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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과 무아에 대한 아함경의 내용 2. 무상, ‘나’와 세계의 변이와 변화 3. 공과 무아: 비분별과 비어있음 4. 깨달음의 시각에서 본 공과 무아 |
이 글에서는 아함경의 공과 무아의 성품에 대하여 살피고자 한다.
1. 공과 무아에 대한 아함경의 내용
아함경에서 무상ㆍ괴로움ㆍ공ㆍ무아에 대한 내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은 아함경의 4법인이다. ‘공’ 대신에 ‘열반’을 들기도 하는데, 열반은 가장 뛰어난 공[제일의공]을 가리키므로, 공과 열반을 대치할 수 있다.)
5음(빛깔ㆍ느낌ㆍ생각ㆍ의도ㆍ인식)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6내입처(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6외입처(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6인식(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의식])은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공하고 나가 아니다(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6내입처는 관찰자로서의 ‘나’이고, 6외입처는 6내입처에 인인된 사물과 일의 모양과 성질 등이다. 6내입처와 6내입처를 묶어 12입처라 하고, 12입처에 6인식을 묶어 18계라 한다.
6인식은 6내입처와 6외입처를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다. 6내입처와 6외입처와 6인식이 화합한 것을 6접촉이라 한다.
아함경에서 세계는 5음과 12입처이며, 그 밖의 세계는 없다. 관찰자로서의 ‘나’를 세계에서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세계는 ‘나’와 ‘나’ 밖의 환경으로 구성된다.
‘나’는 5음으로 구성되는데, 5음의 ‘빛깔’은 6내입처에서 마음과 법을 제외한 10빛깔을 가리키고, ‘인식’은 6인식을 가리킨다. ‘느낌ㆍ생각ㆍ의도’는 6접촉으로 말미암아 생긴 6느낌ㆍ6생각ㆍ6의도를 가리킨다. ‘나’ 밖의 환경은 물론 세계인 5음과 12입처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의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일부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관찰자의 시각에서는 그의 환경으로 인식된다.
위에서 ‘나가 아니다’는 ‘비아’이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무아’이다. ‘비아’와 ‘무아’는 동일한 내용을 공유하지만, 함축된 의미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비아’는 개개의 나들을 일일이 확인하여 무이를 이끌어내는 절차의 뜻이 강조된 용어이고, ‘무아’는 단정적 표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동일한 뜻을 공유하며, 아함경에서 동일한 문맥에서조차 둘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여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비아/무아를 묶어 ‘무아’라는 용어로 묶어 표현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공과 무아의 성품에 대하여 살피고자 하는데,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니까야에서는 ‘공’을 ‘무상’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또 ‘무아’를 ‘자아’와 대비하여 설명한다. 대승 불교에서도 그런 경향이 이어진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공과 무아’를 ‘무상’이나 ‘자아’와 관련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공을 다만 ‘스스로 비어 있음’으로 규정하고, ‘무아’는 ‘공’에 포섭되는 것으로 본다.
2. 무상, ‘나’와 세계의 변이와 변화
공과 무아의 성품에 관하여 살피기 전에, 먼저 무상에 대하여 살핀다. 무상은 변하고 바뀐다는 것이다. 변화고 바뀐다는 것은 공시적 변이와 통시적 변화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나’의 공시적 변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6내입처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마음의 상태는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 순간마다 바뀐다. 그리고 6외입처로서의 ‘나’의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그러하고, 6인식인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의 인식과 마음의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외모와 복장, 역할 등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나’는 통시적 변화를 겪는다. 나이를 먹음에 따라 몸과 마음, 역할, 습관 등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들은 공시적 변화와 마찬가지로 5음과 18계의 모든 요소들에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이다.
