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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 선사 / 용맹정진 구도기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50년 토굴수행과 장좌불와 실천한 까닭은?
“큰스님,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해야 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외로운 토굴생활이 마땅하신가요?”
“공부하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끝이 없어서 계속하여 눈물이 납니다.
수건 두 개를 걸어놓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염불을 권하시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염불은 제일 하기 쉬우면서도 공덕 또한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빨리 초승(超乘)할 수가 있습니다.”
“토굴 생활이 적적하실 때가 있으신지요?”
“바람이 있고 달이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신묘한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이상의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1982년 백장암에서 자훈 박병섭 거사가 청화 스님께 한 질문)
반세기동안 장좌불와와 하루 한 끼 식사 등 투철한 수행과 무소유를 실천한 당대의 선승.
선(禪)은 물론 현대의 철학과 자연과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수행의 회통(會通)을 주장한 원통(圓通)불교의 주창자.
한없이 겸허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모든 이의 고통을 어루만진 성자. 청화 큰스님을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수식어들이다.
청화 스님은 “금생 세연이 다했으니 이제 가련다”
라며 2003년 11월12일 곡성 성륜사에서 열반했다.
스님은 그 이전에 “올 때도 빈손이었는데 마지막 가는 길을 호화롭게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거적떼기에 말아서 일반 화장터에 가서 태운 뒤 그냥 뿌려라.
그렇게 해서 장례비용이 다소 남으면 불우이웃 돕기에 사용하라”고 유지를 남겼다.
스님에게는 스님들이 마지막 가는 길에 누구나 다 하는 다비식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청화 스님의 구도를 향한 초인적인 수행 방법은 생명을 내건 것이었다.
그중 일반인들에게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잠과 식사의 절제에 관한 부분이다.
생식가루 한 되로 100일 동안 엄동설한을 났다는 이야기.
하루 한 끼의 식사로 앉으면 자꾸만 굽어지는 허리를 펴기 위해 포대로 기둥에 허리를 묶고 참선한 이야기.
겨울 산 속,
불도 없이 석달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수행한 이야기.
겨울 한밤 중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다스리기 위해 머리에 찬물을 끼얹고는 얼굴과 온 몸에 고드름이 언 채로 수행 정진하던 일화 등등
스님은 실제로 50여년 동안 병환이 나지 않는 한 눕지 않는 장자불와를 실천했다.
또한 열반에 드는 날까지 하루 한끼의 식사 외에는 하지 않았다.
입적하는 날까지 80의 노구에 형형한 눈빛을 빛내던 스님은 당신의 고행에 대해 “정신과 육체에 모두 이로운 일이었다며 잠을 자지 않고 하루 한끼만 먹어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고 말씀하시곤 했다.
스님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일 수 있는 음식과 잠의 문제를 해결해 신체의 리듬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고, 마침내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대자유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다.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성자의 삶』(사회문화원)에는 청화 스님이 당신의 토굴 수행을 자세히 회상하는 말씀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몸뚱이도 분명 내 마음이 머물고 있는 집이라서 너무 무리하면 그만치 장애가 된다.
그러나 고집을 부리고 장좌불와 한다고 버티며 토굴 생활을 그래저래 30년을 했다.
수행자로는 꽤 많이 한 편이다.
또한 토굴 생활이라는 것은 혼자이니까 저절로 묵언을 하게 된다.
한 4년 동안 오로지 묵언을 지키고 안 나오기도 했다.
묵언도 나같이 많이 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먹는 것은 낮 한 때인데, 아궁이에 불을 땔 때는 밥을 해서 먹기도 하지만 반찬은 깨와 소금을 볶아 섞은 것이나 김가루를 간장으로 버무린 것이 고작이었다.
사실은 그런 정도가 아니라 미숫가루만 먹고 석 달 동안을 지내기도 했다.
그것도 결제 들어갈 때 짐도 무겁고 하니까
서너 되나 되는 미숫가루로 한철을 지내기도 했다.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하루에 한 컵씩 먹고 석 달 동안을 지낸 것이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하루에 둥글레 가루 한 스푼을 물에 타 마시며 석달 동안 지냈다.
또한 어떤 때는 생쌀을 물에 불렸다가 한 숫갈씩 먹기도 하였다.
