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 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주인공 B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방치되었다 대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들도 목적이 있었다 잡지를 접은 두 손이 비슷한 뉘앙스로 포켓에 들어간다 잠복한 형사들의 수만큼 일상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 없이 녹차가 썼고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지난 밤을 뒤졌다 스카치테이프로 개미를 잡는 엄마와 죽은 개미의 수만큼 악몽이 발견되곤 했다 개종한 다음날에도 신발에 껌이 붙는 이유를 젖꽃판에 털이 자라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의 속옷이 청바지에 물들고 물 바진 청바지에 핑크색 얼룩이 남아도 햇살은 처음부터 색깔만 말려 주었다 주인공 B가 떠나가는 플랫폼에 장르에 없던 도둑고양이가 들어온다 도둑고양이를 발로 차는 누군가 C에게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 1’이 울렁거림으로 희미해진다 식탁에 올릴 생선대가리 속으로 독이 든 저녁을 넣고 싶었다 무심코 껴안은 사람들과 지하철마다 부딪치는 그들의 성기가 두 눈을 예외로 만든다 나는 안개, 안개 같았다
두 단어의 세계
에베레스트경이 초모랑마*를 발견한 뒤에도 늘어난 건 몇 방울의 잉크 핼리혜성이나 B612가 발견된 다음에도 몇 가지 수학공식이 늘어났을 뿐 노트 정리를 잘하면 곳곳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구십 퍼센트 바다생물도 약간의 여백이면 충분해 ‘모든’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고 조물주처럼 보살펴주고 있기에. 몇 번씩 전쟁을 치렀지만 지우개가루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반듯하게 접으면 작고 가벼워 죽은 친구의 이름이나 낯선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는 지구 가끔씩 글자를 혼동한 사람들은 바람과 지하철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울다가, 웃기도 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 그녀의 노트엔 보탤 수 없는 유머가 있다.
* Chomolungma, 영국 측량기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에베레스트를 부르던 이름. **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이 붙은 이 화석은 440만년 전 인류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最古)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보다 120만 년 정도 앞선다. 미국 《사이언스》지 선정 ‘올해의 10대 과학적 성과’ 1위.
비닐의 기원
검정비닐을 들어 올린 바람은 자신의 손가락만 사용하려 들었어요 어린 가축의 혓바닥이나 토막난 고등어 따위가 담겨 있던 검정비닐이 에요 가슴을 받치고 손잡이 없는 주둥이를 벌리면 제 것 같은 핏물이 흘 러요
온몸이 찢겨져도 담지 못할 내용은 없었죠 계단을 오르고 새떼를 오 르고 자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검정비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비닐이 묵직해졌어요 바람은 몰랐죠, 바스락거리는 목젖이 돋아날 줄은 사소한 시빗거릴 주워 담을 줄 말이에요 인류학자들의 논쟁거릴 삼켜버렸어요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기도 했구요
검정비닐이 두려워요, 사람들은 호주머니 가득 목소릴 숨기거나 깊 은 밤 고함을 지르고 도망 다녔어요 자신의 메아리에 놀라서 긍정도 부 정도 아닌 신음을 낸 적도 많았죠 검정비닐을 들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 밤에는 사나운 풍문이 떼지어 몰려왔답니다 모국어와 전화기를 의심하다 눈짓과 몸짓이 뒤섞인 당신의 홍당무에도 바람이 들지 몰라 요
저기 검정비닐을 든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오네요 비닐을 벗고 심호 흡하고 있어요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도 지을 수 있군요 허공에 허 파를 만들고 속을 드러낼 시간이에요
네 번째 사과
이곳에서 너는 사적인 공간이야. 나의 이빨과 혓바닥이 머물다 간 싸 구려 호텔이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숙을 허락하는 거실 이야. 붉은색 하드커버를 가진 너는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지. 가 장 은밀한 부위에는 신화를 숨기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나는 고전적 성 교양식을 학습해.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낯빛을 바꾸는데 일조했어요. 만유인 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지구를 떠넘긴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럼으로써 당신은 지구의 종말 따위에 절망하지 않았어요.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 속에서 ‘달다’의 반대말을 고민하지도 않았죠. ‘사과’의 ‘맛’에 대 해 사유하는 당신은 당신의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종족이에요.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해성사 는 오직 벌레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과를 주 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모릅니다. 그는 식탁 에 둘러앉은 동거인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먹은 그는 반으로 쪼개 집니다. 그 속에 그의 사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턱선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 당선소감
살지 않을 집에 대하여
자신이 살지 않을 집을 짓는다면 고민거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거나 남으로 난 창문이 없거나 심지어 대들보가 없어도, ‘집’이라고 발음되는 무언가가 세워질 테니까. 그래, 그냥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무언가는 모래사장 위에 세우자. 한라산 꼭대기에 한라산보다 더 높은 높이로 지어보자. 대머리 독수리의 우스꽝스러운 이마 위에 공기보다 가볍게 쌓아보자. 내가 살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살지만 않는다 면, 누구나 이 소심하고 게으른 건축업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
그런데 이 부실한 오두막에 내가 살아야만 한대, 잠을 깨면 누군가 내 옆에 벌거벗고 코를 곤대, 그래서 ‘집’이라고 발음되던 것들이 진짜 집이 되어버린대. 아니, 집이 아니었던 것조차 자기가 집이라고 박박 우겨대잖아, 아니, 지금 넌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 거야.
