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사교육 이길 수 있다 / 서울 우신中
3개 방과후 프로그램 학생 수준별로 운영
교사도 밤 10시까지 남아 자율학습 아이들 지도
12일 저녁 8시 서울 구로구 소재 우신중학교는 교실 곳곳에 불이 켜져 대낮같이 환했다. 잔잔한 목소리가 2, 3층 복도에 울렸다. 교실마다 10여명의 학생들이 책을 읽고 교사에게 질문하는 소리였다.
잠시 후 1층 교장실에 자장면과 짬뽕이 배달됐다. 교장·교감을 비롯해 8명의 교사가 하나 둘 내려와 늦은 저녁을 들었다.
전상호 교사(과학)가 식사를 마치고 교실로 올라가자 학생들이 가방에서 파일을 하나씩 꺼내들었다. 올해 치른 시험지를 모두 모아 학생 스스로 출제 경향을 분석한 'X-파일'이었다. 전 교사는 시험 문제를 분석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학생들에게 X-파일을 만들어오도록 했다.
"이번 중간고사 과학시험에선 어떤 그래프가 나왔었지?"(전 교사)
"해수(海水)의 운동에 대한 그래프가 나왔고요, 실험 영역은 없었어요."(1학년 학생)
우신중의 이런 풍경은 매일 밤 10~11시까지 펼쳐진다. 이 학교는 '사교육 퇴출'을 위해 올 초부터 학생 실력별로 3개의 방과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프로그램에 들지 않은 학생들은 자율학습을 할 수 있도록 도서관과 교실을 개방했다. 자율학습 하는 학생들이 공부하다 막히는 부분을 물어볼 수 있도록 7~10명의 교사가 매일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는다.
-
- ▲ 서울 구로구 우신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오후 9시 공부방에 모여 차원석 교사와 함께 수업시간에 배운 부분을 복습하고 있다. 차 교사는 “필요할땐 한명씩 옆 방으로 데려가 개별 지도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학교에 맡겨달라"
우신중 역시 사교육 문제가 심각했다. 집안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목동의 학원에 다녔고, 형편이 넉넉지 않은 학생들도 동네 소규모 학원으로 몰려갔다. 이 학교 김시남 교감은 "일등부터 꼴찌까지 전부 다 학원을 다녔다. 나만 안 가면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갑중 교장은 올 초 부임하자마자 교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결론은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도록 학교에서 실력을 쌓아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 교장은 1학년 상위권 학생 40명을 선발해 학부모에게 일일이 전화했다. "학원에 안 다녀도 원하는 고등학교에 모두 들어갈 수 있도록 할 테니 믿고 맡기라"고 설득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지난 3월부터 26명의 학생으로 '방과 후 심화반'이 꾸려졌다. 영어·수학은 목동 학원가의 강사를 초빙해 맡기고 과학·사회는 교사들이 맡았다. 김 교장은 구청을 설득해 강사비 등 운영비 3000만원을 지원받았다.
중·하위권 학생들을 위해선 '튜터링(개인교습) 교실'을 열었다. 교사 4명이 저녁 9시까지 30명의 학생들을 지도한다. 튜터링을 맡은 남용호 교사(한문)는 "당장의 공부뿐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가르치려 노력한다"고 했다.
'공부방'은 기초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지난 12일 '공부방' 학생들은 낮에 배운 영어 교과서를 교사와 함께 읽으면서 복습하고 있었다. 김 교감은 "공부 잘하는 아이부터, 사칙연산이 안 되는 아이들까지, 모든 단계의 아이들을 학교에서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런 '학습지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기말고사의 기적
학생들은 처음엔 학교 프로그램을 어려워했다. 시험 전 과목별 요약 프린트를 내주고, 문제 푸는 요령을 알려주는 등 '입에 떠먹여주는' 식의 학원 교육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를 치르고 나자 3명의 학생이 심화반을 그만두고 학원으로 돌아갔다. 자녀 성적이 떨어진 학부모는 전화로 항의하기도 했다.
교사들은 또 대책을 마련했다. 자기주도 학습을 해본 적 없는 학생들에게 조금 더 방법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스스로 고른 문제집을 시험 기간 전까지 풀어 검사를 맡는 '문제집 인증제', 수업 시간 배운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스스로 정리한 '서머리(요약) 노트' 등을 도입했다.
1학기 기말고사 때부터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학년 전체 평균이 3점 이상 떨어졌지만, 심화반 학생들의 성적은 1점가량 올랐다. 2명만 제외하곤 21명 학생들의 영어·수학 성적이 올랐다. 튜터링 반 학생들의 성적도 5~7점 올랐다. 한 학부모는 "학원 보낼 형편이 안 돼 아이에게 항상 미안했는데, 올 초 튜터링 반에 들어간 후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반겼다. 최근에는 학원을 끊고 심화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조르는 상위권 학생들까지 나타나고 있다. 김 교장은 "당장의 성적뿐 아니라, 학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운 학생들은 훌륭한 미래의 인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