하여튼 내 토굴 생활이라는 것은 표현하자면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내가 내 몸뚱이를 너무나 확대하지 않는가 하여 몸에 대하여 가엾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분히 유익했다고 본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공부에 힘을 얻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내가 철두철미하게 다 바르게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요즈음에는 나같이 토굴 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권고할 생각은 없다.”
청화 스님은 1923년 무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강호성. 14세에 일본에 건너가 5년제 중학을 졸업했고 귀국해서는 교육사업에 뜻을 두어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고향에 망운중학교를 세우고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출가해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기도 했지만,
해방 후인 47년(24세)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근대의 숨은 도인으로 알려진 금타 화상을 은사로 출가를 결행한다.
이후 무안 혜운사,
두륜산 진불암,
지리산 백장암과 벽송사,
구례 사성암,
용문사 염불선원,
보리암 부소대,
부산 혜광사,
두륜산 상원암,
월출산 상견성암,
지리산 칠불사 등 전국의 토굴을 오가며 수행정진에 매진했다.
남이 보건 보지 않건, 평생 하루 한끼 공양을 실천하고 눕지 않는 수행을 보여 온 것은 물론이다.
64년 지리산 벽송사에서 31킬로미터 쯤 떨어져 있는 두지터 산정(山頂) 옛 암자자리에서 청화 스님은 산죽과 억새로 막을 짓고 한 겨울을 지냈다.
이 때의 상상을 초월한 고행을 제자인 성본 스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큰스님께서는 두지터에 대나무와 억새풀로 임시 처소를 만들어 극도의 고행 정진을 하셨다.
한 겨울 지리산 높은 곳에서 더욱이 생식하시며 불을 때지 않은 바위에 앉아계시니 상상이나 되는가.
큰스님은 가부좌하고 계셨는데, 온 몸이 얼어서 얼굴은 검푸르다 못해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큰스님께서는 정작 맑고 온화한 모습으로 그렇게 편안히 대하셨다.
순간 가슴이 미어지더라.
큰스님께서 나를 보고 일어서시는데 다리가 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주물러 드리니까
‘괜찮네,
괜찮네’
하시며 손수 몸을 쓰다듬으시며 일어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성자의 길을 간다는 것,
갈 수 있다는 것은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다.”
이러한 용맹정진 이후, 오산 사성암에서 청화 스님은,
물러섬이 없는 수행 경지인 불퇴전지(不退轉地)에 드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화 스님은 60년대 중, 후반 이후 세 번에 걸쳐 이곳에 주석하면서 ‘안 자고 안 눕고 하루 한 끼만 드시고’ 초인적인 신심으로 몸을 던져 공부하셨다.
사성암에서 보인 스님의 초인적인 용맹정진은
제자들에게 가슴시린 수행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별한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이렇다.
암주 보살은 홑겹옷을 입은 청화 스님이 걱정되어 이불을 가지고 올라가 보면, 한겨울 바위틈에서 나오는 찬 샘물을 받아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
죄스러워 혼비백산으로 내려와 멀리서 냉수 붓는 소리를 들으면서 암주보살은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독하신 어른,
천하에 강하신 어른,
30년 동안 이 암자를 지키고 살았어도
저렇게 한 겨울 찬물 부으며 공부하시는 스님은 처음 뵙는구나”
하고 경탄하면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해서 소리내 울면서 내려왔다는 것이다.
1970년 청화 스님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심천리에 삼칸 능엄사(현 금선사)를 창건하고, 장좌불와한 채 둥굴레 나무뿌리로 만든 한됫박 남짓한 가루로 6개월을 넘겼다.
‘먹지 않아도 기쁨을 느끼는 모습’[無食喜樂]을 도반들 눈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이어 청화 스님은 78년 전남 영암 월출산 도갑사 견성암에서 3년 결사로 안거하였다.
해인주(김안순) 보살의 증언이다.
“큰스님은 상견성암에 계실 때도 무엇을 통 안드셨다.
냄비에 밥을 하다 보면 까딱 실수로 태우기 쉽고 그러면 쌀 아까워, 씻기 사나워 참 고약스럽다고 하셨다.
