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복판에서도 관람객을 불러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게 미술관이고 박물관이다. 그런데, 산속이라니…. 거장의 예술혼과 세계적인 건축가가 힘을 보탠 덕분일까, 도시인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 있다. 이제 갓 1년을 넘긴 '뮤지엄 산'. 강원도 원주까지 가야 했지만 그곳이 특별히 끌렸던 이유는 '빛과 공간의 작가' 제임스 터렐(71)과 '뮤지엄 산' 설계를 8년에 걸쳐 관여했다는 안도 다다오(73)의 조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일본 나오시마 지추(地中)미술관에서 두 사람의 협업 작업을 본 기억이 있기에 개인적인 기대감은 더 컸다. 4시간을 넘게 달려가 마주한 현장, 안도와 터렐로 대표되는 '공간(Space)', 각종 예술 작품(Art), 그리고 뮤지엄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Nature)을 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했다는 '산(SAN)', 그 안에 있음이 곧 힐링이었다. 관람 동선만 무려 2㎞ 이상 되는 전원형 미술관 '뮤지엄 산'으로의 느린 산책을 기록해 본다.
■제임스 터렐 작품 업그레이드
먼 길을 달려간 데다 다음 날까지 원주에 머무를 요량이었기 때문에 터렐의 일몰 프로그램부터 예약했다. 지난 4월부터 도입된 '일몰'은 1명이 예약하든, 10명이 오든 상관없이 무료 운영되지만 뮤지엄 멤버십 회원 가입자에 한했다. 그날의 일몰 예상 시각은 오후 7시 52분. 인근 여행지를 먼저 돌아보고 오크밸리리조트 산정에 위치한 '뮤지엄 산'에 도착했다. 원형으로 설계된 웰컴센터 앞
잔디 주차장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데, 직원들은 좌불안석. 이날따라 갑자기 퍼붓기 시작한 비로 인해 일몰 프로그램 진행이 어렵게 된 것이다.
관람 동선 2㎞ 이르는 전원형 미술관
'빛과 공간의 작가' 제임스 터렐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 손길 '물씬'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체취도
느린 산책에 깊은 감동 그리고 '힐링'이날의 '일몰' 예약 손님은 총 4명. 2시간 30분을
운전해 왔다는 한 고객의 항의가 특히 거셌다. 하지만 비 앞에선 속수무책. 직원이 역제안을 했다. '일몰'은 다음에라도 볼 수 있는 티켓으로 교환해 주고, 대신 올봄 한국을 다녀간 터렐이 '스카이 스페이스'에 우천 프로그램으로 추가한 '스페이스 디비전'을 보는 건 어떻겠냐고. 오후 8시도 넘긴 시각, 4명의 관객은 2명의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뮤지엄 산-터렐관'을 1시간 30분에 걸쳐 관람했다. 안내 직원은 "일몰 프로그램은 항상 비가 신경 쓰였는데, 이젠 우천 프로그램이 가동돼 한시름 놓인다"고 말했다.
■웰컴센터에서 뮤지엄 본관으로 다음 날, 다시 뮤지엄을 찾았다. 7만 1천172㎡(약 2만 1천500평) 부지에 안도가 설계했다는 '뮤지엄 산'을 제대로 느껴볼 차례다. 주변 환경을 고려한 친환경
디자인이 특징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한국적 정서를 고려, 건물 외부 마감은 흔히 보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아닌 '파주석(파주에서 캔 돌)'을 사용한 점이 남달랐다.
|
안도 다다오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이 적용된 뮤지엄 본관 실내 모습. |
웰컴센터를 출발해, 성벽을 연상시키는 두 개의 돌담 사이를 지나자마자 80만 주의 패랭이꽃을 심어 놓았다는 플라워가든이 나타났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패랭이꽃은 온데간데없이 흔적만 남았고, 강철 재료에 시적 감성이 더해진 마크 디 수베르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 작품만이 파란 하늘을 인 채 우뚝 솟아 있다. 곧이어 하얀 수피를 벗고 있는 자작나무 숲길이 이어지고 알렉산더 리버만의
조형물 '아치형 입구(Archway)'가 반기는 워터가든이 눈앞에 등장했다. 붉은 색이 칠해진 사람 인(人)자 모양의 파이프형 금속이 어쩌면 저리도 예리하게 잘리고 구부러질 수 있는지 놀라웠다. 그리고 뮤지엄 본관까지 이어지는 보도 좌우는 물로 채워졌다. 보도에 깐 돌은 충남 서산 해미에서 가져온 '해미석'. 멀리서 보면 뮤지엄 본관은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이다. 물의 경계선에는 울창한 숲이 자리를 잡았다. 물과 돌, 그리고 나무가 어우러진 자연 속 미술관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페이퍼갤러리와 청조갤러리워터가든 끝 지점에서 뮤지엄 본관으로 들어섰다. '
박스 인 박스(Box in Box)' 콘셉트의 건물이다. 안도다운 색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페이퍼갤러리부터 구경했다. 야외의 파피루스 온실에선 이집트 나일강가에서 가져왔다는 파피루스가 자라고 있다. 전세계에 3대밖에 없다는 실물 '소형초지기', '대방광불화엄경 진본(권38·보물 1192호)', 다양한 한지공예 등을 만났다. 독일의 설치예술그룹 'ART+COM'의 체험작품 '브리즈(The Breeze)'는 관람객이 하얀 종이를 펴서 검은색 유체
영상을 종이 위로 받으면 그것을 다시 물을 붓듯 종이를 기울이면서 다른 종이로 옮겨가게 만드는 재미난 체험이었다.
