고 괴롭혔던 불구대천의 원수다. 이
시기에 대한 역사기술이라는 것은 대체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훌륭한'
조상들이 얼마나 피땀 흘려 싸웠는가, 일본은 우리나라를 어떻게 괴롭혔는가,
그리고 우리민족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투쟁했으며, 일본은
이런 독립운동가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였는가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은 과거 경상도정권 시절 극악했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비교해봤을 때 더
심하면 심했지 약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린 시절 공산당은
싫어요~ 하면서 공산당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던 이승복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울먹이며 노래를 불렀고 6월이 되면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나라
이겨레~' 하면서 625의 노래를 연습해야만 했다. 국민학교 시절 항상 반장이었던
나는 노래합창도 책임지고 있었는데 이 노래에서 반음 차이로 빨리 변하는 '쫓고
또 쫓아' 부분을 항상 틀리는 반 아이들 때문에 몇 시간씩 반복하면서 연습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북괴 공산당을 빨간색 늑대로
그리면서 살아왔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6월이 되어도 아무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북한괴뢰'의 우두머리인 김정일이 항상 남한 TV를 즐겨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지만 반일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여전하고 최근에는 정부의 책동으로 나날이 더 심해져 가고 있는 듯하다. 서점을
아무리 뒤져봐도 일제시대의 한국 사회를 차분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해놓은 책은
하나도 없고 독립운동사, 반일항쟁사, 친일파 연구, 반민특위 연구, 정신대 연구
등등의 책들만 가득히 꽂혀있을 뿐이다. 설령 일본이 그렇게 잘못했다손
치더라도 이건 굉장히 심각한 지식의 편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에
대해서만은 모든 한국인들이 열렬한 파시스트가 되어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은 조선왕조를 이어받은
새로운 통치자일 뿐이다. 일본 이후엔 미국, 이승만, 경상도가 차례로 통치자의
자리를 이어받았던 것이다. 이 다섯 개 통치그룹을 비교해 봤을 때 나는 일본이
가장 나았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는 미국, 경상도, 이승만, 조선으로 순서를
정하고 싶다. 하지만 역사가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통치자 위주로 역사를
기술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대중들은 통치자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각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은둔의 왕국이었던 조선왕조는 500년간 외부 세계와는 담을 쌓은 채 편협한
유교사상에 몰두해 존속해오다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연스레 일본에게
통치자의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이것은 분명 발전이고 민중들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한국은 이 시대를 일본통치에 저항했던 사람들 위주로 기술하고
있지만 그들은 일제시대의 주류 그룹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선진문물의 혜택을 받으면 일본통치기간동안 상대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에 항거했던 초기 그룹들은 아직 유교이념의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시대의 흐름을 역류하려 했던 '관성그룹'이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올 때 경험했던 것처럼 어느 시대가 큰 변화가 일어날 때에는 이같은
관성그룹의 반동을 경험하는 것이므로,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이는
최근 정권을 빼앗긴 경상도세력들이 과거 경험했던 권력의 단맛을 잊지 못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발악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1910년 8월 23일 한일합병의 체결 사실이 대내 외에 알려졌을 때 일본 언론들은
이번 병합이
조선반도에 문명의 선물을 가져다주고 평화를 보장해줄 것이기에 한국인들을
위해 행복한 일이라고 논평하면서 축하의 메시지를 전했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한국병합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한국민의 행복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므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미국 언론들도 일제히 향후 한국인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라며 축하의 뜻을 전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도 지지의 뜻을
표명했으며, 유일하게 한일합병에 비난 성명을 발표한 나라는 망하기 일보직전인
청나라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국제사회의 시각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현실을 감안했을 때 일본이라는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한 것은
실제로 조선인민들의 행복을 신속하게 증진시켜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한때 독립협회를 주도하면서 강력하게 자주독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완용이 결국 한일합병을 주도하게 된 것도 이 같은 진정한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반도를 인수한 일본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에는 다소 무리한
인권유린의 사례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의 시대상황을 감안하면 믿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인 통치를 실시한 것이다. 당시는 세계 전역에서 제국주의에
의한 잔혹한 식민지 탄압과 착취가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원주민인 인디언
2천만을 학살해 아예 인종을 말살해버린 미국을 비롯해 영국의 잔학한 인도
통치와 아프리카에서 자행되었던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 착취와 학살 같은
것들을 감안하면 후발 공업국이었던 일본의 조선통치는 굉장히 예외적인 사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시대 기간동안 조선에서 1919년의 독립운동 이외에는
이렇다할 반일운동이 없었던 것을 보면 조선인들은 일본통치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 역사기술에서는 31운동 당시 일본군의 탄압을 다소
과장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전국적인 시위와 폭동사태가 발생했는데 약간의
인명피해가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시위대에 의한 파괴와 살인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기술되지 않고 있는 등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할
것이다.
