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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네팔 여행기 2013년 1월 7일 - 1월 25일
여행 떠나기 전
오래 전부터 계획 되어 있었던 일이고 준비도 했었지만 막상 떠나려니 여러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도 생기고, 큰 시험을 앞둔 것처럼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된다.
2012년 12월 27일 아버지께서 큰 수술을 받고 항암제 복용으로 식욕을 잃어 음식물 섭취량이 적어지니 배변에 곤란이 생겨 급기야 토요일(1월 5일)에는 응급실까지 가셨는데, 일요일(1월 6일) 드디어 화장실에 다녀오셨다고 대한민국 만세란다. 아들이 여행 떠나기 전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노력 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여행을 많이 격려하셨다. 특별한 사람들이나 가는 줄 알았던 히말라야 여행을 아들이 간다고 기뻐도 하셨다. 그 나이에 배낭여행을 같이 갈 수 있는 친구와 체력 여러 가지 여건을 가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면서....
아버지 수술하고 병원에 계신 6일 동안 시간이 많은 내가 병간호를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먼 길 떠나는 형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고 똑 같이 2일 씩 야간 당직을 서 준 동생들에게도 고마웠다.
여행 떠난 다음날 1월 8일이 할머니 제사인데 여기 일은 이곳 사람들에게 맡기고 마음 편히 다녀오라고 하는 애 엄마와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로 바빴던 큰아들이 내 역할을 대신 해준다고 내려와 고맙고, 매일 책을 읽어 주어야 잠이 드는 막내아들도 많이 섭섭해 했지만 잘 다녀오란다. 자기 일도 바쁠 텐데 멀리서 아버지 여행을 격려 해준 딸도 고마웠다. 여행 떠나는 걸 알고 있는 지인(知人) 들도 부러워도 하면서 마음 써 주었다.
여행 구성원
고등학교 8년 선배님으로 학교에서 수학과 기술을 가르치시고, 축구를 40여 년간 하셔서 순간 판단력과 셈이 빠른 선배님은 여행 중 어른 역할을 잘 해 주셨다.
같은 동네 초 중학교 1년 선배로 고등학교 1년 재수해 같이 학교를 다닌 원중 선배는 이 여행의 모든 기획과 회계를 맡았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인 동표는 증권회사에서 평생 분석을 했었고 다양한 사회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여행 중 순간순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평가를 내렸다.
나는 통역과 책에서 읽은 문화 역사 해설을 간간히 곁들였다.
2013년 1월 7일 월요일 호된 신고식
인도는 면적이 대한민국의 33배, 인구는 12억 명(2011년 추정치)이며 공용어는 영어와 힌디어를 포함해 약 15개의 언어가 인정되고, 언어는 북방계열인 인도-아리안계와 남방계열인 드라비언계로 나뉜다고 한다. 그래서 남, 북인도 사람이 만나면 영어로 대화하는 일이 다반사인 넓고 다양한 문화를 가진 나라라고 한다.
델리는 인도 공화국 수도로 야무나 강 서안에 있고 올드 델리와 뉴 델리로 구분되며, 이곳이 정치 군사의 중심이 된 것은 이슬람 기 델리 왕조시대(1206~1526) 부터이고 남, 북 물류이동의 중심지라 한다. 올드 델리가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경제 중심지인 반면에, 뉴델리에는 행정관청이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아침 8시 50분 선사 유적지에서 버스를 타고 인천 공항에 도착해, 14시 15분 비행기를 타고 홍콩을 경유해 11시간 만에 델리에 도착했다. -3시간 30분 시차가 있어 현지 시간 21시 10분 쯤 도착해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늦은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Pre-paid 택시(바가지요금을 방지하기 위해 미리 선금을 공항 사무실에서 내고 목적지에 도착해 영수증을 주는 제도)나 공신력 있는 Mega 택시를 탔어야 했는데 4명이나 되는 인원을 믿고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를 탔다. 기온은 영상 12도 한국에 비해 춥지는 않지만 택시를 타고 델리 시가지로 들어가는데 매연으로 공기가 탁함이 느껴졌다. 한 참을 가다가 택시가 고장 났다고, 다른 택시를 이용하라고 한다. 새로 온 택시 운전사는 처음에는 아무 문제없이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고 하면서 슬슬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도에서는 범죄 행위가 많으니 늦은 밤 다니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목적지인 나마스까 호텔을 잘 모르겠으니 Information center로가 안내를 받자고 한다. 폐허로 보이는 건물들을 지나 허름한 Information center 간판이 붙어 있는 사무실에서 전화를 거는 척 하면서 델리가 축제 기간이라 그 호텔은 만원이고 자기들이 안내하는 호텔로 가란다. 이놈들에게 말리고 있다는 난감한 생각이 들면서, 오래 말을 섞어 봐야 유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에 우리가 알아서 갈 테니 빠하르 간지(델리 기차역 주변) 근처에 데려다 주면 된다고 했다. 일행이 4명이나 되어서 그렇지, 우리가 1-2명이면 상당히 어려웠을 상황 같았다. 하여간 협잡꾼들 소굴을 벗어나 시내 중심지로 들어 왔다. 시간이 지체 되다 보니 간신히 찾아간 숙소마다 터무니없는 숙박비를 불러 댄다.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데 한국인 단체 손님을 데리고 온 인솔자로 보이는 사람이 오늘은 별 수 없고 내일 제대로 된 숙소를 잡으라 한다. 바가지 톡톡히 쓰고 4명이 한 방 쓰는 뜨거운 물도 안 나오는 허름한 숙소를 잡고 시간을 보니 현지 시간 1시가 넘었다. 한국시간은 새벽 4시 30분이 넘는 시간이다. 집 떠나 무슨 개고생인가 후회가 밀려 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협잡꾼들이 소개하는 곳에 따라가면 거의 감금상태에서 가진 돈 다 떨어질 때 까지 고생을 한다고 한다. 늦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면 그냥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에 출발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한다.
2013년 1월 8일 화요일 하루 만에 용이 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숙소부터 옮겼다. 어제는 가격 결정권이 우리에게 없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값도 흥정하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지도 확인하고 숙소를 골랐다. 방 한 개에 1200루피(한국돈 24,000원)를 주고 두 개의 방을 어제와 같은 값에 훨씬 깨끗하고 시설도 좋은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타지마할을 구경하기 위해 델리에서 240km 떨어진 아고라 기차표를 예매하러 갔다. 어제는 폐허로 보였는데 상점 문을 여니 사람들이 엄청 나게 많았다. 쓰레기도 많고 소들도 어슬렁어슬렁 거리를 지나다니는 델리 기차역을 찾아 갔다. 두리번거리며 기차역을 찾고 있자니, 썬 글라스도 쓰고 멀쩡하게 차려 입은 놈이 외국인 예매 창구가 공사 관계로 문을 닫았으므로 자기가 안내를 해주겠다고 한다. 책에 나와 있는 대로 또 사기를 치려는 놈들이다. 어제 한 번이면 충분했다. 우리는 이놈들을 무시하고 목적지를 찾아갔다. 중국 배낭여행을 다녔던 선배가 중국에서는 이러지 않았는데 인도에서는 Team play(협동작전)로 사기를 치려 한다고 혀를 내둘렀다. 4명이 왕복 2466루피, 개인 편도 300루피( 한국돈 6000원)인데 고급기차라고 한다. 현지인들은 같은 거리를 67루피 정도인 기차를 이용하는데 영화에서 보던 6.25 한국 전쟁 때 피란민들이 타는 열차가 상상될 정도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예매를 마치고 인도 방랑기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980루피(한국 돈 19,600원) 주고 한국 음식을 먹었다.
붉은 성(Red Fort)
오후에는 Red Port를 구경하기 위해 지하철을 이용했다. 줄이 엄청나게 길었고 무장한 군인들이 보였다. 인도 지하철은 굉장히 잘 돼 있고 비용도 싸다. 목적지에 도착해 싸이클 릭쌰(사람이 페달을 이용해 움직이는 차)를 탔다. 평균 70kg이 넘으니 300kg이 넘는 우리 4명을 끙끙거리며 끌고 가는데 내려서 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미안한 마음에 값도 후하게 주고 목적지인 붉은 성에 도착했다. Red Fort는 타지마할을 건축한 무굴의 황제이자 건축광이었던 샤 자한(Shah Jahan)이 1639~1648년에 만들었다고 하는데 사암성(砂巖城)으로 크기가 무지무지했다. 무굴시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성들처럼 궁전이자 전투요새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1857~1859년에 발발한 1차 인도 독립 전쟁(세포이 항쟁)때 영국군은 무굴의 모든 상징을 끊어 놓으려는 듯 성에 엄청난 포격을 가해 상당 부분 파괴했으나, 인도 최초의 수상 네루가 1948년 성을 복원하고 인도의 독립을 만천하에 공표했다는 역사가 있다고 한다.
찬드니 촉(Chandni Chowk)
붉은 성과 마주보고 있는 대로인 챤드니 촉은 올드 델리(Old Delhi)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중 하나로 금은 장신구등을 팔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시장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유명하다는 라씨(유명한 인도 발효 유제품)만 한 잔 씩 맛있게 먹었다.