판화 체험 공방도 있다. 셀프판화,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에코 백 만들기, 나만의 엽서 만들기 체험이 가능했다. 안도 코너로 명명된 곳에선 '뮤지엄 산' 각각의 건물
모형과
스케치는 물론, 안도 건물의 특색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
백남준의 '인도는 바퀴를 발명하였지만 플럭서스는 인도를 발명하였다'. |
고 이병철 회장의 장녀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호를 딴 '청조'갤러리로 이동했다. '진실의 순간:한국화와 판화전'(3.28~9.14)이 개관전 2부로 전시 중이다. 소정 변관식의 4m 폭 수묵담채화 '무창춘색', 이응로의 수묵추상화, 황규백 판화가의 메조틴트 30여 점 등 총 40명의 작가 150여 점이 관람객을 맞았다. 특히 청조갤러리 3전시실은 백남준의 작품을 단독 전시하는 공간으로 마련됐다. 마치 커다란 성곽을 연상시키듯 거대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선 '인도는
바퀴를 발명하였지만 플럭서스는 인도를 발명하였다'(1991)가 기다리고 있다.
■스톤가든과 제임스 터렐관뮤지엄 본관을 빠져나오자 스톤가든이 이어진다. 신라고분을 모티프로 했다는 스톤가든은 9개의 부드러운 곡선 스톤마운드(돌더미)로 이루어져 있다. 곡선으로 이어지는 스톤마운드의 산책길을 따라 설치된 조각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터렐관에 이른다.
|
뮤지엄 본관과 제임스 터렐관을 잇는 '스톤가든' 풍경. |
터렐관은 시간(30분 단위)별 입장 인원 제한이 있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 하늘로 뚫린 타원형에 비친 하늘색은 조명 색깔에 따라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스카이 스페이스). 그리고 순간, 이것이 현실인가 싶어 다시 보면 가상이고, 가상이거니 생각했던 곳에선 실제 풍경이 펼쳐지는 반전(호라이즌)도 있었다. 또 푸른색 혹은 분홍빛의 단단한 스크린이 벽에 걸린 듯했는데, 막상 계단을 올라서 공간에 진입하면 마치 내가 그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도 받았다(간즈필드). 그리고 어떤 방에선 어디서 쏘는지 모를 빛의 각도만으로 공간을 연출한 작품(웨지워크)에 탄성을 질렀다. 빛을 활용해 공간 개념을 바꾼 터렐의 시도는 놀라웠다. 그는 매 순간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기다리면서 느껴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스톤가든, 워터가든, 플라워가든을 되돌아 웰컴센터로 나왔다. 액자 속 산수화가 현실에서 펼쳐졌다. 마치 먼 여행에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전시 제목처럼, '진실의 순간'은 언제, 어디서고 그 순간이 가장 빛나는 법일진대, 나는, 우리는, 얼마나 진실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글·사진=김은영 선임기자 key66@busan.com
TIP
■'뮤지엄 산'은2013년 5월 16일 '한솔뮤지엄'으로 개관했고, 그해 12월 '뮤지엄 산'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관람 시간은 뮤지엄 오전 10시 30분~오후 6시(매표 마감 오후 5시), 제임스 터렐관 오전 11시~오후 5시 30분(매표 마감 오후 4시 30분). 입장료는 뮤지엄 성인 1만 2천 원, 소인(7~18세) 7천 원. 뮤지엄+제임스 터렐관 성인 2만 8천 원, 소인 1만 8천 원. 판화가가 함께하는 판화워크숍(매주 월~수요일), 어린이 대상 '키즈맵 투어'(매주 토요일 오후 2시~3시 30분) 등 각종
교육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월요일 휴관. 033-733-9000.
■교통편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대구부산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남원주IC에서 빠져나와 둔전길 문막(여주) 방면으로 이동하다 오크밸리 2길로 좌회전 하면 된다. 4시간 20분 걸림.
대중교통은 부산동부시외버스터미널(1688-9969)∼원주시외버스터미널(033-734-4114)간 시외버스가 하루 11회 거의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 4시간 걸리고 요금은 2만 800원. 원주 시내에서 오크밸리까지는 무료
셔틀버스(막차 오후 9시 52분·문의 천호관광 033-763-1005)가 있다.
■묵을 곳과 먹을 곳'뮤지엄 산'이 위치한 오크밸리(1588-7676)에 콘도형 숙박 시설이 있다. 단지 내에는 골프장, 수영장, 조각공원도 있다. 오크밸리
홈페이지(www.oakvally.co.kr)에서 주변 펜션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식사는 단지 내
푸드코트와 한식·양식당, 그리고 '뮤지엄 산' 카페테라스 등에서 가능하다. 김은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