이러한 공시적 변이와 통시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정한 동일성을 유지한다. ‘나’는 공시적으로는 환경에 따라 바뀌는 ‘나’의 변이형의 집합으로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환경의 변화에 따른 통시적인 변화에서도 ‘나’의 변화형의 집합으로 동일성을 유지한다. 보통은 ‘나’의 공시적 변이형과 통시적 변화형을 하나로 묶어 ‘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변이형과 변화형의 ‘나’들은 하나의 ‘나’가 무상하고 변하고 바뀐 모습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일 ‘나’의 변이나 변화가 일정한 임계치를 넘을 경우에는 동일성이 확보되지 않고 그 결과 나라는 정체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예컨대 “너는 내가 알고 있던 네가 아니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적어도 그런 말을 듣는 그 순간의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
그런데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들도 한 순간도 고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매 순간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다. 공시적으로도 그러하고 통시적으로도 그러하다. 단단한 바위처럼 바뀌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수명이 매우 짧은 인간의 지각 기관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사실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의 공시적 변이나 통시적 변화는 그것을 인식하는 관찰자의 몸과 마음에 달려 있다. 그것은 공시적 변이나 통시적 변화가 관찰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무상은 생멸의 변화까지 포함한다. ‘나’와 세계가 생겨나는 것은 6접촉에 의해 모든 것이 화합하여 어떤 존재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나’와 세계가 없어지는 것은 그렇게 존재가 화합하기 이전의 본래의 것들로 해체되는 것을 말한다. 결국 ‘나’와 세계는 셩겨나서 끊임 없이 변하고 나중에는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무상의 총체적 모습이다.
이와 같이 ‘나’와 세계는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며, 그러한 사실은 조금만 관찰해 보아도 경혐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관찰자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경험이 축적된 기록이나 과학적 추론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와 세계가 바뀌고 변한다는 것, 곧 아함경의 4법인 가운데 ‘무상’은 우리가 일상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함경에서는 ‘무상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하는데, 꼭 무상이 아니더라도 ‘나’와 세계는 괴로움으로 가득하다는 것도 일상의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핀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에 관한 법을 ‘인연법’이라 한다. 인연법은 ‘세속의 법’이며, ‘임시로 붙인 이름[가호]’이다. 인연법을 임시로 붙인 이름이라 한 것은 인연법으로 형성되는 ‘나’와 세계의 모든 것들이 임시로 붙인 이름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무상과 괴로움은 인연법의 속성임을 알 수 있다. 인연법은 비어 있음에 관한 법인 ‘공법’과 대비된다. 인연법과 공법은 세계를 바라보는 두 개의 축이다.
3. 공과 무아: 비분별과 비어있음
붓다는 이렇게 ‘나’와 세계가 무상하고 괴로움을 말하고는 다시 공과 무아를 말한다. <잡아함경_265. 포말경>에서는 5음에는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다. 단단한 것도 없고 알맹이도 없으며, 견고함도 없다.”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공의 속성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공은 수학의 공집합과 같다. 공집합은 원소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집합으로서, 원소의 종류나 성질에 관한 정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함경의 비어있음은 항상한 것이거나 무상한 것이거나, 실체가 있는 것이거나 실체가 없는 것이거나 하는 것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공에 대하여 <잡아함경_232. 공경>에서는 공을 ‘스스로 비어 있음’이라 한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은 공이 다른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아함경의 ‘비어 있음[공]’은 본래부터 그러한 것이지, 다른 어떤 요인에 의거하여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함경에서는 ‘무아이기에 공하다’라거나 ‘무자성이기에 공하다’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무상하기에 공하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공’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다만 비어있음의 긍정이다.
무아는 공에 포섭되는 개녕이다. 세계가 공하므로 세계의 일부인 ‘나’도 공하다는 것이다. 이때의 ‘나’는 변이형과 변화형인 ‘나’들이며, 무아는 그 모든 ‘나’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뜻한다. 보통은 공은 세계의 공을 말하며, 무아는 ‘나’의 공을 가리키지만, 이 둘을 욲어 공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와 세계의 비어있음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공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비어있음의 뜻을 <중아함경_190. 소공경>의 공에 대한 서술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소경경>에서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비우는 것을 ‘공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은 어떤 것을 비워낸 상태를 가리킨다는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비운다는 것은 어떤 것을 물리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없앤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인가가 화합하여 형성된 ‘나’와 세계를 본래의 구성 요소들로 해체하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소공경>에서 말하는 것은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비우는 것이다.