코넛 플레이스(Connaught Place)
1931년 계획되어 만들어진 델리 최대의 상업 및 비즈니스 거리라 한다. 겹으로 이루어진 원형 건물군은 마치 그리스의 신전과도 같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건물군의 한가운데에는 Central Park이 있어 쇼핑, 비즈니스, 휴식의 삼박자를 모두 해결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고 한다.
챤드니 촉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코넛 플레이스로 이동해 우리는 시내 중심지와 정원을 구경하고, 남부 인도 전문점이라는 고급 호텔 식당에서 1175루피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는데 가격에 비해 훌륭한 음식이었다.
2013년 1월 9일 수요일 아!!! 타지마할과 아고라 유적지 구경
새벽 6시 아고라행 기차를 타야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눈을 떠 보니 새벽 2시 너무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한국시간으로 5시 30분 원래 일어나는 시간이다. 같은 방을 쓰는 동표 역시 새벽잠이 없다고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는데 다양한 종교 방송과 영화를 방송하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뜨거운 물을 끓여 비상전투 식량으로 아침을 먹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6시부터 기차를 타고 가는데 어둠이 걷히고 창밖으로 끝없는 밀밭이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은 짐바브웨에서 연수를 온 체육 선생님들이라고 한다. 붙임성 좋은 8년 선배님은 짐바브웨로 초청을 받아 주소를 교환한다. 그리고 고급 열차라 아침 식사로 짜이(뜨거운 우유에 홍차를 탄 인도 대표 음료)와 빵을 제공한다. 아고라에 도착하니 호객행위를 하는 택시기사들이 몰려 왔다. 이제 우리도 요령이 생겼다. 기차역에서 걸어 나올수록 차비는 내려갔다. 이번에는 오토 릭쌰다. 오토바이 엔진에다 창문이 없는 차다. 타지마할 남문에 도착하니 현지인은 5루피인데 외국인은 750루피란다. 값은 비싸더라도 타지마할은 구경해야 했다.
입구에서 소지품 검사가 철저했다. 인화물질인 라이터와 전자 제품 같은 것은 안 된다고 한다. 입구를 통과해 보니 책에서 보던 타지마할이 보였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인품이 훌륭해 보이는 잘 생긴 중년 신사가 이곳저곳을 안내하며 사진을 찍어준 후 600루피를 주면 행복해 하겠다고 한다. 인정상 150루피를 주며 수업료를 또 한 번 지불했다. 이제부터는 내가 원해서 말 걸기 전에 다가오는 놈들은 무시하기 작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은 인도 북부 아그라 교외에 가로 300m, 세로 580m의 부지에 세워졌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황제 샤 자한(Shah Janhan)이 왕비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을 위해 세운 ‘무덤 궁전’이다. 타지마할은 ‘마할의 왕관’이란 뜻으로, 샤자한은 17년의 결혼 기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5번째의 아이를 낳으려다 1629년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을 추모해 만들었다.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타지마할 정문은 붉은 사암과 대리석으로 지어졌으며 정문 지붕에는 정면, 후면 각 11개씩의 흰색 돔 22개가 있다는데, 22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정문을 지나면 높이 65m, 한 변의 길이 94m인 흰색 대리석 건물인 타지마할이 나타난다. 지붕에는 높이 26m, 지름이 18m인 커다란 둥근 돔이 올려 있어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더한다. 건물 주변에는 39m 높이의 4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있다.
순백의 대리석은 태양의 각도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빛깔을 달리하며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고, 웅장한 건물은 중압감은커녕 오히려 공중에 떠있는 듯 신비롭다고 한다. 건물과 입구의 수로 및 정원의 완벽한 좌우대칭은 균형미와 정갈함을 느끼게 한다. 순백의 대리석과 거기에 새겨진 꽃과 잎 문양은 화려하기 그지없는데, 설계는 이란 출신의 천재 건축가 우스타드 이샤가 맡았다는데, 자신의 건축적 영감을 실현하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는 물론 중국에서까지 장인을 불려 들여 이 건축물을 만드느라 국고를 탕진했다고 한다. 결국 말기에 장남에게 왕권을 양위하려던 샤 자한은 3남인 아우랑제브에 의해 쫓겨났고, 타지마할에서 약 2㎞ 떨어진 아그라 포트에 갇히게 된다. 또한 타지마할 내 외벽을 감싸고 있는 대부분의 문양들은 식물과 꽃인데, 유일신을 믿는 이슬람의 특성상 움직이는 동물이나 신상들은 모두 우상으로 취급되어 금지되기 때문에 꽃문양이 발달 되었다고 한다. 인도 이슬람 예술의 걸작 타지마할은 그야말로 완벽한 대칭, 돔과 아치가 보여 주는 완벽한 곡선미, 대리석에 꽃 등의 문양을 판 뒤 그 홈에 석류석과 옥, 사파이어, 자수정, 산호, 비취 등 화려한 보석을 박아 넣는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 등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지만, 변변한 도구 없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일을 했을 도공들의 고단함이 짐작되었다.
아그라 성(Agara Fort)
아그라성은 성벽의 높이가 20m, 폭은 2.5km가 넘는다고 하는데, 무굴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Akbar)가 이처럼 거대한 규모의 군사적인 요새로 지었으며 이후 5대황제이자 건축광인 샤 자한이 아그라 궁으로 변모시켰다고 한다. 타지마할의 북서쪽, 야무나(Yamuna)강을 따라 이중으로 지어진 높은 성벽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다운 궁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아그라성의 이름을 따온 무굴 황제 악바르는 아쇼카 황제와 더불어 인도 역사상 둘밖에 안 되는 '대제'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인물이다. 악바르 황제는 13세에 왕위에 올라 군사적인 정복전쟁에서도 능해 인도의 영토를 넓혔지만 그가 진정한 대제로써의 칭호를 받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은 바로 그의 포용정책이었다. 다른 종교에 비해 약간은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힌두교, 불교를 포함한 당시 인도내의 모든 종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의 당대에 시크교의 성지인 암리차르가 건설되었다는 것은 이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의 증손자격인 아우랑제브의 편협성과 비교하면 악바르의 업적은 더욱더 빛을 발하는데, 그는 회교도 교리상 인정되지 않았던 우상에 대한 조각(왕성의 기둥에 코끼리를 조각)을 한 것이다. 이처럼 악바르의 체취가 강하게 남아있는 아그라 성은 샤자한 시대에 와서 한층 더 증축이 되는데, 특히나 건축적 감각이 남달랐던 샤 자한에 의해 아그라 성은 더욱더 화려해졌다고 한다. 비록 악바르 대제가 아그라를 건설하였지만 그 시대의 건축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의 손자인 건축광 샤 자한이 악바르 시대의 많은 건물을 개축, 증축했기 때문이란다.
이티마드 우드 다올라(Itimad-ud-daula) 베이비 타지마할
환락에 탐닉한 무굴의 4대 제항기르 대신 정무를 처리하고 권력을 휘둘렀던 황제의 장인 미르자 기야스 벡(Mirza Ghiyas Beg)의 무덤으로 타지마할이 생기기 전 까지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고 한다. 최초로 피에트라 두라 기법을 사용한 건물로 건축사적 의미도 높은 편이라고 한다.
아침 일찍 서둘렀기 때문에 위의 3곳을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는다. 우리는 타지미할 옆으로 흐르는 야무나 강가를 걸어 보기로 했다. 강가로 가보니 낭만적인 곳이 아니었다. 보트를 타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피부병이 옮을까 겁났다. 강가의 마을도 가보았다. 땔감을 등짐 져 나르고 소똥을 말리는 여인들, 타지마할 성 보수를 위해 돌을 다듬고 소를 모는 남자들은 많이 빈곤해 보였다. 타지마할의 화려함 뒤의 초라함, 웅장함 뒤의 곤궁함,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같이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혼자 여행이었다면 이런 용기를 낼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텐데 4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더 이상 걷기도 힘들어 일찍 기차역으로 돌아와 델리행 기차가 있나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3시간을 기차역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무거운 가방을 3개나 짊어지고 한국 여대생이 들어 왔다. 인정 많은 원중 선배가 딸 가진 아버지 마음이 되어 도와주러 갔다. 우리와 똑 같이 델리로 간다고 기차도 같은 것으로 구입했다. 짐이 무거워 보여 도와준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해낸다고 하는 무척 다부지고 똘똘해 보이는 학생인데 서울교대 2학년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우리가 가려는 네팔부터 여행을 하고 왔단다. 히말라야 트래킹도 10여일 하고 여행을 한지가 한 달이 되어 이틀 후에 한국에 돌아간다고 하는데 비행기 값 포함해 2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여행 중이라고 했다. 델리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는 시간이었다. 어제 고생한 기억이 있어 숙소 잡는 것을 도와주었다. 다행이 싼 값에 방을 잡고 마땅한 식당이 없어 우리가 가지고 온 비상식량을 먹자고 했다. 비상전투식량은 우리가 먹기에도 상당한 량인데, 여학생은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트래킹 할 때 먹으려고 비축한 라면인데 집으로 돌아가니 먹을 일이 없다고 가져와 끓여 이것도 우리 좀 나누어 주고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고, 여분으로 만든 된장국까지 치운다. 한 끼 30루피(한국 돈 600원)짜리 현지 식사 먹고 다닌 표시가 역력히 드러났다. 딸 가진 부모 입장으로 내일 만나게 되면 저녁이나 사 주고 싶다고 했더니, 내일 같이 델리를 여행하자고 한다.
