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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시편 44편 1-8절
설교제목 : 내가 의지한 것
반걸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오늘 주일은 성령강림절이자 환경의 날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다시 마가 다락방에 모였고, 오순절 날에 성령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이들은 두려움의 빗장을 열고, 이전과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서 서서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개인과 집단의 전환은 인간의 힘과 의지에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개입, 초월적인 힘이 의식으로 진입하여 신성한 도움과 협조가 있을 때 이런 전환이 일어납니다. 지난주 스위스에 계신 에터 박사님과 분석을 하면서, 취리히 근교에 있는 자기 소유의 숲에 나무로 지은 별장을 손수 지었고, 몇 년에 걸친 작업으로, 거의 완성된 형태의 집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작은 문의 출입구 위에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를 새겼고 다른 쪽에는 “신성한 영감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sine afflatus divino nemo nunquam via magnum”를 새겼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인간의 기도와 행함(실행) 뒤에 하나님의 영의 도움이 있을 때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성령 강림절을 통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을 모셔들이고, 그분의 도우심을 신뢰할 수 있는 삶이었으면 합니다.
지난 주중부터 오늘(6월 5일)까지 ‘서울 국제 도서전 2022’가 열렸습니다. 코로나 이후 열리지 못하다가, 코엑스에서 개최되었고, 도서전의 주제는 “반걸음”입니다. 그 반걸음이란 말이 새삼 귀하게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서울국제도서전 대표인 주일우는 <출판문화, 2022.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올해는, 진짜 코로나 19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으로 시작했는데, 절반이 지나도록 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아직 코로나 19의 종식을 선언하지도 못해서, 그 속도도 매우 느릴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순자가 ‘규보불휴跬步不休 파별천리跛鼈千里’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떠올린다. 반걸음으로 걸어도 쉬지 않으면 느리고 기우뚱거리는 거북이도 천리를 갈 수 있다... 시간의 켜가 쌓이면 그것은 천지개벽의 큰 변화가 된다. ... 지금 내딛는 반걸음이 중요하다. 이 반걸음 위에 쌓을 미래를 전망하고 예측하는 것이 예전과 비슷하지만, 다른 일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주일우, <도서출판 2022.5.> vol.676. p8-9]
이어서 조성은 북칼럼니스트는 왜 반걸음인지 간단히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가속의 시간 속에 뒤돌아보고 점검하자는 멈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의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변화를 위해 함께 발맞추어 걸어나자는 의미의 제안이기도 합니다.”[조성은, <도서출판 2022.5.> vol.676. p22]
지금 우리는 빠른 걸음 혹은 한걸음으로 옛 삶을 회복하기 위해, 또 다른 미래로 가기 위해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반걸음으로 다시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보고,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 인간과 자연이 연합하며 나아가야 할 때인 듯합니다.
두 귀로 들은 것
오늘 본문 시편 44편은 시편 42편과 43편의 표제와 동일합니다.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마스길”입니다. 특정 음악 형식으로 예배시에 낭송하며 노래했던 시편입니다.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옛 조상이 번성했던 때를 회상하며 도와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하나님, 우리는 두 귀로 들었습니다. 그 옛날 우리 조상이 살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그 일들을, 우리의 조상이 우리에게 낱낱이 일러주었습니다(1).”
