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엔 나에게 1년 내내 뜨거웠던 여름
/ 류인록
내 나이 스믈아홉 시절이던 1975년 4월 23일 중동행 비행기에 올랐다. 결혼 5개월 된 나는 무심하게도 아내를 시골 부모님과 형수에게 맡기고 떠났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군에 가기 전에 건설 현장을 전전하며 모은 돈은 고향집이 어려워 그때그때 보내주었고 부모님의 권유로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 한터라 어디든지 돈 벌이가 된다면 나는 떠나야 했었다. 그 시절에는 해외 건설 현장이 많지 않았었다. 나는 군에 가기 전 건설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어렵지 않게 해외취업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해외취업 조건이 까다로웠다. 회사가 지정해준 병원에서 신체검사에 통과는 물론 그때에는 연좌제가 있어 집안에 좌익에 복역한 사람이 있으면 신원조회에 걸려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던 터였고 일 년 계약을 못 채우고 오는 경우 항공료를 변상해야했기에 재정 보증을 세워야 했었다. 그 시절 고향 면 단위에서 독일 광부나 간호사로 취업한 사람은 있어도 중동 취업은 내가 최초라고 했다.
건설회사에서 여행 시 참고할 사항에 대한 교육을 받고 여비 100불과 비행기 티켓을 받아든 일행 16명은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비행기를 탔다. 일행 중 월남에 취업했던 경험이 있었던 사람이 인솔자 역을 맡았다. 그때는 직항로가 없었기에 오사카와 대만을 거쳐 방콕에 도착했다. 여기까지가 당시 대한항공 노선이었다.
“아저씨들 우리는 여기서 서울로 돌아갑니다. 건강한 몸으로 돈 많이 벌어오세요” 그날 가슴을 찡하게 한 스튜어디스들의 인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네델란드 항공사 KLM항공기로 환승하여 파키스탄의 카라치를 경유해 레바논에 도착하여 호텔로 이동했다. 아침 늦은 시간이었다. 대기 시간이 10시간 정도였던 것 같다. 레바논은 북한과도 수교하는 나라였다. 북한은 대사관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영사관 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가고 있는 사우디는 금주의 나라이기에 술 반입이 금지된 나라이다. 우리들은 기내에서 면세품으로 ‘죠니워커’ 두병씩을 샀다. 그곳 마트에서 한 병에 15불을 받고 팔아서 이윤을 남겼고 호텔에서 일부의 양주를 즐기며 시간을 보냈으며, 호텔은 바다를 끼고 있었기에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지중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손을 씻어보기도 했다.
해질 무렵 베이루트 공항에서 사우디 항공사 비행기에 탑승했다. 홍해바다를 끼고 있는 사우디 제2의 도시 ‘제다’에 도착하여 회사 지점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육로를 이용해 ‘움라지’라는 곳에 있는 현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홍해바다를 끼고 있는 시골 면 단위의 마을이었고 우리 회사는 그곳에서 북으로 ‘다북’이라는 도시까지 이어지는 87km의 도로공사를 하고 있었다. 사막의 나라 도로 공사에도 교량이 있었고 암거가 있었다. 좀처럼 비가 내리지는 않지만 폭우가 쏟아질 때를 대비한 것이다. 날씨는 더웠지만 한 낮에는 에어컨 시설이 갖추어진 숙소에서 보낼 수 있었고 그곳 생활에 곧 잘 적응했다. 80여km 먼 거리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물을 길어다 썼지만 부족함이 없었고 김치는 없었지만 구내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도 곧잘 적응했다.
그 시절 한국에서 하루 일당이 2.000원 이었으니 한 달에 5만원 벌기도 힘들었을 때였다. 우리는 월 300불 그 때는 환율이 고정 483원이었다. 약 15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매주 금요일은 휴일이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였기에 금요일은 ‘모스크’에나가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홍해바다에서 수영도 즐기고 고기도 잡아 싱싱한 회를 즐기기도 했다. 때로는 일거리가 많아 잔업을 해 그곳에서 쓸 수 있는 돈을 벌었기에 월급은 전액 송금 할 수 있었다.