2013년 1월 10일 목요일 현지 적응과 델리 구경
책에는 현지 식사 잘못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해서 겁을 잔뜩 먹고 있었는데 당찬 여학생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시장으로 가보니 정말 30루피 식사를 팔고 있었다. 먹어 보니 그런대로 훌륭했다. 약속대로 10시에 여대생이 오고 택시를 한 대 대절해 시내 관광 명소를 돌기로 했다. 뒷좌석에 타도된다는 여학생을 앞자리에 태우고 덩치 큰 사람들이 4명 뒷좌석에서 고생을 좀 했다.
인도 대통령 궁에서 사진도 찍고, 데모 중이라 India gate는 구경을 못하고, 굽뚭 미나루, 바하이 사원 후마윤 무덤 등을 구경했다.
대통령궁(Rashtrapati Bhavan)
설계자는 에드윈 루티엔스 경으로 웅장함을 자랑하는 영국 고전주의 건물을 모티브로 무굴제국 스타일을 가미해 만들었다고 하는데, 택시 기사가 2분 만 시간을 준다고 하여 정신없이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인도문(Inda Gate)
인도문(India Gate)은 제1차 세계 대전에 참가하여 유명을 달리한 7만여 인도군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서 1921년에 영국인이 인도를 위하여 세워 준 문이라는데 여대성이 성폭행 당하고 사망한 사건 때문에 시위가 있다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꾸뜹 미나르 유적군(Qutab Minar Comolex)
쿠툽탑(Qutab Minar)
델리 술탄국의 첫 군주이자 노예왕조(Slave Dynasty, 조상이 터키계의 노예 출신)의 시조인 꾸뜹 웃 딘 에어백이 힌두제국을 제압하고 만든 쿠툽탑(Qutab Minar)은 높이가 72.5m에 이르고 붉은색 사암으로 겉이 단장된 이 승전탑은 각 층마다 베란다가 있는 5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아랫부분의 지름이 15m인 반면 정상 부위의 지름은 2.5m에 불과하다고 한다.
철기둥
이 철기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6줄의 글이 새겨져있는데, 그에 따르면 굽타왕조의 찬드라굽타 비크마디트야 왕(375~413)을 기리기 위해 비하르 주의 어느 비슈누 사원 밖에 세워졌던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5세기경 주조된 것이라 추정한다면 만든 지 1500년이 지났는데 이렇게 노출된 상태로 그동안 조금도 녹슬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란다. 현대 과학으로는 도저히 이런 주조기술을 밝혀 낼 수도, 따라 갈 수도 없다고 하니 문화유적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인도의 고대 과학기술을 상징한다고 한다.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at-ul-islam Mosque)
델리를 점령한 꾸뜹 웃 딘 에어백은 27개나 되는 힌두교 사원을 파괴한 후, 그 잔해를 모아 이 모스크를 지었다고 한다. 건설을 계획했던 왕이 암살되어 1층만 완성하고 미완으로 남아 있다.
꾸뜹 미나르 유적군의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를 타고 아래의 유적지로 향했다.
후마윤의 무덤(Humayun's Tomb)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이 무덤으로, 페르시아 출신 왕비 하지 베굼(Haji Begum)의 지시로 페르시아 건축의 기본틀을 창조적으로 변형하여 무굴양식이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바하이사원(Bahai Temple )
연꽃사원(Lotus Temple)로 알려진 바하이사원(Bahai Temple )은 인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사원으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종교로 기도를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와서 명상을 할 수 있도록 입장이 허용되며 사원 안에는 맨발로 들어가야 하고 내부에는 백색 대리석으로 된 의자가 원형극장처럼 설치되어 있는데 일단 이곳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침묵해야 한다. 바하이교는 '바하울라'란 사람이 창시한 이슬람교의 한 분파로 가장 근본 가르침은 전 인류의 형제화, 종교의 통일, 모든 국가의 통합을 주장하며 특히 여성과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한다.
건물은 40미터 이상의 높이에 27개의 거대한 연꽃잎 모양으로서 1986년에 설립되었으며 어느 사원이든지 9개의 면을 가지고 있는데 9라는 의미는 하나로 된 숫자 중 가장 큰 수가 9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뭉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긴단다.
점심은 택시 운전사가 안내해 준 Indian, Mughlie, Chinese 음식을 하는 Chimney Restaurant에서 싸고 맛있게 먹었다. 구경하는 도중 부산에서 6년간 일하고 돈도 모으고 한국에서 배운 기술로 자기 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었는지 망원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가진 멋있는 외투를 입고 있는 멋쟁이 스리랑카 신사도 만났다.
인도는 11세기부터 영향을 받은 이슬람 문화 때문인지 술 담배는 금지해서인지 술집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소란스러운 경제 중심지인 Old Deli와는 다르게 New deli는 고급 주택가와 관공서가 많이 눈에 보인다. 우리 택시 옆으로 1억 원이 넘는다는 포르쉐를 타고 가는 멋쟁이 할아버지가 보이는데 차번호도 5555이다. 인도는 이건희 회장보다 부자가 우리나라 인구 수 만큼 많고, 반대로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말 할 수 없이 비참한 생활 -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를 불구로 만들어 구걸을 쉽게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는 - 을 한다고 한다. 구걸하는 아이들을 보니 조직적인 앵벌이 교육을 받았는지, 거의 같은 행동을 보이고 애들을 업고 있는 여인들은 인신매매된 아이들이라는데 이것도 정들면 영업에 지장 있다고 6개월에 한 번씩 교대를 한다는 상상을 초월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보는 80%를 눈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눈이 어두워지니 여기에 맞추어 뇌도 굼떠지는 것을 실감 했다. 오늘은 젊은 학생이 유적지에 올 때 마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설명도 읽어 주어 돋보기 찾아 쓸 필요 없이 구경을 했다.
2013년 1월 11일 금요일 미치겠다. 행주!
오늘도 아침으로 인도 음식을 먹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어제 갔던 식당 옆을 지나니 우리를 알아보아 그 집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은 익숙해져서인지 어제는 안 보이던 것이 보였다. 식탁도 닦고 솥도 닦던 행주로 우리 식판도 닦아, 그 위에 음식을 담아 주었다. 거의 미칠 뻔했으나 여기는 인도니까 적응해야 했다.
오늘도 시내 관광을 위해 택시를 잡으려 호텔 앞으로 가는데 어제 탔던 택시 기사가 열심히 세차를 하고 있어 같은 차를 이용했다.
라즈 가트(Raj Ghat)
1948년 1월30일에 극우파 힌두 청년에게 암살당한 간디의 유해를 화장한 곳으로 현재는 추모 공원이란다. 잔디밭 중앙에는 검은 대리석의 네모난 대좌가 있으며 묘지는 아니지만 많은 인도인들이 위대한 혼을 기리는 기념 장소로 추모객들이 끊임없이 찾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청빈한 생활과 민중과 함께 평화로운 방법으로 영국의 총칼에 맡서 싸운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라 모든 인도인들에게 존경을 받는다고 나는 생각했었는데, 한국인 단체를 이끌고 온 인도 가이드는 간디가 인도 독립을 위해 일하기는 했으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국부는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을 귀동냥으로 듣고 인도는 넓고 다양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악샤르담 사원(Akshahdham Mandir)
다음은 인도 건축 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악샤르담 힌두교 사원에 갔다. 19세기 비슈누교 성인인 스와미 나라얀(Swami Narayan)을 추종하는 스와미 나라얀 그룹에 의해 2005년 문을 연 인도최대 힌두교 사원 중 하나라 한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인도에서 며칠 있다 보니 방향 감각이 생겼는지 택시기사가 또 같은 식당으로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머리 나쁜 쉐끼 또 같은 식당으로 데리고 왔구나 속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Menu를 바꾸어 먹으니 값싸고 훌륭한 점심 식사가 되었다. 미안하다 아까 속으로 욕해서!!! 내가 미련한 놈이었다. 내가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다고 절실히 깨달았다.
국립 간디 박물관(National Gandhi Museum)
전시장에는 간디의 어린 시절부터 사망 시까지의 사진, 언론 기사, 인도 독립에 관한 자료들이 꾸며져 있었다.