살지도 못할 의미를 짓는데 고민 많이 했었다. 도무지 맞지 않는 단어를 끄집어내는데 많이 울었다. 거기 맑은 목소리의 옹벽과 축축한 눈동자의 창을 단 건 모두 내 잘못이었다. 당신의 머릿속에 제라늄 화분이 있는 비둘기 집을 지은 건 그나마 나의 자랑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거기, 머물러줘서 정말 고맙다.
그래요, 시는 영원한 스승님 김소연 선생님의 이름, 간지 형님 경주형의 이름, 이것저것 공법을 전수해주신 김태용 선생님의 이름, 멋쟁이 신사 경욱 선생님의 이름, 자꾸 집나가는 자식 잘 보살펴주신 부모님 이름, 내 사랑하는 애인 수현의 이름,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학우들과 시창작 동아리 <不詩>의 이름,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이름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나, 또, 사랑스런 당신, 뜻 모를 당신들의 이름, 아름.
□ 심사평
시의 새로운 자기개성
김 종 해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가 끝나서 그런지 그 쪽으로 투고했던 시인 지망생들이 다시 《시인세계》 쪽으로 관심을 가진 탓인지 《시인세계》의 신인 응모가 훨씬 늘어나 총 응모자도 2백 명을 넘고 응모 작품수도 2500여 편을 넘는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넘어온 응모자가 24명. 그 가운데 뽑힌 당선자의 시편들은 매우 낯설고 색다른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기혁의 당선작 「사춘기의 아침」은 라이브 단막 무대 혹은 영화 시나리오 대본을 보는 듯한 화자의 의식 분열과 욕망을 그리고 있다. 시로서 새로운 자기 개성을 선보이는 장점이 있다. 간결한 문체가 그려내는 등장인물과 등장하는 가족들 속에서 화자인 <나>는 ‘독이 든 저녁’과 ‘안개’ 속에 방황하고 있다. 원숙하고 매끈한 시의 성취보다 다소 거칠어도 이 신인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시의 발상과 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인의 변모와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당선자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했던 「천사금렵구」(외 9편)의 강민정, 「인턴」(외 9편)의 김영진, 「서른 즈음」(외 9편)의 황시와, 「헛스윙」(외 9편)의 박은영 이상 네 분의 역량은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다만 함께 투고했던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박은영의 시 「헛스윙」은 사람의 한 생애를 절체절명의 야구 상황에 압축, 비유해 놓은 뛰어난 시다. 아깝다는 말 남겨둔다.
도발적인 상상력에 무게
신 달 자
누적되어 있는 예비시인들이 세상의 힘으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이번 응모 작품이 많았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시인세계》의 미래를 앞당겨 볼 수 있는 에너지라고도 생각했었다. 어려운 시대에 시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에 영광 있으라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하긴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될 것이다. 집요하게 즐겁게 읽기를 끝내고 심사위원들 앞에는 세 작품이 놓여 있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생각 같아서는 셋 다 시인의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박 은영의 「원풀빨래방」 외 9편, 황시와의 「멧돼지가 온다」 외 9편, 기혁의 「동대문 운동장」 외 9편이었다. 어느 하나가 약하다고 얼른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박은영은 시 쓰는 일에 적잖은 세월이 느껴지므로 원고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능숙한 솜씨가 주는 신선함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황시와는 시인의 피가 느껴진다. 그러므로 무게의 차이가 가늠할 수 없이 미약하므로 어느 것에 기울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련됨과 무난함과 도발적인 상상력 중에서 가능성에 손을 들어 주었다. 박은영은 무엇보다 능숙하고 솜씨가 탁월했지만 상상력의 탄력성에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러나 「헛스윙」 「명태」는 아까웠다. 황시와는 시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세련됨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지 못하다는 데 동의했고 그러나 「서른 즈음」은 진심으로 아까웠다. 기혁은 당돌하고 도발적이서 감정 정돈이 문제였지만 결국 기혁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리고 하나의 시인을 탄생시켰다.