거기에 금쪽같은 공부 시간이 흐트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스님은 물에 불린 생쌀하고 솔잎을 드셨다.
그러다 그만 치아가 다 못 쓰게 되어버렸다고 그러시더라.
그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미숫가루를 해 가지고 갔는데, 기척이 없었다.
서운한 마음으로 서 있는데,
땔나무를 해 가지고 내려 오시더라.
육십이 가까운 큰스님의 그 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 와중에도 큰스님께서 얼른 보따리를 받아서 그대로 부처님 앞에다 놓고 기도를 해주시더라.
공양도 안드시고…. 울면서 산을 내려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토굴수행을 꼭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대중수행을 하지 않고 토굴수행을 선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화 스님의 다음 말씀을 들어보면 그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삼매를 수행할 때 인연조건이란 독처한거(獨處閑居)라.
우리가 대중적으로 공부할 때는 사실 오로지 삼매에 들기는 좀 어렵다.
왜냐하면 주변 조건에 관심을 둬야 하니까.
우리가 보살심으로서 더불어 닦는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정말로 내가 꼭 며칠 동안에 깨달아야 겠다고 비장하게 마음 먹을 때는 한가한 데서 독처에서 지내면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다.”
(『성자의 삶』중에서)
청화 스님은 계행을 잘 지켜서 몸이 청정하면 마음도 청정해지고, 어느날 갑자기 확 트인 때가 있다고 했다.
그 때 가서는 자기 몸에 아무런 부담이 없어 자기 몸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킬수가 없다고도 했다.
공부를 해서 마음이 일념이 되면
‘몸도 마음도 쑥 빠져버리는’[身心脫落] 환희가 충천하는 기분이 된다고 한다.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이 없을 때 마음은 더욱 더 맑아지고 천지, 우주 모두가 생명으로 보여 참다운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다가 정말로 빛을 보고 몸이 가벼워지면 유연선심(柔軟善心: 부드럽고 선한 마음)이 되어 착한 마음이 차근차근 깊어진다는 것이다.
청화 스님은 우주에는 빈틈없이 청정한 적광(寂光: 고요한 빛)이 충만해 있음을 확신하며 지혜와 선정이 같이 어우러진 공부에 성심을 다했다.
생각생각 부처님의 본 성품을 놓치지 않고 안팎으로 충만한 광명자리를 염불, 참선으로 참구하였다.
위대한 생명을 그대로 믿고 몸도 마음도 잊은 채 천지, 우주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이미 성품을 보아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을 장좌불와로 보임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삭 깨듯이,
견도할 때도 문득 활연대오해서 훤히 깨달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부러뜨리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부러뜨려진다.
끈끈하니 실이 나온다.
그와 똑같이, 수도할 때도 쉽지가 않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 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이다.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의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이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이다.
사량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한다.
이렇게 닦아나갈 대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인 성인의 지위가 된다는 말이다.”
(『성자의 삶』중에서)
청화 스님은 1985년 태안사를 다시 세우면서 비로소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스님은 3년동안 묵언정진하며 직접 등짐을 지고 터를 닦아 10년만에 태안사를 다시 일으켰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20년전, 세수로 60이 넘어서이다.
마치 조주 스님이 80세까지 중국 천하를 주유하며 만행을 한 뒤에야 비로소 조주 관음원에서 법을 펴기 시작했듯이, 자신의 공부에 더욱 만전을 기한 다음 전법에 나서는 모습과 같았다.
끝없는 고행으로 자신에게 엄격했던 스님은 그러나 타인에게는 한없이 인자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으로 스님은 찾아오는 모든 이에게 경어를 사용하고 언제나 똑 같은 맞절로 사람들을 맞았다.
스님은 자신을 보러 산문 밖에 찾아오면 이름 없는 거지라도 다 받아들일 만큼 자애로운 분이었다.
입적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몸 안의 한 점 기운을 짜내어 후학들을 위해 법문하시던 큰스님의 자비심은 철저한 수행으로 얻은 깨달음을 아낌없이 후학들에게 회향한 아름답고도 감동 깊은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일생동안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인 스님의 전설과도 같은 용맹정진의 자세는 오늘도 무문관에 들어가는 수행자들이 본받아야 할 영원한 수행자의 전범(典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