오늘은 일찍 관광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 바라나시로 이동할 준비를 하자고 했다. 선배님께서 인도 가정집에 가보고 싶은데 택시 기사에게 한 번 물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은 어떻게 되고, 집은 어디냐? 물으니 다음달(2월)에 결혼을 하고 집은 우리 호텔에서 도보로 2분 거리에 있다고 했다. 너희 집에 한 번 가 봐도 되겠냐고 했더니, 즉석에서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하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전화 걸어 닭고기 요리를 준비 시킨다고 했다. 얼마를 지불해야 하나 물으니 우리를 존경하기 때문에 무료라고 했다. 우리는 점심을 정말 맛있게 많이 먹어 저녁 생각은 없고, 인도 대표 음료인 라시를 먹고 싶다고 했더니 8시에 호텔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저녁 때 택시기사네 집을 방문해 보니 부모님, 형님 내외와 조카 2명과 택시기사 등 모두 7명이 방 2칸 부엌 한 칸의 10평 정도의 공간에 살고 있었다. 우리도 50~60년 전에는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우리가 참으로 풍족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3년 1월 12일 토요일 호불호(好不好)가 확실하게 엇갈리는 바라나시
바라나시(Varbnasi)는 기원전부터 알려져 온 오래된 도시이며, 신앙심이 깊은 힌두교도들은 누구나 일생에 한번 바라나시를 방문하여 그 길을 걸어보고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소망한다고 한다. 그래서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한다고 하는데, 바라나시는 비단 힌두교의 성지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시크교 ·자이나교 ·불교 등에서도 성지로 치고 있어서 한층 종교적 특색이 짙다고 한다.
델리에서 10시 30분 출발해서 바라나시에 11시 45분 도착했다. 비행기 탑승 수속을 하는데 앞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자기는 장애 아이들을 가르치는 특수 교사인데 Sikkim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으며 출장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우리를 보고 자기 고향은 인도 북부 중국과 접경 지역에 힌두교와 불교의 Mixed Culture라고 한 번 놀러 오라고 명함까지 주었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느긋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며 TV를 보았다. 여대생 성폭행 사망 사건으로 Making Woman's Safety in India라는 주제를 가지고 고용 문제, 직장에서의 성 평등, 법적인 제도 보안, 여성부 신설 등을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탑승 시간이 되어도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해서 경비를 서고 있는 직원들에게 물으니 맞는 탑승 gate라고 했다. 다행이 순간 판단이 빠른 선배님이 안내판을 보고 탑승 gate가 바뀐 것을 알고 간신히 비행기를 타는 기이한 일이 발생해 통역 담당으로 상당히 체면이 깎였다.
바라나시에 도착해서는 Deli에서의 아픈 기억도 있어 800루피 선불 주고 Pre-paid 택시를 이용했다. 도착해 숙소를 정한 후 14일(월요일) 인도 최북단 고락프르까지 가는 기차를 예약했다. 그 후 말로만 듣던 갠지스강 Boat여행을 떠났다. 배를 타고 강 위에서 힌두종교 의식인 Puja ceremony를 보는데 타악기와 손풍금에 맞추어 촛불 횃불을 흔들며 주문을 읊조리는 의식인데 의미를 모르니 지루했다. 나중에 인도 여행을 오래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시골에서는 저녁 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의식을 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공동체 의식을 드높이는데 거의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행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진짜 브라만이 아니라, 티베트이나 네팔에서 사진 잘 받는 사람들 뽑아다 보여 주는 것에 중점을 둔다고 반발을 한다고 하였다.
갠지스 강에서
배를 타고 강 위에서 힌두종교 의식인 Puja ceremony를 보는 도중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뚱뚱하게 생긴 뱃사공이 다가 오더니 초에 불을 붙인 메리골드라는 꽃으로 장식한 풀잎접시를 주어 기특하다고 30루피를 주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그냥 가버린다.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조금 후에 다시 오더니 150루피를 달란다. 참 어이가 없었다. 조금 있으니 붕어를 몇 마리 비닐봉지에 담은 사람이 오더니 “방생, 방생”을 외친다. 이번에는 그냥 쫒아 보냈다.
인도 사람들에게 갠지스 강에서의 목욕은 단순한 위생 문제를 떠나 정신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는 종교적 행위에 가깝다고 한다. 그러나 바라나시의 시가지에서 발생하는 온갖 오물이 흘러들어가는 곳이 갠지스 강이고, 동물과 어린이 그리고 수행자들의 시체들과 힌두 계율 상 화장될 수 없는 시체들이 버려지는 곳인데 목욕은 물론 양치질도 하고, 물병에 담아가 자기 집 우물물이건 동네 냇가건 한 방울만 뿌려도 그 물은 갠지스의 성스러운 물이 된다는 종교적 믿음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2013년 1월 13일 일요일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지 사르나트(Sarnath)
아침을 먹고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수㎞ 떨어진 사르나트로 향했다. 사르나트는 부처님이 처음으로 설법을 하신 곳으로 고대 불교 수도원의 유적이 있다고 하여 길을 떠났다. 오토 릭샤를 타고 가는데 이곳을 방문한 달라이 라마 행렬 때문에 엄청난 교통체증으로 고생을 하였다. 도저히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행렬이 용케도 전진해 나간다. 인도에서는 Horn is Art라는 말이 있다. 경적을 울리며 길을 헤쳐 가는 것은 도저히 과학으로는 설명이 어렵고 예술의 경지라고 감탄을 거듭했다. 엄청 터덜거리며 먼지도 마시며 갔던 곳에서 아소카 석주 등의 불교 유적지와 박물관에 전시된 역사적 유물을 보았다. 인생이라는 것도 고생스럽기만 하다가도 뜻밖에 횡재를 하기도 한다는데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르나트 유적군(Sarnath Main Site)
다멕 스투파(Dhamekh Stupa)
붓다가 다섯 도반에게 사성제(四聖躋)와 팔정도(八正道)를 설법한 자리에 세워진 기념탑이라고 한다. 지름 28.5m, 높이 33.5m로 진리를 보는 탑이라는 의미란다.
아쇼카 석주(Ashokan Pillar)
잔혹한 정복자였던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한 후에 재위 기간 중 불교 유적지를 돌며 방문한 기념으로 석주를 남겼다고 한다. 이 석주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불교 성지에 대한 고고학적 논쟁이 많았을 것이라 한다.
사르나트 박물관
실내에는 힌두교와 불교를 2관으로 나누어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박물관 입구에 아쇼카 석주의 상륜부인 4마리 사자상이 있는데 인도의 국가 상징이란다. 실내에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많이 있고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기다리는 일행이 있어 대충 구경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시 바라나시 화장터
사르나트에서 돌아와 다시 바라나시 뒷골목을 돌아보기로 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화장터로 향하는 운구 행렬을 계속 만나게 되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운구 행렬의 규모가 각기 달랐다. 살아온 방법도 달랐겠지만 가는 방법도 다르구나 생각했다. 입구에서만 사진이 허락되고 화장터에서 사진은 금지라고 한다. 또 이 와중에도 화장터 근방에 가면 카르마(업보)를 씻을 수 있도록 Donation(헌금)을 하라는 사람도 있다. 화장할 때도 나무를 많이 사면 화장을 깨끗이 하여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돈이 부족하여 나무를 충분히 사지 못하면 그냥 대충 수습해 강물에 뿌린다고 한다. 화장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찬드라라고 인도에서 하층계급에 속하지만 돈을 많이 벌어 재벌급이 되어 이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보통사람들은 자기조상을 위한 제사도 지낼 수 없고 브라만이라는 사두를 초청해 의식을 집행해야 한다지만, 브라만도 돈이 없으면 세공품이나 만들어 팔아야 한다고 한다. 엄격한 계급 사회였던 인도도 점점 돈이 중요한 세상이 된다고 한다.
갠지스 강의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는 호텔 옥상 식당에서 밖을 내다보니 갠지스 강의 석양도 보이고, 수천 개의 연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숙소에서 보이는 옥상에서도 온 동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데 아버지들도 거들고 있었다.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는 우리나라 아이들이 행복할까? 이 아이들이 행복할까? 생각은 해 보았지만 잘은 모르겠다.