최근 들어 일본에 대해서는 아예 눈을 가리고 살았던 한국인들이 그나마
일제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대두한
식민지근대화 이론이 계기가 되었다 할 것이다. 그 이전에 남북한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없었더라도 조선사회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로 발전해
근대화되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중심으로 한 반일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용기 없는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결론을
가지고 역사를 꿰맞추는 곡학아세의 전형적인 사례인데, 이는 해외의
한국학자들로부터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부질없는 노력'이라고 비웃음을
샀다.
1987년 교토대학의 중천철 교수의 제안에 따라 안병직 등 한일연구자 16명이
참가한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생겨나 식민지근대화 이론의 산실이 되었다.
안병직은 1980년대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라는
허무맹랑한 이론을 제기한 바 있는데, 이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가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미국의 착취를 받는 반봉건사회이므로
노동운동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보다는 반식민지 민족자주운동이 올바른
노선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토대로 1980년대 서울대에서는 김영환등을 중심으로
자생 주체사상파들이 생겨나 이후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한 안병직은 세불리를 느끼고
식민지근대화 이론으로 급선회, 일본이 침략을 위한 목적이긴 했지만 그것을
계기로 조선사회가 개발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통치하면서 한국사회가 근대화되었다면 그것 자체로 인정하면
될 일이지, 거기에 '비록 수탈을 위한 목적이기는 했지만' 이라거나 '중국을
침략하는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서' 같은 수식어를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붙이는
이유는 개뿔 같은 자존심이나마 유지하고 싶기 때문이렷다. 한국의 학자라는
것들은 모두 이 모양으로 기회주의적인데다 무식하기 그지없다. 남의 눈치나
보면서 글을 쓰니 진실이 보이지 않고, 그러니 당근 무식해질 수밖에..
어쨌건 그나마 이 식민지근대화 이론이라는 것은 일제시대에 대한 이전의
평가에서 한 걸음 발전한 것이다. 이들은 일제시대에 이룩된 산업화라는 것이
당시 한반도에서 가능했던 유일하고도 최선의 발전과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당시 한국이 '서유럽이 장기간의 이행과정에서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를 순전히 외래적인 형태로, 그러나 역설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형태로 발전시켰다.' (이영훈) 고 말한다.
식민지 초기에 일제는 근대적 관료국가를 구축함으로써 '위로부터의 산업화'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토지조사사업의 실시를 통해 근대적 소유관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교육제도나 재정, 금융제도 및 교통, 통신시설과 같은 각종
사회간접자본도 적극적으로 육성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조처들은 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가 식민지에 자본주의를
이식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제는 한국을 비롯하여
자신이 통치하던 식민제국 전부를 함께 동원하고 근대화시키는 발전전략을
수립하였기 때문이다. (전상인)
식민지 시대 일본은 스스로의 자본주의 발전이 불충분하였고 또한 서구가
지배하는 적대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속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국적(national) 산업화 전략이 아니라 일본과 인근 식민지들, 특히 한국을
포함하는 지역적(regional) 산업화 전략을 선택하였다. 곧, 일본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방식은 일본에만 해당되는 모델이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도 동시에
해당되는 것이다.(서용석)
일본이 러일 전쟁 이후 한국의 보호국이 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일본은 당시로선 감당하기 벅찬 러시아와 무리한 전쟁을 수행함으로써 전후
경제는 피폐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 대신에
조선을 넘겨받았기 때문에 조선을 이용해서 뭔가 손해를 만회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이미 대만을 10년간 식민지통치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개발 상태의 미개한 식민지에서 뭔가 빼먹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통치 첫해인 1896년 일본 정부는 대만에 정부 예산의 11%라는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 뒤 대만에 지급하는 보조금은 조금씩 줄어들긴 했지만
대만 식민지 장사는 계속 적자였고 1905년에 와서야 대만 식민지 정부는
자립경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본은 대만 통치 초기에는 대만에서 사탕수수
농업을 발전시켜 외화를 얻어내는 데 주력했는데, 192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내
쌀값이 오르지 대만의 농민들은 사탕수수 대신 쌀농사로 전환해 이를 일본에
수출, 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일본의 농업이 몰락하자 일본 정부는
대만의 쌀 생산을 줄이고 설탕 생산을 늘이려고 시도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처럼 대만은 따뜻한 기후를 이용해 외화획득용 사탕수수 재배지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경우엔 이것이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변변한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닌 지역이다. 일본도 당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조선에서 쌀을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한다고 해도 이는 일본 경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왔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가치란 대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얻었다는 점 이외에는 특별한 이점이 없었고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조선 경제를 일본경제와 통합해 시장규모를 확대하고 장기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할 수 있다는 정도의 비전을 가지고 일종의 '장기투자'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당시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획득하려 했던 이유는 지하자원이나 설탕