시인이 아니면 나도 아니다라는 젊은 패기로 당당히 미래의 시인으로 활약을 기대해 본다.
낯선 발화법, 발상의 참신성
장 석 주
예심을 거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스물네 분의 시들이다. 다른 때보다 그 양이 두 배라는데, 그만큼 응모작이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스물네 분의 시들을 다 읽고 난 뒤 첫 느낌은 간이 센 음식을 포식한 듯했다. 혀가 얼얼해서 섬세하게 미각을 즐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말이 많고, 강한 표현들이 득세하는가? 저마다 진술하려는 욕망은 강하고, 표현의 수위는 높은데, 각 응모자들 사이의 변별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개성이 강한 시는 많지 않았다. 체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들어있는 시들, 담담하면서도 감미로운 시들, 그리고 시적 고요에 그윽하게 가 닿은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최종심으로 올려진 작품은 강민정의 「천사금렵구」 외 9편, 김영진의 「인턴」 외 9편, 황시와의 「멧돼지가 온다」 외 9편, 박은영의 「원풀빨래방」 외 9편, 기혁의 「동대문운동장」 외 9편이었다. 먼저 강민정과 김영진의 시들은 시적 사유의 숙련성은 엿보이지만 익숙한 서정성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감점을 받았다. 사적인 감상의 노출, 소재를 장악하는 힘의 미약성, 자기만의 ‘관점’이 미흡함도 지적되었다. 본인들을 위해서도 조금 더 숙련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은 세 분의 시들은 장점과 단점들을 함께 갖고 있어 어느 한 분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공동 당선을 내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결국은 한 분을 고르기로 했다. 세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심사가 길어졌다. 박은영과 황시와는 당장 시단에 내놓아도 주목받을 만한 시인들이다! 박은영의 「헛스윙」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삼진, 기습 번트와 볼넷, 데드볼, 2할이 되지 않는 날들, 9회말 2사 주자 만루,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직구 뒤 변화구 등 야구에서 건져낸 삶의 은유들이 통렬하고 날것으로 싱싱했다. 황시와의 「서른 즈음」 「옆구리의 일」 「산양」 등이 도달한 시적 성취도 드높았다. 현실에 대한 어둡지만 따뜻한 통찰, 사유와 감각의 평형성, 그리고 표현의 완숙미 등이 돋보였다. 기혁의 「사춘기 아침」 「비닐의 기원」 「네번째 사과」등은 상대적으로 낯선 발화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참신하긴 하지만 수사修辭는 서걱거렸고, 재능은 균질하지 않았다. 앞서의 두 응모자에 비해 다소 불안정한 재능이라는 점에서 선뜻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허나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 끝에 완숙미보다는 삶과 세계에 대한 들뜨지 않은 이지적 통어력, 발상의 참신성,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기혁을 당선자로 밀기로 합의했다.
어떤 장르에는 대사가 없다 ‘얘기하는 사람 1’과 ‘지나가는 사람 2’는 수군거림으로 명백해진다 주인공 B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비둘기 몇 마리가 방치되었다 대사와는 무관하지만 그들도 목적이 있었다 잡지를 접은 두 손이 비슷한 뉘앙스로 포켓에 들어간다 잠복한 형사들의 수만큼 일상에서 가족을 만난다 그런 날이면 이유 없이 녹차가 썼고 두고 온 가방을 찾기 위해 지난 밤을 뒤졌다 스카치테이프로 개미를 잡는 엄마와 죽은 개미의 수만큼 악몽이 발견되곤 했다 개종한 다음날에도 신발에 껌이 붙는 이유를 젖꽃판에 털이 자라는 것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의 속옷이 청바지에 물들고 물 바진 청바지에 핑크색 얼룩이 남아도 햇살은 처음부터 색깔만 말려 주었다 주인공 B가 떠나가는 플랫폼에 장르에 없던 도둑고양이가 들어온다 도둑고양이를 발로 차는 누군가 C에게 고함을 지른다 ‘아버지 1’이 울렁거림으로 희미해진다 식탁에 올릴 생선대가리 속으로 독이 든 저녁을 넣고 싶었다 무심코 껴안은 사람들과 지하철마다 부딪치는 그들의 성기가 두 눈을 예외로 만든다 나는 안개, 안개 같았다
두 단어의 세계
에베레스트경이 초모랑마*를 발견한 뒤에도 늘어난 건 몇 방울의 잉크 핼리혜성이나 B612가 발견된 다음에도 몇 가지 수학공식이 늘어났을 뿐 노트 정리를 잘하면 곳곳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름 붙이지 못한 구십 퍼센트 바다생물도 약간의 여백이면 충분해 ‘모든’이라는 단어가 미래를 예언하고 조물주처럼 보살펴주고 있기에. 몇 번씩 전쟁을 치렀지만 지우개가루엔 흔적이 남지 않는다. 반듯하게 접으면 작고 가벼워 죽은 친구의 이름이나 낯선 전화번호 따위가 적혀 있는 지구 가끔씩 글자를 혼동한 사람들은 바람과 지하철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이유 없이 울다가, 웃기도 한다. ‘우리’라는 단어가 처음 발견되던 날, 외계인이 쓴 방명록 같았다는 아르디**의 소감 그녀의 노트엔 보탤 수 없는 유머가 있다.