우리 일행 4명 모두는 바라나시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무질서함과 교통체중, 사방에서 불쑥 불쑥 나타나는 소와 개, 온갖 쓰레기와 오물, 매연과 화장터에서 계속 타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이곳의 탈출만을 고대 했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 중에는 바라나시를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우리는 객관식으로 주어진 문제의 정답만을 고르는 교육을 받았지만, 젊은 사람들은 다양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를 가졌기에 우리나라의 앞날이 밝은 것 같다.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은 앞으로의 인생을 풍부하게 개척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13년 1월 14일 월요일 인도를 떠나 네팔로
드디어 0시 30분 인도를 떠나 네팔로 향한다. 인도는 철도가 워낙 길고 요즘은 안개 때문에 연착이 잦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기차가 24시간 연착되어 일정에 쫓긴 나머지 타지마할을 못 본 경우도 있다고 하는데, 우리 기차는 2시간 연착이라 기본은 했다고 한다. 기차를 기다리며 여행의 고수로 보이는 38살의 총각을 만나게 되었다. 이 사람은 내가 의문을 가졌던 사항을 거침없이 대답해 주었다. 왜 바라나시에는 총을 든 무장 경관들이 많은가? 물으니 이곳의 힌두교와 이슬람 사원이 바로 이웃해 발생하는 첨예한 대립 때문이란다. 황금사원(Golden Temple)은 시바신에게 봉헌된 인도에서도 가장 중요한 힌두 사원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1669년 무굴의 마지막 황제인 아우랑제부는 이 사원을 파괴하고 이슬람 사원인 자나 바피 모스크(Jhana Vapi Mosque)를 세워 힌두-이슬람 종교 대립의 근원을 만들었고, 지금도 긴장 상태라 한다. 바라나시는 전쟁과 평화, 성스러움과 더러움, 종교와 세속이 공존하는 묘한 구석이 있다고 한다. 힌두교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개까지 많은지 질문을 했다. 대답은 힌두교 최고신이 비슈누 신이 코끼리, 소, 개 원숭이, 쥐, 염소 등을 데리고 왔는데 염소만 제물로 바쳐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염소와 닭만 먹는다고 한다. 또한 돼지는 더러운 곳에 살기 때문에 먹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돼지들이 시궁창에서 떼 지어 다니던 모습이 생각났다. 또한 인도에서 좋은 사람도 만나고 나쁜 사람도 만나고, 좋은 경험도 하고 나쁜 경험도 했지만 무사무탈 했으니 만족하고 한국에 가면 어지간한 일에는 화를 덜 내고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 사람에게 한 수 배웠다.
오랜 기다림 끝에 새벽 2시 30분에서야 기차를 탔다. 한 칸에 6개의 침대가 있는 좋은 기차였기에 짐을 잘 챙겨 놓고는 잠을 자다 일어나 보니 거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락프르에서 네팔 국경 근처인 소울나리까지는 지프(정원 8명 정도 승용차)나 버스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프를 이용하기로 했다. 1인당 150루피 정도를 주고 타기로 했는데 10명을 태운다는 것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는 짐짝처럼 실려 갈 수 없다고, 승용차를 탔다 내렸다 협상을 시도했지만 노회한 이들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결국 시간이 급한 우리는 8명 타는 대신 300루피를 더 주는 선에서 협상을 마쳤다. 그런데 운전자 운전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2시간 30분이나 3시간은 걸린다는 거리를 2시간 만에 주파하는 것이었다. 또 한 번 더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솜씨(Horn is Art)를 실감했다.
국경에 도착해서는 의외로 간단했다. 허름한 사무소에서 사진과 여권, 서류를 작성해 주니 금방 비자가 발급되었다. 우리는 인도를 떠나 네팔로 가게 되었다. 네팔의 종족은 아리안족이 80%, 티베트 몽고족이 17%이며, 언어는 네팔어가 공용어이고, 종교는 힌두교가 80.6%, 불교가 10.7%, 기타 4.2% 등이란다.
네팔 화폐도 환전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선 군인들의 신장이 인도 보다는 작았지만 다부져 보였다. 조금 더 우리 모습과 비슷해진 느낌이다. 지프를 같이 타고 온 일행들은 포카라까지 또 8시간을 이동한다지만, 우리는 부처님이 태어난 고향 룸비니로 이동하기로 해서 한결 여유가 있었다. 택시를 타고 룸비니로 이동해서 숙소를 정하고 구경을 하였다. 룸비니 동산은 장대한 히말라야가 북인도의 평원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 석가모니의 탄생지다. 룸비니동산 입구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나무아미타불 옴마니 반메옴 등의 불경을 외우면서 "원달러 프리이즈"를 반복하며 계속 쫓아온다.
성원구역(Sacred Garden)
붓다의 탄생과 관련된 유적지가 모여 있다. 붓다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마야데비 사원(Mayadevi Temple), 인도 최초 대제국을 세운 아쇼카 대왕이 기원전 249년 붓다의 탄생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세웠다는 아쇼카 석주(Ashok Pillar), 마야 부인이 붓다를 출산 한 후 목욕을 했다는 마야데비 연못(Maya Devi Puskarini)과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룸비니를 찾은 아난존자가 심은 큰 보리수나무를 구경했다. 태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설법도 듣고, 명상도 하고, 유적지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국 사찰 대성석가사
유적지가 모여 있는 곳에서 30분가량 걸어가면 한국 사찰 대성석가사가 있다. 일본 사찰, 중국 사찰은 쉽게 눈에 띄는데 한국 사찰을 잘 찾을 수 없었다. 간판을 보고 찾아 가 보니, 단청을 안 했다. 10년 전에 골조 공사는 끝냈는데 자금이 부족해 기와와 단청을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공도 드리고, 일반인들도 사찰에 묵어 갈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 사찰은 개방을 안 하는데 우리나라 사찰만 개방을 해 놓으니 여러 나라 사람이 묵고 가면서 심지어 5루피만 헌금을 하고 가, 이제는 1일 300루피로 정해서 학생들에게 아주 인기 있는 숙소라고 한다. 우리는 내일 포카라로 일찍 떠나야 했기에 시내에 숙박을 정해 아쉽기는 했다.
2013년 15일 화요일 포카라로 이동
포카라로 이동하는 7시 버스를 타야했기에 6시부터 서둘렀다. 네팔은 전력 사정이 안 좋아 뜨거운 물도 구하지 못해 전투식량도 못 먹고 이동을 시작했다. 240km 거리를 8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한다고 했다. 어제 떠난 일행들은 차멀미도 걱정했지만 우리는 롬비니에서 체력을 비축했기 때문에 경치를 구경하며 여유가 있었다. 8년 선배님과 이제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목적지에 금방 도착한 것 같다. 간간히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이제까지 인도 대도시 관광지에서 보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수평 차이가 거의 없어 유속이 느려 엄청 수질이 나빠, BOD(생물학적 산소 요구량)측정 불가의 갠지스 강과는 다르게, 계곡물은 빠른 속도로 흘러 강원도 계곡의 청량한 물을 보는 듯 했다. 한 참을 달리다 아침 먹을 시간을 주는 듯 했다. 화장실을 가려다 이 사람들 설거지 하는 물을 보게 되었다. 갠지스 강물 보다 더한 물로 식기를 닦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안녕(安寧)과 앞으로의 트래킹을 위해서 이동 중 식사를 포기했다. 비스킷, 찐 달걀, 귤 등으로 탄수화물, 단백질, 비타민을 보충하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산길로 동네 마다 들리며 점점 고산지대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240km를 8시간 걸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도로공사는 일을 엄청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4대강 공사하고 장비도 많이 남을 텐데 이곳에서 일거리를 창출하면 좋을 것이라고 경제 분석 전문가였던 동표는 네팔과 한국 경제의 상생을 많이 걱정했다.
하여간 오후 3시쯤 포카라에 도착했다. 우리가 묵었던 룸비니 호텔 주인은 수완가였다. 벌써 택시를 보내 포카라에 있는 자기네 호텔을 구경하란다. 우리는 구경만 해 본 후 결정한다고 미리 다짐을 하고 승용차를 탔다. 호텔에 도착해 보니 천국이었다. 1100네팔루피(우리돈 12000원)에 숙박비를 정하고, 책에 나와 있는 산골 다람쥐라는 한국식당을 찾아갔다. 하루 종일 굶은 우리는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며 먹는 즐거움을 느꼈다. 이곳에서 트래킹 입산 허가증, 패러글라이딩, 포터 등을 예약했다. 우리 숙소를 1100루피에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당 주인이 비싸다고 놀라는 바람에 우리는 바가지를 톡톡히 쓴 느낌이 들어 내일 숙소를 옮기기로 했다.
포카라는 면적 30 km2 해발 827 m로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에서 서쪽으로 약 20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네팔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꼽힌다고 한다. 인근에 있는 사랑고트는 고산준봉을 조망할 수 있고, 패러글라이딩 장소로도 최적으로 꼽히고 있단다. 도시명은 호수'라는 뜻의 네팔어(語) '포카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인도·티베트와의 무역 중개지역으로 번영하였으며, 현재는 인도와 네팔을 연결하는 동시에 평지와 산지를 이어주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히말라야 등산과 트레킹을 시작하는 서쪽 출발점으로서 각광받고 있다.
아열대 기후로 겨울에도 따뜻하며, 히말라야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려 이루어졌다는 거대한 페와(Fewa) 호수도 있는 세계적인 휴양지이란다. 그래서 네팔 국왕의 별장도 이곳에 있고 네팔인의 신혼여행지로도 손꼽히는 곳이며, 영국 용병으로 복무한 뒤 퇴역한 이들이 많이 사는 부촌도 있다고 한다. 레이크사이드에는 숙박시설, 레스토랑, 트레킹 용품점들이 모여 있다.
또한 이곳이 유명한 것은 30 km 이내에 호수에 비친 '물고기 꼬리(Fish Tale)'를 뜻하는 마차푸차르(Machhapuchhare, 6,998m), 다울라기리(8167m), 안나푸르나 남봉(7219m), 안나푸르나 1봉(8091m), 히운출리(6441m), 안나푸르나 3봉(7555m), 안나푸르나 4봉(7525m), 안나푸르나 2봉(7939m), 람중히말(5559m) 등의 설산이 파노라마로 펼쳐 보여 사진 찍기에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3년 1월 16일 수요일 천국에서 다시 지상으로
어제 숙소는 천국이었다. 마당의 정원도 좋았고, 시설도 깨끗했었지만, 다른 숙소를 알아보니 600루피(우리돈 8000원) 정도면 괜찮아 옮기기로 했다. 하루 만에 천국에서 지상으로다.