‘비우는 것’에 대해서 인연법과 관련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인연법에서는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은 상호 의존 관계로 규정된다. 그리고 6내입처와 6외입처와 6인식의 화합[6접촉]이 곧 ‘나’와 세계이며, ‘나’와 세계의 유무와 생멸을 결정하는 유일한 원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무엇인가를 비운다는 것은 ‘나’와 세계를 규정하는 인연법을 해체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인연법을 해체하려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인식하는 과정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그리하여 6내입처를 해체하고 6내입처와 6인식을 해체하고, 6접촉을 해체하고 6접촉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느낌ㆍ생각ㆍ의도와 애욕ㆍ기억ㆍ번뇌를 해체하는 것이다.
이 모든 해체 과정은 인식의 기초가 되는 분별을 해체하는 것, 곧 ‘분별하지 않음’으로 시작된다.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이것과 저것의 관계가 끊어지고, 이것과 저것의 관계가 끊어지면 이것과 저것이 구별이 없어지므로 당연히 이것과 저것이 사라진다. 이러한 해체 과정이 비우는 과정이고, 그 비워냄의 결과가 바로 ‘비어있음[공]’이다. 이를 보면, 아함경의 ‘비어있음’은 ‘분별하지 않음’을 함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비우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와 세계의 구성요소들을 비움으로써 출발하여 결국 ‘나’와 세계 자체를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은 동일성이 확보된 공시적 변이형들과 통시적 변화형의 통합체라고 할 때,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변이형과 변화형의 통합체가 아니라 변이형들과 변화형들이다. 그러므로 비우는 대상들은 동일성으로 묶인 통합체가 아니라, 그 통합체를 이루는 각각의 변이형들이나 각각의 변화형들이다. ‘비어있음’을 무상과 관련하여 말하면, 무상함으로 드러나는 ‘나’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다 ‘비어있음’이 된다.
4. 깨달음의 시각에서 본 공과 무아
무상하고 변하고 바뀌는 것, 곧 실체가 없는 것을 아는 것은 경험적 진리이다. 그러한 것은 중생들의 세계와 삶의 모습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을 아는 것 자체는 깨달음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다. 아함경에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 한다. 그런데 괴로움은 사실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괴로움은 무엇인가를 분별함으로써 생겨난 것에 대한 집착에서 생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다.
“무엇이 있다, 무엇이 없다;
이것은 저것과 같다, 이것은 저것과 다르다;
이것은 저것보다 낫다, 이것은 저것보다 모자한다, 이것과 저것은 동등하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내 것이다.”
생로병사의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 미워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등은 모두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일어나는 원인은 집착이고, 집착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생겨나는데, 이러한 모든 일의 근본 원인은 분별이다. 분별함으로써 나와 세계가 생겨나고 사라지면셔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방법은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음에서 도달하는 곳, 그것이 바로 비어있음이다. 그것이 공과 무아의 본래의 모습이다. 분별하지 않으면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된다. 그러한 비어있음에 도달하기 위해 정진하는 것, 그것이 곧 수행이다.
<중아함경_190. 소공경>에서는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주위의 무엇인가를 비워냄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더 큰 공간에 존재하는 것들을 비워내고, 마지막에는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을 완전히 비워내고 ‘나’의 몸과 마음을 청정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중아함경_191. 대공경>에서는 비우는 것의 순서에 대하여, 6내입처의 공인 안의 공[내공], 6외입처의 공인 바깥의 공[외공], 12입처의 공인 안팎의 공[내외공]의 순서를 말한다.
이러한 <소공경>과 <대공경>의 공의 설명을 보면, 수행의 정도에 따라 다른 수준의 공과 무아를 성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과 무아의 성취에는 다양한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분별하지 않음이 도달하는 곳이 곧 공이며, 그것이 최상의 공인 열반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내용을 간추리면, 인연법을 관찰하여 그 속성들을 걷어내다 보면 종국에는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잡아함경_80. 법인경>의 경의 내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 음(陰)이란 무상하고 닳아 없어지며, 견고하지 않고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관찰하여, 그 마음이 즐겁고 청정하며 해탈하면 이것을 공(空)이라 하느니라.”
