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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연표 (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 아버지 김순영, 어머니 곽낙원, 아명은 창암(昌巖) 1878. 3세 천연두를 앓다. 1880. 5세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 1882 . 7세 해주 본향 텃골로 다시 이사하다.
1887. 12세 한학을 배우다. 1889. 14세 [통감], [사략] 병서를 읽다. 과문을 익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다. 매관매직을 일삼는 당시의 부패한 과장을 보고 실망하여 돌아오다. 풍수와 관상 공부에 몰두하다. 이름을 창수(昌洙)로 고치다. 동학교도들과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다. 동학군 토벌을 위해 일어난 진사 안태훈(안중근의사의 부친)과 교전하지 않기로 밀약을 맺고 구월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동엽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다. 신천 청계동에 있는 안태훈의 의려소로 가서 은거하다. 김형진과 함께 만주를 시찰하고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강계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다.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하였다는 포고문을 길거리에 붙이고 귀가하다. 3개월 후 체포되어 해주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황제의 특사 명령이 내려지다. 그러나 일본 공사 하야시의 압력으로 출감하지 못하다. 평양 대보산 영천암의 방주가 되어 지내다가 환속하여 귀향하다. 1901. 26세 부친상을 당하다(2월) 삼촌 김준영을 도와 집에서 잠시 농사를 짓다. 장연읍 사직동에 봉양학교를 설립하고 신문화 선전과 애국, 애족사상을 고취하다. 도산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를 만나 약혼하였으나 파혼하다. 진남포 의법 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이준 이동녕 등과 을사보호 조약의 철회를 상소하다. 황해도로 돌아가 서명의숙 교원이 되다. 10월 26일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사살 사건 관련자로 몰려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불기소로 석방되다. 재령 보강학교 교장으로 교육사업에 열중하였으며, 이완용을 찌른 이재명과 노백린을 만나다. 이 회의에서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결의하다.(11월) 징역 17년을 언도받은 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다.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하자는 뜻에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하다. 1920. 45세 부인 최준례 여사가 맏아들 인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오다. 1924. 49세 부인 최준례 사망하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경축식장에 폭탄을 던지게 하다.(4월) 한국독립당 등 5개 단체 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하다. 조소앙등과 일경피해 가흥으로이주하다(5월)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다(5월) 임시정부를 강소성 진강으로 옮겼다가 다시 장사로 옮기다. 한국광복운동 단체연합(일명 광복진선)을 결성하다.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중상을 입다(5월) 한국독립당을 발족시키고 집행위원장에 추대되다. 또한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다.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이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다. 국내진공 작전을 계획하다. 3.1절 기념대회에서 '임정에 국제지위 주기를' 연설하다.(3.11) 장개석과 회견갖다(7.26) 임시정부 주석직을 사직하고(8.3l) 다시 복직 집무시작하다.(9.21) 11월 5일 중경을 떠나 개인자격으로 환국(11.23)하여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건국의 포부와 방책'을 밝히다(11.26)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돈암장서 회견을 갖다(12.1)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소식을 접하고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3천만에게 고함' 방송하다(12.27 엄항섭 대독) 우익합당관련 이승만과 함께 '어떤 정당에도 불참' 선언하다(4.9) 민정시찰에 나서 인천의 각 공장 시찰하다(4.14,15) 대한독립청년단 발족하여 부총재에 선출되다. 총재에 이승만(9.12) 하지중장과 요담하고 좌우합작에 찬성, 좌우합작 7원칙 발표(10.13) 한독당 간부회담서 한독. 한민 합당 제의하다(2.26) 건국실천원양성소를 개소하다(3.20) 이승만과 함께 '공위협의에 참가보류' 성명 발표하다(5.22) 이승만과 함께 '공위참가는 각자의사에 따르기로 공동성명 발표하다(6.5) 비상국민회의 43차 임시회의서 부주석 유임되다(9.21) 26청년단체 통합, 대동청년단 결성, 부총재 춰임하다(9.21) '정부수립 이승만과 동일 단정수립 반대' 담화 발표하다(12.1) '미소양군 철수후에 자유선거 실시가능' 담화 발표하다(1.27) 한위 협의 관련 이승만, 김규식, 조소앙 등과 협의하다(1.28) 유엔 한위 협의후 '철병후 선거실시' 의견서 제출하다(1.30) 김규식과 함께 유엔한위에 남북회담 소집을 요청하다(2.6) 민의, 김구, 김규식의 남북협상방안에 대한 담화 발표하다(2.8) 김구등 3영수 19일 하지와 북조선 정권수립설에 대해 요담하다(2.19)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에 남북회담 제의하다(2.25) 이북애국단체연합, 재남이북인대회서 고문으로 추대되다(3.10)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항구, 홍명희등과 총선거 불참 성명 발표하다(3.12) 남북협상 관련 담화 발표하다(3.26) 김구, 김규식 평양회담 참가 성명서 발표하다(4.1) 남북협상 출발전 성명 '우리 지표는 통일뿐' 성명발표후 38선 넘어 평양도착하다(4.20) 김규식과 귀경, 남북협상결과 공동성명 발표하다(5.5) 소련군 철군관련 '영토내 외국군 철수' 담화발표하다(6.14) 기자회견 통해 북조선서 2차 남북회담 제의하다(7.10) '단독정부에 불참' 담화 발표하다(7.19) '반탁과 철군은 동일'하다는 주장담은 담화 발표하다(10.19) 성금을 내 금호동에 백범학원을 세우다(1.29) '미소 철군협의는 평화통일의 진전' 담화 발표하다(4.19) 마포 염리동에 창암공민교 개교하다(5.17) 경교장서 안두희에게 피습받아 절명하다(6.26) 영결식 효창원에서 국민장으로 치러지다(7.5) 경교장 반환후 김신 충정로 금화장으로 이사하다(8.26) 건국실천원양성소 해산하다(8.23) =========================================================================== 상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도 기념관 내부에서 바라본 백범김구 묘역 충칭 임시정부청사 1948. 4. 19 삼팔선에선 김구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애쓰던 백범 김구는 1949. 6. 26 경교장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향년 74세. (1876 ~1949).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