패러글라이딩
오늘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트래킹을 대비해 예비일이다. 남는 시간을 이용해 패러글라이딩을 하기로 했다. 11시 부터가 상승기류가 좋다고 해서 사랑고트로 이동했다. 페와 호수가 보이고 포카라 전경을 볼 수 있으며 패러글라이딩 하는데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소라고 한다. 단독 비행하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우리는 조종사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장비를 준비하고 조동사와 돋움 닫기를 한 후 공중으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창공의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는 것이 신기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지상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9000루피(한화 117,000원) 본전생각이 나서 참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지상으로 착지하기 전 롤러코스트 타듯 공중에서 요동을 치는데 거의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지상에 내려와 멀미 증상을 보이니 멀쩡한 다른 일행 분들은 나보고 공군은 안 되겠고 지상군이란다. 속은 메스껍고 어제 춥게 잠을 잤는지 으슬으슬 한 것이 내일부터 트래킹 할 일이 걱정이 되었다.
트래킹 준비
산을 오래 다닌 선배님이 “산에 갈 때는 숟가락도 반토막 내라.”는 말이 있다며, 짐을 단출하게 싸라고 충고를 하신다. 나는 한국에서부터 짐을 바리바리 너무 많이 싸가지고 왔다. 앞으로 삶에서도 꼭 필요하고 요긴한 것만 준비하고 downsizing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일부터 산행인데 먼저 산행을 마친 사람들이 체온을 빼앗기면 고산증이 온다고 목과 머리를 따뜻하게 하란다. 내가 드디어 히말라야 언저리를 올라가게 된다니 긴장감과 설렘이 들면서 가족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많이 들었다.
2013년 1월 17일 목요일 가족들에게 감사하며 트래킹 시작
아침에 트래킹을 시작하기 위해 미리 신청한 입산 허가서를 받고 포터를 만났다. 역도 선수 전병관을 연상하게 하는 다부진 몸매에 선한 얼굴을 한 포터이다, 이름은 지미라고 했다. 숙소에서 한 시간 가량 택시를 타고 트래킹 시작 장소인 나야폴(1,070m)까지 이동 한다고 했다. 이동 중 택시 운전사가 한국말을 상당히 잘해 물어 보니 한국에서 10년 돈을 벌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모은 돈으로 지금은 잘 살고 있다고 하면서 네팔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다. 네팔은 제조 공장이 없기 때문에 일자리가 없다고 한다. 90%가 농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사우디나 카타르에 가면 30~40만원 벌고, 한국에 갈 수 만 있다면 100여만 원은 벌 수 있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라고 한다. 최고의 직업은 영국 용병이 되는 것이라 했다. 학교는 12학년까지는 무상교육이고 대학등록금도 싸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공부가 가능하다고 한다. 근대사 중 왕이 250년간 다스렸고,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민주 정부가 들어서기는 했지만 정치가 썩었다고 한다. 한 동안 세상을 떠나 있었는데 어디서나 정치가가 욕을 안 먹기는 힘들겠구나 생각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입산 허가 서류에 도장을 받고 트래킹 시작이다. 처음에는 그냥 시골길 걷는 기분이었다. 11시 30분 수다메(1,340m)에서 점심을 먹었다. 물을 보면 그냥 못 지나치신다는 선배님은 알탕 최적의 장소라고 머리를 감으신다. 나는 저체온이 되면 고산증이 온다는 말을 들어서 발만 씻었다. 점심을 먹고 힐레(1,430m)에서 기진맥진(氣盡脈盡) 해 있는 한국인 일행을 만났다. 포터도 없고 등산 장비도 갖추지 않은 용감한 학생들이다. 인정 많은 원중 선배가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지금부터가 70도 경사의 최고 난코스라고 한다. 처지는 일행을 도와주다 친구와 길이 엇갈렸다는 것을 목적지에서 알게 되었다. 친구를 찾아 나서려 하니, 산장 주인이 두 갈래 길이 있으니 다른 팀의 동향을 보고 움직이자고 한다. 다른 팀이 허탕을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주변을 살피고 길에 난 발자국도 살피며 전진을 한다. 한 참을 가다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이 무척 길었다. 돌아오는 도중 내가 자기 할아버지와 무척 닮았다고 하면서 이따 만날 수 있다고 하였다. 산장에 돌아와 보니 우리가 묵는 울레리(1,960)가 넓은 지역이라 다른 곳에 있다고 간신히 연락이 되어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처진 한국 학생들 도와주고 수색에 협조하다보니 체력이 바닥났는지 저녁을 먹을 수가 없어 감자 몇 개로 허기만 없앴다.
구루카 용병네 Guest house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까 이야기 하던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그래서 이 분이 나와 닮은 분이냐고 했더니 그렇단다. 그런데 나이 드신 분이 영어를 상당히 잘 했다. 젊은 시절 무엇을 했냐고 물으니 15년 동안 영국 용병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TV 다큐멘터리로 용병 선발 과정을 봐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안이 용병이 많았다. 지금 아들 둘이 영국 용병이란다. 젊은 산장 주인은 자기 아버지와 삼촌을 만나면 더 인상적일 것이라고 자랑을 한다. 수색 같이 나갔던 손자도 용병 시험 중이라고 했다. 자기의 네팔 나이는 24살이지만 호적에는 19살로 되어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께서 용병선발 시험을 준비 시켜서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총명해 보이는 젊은이가 왜 그렇게 주도면밀하게 전략적으로 움직였는지....
그래서 우리는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훌륭한 전통을 가진 집안이라고 경의를 표하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구르카 용사들의 칼까지 들고 나와 우리는 용맹한 전사의 포즈를 취하고 사진도 찍었다. 젊은이는 나와 눈만 마주치면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나도 손자라 부르니 네팔에 와서 가족관계가 복잡해졌다고 일행들이 놀리기도 했다. 73살 먹은 예전 영국 용병 할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정정하게 농사일도 거들고 산에서 나무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난로에 땔감을 풍족하게 넣어 아주 편안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들었다. 산장 이름도 온 가족의 존경을 받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Tratop Guest House이다.
2013년 1월 18일 금요일 산악 날씨
너무 피곤했는지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 보니 밤새 천둥도 치고 비가 내렸다고 한다. 아침에도 비가 부슬 부슬 내렸다. 네팔 용병할아버지께서 오늘 비가 올 수도 또는 눈이 올 수도 있고 산 날씨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오늘 등산이 가능한지 망설이다가 훌륭한 구르카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한 시간 늦은 9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간간히 당나귀에 물품을 실어 나르는 것을 보며 산 위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음이 짐작 되었다. 오전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점심 먹고 오후가 되니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등산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학생들은 정말 고생들 많이 했다. 간신히 목적지인 고래빠니(2,680m)에 도착했다. Ghore(말) + Pani(물) 고래빠니는 네팔말로 말들이 물을 먹는 곳이라 한다. 산장에 도착해 보니 어제 비가 내려 일출을 보지 못해 죽치고 있는 외국인들이 난로 주위를 점령하고 비켜날 줄 몰랐다. 애들이 뻔뻔하게 나오면 우리도 들이대는 수밖에 없다. 이곳은 물이 귀한지 빨래금지라고 한다. 비에 젖은 옷을 말리고 저녁을 먹었다. 당나귀에 실어 나른 물품이라 이해는 하지만,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맛이 참으로 없는 음식을 생존을 위해 먹어 두어야만 했다.