* Chomolungma, 영국 측량기사들이 들어오기 전부터 에베레스트를 부르던 이름. **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라는 학명이 붙은 이 화석은 440만년 전 인류로 추정되고 있다. 최고(最古)의 인류로 알려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루시)’보다 120만 년 정도 앞선다. 미국 《사이언스》지 선정 ‘올해의 10대 과학적 성과’ 1위.
비닐의 기원
검정비닐을 들어 올린 바람은 자신의 손가락만 사용하려 들었어요 어린 가축의 혓바닥이나 토막난 고등어 따위가 담겨 있던 검정비닐이 에요 가슴을 받치고 손잡이 없는 주둥이를 벌리면 제 것 같은 핏물이 흘 러요
온몸이 찢겨져도 담지 못할 내용은 없었죠 계단을 오르고 새떼를 오 르고 자주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던 검정비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검정비닐이 묵직해졌어요 바람은 몰랐죠, 바스락거리는 목젖이 돋아날 줄은 사소한 시빗거릴 주워 담을 줄 말이에요 인류학자들의 논쟁거릴 삼켜버렸어요 언어를 통째로 씹어 침묵만 내뱉기도 했구요
검정비닐이 두려워요, 사람들은 호주머니 가득 목소릴 숨기거나 깊 은 밤 고함을 지르고 도망 다녔어요 자신의 메아리에 놀라서 긍정도 부 정도 아닌 신음을 낸 적도 많았죠 검정비닐을 들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 밤에는 사나운 풍문이 떼지어 몰려왔답니다 모국어와 전화기를 의심하다 눈짓과 몸짓이 뒤섞인 당신의 홍당무에도 바람이 들지 몰라 요
저기 검정비닐을 든 엄마가 두 다리로 걸어오네요 비닐을 벗고 심호 흡하고 있어요 유대인이나 말갈족의 표정도 지을 수 있군요 허공에 허 파를 만들고 속을 드러낼 시간이에요
네 번째 사과
이곳에서 너는 사적인 공간이야. 나의 이빨과 혓바닥이 머물다 간 싸 구려 호텔이야. 식욕과 성욕이 동시에 교차하는 혼숙을 허락하는 거실 이야. 붉은색 하드커버를 가진 너는 포르노그래피를 떠올리게 하지. 가 장 은밀한 부위에는 신화를 숨기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나는 고전적 성 교양식을 학습해.
이곳의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낯빛을 바꾸는데 일조했어요. 만유인 력의 법칙은 당신에게 지구를 떠넘긴 최초의 사건이었죠. 그럼으로써 당신은 지구의 종말 따위에 절망하지 않았어요.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 속에서 ‘달다’의 반대말을 고민하지도 않았죠. ‘사과’의 ‘맛’에 대 해 사유하는 당신은 당신의 사진으로부터 가장 먼 종족이에요.
그러나 신앙을 가질 수 없는 그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해성사 는 오직 벌레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입니다. 아무도 그와 같은 사과를 주 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를 모릅니다. 그는 식탁 에 둘러앉은 동거인입니다. 그에게 사과를 받아먹은 그는 반으로 쪼개 집니다. 그 속에 그의 사적인 공간이 열리고 있습니다.
