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22 기도와 기쁨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16:23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저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위기를 맞은 이유 중에 하나는 외부의 영향 때문보다는 기도에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만이라도 기억한다면 잘못된 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송명희 시인의 시 가운데 나(공평하신 하나님)라는 시를 보시면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신자는 성령이 오시므로 남이 못 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고 남이 모르는 것을 깨달으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성령이 오시므로 영적인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성령이 오시므로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해야합니까? 안 해도 됩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이 보다는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어떤 기도는 해야 하고 어떤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 질문이 더 타당하겠지요.
23절에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기도) 아니하리라 -
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기도) 아니하였으나 구하라(기도) -
이 두 절을 보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마6:33)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자녀들이 부모 곁에 있을 때는 부모가 모든 것을 해주니 자신이 해야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부모 품을 떠나 독립을 하거나 시집 장가를 가게 되면 이제는 부모가 해 주었던 것들을 자신이 해야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하셨다가 떠나 가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주님이 제자들의 길이 되셔서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주님만 따라가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제자들 곁에 계시지 않으므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원하시는 길과 뜻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기도하면서 주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면 기도를 하더라도 여전히 세상과 육신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신자가 기도할 때 기본은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구한다면 굳이 응답의 확신을 갖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기도를 하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기 보다 응답의 확신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응답이 없으면 성도의 믿음과 확신을 갖지 못한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응답으로 기쁨이 충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응답 때문에 기쁜 것입니까?
다시말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냈기 때문에 기쁜 것입니까?
여기서 기도의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란 무엇이 생각합니까?
일반적으로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어내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기도와 기쁨이라는 제목입니다.
24절에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언제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씀합니까?
구할 때 즉 기도와 간구할 때라는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 그 자체가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과 데이트는 시간 가는 줄 모르듯이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기도의 시간이 이러할 수는 없을까요?
찬송가 364장, 작사자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기도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응답받고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주님의 뜻대로 구하면 응답받습니다. 이로인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자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뜻을 위해 땅의 것들을 구하며 근심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근심하시겠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외에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시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사람은 자신의 목마른 것을 구하고 찾게 되어 있습니다.(이스라엘)
영혼의 깊은 간구를 드리는 신자는 영적인 부요함으로 세상 것에 미련을 갖거나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 세상과 자신이 원하는 간구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그 요구하는 것을 주실지라도 ㅡ 그것이 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심령은 가난하여 그 가난을 채우지 못해 끊임없이 세상과 육신의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계 3:17ㅡ18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 교회는 육신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영적으로는 빈곤한 상태였습니다.
신자나 교회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처럼 부유해지는 것이 목적입니까?
비록 육신적으로 가난해도 영적을 부유해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왕이면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다 부유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육신적인 욕심이 있기 때문에 그리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다윗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바랬습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 따라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중요할 뿐이고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고난 중에도 그 고난이 주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지 내 뜻 안에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중심으로 내 뜻 안에서 구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따라서 이제라도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고 행할 것을 기도하는 것입니다(빌2:13).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질 때 기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기쁨입니다.
내가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난 신자는 기도 또한 오직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성경을 읽고 마칩니다.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우리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내가 하는 사역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이라고 생각을 하고 사역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와 간구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