2013년 1월 19일 토요일 빡센 하루
추워서인지 또는 고도가 높아서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창문 밖에는 천둥번개도 치고 요란했다. 도저히 잠이 안 와 식당에 내려와 혼자 한참 운동을 했다. 그러다 창밖을 내다보니 날씨는 좋아졌는지 별이 초롱초롱하지만 눈이 5cm는 쌓였다. 내일 일출은 포기해야겠구나하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푼 힐 전망대(3,210m) 일출을 보러 가자고 깨운다. 이런 날씨에 꼭 전망대에 올라야 하나 망설이는데 다들 올라간다고 해서, 헤드 랜턴과 손전등을 들고 길을 떠났다. 어두컴컴한 산길을 앞 사람 발길만 따라 전등에 의지해 전진했다. 한 참을 오르니 목적지에 도착했고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뜨거운 음료를 팔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사먹으며 기다리니 해가 떠올랐다. 그냥 일출이었다. 추운데 더 이상 고생할 필요 없다고 우리는 내려오는데 그때 올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생은 선택
생존만을 위한 아침 식사를 한 번 더 하고 길을 떠났다. 책에 나와 있는 지도에 따르면 계속 내려가는 길이라 안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 오르막이 계속 되었다. 조금 더 가면 내리막이 나오겠지 하면서 계속 전진해도 오르막만 계속된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데우랄리(2990m)에서 우리가 빡센 곳으로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따또빠니로 가야 하는데 따다빠니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따또Tato(Boiling water, 뜨거운 물), 따다Tada(long, 긴) 따또빠니, 따다빠니 비슷비슷해 의사소통이 잘못되었는지 포터인 지미가 우리를 험한 길로 끌고 왔다. 그런데 이 길이 험하기는 하지만 경치는 참 좋다고 한다. 인생은 결국 선택이고 잘못된 선택을 하더라도 좋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면 좋은 것이라고 선배님이 말씀하신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시없는 기회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오르락내리락 반복하다가 제일 마지막 언덕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생겼다. 겨우 도착한 산장은 정말 한심했다. 이름이 Super view인데 온 통 2면이 유리 벽면으로 여름에는 경치가 좋을지 몰라도 지금은 Super dye(얼어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도저히 이 방에는 잘 수 없으니 방을 바꾸어 달라고 해서 4인 1실 안쪽으로 방을 잡았다. 식단을 보니 라면과 칼국수가 눈에 띄었다. 550루피(한국돈 7000원) 이곳 물가에 비해 무지 비싼 값이었지만 먹기로 했다. 선배님이 주방에 직접 들어가 네팔 향신료 넣지 말고, 감자와 국수 많이 넣고, 마늘과 고추 넣으라고 지시를 했다고 한다. 마늘도 하나 집어 왔는데 중국에서 수입해 비싸다고 한 개만 주었다고 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당나귀로 실어 나르는 것을 눈으로 봤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했다. 값은 비쌌지만 맛은 훌륭했다. 모두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을 것이다. 오랜만에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식사를 했다. 저녁을 먹고서도 추워 방으로 갈 엄두가 잘 나지 않았다. 난로에서 앞면을 불에 쬐면 등이 시리고, 등을 불에 쬐면 앞면이 추워지고 난감했다. 그런데 포터들은 맨발로 돌아다닌다. 너희들은 안 춥냐고 물어보니 문제없다고 한다. 4명의 포터 중 한 사람은 8000m 한사람은 7000m까지 올라가봤고 산 위는 5분마다 날씨가 변한다고 하며, 한국 등산가들은 높은 산에 올 때 고기 엄청 먹고 술도 많이 마신다고 했다. 장작을 좀 더 때자고 했더니 장작을 티베트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비싸단다. 나무 많은 히말라야 산 속에 나무가 귀해 티베트에서 수입을 하나 의아했다. 아무튼 똘똘해 보이는 포터가 주인 몰래 장작을 한 아름 훔쳐와 박수를 쳐 주고 난로에 집어넣었는데도 날씨 탓인지 화력이 시원치 않았다.
2013년 1월 20일 일요일 원시림의 비경(秘境)을 보며 하산(下山)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도 거꾸로 매달아도 내일이면 산을 내려간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더 이상 비상전투식량 메고 다닐 필요가 없어 준비해 온 것을 다 먹어 버렸다. 길을 떠나니 계속 내리막길인데 눈이 쌓여 고생을 하였다. 한 참을 내려와 보니 영화 쥐라기 공원에서 본 것 같은 원시림이 나타났다. 어제 왜 티베트에서 장작을 수입하는지 의아해했던 의문이 풀렸다. 이곳은 철저히 국가에서 원시림을 보호하고 있었다. 또한 계곡의 바위를 보니 퇴적암 무늬가 보여 예전에는 이곳이 바다였었고 지층의 충돌에 의해 위로 솟아올랐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이 웅장한 자연의 경치를 보니 어제 고생을 충분히 보상되었다. 좀 더 내려오니 사람이 사는 마을이 보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일행들은 다음에 다시 가족과 이곳에 오게 된다면 산위까지 올라갈 필요 없이 여기까지만 오면 설산(雪山)들이 다 보이니 더 이상 오를 필요 없을 듯 하다고 말했다. 멀리서 마을을 볼 때는 평화로워 보였는데, 가까이서 사람들을 만나 보니 등짐으로 땔감을 져 나르고, 당나귀로 생활용품을 나르는 것을 보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를 안내하는 포터인 지미는 숙소와 식대에서 구전을 먹는지 자꾸 점심을 먹고 가자고 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식사는 하고 싶지 않고 산골 다람쥐의 한식을 먹고 싶어 길을 재촉했다. 돌아가는 차량을 알아보니 6000루피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류장에 가보니 버스가 한 사람당 250루피면 포카라로 간다고 했다. 우리가 버스에 관심을 보이니 포터 얼굴이 변하고 3500루피로 승합차를 이용하자고 한다. 우리와 같이 고생한 지미가 적당히 구전을 먹을 수 있도록 승합차를 이용해 편안하게 포카라로 돌아왔다. 우리가 산행을 도와준 젊은이들이 맛있는 한식을 대접해 주어 잘 먹었다. 3박 4일 산행을 같이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3개월 인도 여행을 하고 90일 비자가 만료되어 네팔에 왔다가 또 3개월 인도여행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고 한다. 우리는 20일도 힘이 드는데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 여행 고수의 이야기는 여행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리 좋은 곳을 가더라도 불편한 사람들과 있으면 어렵고, 별로인 곳도 좋은 사람들과 있으면 의미가 있어진다고 했다. 여행의 고수다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산에서 내려와 산장에서 자며 수백 명은 덮고 잤을 빌린 침낭과 야크 담요에서 배인 냄새나는 옷은 세탁에 맡겼다. 그전에는 옷을 빨아 입고 다녔는데 세탁물 1kg에 80루피(한화 1000원) 정도라 더 이상 세탁하느라 궁상은 떨지 않아도 되었다.
2013년 1월 21일 월요일 오늘은 그냥 쉬는 날
오늘은 특별한 일과 없이 빈둥거리기로 했다. 동표는 산골 다람쥐 한식집에 마늘 까기 도와주러 가고, 선배님은 페와 호수에 뱃놀이를 가셨다. 나는 기록을 정리한다고 꾸물거리는데 원중 선배가 자전거 타고 포카라를 돌아보자고 한다. 점심 먹고 자전거를 한 대당 250루피 씩 빌렸다.
국제 산악 박물관(International Mountain Museum)
자전거를 타고 먼저 산악 박물관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서 물어물어 가려니 대답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가르쳐 주어 고생을 좀 했다. 산악 박물관에 가서 좋은 구경 많이 했다. 4개의 다른 전시실이 있었는데 1전시실은 네팔의 각기 다른 족속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네팔의 민속 박물관 이었다. 2전시실은 히말라야 산맥을 등반한 산악인들을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히말라야를 오른 2명의 네팔 세르파와 힐러리, 일본 등산가, 한국인 등산가들도 있었다. 3전시실은 히말라야 산맥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지구과학 시간에 배운 그림과 설명이 있었다. 4전시실에는 네팔의 동식물이 전시 되어있었다. 나는 오늘 충분한 소득을 얻었다.
따실링 티베탄 난민촌(Tashiling Tibetan Settlement)
다음은 티베트 난민촌을 찾아갔다. 또 한참을 자전거를 타고 헤매고 있는데 진짜 티베트 난민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길을 따라 가보니 티베트 난민들의 공회소와 양탄자를 수작업을 통해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 나타났다. 입구에는 티베트 장신구등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 보였다. 이곳은 티베트가 중국의 한 자치구로 병합 되던 1950년대 티베트에서 집단으로 넘어온 망명자들의 거주지로 오늘날에는 네팔 속의 작은 티베트가 되었다고 한다.