턱선
서로 다른 골격을 가진 해안선
푸른 말들이 쏟아내는 거품 속에서 뒤틀린 혀의 관절을 기억해
허술한 두개골을 받치고 있던 두 손 썰물이 두고 간 파도소리에 기대고 있어
낯선 백사장을 따라 몇 바퀴 귓바퀴를 돌아보면 원점에 가깝게 중심이 멀어져 있지
구명조끼 같은 입술을 붙들고 표류하는 삐걱거리는 침묵은 아직 스스로 가라앉는 법을 몰라요,
너의 해안가, 허공의 난파선 한 척 커튼을 열고 흘러내린 그곳엔
가슴 밑바닥까지 이어진 물길이 열리죠 몸통 없는 지느러미만 파닥거리죠
붉은 방 갯벌이 깊어지는 계단 하얀 방파제로 버텨온 이빨 시려와
□ 당선소감
살지 않을 집에 대하여
자신이 살지 않을 집을 짓는다면 고민거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바닥이 평평하지 않거나 남으로 난 창문이 없거나 심지어 대들보가 없어도, ‘집’이라고 발음되는 무언가가 세워질 테니까. 그래, 그냥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무언가는 모래사장 위에 세우자. 한라산 꼭대기에 한라산보다 더 높은 높이로 지어보자. 대머리 독수리의 우스꽝스러운 이마 위에 공기보다 가볍게 쌓아보자. 내가 살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살지만 않는다 면, 누구나 이 소심하고 게으른 건축업자의 길로 들어설 수 있으리.
그런데 이 부실한 오두막에 내가 살아야만 한대, 잠을 깨면 누군가 내 옆에 벌거벗고 코를 곤대, 그래서 ‘집’이라고 발음되던 것들이 진짜 집이 되어버린대. 아니, 집이 아니었던 것조차 자기가 집이라고 박박 우겨대잖아, 아니, 지금 넌 무슨 변명을 늘어놓는 거야.
살지도 못할 의미를 짓는데 고민 많이 했었다. 도무지 맞지 않는 단어를 끄집어내는데 많이 울었다. 거기 맑은 목소리의 옹벽과 축축한 눈동자의 창을 단 건 모두 내 잘못이었다. 당신의 머릿속에 제라늄 화분이 있는 비둘기 집을 지은 건 그나마 나의 자랑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래 거기, 머물러줘서 정말 고맙다.
그래요, 시는 영원한 스승님 김소연 선생님의 이름, 간지 형님 경주형의 이름, 이것저것 공법을 전수해주신 김태용 선생님의 이름, 멋쟁이 신사 경욱 선생님의 이름, 자꾸 집나가는 자식 잘 보살펴주신 부모님 이름, 내 사랑하는 애인 수현의 이름,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학우들과 시창작 동아리 <不詩>의 이름,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이름 그리고 가장 부끄러운 나, 또, 사랑스런 당신, 뜻 모를 당신들의 이름, 아름.
□ 심사평
시의 새로운 자기개성
김 종 해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가 끝나서 그런지 그 쪽으로 투고했던 시인 지망생들이 다시 《시인세계》 쪽으로 관심을 가진 탓인지 《시인세계》의 신인 응모가 훨씬 늘어나 총 응모자도 2백 명을 넘고 응모 작품수도 2500여 편을 넘는다. 예심을 거쳐 최종심으로 넘어온 응모자가 24명. 그 가운데 뽑힌 당선자의 시편들은 매우 낯설고 색다른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기혁의 당선작 「사춘기의 아침」은 라이브 단막 무대 혹은 영화 시나리오 대본을 보는 듯한 화자의 의식 분열과 욕망을 그리고 있다. 시로서 새로운 자기 개성을 선보이는 장점이 있다. 간결한 문체가 그려내는 등장인물과 등장하는 가족들 속에서 화자인 <나>는 ‘독이 든 저녁’과 ‘안개’ 속에 방황하고 있다. 원숙하고 매끈한 시의 성취보다 다소 거칠어도 이 신인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시의 발상과 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인의 변모와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당선자로 뽑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경합했던 「천사금렵구」(외 9편)의 강민정, 「인턴」(외 9편)의 김영진, 「서른 즈음」(외 9편)의 황시와, 「헛스윙」(외 9편)의 박은영 이상 네 분의 역량은 당선작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다만 함께 투고했던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고르지 못했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특히 박은영의 시 「헛스윙」은 사람의 한 생애를 절체절명의 야구 상황에 압축, 비유해 놓은 뛰어난 시다. 아깝다는 말 남겨둔다.