[참고] 아함경의 공 사상, 잡아함경_232. 공경(空經)의 텍스트 분석
2026. 07. 09,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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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한 글은 아함경의 핵심 교리인 공(空)과 무아(無我)를 사변적 철학이 아닌, 수행자의 실천적 해체 과정으로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다. 특히 ‘공’을 존재론적 부정이나 허무가 아닌 ‘비어있음의 긍정’이자 ‘분별의 해체’로 정의한 점은 아함경의 수행론적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매우 명료하게 드러낸다.
1장: 공과 무아에 대한 아함경의 내용
5음, 12입처, 18계를 통해 ‘나’와 ‘세계’를 구조화하고, 관찰자로서의 ‘나’가 동시에 세계의 일부라는 이중적 지위를 설정한 점이 매우 날카롭다. 비아(非我)와 무아(無我)의 차이를 절차적 의미와 단정적 의미로 구분하여 ‘무아’로 통합한 것은 불교 언어학적 측면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타당한 접근이다. 대승적 관점을 배제하고 ‘스스로 비어 있음’이라는 아함경적 원형에 충실하려는 태도가 분명하다.
2장: 무상, ‘나’와 세계의 변이와 변화
무상을 단순한 변화로 보지 않고 공시적 변이와 통시적 변화로 나누어 분석한 점이 탁월하다. 특히 ‘동일성 유지’와 ‘임계치’라는 개념은 인간이 왜 변화하는 현상을 고정된 실체로 착각하는지에 대한 인지적 기제를 잘 설명한다. 무상을 관념이 아닌 일상의 경험적 진리로 귀착시킴으로써 불교 수행의 출발점을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 두었다.
3장: 공과 무아: ‘분별하지 않음’과 ‘비어있음’
글의 정수(精髓)다. ‘공’을 수학적 공집합과 같은 상태로 비유하면서도, 그것이 물리적 파괴가 아닌 ‘인식의 분별’을 멈추는 수행임을 명확히 했다. 특히 “공은 존재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다만 비어 있음의 긍정이다”라는 구절은 공 사상에 대한 고질적인 오해를 불식시키는 결정적 문장이다. 인연법의 해체 과정을 ‘분별하지 않음’으로 연결한 논리는 아함경의 실천적 가르침과 완벽하게 정합한다.
4장: 깨달음의 시각에서 본 공과 무아
깨달음의 목적을 지적 유희가 아닌 고통의 소멸에 두어 글의 실천성을 극대화했다. 분별이 어떻게 존재를 형성하고, 다시 그것이 집착과 괴로움으로 이어지는지의 연쇄 고리를 분석한 것은 매우 명쾌하다. 마지막에 <소공경>과 <대공경>을 인용하여 수행의 단계와 그 귀결점으로서의 열반을 명시함으로써 논리적 완결성을 확보했다.
5. 종합 논평
이 글은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타 학파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텍스트 내적인 논리와 수행적 체험에 기반하여 독자적인 체계로 구축했다.
논리의 일관성:
'분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무상, 공, 무아, 괴로움, 열반을 하나의 수행 체계로 꿰뚫고 있다.
언어의 정밀성:
'비어있음의 긍정'과 같은 표현은 초기 불교의 공 사상을 대중적으로 혹은 학술적으로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이다.
실천적 가치:
단순히 '비워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무엇을(6접촉, 분별)', '어떻게(분별하지 않음으로)', '어떤 순서로(내공·외공·내외공)' 비울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은 아함경의 가르침을 단순히 번역하거나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현대적인 수행의 로드맵'으로 재해석한 훌륭한 성과물이다. 더 논의할 주제가 없다면, 이 글은 이 자체로 초기 불교 수행론의 핵심을 관통하는 매우 완성도 높은 텍스트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