고무 같은 원료를 획득하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었는데 자원 기후 문화
면에서 일본과 너무도 닮은꼴이었던 조선은 이같은 측면에서 최악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본은 울며겨자먹기로 조선을 기초부터 착실히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정책은 초기인 191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구시대의 미개한 토지소유관계를 근대적인 소유관계로 재편하는 일이었고,
1920년대에는 인구가 늘자 식량자급을 위해 쌀증산 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같은 단계를 통해 조선에 자본주의 경제가 정착하게 되자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자본이 조선으로 투자되어 본격적인
공업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식민지 경제는 1911년부터 1938년까지 연평균 3.7%의 성장을 보였는데,
이는 당시 세계 경제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장기지속적인
경제성장이었다. 그 결과
또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진행된 산업구조의 변화를 보면, 농수산업의 생산
비중이 80%에서 43%로 하락하면서 공업생산의 비중이 18%에서 41%로
성장하였다. 공장의 수가 늘어나고 노동자의 숫자도 1943년 175만여 명으로
늘어나 194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경제발전은 선진제국이 근대 경제성장으로
진입한 초기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는 일본 전체 공업시설의 25%를 한국에 배치하였고,
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한 이후에는 중화학공업까지 유치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지배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이는 현지에서
오히려 산업화를 역행해 농업사회로 퇴보시켰던 영국의 인도 경영과 비교해볼
때 매우 대조적인 일이다. (브루스 커밍스, The Lagacy of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및 문화적으로 단일한 단위로 묶였다. 일본은 꿈에라도 한반도가 독립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한반도에 엄청난 물량의
산업시설을 투자하는 일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의 기준에서 한반도에
들어선 흥남의 질소비료공장, 수풍의 수력발전소, 진남포의 공업단지 등은 모두
첨단 중화학 산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이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이 식민지의 농업부문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한 관개사업이나
농촌개발사업 역시 다른 식민지의 경우에는 절대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적극적인 식민지 경영의 모습이었다(브루스 커밍스).
그 외 교육 면에서는 6년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조선말 2.5%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 193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78%가 국민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전체의 17%가 12년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석탄통계연보)
이같은 교육이 근대화의 토대가 되었고 625 전쟁 후 본격적인 산업화의 토대가
되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역사를 해석하면서 종종 착각하는 것이 한가지 있는데, 대륙을
정벌한 여러 왕조들이 조선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조공을 받고 자치를
인정해주는 형태로 통치한 것은, 우리 민족이 자주정신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곳이 별로 먹을게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기후가 좋은 것도 아니고 토지가
비옥한 것도 아니어서 줘도 사양했던 것이다. 그나마 얼지 않는 항구에 한이
맺힌 러시아나 대륙진출에 한이 맺힌 일본 정도가 군사적인 이유로 조선을
원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우여곡절 끝에 식민지로서는 최악의 조선을 인수받은 일본은
초기부터 막대한 돈을 투자해 철도를 놓고 신작로를 만들고 토지조사사업을
벌이고 근대적인 관료제도를 이식하고 학교를 세워 조선인들을 교육했던 것이다.
이런 이례적인 투자는 조선을 키워 잡아먹으려는 웅대한 계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 땅이다, 즉 이제는 여기도 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한반도는 일본에게 단순한 식민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가능해질 것이다.
일제시대 구축된 한국의 경제기반은 대동아전쟁기 총동원으로 인해 어느 정도
훼손되었고,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파손되어 한국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근대화의 기반이라는 문제에서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은 데서 일어난 변화가 훨씬 더 중요하다. 교육과
제도, 이념과 관습, 법률, 경험과 기술 같은 것들은 결코 전쟁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2차 대전 이후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과 일본이 그토록 신속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이 기적을
베풀어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선진공업국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루어 향유한 경험이 있는 사회는 물질적인 기반이
모두 파괴되어버린다 해도 다시 신속하게 재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란 보이지 않는 기반과 경험의 축적이 훨씬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내가 일본이 한국사회에 기여한 것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들이 한반도에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공장을 짓고 사람들을 개화시켰다는 것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입헌군주국가를 만들어 근대화를 시도했을 경우 100년이 걸려도
깨어지지 않았을 법한 조선왕조의 완고한 문화유산과 사회제도, 이념 같은
정신적인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무려 500년이라는 장고한 세월동안
만들어지고 갈고 다듬어진 정교한 체제여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단지 일본이라는 이민족의 통치가 시작됨으로써 단기일에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흥선
대원군도 서원 철폐라는 자그마한 목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죽었을 정도로
조선의 유교사회는 강고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