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대로인 건 없다. 천지만물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죽음에 관해서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군요.
그렇다. 그것은 너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순간이든 너희가 그 순간의 삶을 알아차리는 그 찰나,
너희는 곧바로 죽음과 상실을 응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너희는 삶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 반쪽만을 알 것이다.
각각의 순간은 그것이 시작되는 그 찰나에 끝난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한, 너희는 그 속에 든 절묘함을 보지 못할 것이니,
그 순간을 평범하다 일컬을 것이다.
각각의 상호작용은 그것이 “시작하기 시작하자”마자 “끝나기 시작한다”.
이것을 진실로 응시하고 깊이 이해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순간과 삶 자체에 가득한 보물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할 때, 삶은 너희에게 자신을 줄 수 없다.
아니, 너희는 죽음을 이해하는 것 이상을 해야 한다.
너희는 죽음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삶을 사랑하는 그 순간에도.
너희가 개개인과 갖는 시간을 그 사람과의 마지막 시간이라 생각할 때,
그 시간은 찬미받을 것이고, 너희가 개개 순간에 갖는 체험을 마지막 그런 순간이라 생각할 때,
그 체험은 무한히 확장될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너희의 거부가 자신의 삶을 응시하지 않으려는 너희의 거부를 불러온다.
너희는 삶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너희는 그 순간과, 순간이 너희를 위해 붙잡고 있는 모든 걸 놓치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곧장 꿰뚫어보지 않고, 곧장 지나쳐본다.
뭔가를 깊이 살펴볼 때, 너희는 그 순간을 곧장 꿰뚫어본다.
뭔가를 깊이 응시한다는 건 그것을 곧장 꿰뚫어본다는 것이다.
그럴 때 환상은 존재하기를 그치고, 그럴 때 너희는 어떤 것이든 그 참모습대로 본다.
오직 그럴 때만 너희는 그것을 진실로 즐길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속에 기쁨을 집어넣을 수 있다. (“즐긴다”en-joy는 건 뭔가를 기쁘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럴 때 너희는 환상까지도 즐길 수 있다.
너희는 그것이 환상임을 알 것이고, 이 앎 자체가 그 기쁨의 반을 차지하리니!
너희는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너희가 그것을 진짜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짜가 아님을 아는 어떤 것도 너희에게 고통스럽지 않다.
이 문장을 한번 더 말하자꾸나.
진짜가 아님을 아는 어떤 것도 너희에게 고통스럽지 않다.
그것은 너희 마음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이다.
너희가 상황과 배우들을 만들어내고, 너희가 대사를 쓴다.
그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님을 이해하는 순간, 어떤 것도 고통스럽지 않다.
이것은 삶의 경우에 그러하듯, 죽음의 경우에도 사실이다.
죽음 역시 환상임을 이해할 때, 너희는 “오, 죽음이여, 네 가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너희는 죽음을 즐길 수도 있다! 너희는 다른 누군가의 죽음까지도 즐길 수 있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이런 이야기를 말하는 게 이상한가?
오직 너희가 죽음-과 삶-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오직 그럴 때만 그럴 것이다.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시작이다.
죽음은 문 열림이지, 문 닫힘이 아니다.
삶이 영원하다는 걸 이해할 때,
너희는 죽음이 환상, 계속해서 너희가 몸을 무척 염려하도록 만듦으로써
너희 몸을 너희라고 믿게 만드는 환상임을 이해한다.
하지만 너희는 몸이 아니니, 몸의 파멸은 너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죽음은, 너희에게 진짜인 건 삶임을 가르칠 테고,
삶은 피할 수 없는 건 죽음이 아니라 무상성(無常性)impermanence임을 가르친다.
무상성만이 유일하게 진리다.
항상 그대로인 건 없다. 천지만물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대로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성permanence이라는 개념 자체도 뭔가가 의미를 가지려면 무상성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항상성조차 무상하다. 이것을 깊이 살펴보고, 이 진리를 응시하라.
그것을 이해하라, 그러면 신을 이해하리니.
이것이 법(法)이요, 이것이 부처다. 이것은 부처 법이다.
이것은 가르침이자 스승이요, 교훈이자 선각자다.
이것은 둥글게 말려서 하나가 된 대상이자 관찰자다.
그것들이 하나 아닌 다른 것이었던 적은 없다.
삶이 눈앞에서 펼쳐질 수 있도록 그것들을 펼친 건 너희였다.
그러나 너희 앞에 펼쳐진 자신의 삶을 볼 때, 너희 자신이 끌러지게 하지는 마라.
자신을 묶어둬라! 환상을 보고 그것을 즐겨라! 하지만 환상이 되지는 마라!
너희는 환상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다.
너희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이지, 이 세상 출신이 아니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너희의 환상을 이용하라. 그것을 이용하라!
그것이 너희에게 삶의 더 많은 것을 열어주는 열쇠가 되게 하라.
꽃을 죽어가는 것으로 보면 그 꽃이 슬퍼 보이겠지만,
그 꽃을 바뀌고 있고 얼마 안 가 열매 맺을 나무 전체의 일부로 본다면,
그때 너희는 그 꽃의 참된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
꽃의 피고 짐을 나무가 열매 맺을 준비를 갖추는 표식으로 이해할 때, 그때 너희는 삶을 이해하리니.
이것을 주의 깊게 살펴봐라. 그러면 너희는 삶이 그 자체로 비유임을 이해할 것이다.
언제나 잊지 마라. 너희는 꽃이 아니며, 그렇다고 열매도 아니다.
너희는 나무다. 너희의 뿌리는 내 속에 깊이 박혀 있다.
나는 너희가 싹을 틔운 흙이니, 너희의 꽃과 열매는 내게로 돌아와 더 비옥한 흙을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이 생명을 낳으니, 그것은 영원히 죽음을 알지 못한다.
이건 정말 아름답군요. 진짜 아름답군요. 고맙습니다.
- 신과 나눈 이야기 3권 p23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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