도발적인 상상력에 무게
신 달 자
누적되어 있는 예비시인들이 세상의 힘으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정도로 이번 응모 작품이 많았다. 그것은 기분 좋은 일이고 《시인세계》의 미래를 앞당겨 볼 수 있는 에너지라고도 생각했었다. 어려운 시대에 시에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들에 영광 있으라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하긴 하지만 결국 한 사람의 시인이 탄생될 것이다. 집요하게 즐겁게 읽기를 끝내고 심사위원들 앞에는 세 작품이 놓여 있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생각 같아서는 셋 다 시인의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다. 박 은영의 「원풀빨래방」 외 9편, 황시와의 「멧돼지가 온다」 외 9편, 기혁의 「동대문 운동장」 외 9편이었다. 어느 하나가 약하다고 얼른 놓아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박은영은 시 쓰는 일에 적잖은 세월이 느껴지므로 원고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지만 능숙한 솜씨가 주는 신선함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황시와는 시인의 피가 느껴진다. 그러므로 무게의 차이가 가늠할 수 없이 미약하므로 어느 것에 기울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세련됨과 무난함과 도발적인 상상력 중에서 가능성에 손을 들어 주었다. 박은영은 무엇보다 능숙하고 솜씨가 탁월했지만 상상력의 탄력성에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었고 그러나 「헛스윙」 「명태」는 아까웠다. 황시와는 시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세련됨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지 못하다는 데 동의했고 그러나 「서른 즈음」은 진심으로 아까웠다. 기혁은 당돌하고 도발적이서 감정 정돈이 문제였지만 결국 기혁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리고 하나의 시인을 탄생시켰다.
시인이 아니면 나도 아니다라는 젊은 패기로 당당히 미래의 시인으로 활약을 기대해 본다.
낯선 발화법, 발상의 참신성
장 석 주
예심을 거처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스물네 분의 시들이다. 다른 때보다 그 양이 두 배라는데, 그만큼 응모작이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스물네 분의 시들을 다 읽고 난 뒤 첫 느낌은 간이 센 음식을 포식한 듯했다. 혀가 얼얼해서 섬세하게 미각을 즐길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말이 많고, 강한 표현들이 득세하는가? 저마다 진술하려는 욕망은 강하고, 표현의 수위는 높은데, 각 응모자들 사이의 변별성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개성이 강한 시는 많지 않았다. 체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들어있는 시들, 담담하면서도 감미로운 시들, 그리고 시적 고요에 그윽하게 가 닿은 작품은 찾기 어려웠다.
최종심으로 올려진 작품은 강민정의 「천사금렵구」 외 9편, 김영진의 「인턴」 외 9편, 황시와의 「멧돼지가 온다」 외 9편, 박은영의 「원풀빨래방」 외 9편, 기혁의 「동대문운동장」 외 9편이었다. 먼저 강민정과 김영진의 시들은 시적 사유의 숙련성은 엿보이지만 익숙한 서정성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감점을 받았다. 사적인 감상의 노출, 소재를 장악하는 힘의 미약성, 자기만의 ‘관점’이 미흡함도 지적되었다. 본인들을 위해서도 조금 더 숙련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은 세 분의 시들은 장점과 단점들을 함께 갖고 있어 어느 한 분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공동 당선을 내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결국은 한 분을 고르기로 했다. 세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심사가 길어졌다. 박은영과 황시와는 당장 시단에 내놓아도 주목받을 만한 시인들이다! 박은영의 「헛스윙」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삼진, 기습 번트와 볼넷, 데드볼, 2할이 되지 않는 날들, 9회말 2사 주자 만루,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 직구 뒤 변화구 등 야구에서 건져낸 삶의 은유들이 통렬하고 날것으로 싱싱했다. 황시와의 「서른 즈음」 「옆구리의 일」 「산양」 등이 도달한 시적 성취도 드높았다. 현실에 대한 어둡지만 따뜻한 통찰, 사유와 감각의 평형성, 그리고 표현의 완숙미 등이 돋보였다. 기혁의 「사춘기 아침」 「비닐의 기원」 「네번째 사과」등은 상대적으로 낯선 발화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참신하긴 하지만 수사修辭는 서걱거렸고, 재능은 균질하지 않았다. 앞서의 두 응모자에 비해 다소 불안정한 재능이라는 점에서 선뜻 당선작으로 밀기에는 망설임이 있었다. 허나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 끝에 완숙미보다는 삶과 세계에 대한 들뜨지 않은 이지적 통어력, 발상의 참신성,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기혁을 당선자로 밀기로 합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