밤이면 아랍어 공부를 했다. 직원 중에 노무직을 맡고 있는 사원이 외국어대 아랍어과를 나왔기에 우리글로 아랍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회사에 취업한 외국 근로자들은 ‘예멘’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을 리더 하려면 기초적인 아랍어는 필수였다. 배운 아랍어로 그들과 의사소통이 될 때는 마음 뿌듯하기도 했다. 나는 녹음기를 구입해 아랍어 공부시간에 녹음을 해 남달리 열심히 배웠었다. 근면 성실하게 일을 했고 ‘예멘’인 들과도 의사소통을 잘했기에 근로자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우리는 위문편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우리 회사는 한진그룹이었기에 대한항공, 한진고속버스, 등 여직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열사의 나라에서 힘들게 일하는 해외 취업자들을 위한 위문편지를 부탁했단다. 우리들은 그 편지들을 한데 철해놓고 읽으며 고국의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그곳에는 일 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보면 숙소 처마 밑에는 마치 비가 온 것처럼 이슬이 내렸었다. 그렇기에 낙타들과 양떼를 기르는 유목민들이 있었고 그들이 기르는 양과 낙타고기를 먹을 수 있었으며 홍해바다에 서식하는 ‘랍스타’(아랍어로는 ‘자람보’라고 불렀다)를 잡아먹기도 했다. 지금도 국내는 수입해온 ‘랍스타’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그 시절 심심치 않게 돈 한 푼들이지 않고 즐길 수도 있었다. 한편 수입해온 열대 과일들은 가격이 우리나라보다는 워낙 싼 가격이었기에 마음껏 과일도 즐길 수 있었다. 우리가 건설했던 도로 끝 ‘다북’이라는 곳은 요르단과 국경이었다. 초소에는 두 명의 보초가 있었는데 국경을 넘어 요르단 땅을 밟아 보고 싶어 말을 건네자 쾌히 들어갔다 오라고 해 요르단 땅도 밟아본 추억이 생각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도로공사 측량을 하던 측량 기사 2명과 주임이 양떼를 몰고 가는 여인네에게 길을 물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 여인은 남편에게 우리 회사 직원들이 성희롱을 했다며 남편에게 말했고 남편은 ‘움라지’ 경찰서에 신고 경찰이 직원 3명을 연행해 갔다. 그들은 경찰서 구치소에서 지내야 했고 우리들은 목요일 밤에 면회를 가기도 했다. 다행히 구치소에 갇히기는 했어도 그곳에서는 자유로운 편이었다. 우리는 여러 명이 면회를 가서 같이 보내다가 끝나고 올 때는 우리 회사 유니폼 입은 사람 셋만 남으면 되었다. 교대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흑인들을 보면 분간하기 어렵듯이 그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래서 숙소에 와서 샤워도 하고 쉬었다가 다음날 면회 가는 것처럼 가서 교대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들은 형벌로 우리 현장숙소에서 회사원들이 보는 앞에서 회초리 36대씩을 때리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곳 현지인들은 그들 기사들을 보고 ‘씻따 딸라틴’이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36이라는 말이었다. 갑 질을 당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1년 계약기간이 되었지만 회사에서 공사가 마무리 될 때까지 연장 근무를 하라고 권했다. 나는 쾌히 승낙하고 4개월 동안 연장 근무를 하고 월급 이외 항공료의 12분의 4를 받았으며 재취업할 수 있는 고가점수를 받고 1차의 해외 생활을 마쳤다. 물론 그 후로도 나는 4차례 더 중동 그 열사의 나라에서 총 8년 2개월간 그곳 생활을 했다. 그 덕에 중년에는 생활의 기반을 다져놓을 수 있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요즘 39도를 넘을 만큼 한반도의 여름이 달아오르고 있다. 모두들 더워서 지치고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젊은 시절 이미 그 보다도 더 뜨겁던 건설현장에서 일했던 나로서는 과거를 회상하며 ‘여름 더위쯤이야’하고 일상생활에 늘 긍정적으로 인생 이모작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젊어고생 사서도 한다고 했던가요
지금이라그렇지 그때는 참 그랬지요 돈이 뭔지, 그눔의 돈때문에
하지만 지금 누리고 사신다니 다행이네요 고생많이했습니다. ^^
우리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중동을 다녀온 분들이 많았지요.
아득한 옛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