뻬딸레 창고(Patale Chango, Devi's Fall)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Devi's Fall도 구경했다. 페와 호수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땅속으로 물이 꺼지는 특이한 구조를 보이는 지형이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침식에 의해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1961년 뻬딸레 창고에 놀러 왔던 스위스 여인 Devi가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 사망한 이후 Devi's Fall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예정 보다 한 시간 늦게 돌아오니 다른 분들이 걱정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은 스테이크를 먹어 보자고 했다. 식당에 가보니 495루피, 산에서 먹은 칼국수보다 싼 가격이다. 이탈리언 소스 스테이크였는데 맛은 칼국수 보다 못했다.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카트만두로 이동하는 날
포카라에서 카트만두까지 200km 또 7시간 3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는 날이다. 비행기로는 한 시간 거리 60달러(한화 66000원)라고 하는데, 돈을 쓰기 위해 온 것도 아니니 600루피(한화 7800원)내고 쉬엄쉬엄 구경도 하잔다. 지난번에 굶은 것 생각해서 아침 단단히 먹고 출발하자고 해서 된장찌개 열심히 먹어 두었다. 산골 다람쥐 사장님이 카트만두에 있는 한식당 주인에게 연락하면 마중 나온다고 했다. 7시 출발해 카트만두에 도착하니 걸리안이라는 네팔인이 마중을 나왔다. 한국에서 10년 일하고 돈을 모아, 이곳에서 재산을 불린 성공한 사람이란다. 이 사람을 따라 식당에 짐을 맡기고 숙소부터 구했다. 소개해 주는 이곳저곳을 찾아가 보니 지저분하고, 지금이 비수기라 공사를 하는 호텔도 있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 이틀 후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좋은 곳에 숙소를 정하자고 마음먹고 20달러씩 주고 비교적 깨끗한 곳에 숙소를 정했다. 걸리안이 운영하는 축제라는 식당은 값도 싸고 맛도 있어 푸짐하게 저녁을 잘 먹었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5개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해발 1,400m의 분지에 있는 도시란다. 카트만두(Kathmandu)는 나무로 지은 집이란 뜻인데, 카트(Kath)는 '나무', 만두(mandu)는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013년 1월 23일 수요일 네팔 문화 유적 탐방
파탄(Patan)
원래는 박타프르라는 곳을 방문하려 했었는데 멀기도 하고, 파탄이라는 도시와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파탄이라는 도시를 가기로 했다. 파탄이라는 도시의 애칭은 ‘미의 도시’라고 한다. 고대 파탄의 장인들은 카트만두 계곡에서 제일가는 솜씨를 자랑했다는데 목공예 기술이 뛰어났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재정이 열악해서인지 문화재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우리나라 경복궁은 참 보존이 잘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우더나트(Boudehanath)
보우더나트(Boudehanath)는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 동쪽에 있는 사리탑으로 네팔 티베트 불교의 총 본산이자 가장 큰 규모의 불탑이라고 한다. 'Bodh'란 '깨달음', 'Nath'는 '사찰'이란 뜻이라서 사원이름을 '보더나트 (Bodhnath)'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스투파는 흰색 반구체의 사면체 기단 위에 두 눈과 코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원추형의 덮개가 놓여있다. 사면체에 그려진 '제 3의 눈'은 인간의 마음에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음을 표시한 것이고, 물음표처럼 보이는 코는 '1'이란 숫자를 형상화 시켜 놓은 것으로 극락과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로써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 위로 시작되는 13층의 원추형 탑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13 단계를 뜻하고, 맨 꼭대기는 천국을 상징하는 종이 있다고 한다. 이 탑을 돌 때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야 하는데, 이 수투파를 한 바퀴를 돌면 불경을 1천 번 읽은 것만큼의 큰 공덕 쌓는 것과 같다고 하며 , 열심히 오체투지(온 몸을 바닥에 대는 절)를 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보우드나트에 얽힌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한 여인이 왕에게 스투파를 지을 땅으로 버펄로(물소)의 피부 한 조각만큼의 땅을 요청했고, 왕이 흔쾌히 수락하자 버펄로의 피부를 최대한 길게 잘라 그 끝을 잡고 큰 원을 그려 그 만큼의 땅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그 땅을 주는 것을 만류하였으나 왕은 "한번 허락된 것은 철회할 수 없다 "라고 하며 그 땅을 전부 여인에게 주었고, 그 땅 위에 사원을 세웠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게 들은 이야기는 네팔에서 특히 누런 소는 신성하게 대접을 받는데, 뿔이 뒤로 향하는 버펄로는 일도 많이 해야 하고 고기로도 사용되어 뿔의 각도에 따라 신분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스와얌부나트(Swayambhunath)
불탑과 회교 사원이 뒤섞여 다소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도시를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여겨 사시사철 수많은 방문객이 붐빈다고 한다. 또한 전망도 좋아 카트만두 시내를 내려다 볼 수도 있었다. 원숭이 사원이라는 애칭이 있다고 하는데 원숭이 들이 정말 많이 보였다.
더르바르 광장(Durbar Squre)
더르바르는 '궁정'이라는 의미로 옛 카트만두 왕국의 중심 광장이라고 한다. 구왕궁과 쿠마리 사원, 쉬바 사원 등 중세 카트만두의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고 기둥과 창살 등의 목공예 기술이 대단했다.
오후 4시에 쿠마리를 볼 수 있다고 하여 기다리는데, 사진 촬영을 금지시키며 경건을 유지시켰다. 고대 힌두여신인 ‘탈레주’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쿠마리는 국왕까지 찾아와 무릎을 꿇고 축복을 구할 정도로 네팔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신 중 하나라고 한다. 네팔 사람들은 쿠마리의 축복을 받거나 심지어 눈길이 한번만 스쳐도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힌두신인 쿠마리는 특이하게도 불교도만이 갖는 직업인 금세공업자의 보통 2~4살 때의 여자 아이들 중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고, 몸에 흉터가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32가지 조건을 모두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동물의 시체와 피가 낭자한 어두운 방에 갇혀 울지 않고 하룻밤을 무사히 보낸 아이가 쿠마리로 선발된다고 한다. 이렇게 선발된 쿠마리는 가족과 함께 초경을 치르기 전까지 쿠마리 사원에 거주하며 신으로 추앙 받다가, 초경을 치르면 신성을 잃은 것으로 간주하여 사원을 떠나야 하는데, 전직 쿠마리와 결혼한 남자는 일찍 죽는다는 속설로 평생 어려운 생활을 한다니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2013년 1월 24일 목요일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드디어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가는 날이다. 인도를 일주일 여행한 사람은 홈 페이지를 만들고, 한 달 여행한 사람은 책을 내고, 일 년을 살아본 사람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홈 페이지나 만들어야겠다. 넓고 사람 많다는 인도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과, 보고 들은 것들은 참으로 한정되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와 개 동물들까지 잘 어울려 사는 공존의 나라라고 어떤 여행하던 사람이 내게 말 했다. 내가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묘한 느낌이다.
모든 화폐에 간디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인도와 다르게, 네팔은 에베레스트 산과 동물들이 화폐에 그려져 있다. 개인적으로 음식은 인도가 더 적응하기 쉬웠지만, 마음이 더 편안했던 곳은 네팔이었다.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드디어 집으로
내게 길게 느껴졌던 짧지 않은 시간, 좋은 일행들과 새로운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보고, 느끼기도 했다. 또한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확인도 하고, 차이점을 발견도 하는 훌륭한 경험이었다. 준비하고 대기하고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해 거의 하루 만에 집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거의 전 자동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보면서 우리의 수도나 전력 사정이 풍요롭고, 도로 사정도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 환경도 쾌적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한민국의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이 실감되었다.
집에 도착하니 20여일 기른 수염에 대하여도 논란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히말라야 기념으로 수염 계속 기르라고 하고, 어머니는 당장 깎으라고 성화시다. 애 엄마도 수염을 무쟈게 낯설어 했다. 늦둥이는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사진을 찍어 보내니 서울에 있는 딸과 아들은 야인 같다고 카카오 톡을 보내왔다.
좋은 분들과 다양한 경험을 한 훌륭한 여행이었다.
첫댓글 우와~~~
멋진여행과 다녀오신 기록까지도 멋지네요.
만나면 더많은 얘기를 들을수 있을듯.. 기대되네요.
멋지게 평가해 주어 고마워요
왕거님.. 잘 다녀오셨네요. 네팔에서 트래킹도 하시고...읽고 있으니 계속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업무가 마비되고 있어 퇴근하고 찬찬히 읽어봐야 겠습니다. ㅋㅋㅋ
나중에 시간 나면 트래킹 다녀 오세요.
아들하고 오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강력히 추천합니다.
원장님 기행문학 수준이시네요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과한 칭찬 고맙고,
다시 한 번 더 따님 얻은 것 축하드려요.
읽기를 몇번 시도하다 드뎌 찬찬히 다 읽어 보았네요.
여기에서 그칠게 아니라 정말 책을 내셔야 겠어요..
철학자 반, 애국자가 되신것 같기도 하구요..
기록하시느라 후회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다 보셨는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왕자와 거지님이 계시기에 이런 훌륭한 여행기를 편하고 쉽게 접근할수 있겠지요..
여독도 다 풀리기도 전에 좋은 경험을 그대로 잘 옮겨 주시고 간접적인 체험을 하게 해 주셔서 너무나 큰 감사드립니다..^^
잘 읽어 주셔서 고맙고,
기록하려니 더 자세히 보아야 하고 생각해야 하니까
제 자신에게도 좋아요.
걱정까지 해 주셔서 송구스럽네요.
Wow!..부럽고 존경스럽고 감사한 글이네요...
세계여행 꿈꾸셨으니 부러우시겠어요.
여행 할 수 있는 제 여건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과연 왕거님 솜씨가 물씬나는 생생한 기행문 입니다. 저를 포함, 수독회원들께 좋은 간접체험을 제공하는 글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글 만큼이나 생생한 아마도 많은 사진을 찍으셨을텐데, 나중에 홈피를 만드시면 올리시겠죠 ? 마침 저의 초등학교 동창중에 세계여행 홈피운영자(푸른마음)가 있어 뒤져보니 북인도와 네팔편에 많은 사진이 있어 아래에 참고로 소개 드립니다 :
http://cafe.daum.net/gumel8234?t__nil_cafemy=item
아쉽게도 사진은 많이 찍지 못했네요.
스마트 폰으로 몇 장 찍은 것은 있는데 나중에 보여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