시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두 귀로 똑똑히 들은 것이 무엇입니까? 조상의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부모 세대가 귀에 들려주고, 소상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활동하셨던 하나님을 신앙적으로 전승한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이신 신채호 선생님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옛 조상이 경험했던 역사와 우리 자신이 연결된다는 것은 일종의 뿌리 의식입니다. 뿌리를 잊는다면 식물처럼 인간의 삶도 오래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모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흩어져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백성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던 옛 기억들을 기록하고 이전 세대가 다음 세대로 전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몸은 타국에서 부자유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갈 수 없었지만, 회당을 세워 그들은 신앙의 가치를 세우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신 역사뿐만 아니라 고통과 눈물의 역사도 그 자녀에서 자녀로 대를 이어 두 귀로 들려주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판데믹 이후 신앙이 철저히 교회 공동체가 주도하는 영성이 아니라 철저히 개별화되고 개인의 차원에서 영성이 중요해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신앙교육은 철저히 부모를 통하여 전승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나라를 잃고 2천년 이상 배회하고 수많은 나라로 흩어졌지만, 여전히 흩어진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자신의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것은 부모가 전승해주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저의 두 딸이 귀로 들은 하나님의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하곤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이고, 율법적 내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러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간 흔적이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셨기에
시인은 조상들이 노예 살이에서 땅에 뿌리박고 번창하게 하신 주체를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왜 하나님은 조상들이 땅을 차지하고 번성하게 하셨을까요? 바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오른손과 오른팔과 하나님의 빛나는 얼굴이 이루어 주셨으니 참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3b).”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서는 저희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놀라운 선언이자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잘나서 무언가 성공하고 업적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를 여전히 존재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현대사회에 드러워진 그림자는 자아 거대증으로 인한 팽창 현상입니다. 자신의 성취와 성공을 자아의 것으로 모든 것을 흡수하여 마치 신과 같은 상태로 부풀려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마을에서 누군가 크게 이름을 떨치면 조상님이 도우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자아가 공덕을 모두 취하지 않고 조상에게 그 은혜를 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과 우리 자신은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한껏 자랑하며 치장하고 있지만, 그 또한 추풍낙엽처럼 힘을 잃고 떨어질 때가 반드시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나를 나되게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자는 어떤 삶을 살까요? 시인은 6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의지한 것은 내 활이 아닙니다. 나에게 승리를 안겨 준 것은 내 칼이 아닙니다(6).”
이 시 구절은 마음에 울림을 줍니다. 내가 의지하고, 승리를 안겨 준 것은 내 활도 내 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에게 다시 반문합니다. “네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냐?” “네게 승리와 명예와 힘을 안겨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에서 활과 칼은 힘과 능력을 표상합니다. 끊임없이 삶의 여정 동안에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야 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남들이 알아주고 칭송해주는 명예나 권력, 나의 삶을 안전하게 지탱해주는 통장 잔고를 목적 삼아 그것을 의지하며 살고자 합니다. 물론 이 세속 사회에서 이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자원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정신까지 든든하게 지켜줄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과 힘을 가진 재벌도 프로토콜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가 소유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그들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처리할 수 있음에도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이 최종 결정자가 되시고, 개입하시도록 마음의 여백을 만드는 삶입니다. 이것을 어리숙해 보이는 순수한 바보들의 지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출세하기 위해 비열한 행위와 계산적인 행동을 포기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부를 것입니다. 바보는 내적인 단일성을 가지고 자신을 신뢰하며 자신보다 하나님과 자연에 빚지고 있는 자임을 알고, 자신의 내면의 법칙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저는 6년 전에 저의 거취문제로 교회 개척 준비를 하면서 한수엘리 에터 박사님과 저의 꿈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교회 사무실에 갓 태어난 아이를 등에 매고 어딘가로 갔습니다. 제가 간 곳은 거실이 있는 낯선 집이었습니다. 거실에서 저는 그 아이의 목욕을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저는 갓난 아이를 왼손에 받치고 큰 대야에서 목욕을 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물이 차가웠습니다. 제 옆에 있던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여자 청년에게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여성은 사각쟁반으로 부엌의 수도꼭지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왔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 물로 따뜻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물을 붓자 물이 미지근하게 되었고, 이 정도 온도면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아이를 목욕시켰습니다.”
저에게 중요한 메시지가 두 개가 있었습니다. 교회를 외형적으로 개척하고 무언가 움직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씻기는 문제였습니다. 교회는 밖에도 있지만, 내면의 성전, 영적 성전이 중요함을 그 당시 깨달았습니다. 내면의 성소가 없는 자에게 외형의 교회는 가식과 형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 일을 위해서 바보같은 아니마가 저를 돕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보같은 순수한 감정과 마음의 태도가 나의 미래, 잠재력, 내 안에서 태어난 신성한 아이를 돌보고 섬기는데 도움을 줄 것이고, 이것이 신의 한수임을 일러주었습니다. 내적 단일성을 지닌 바보같은 아니마가 나를 돕는다는 것은 의심을 불러 일으키고, 자아에게 부족하고 마음에 그렇게 썩 들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족한 듯 보이는 바보 아니마의 빈틈과 여백은 신성한 힘이 개입할 수 있는 길을 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바보같음을 요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바보처럼 내가, 내가, 내가, 꽉 채우려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의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며, 바보스럽게 여백을 만들어 하나님이 그 빈틈 속에 들어오시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