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무 죽은 고기처럼 혈색 없는 나를 보고 얼마 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한다 ―― 김수영, 「강가에서」에서
지금 읽어보면 지극히 평범한 진술이다. 하지만 30년 전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물 묻은 손으로 전선을 만진 듯 전율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이 시가 김수영의 다른 시편들에서도 보이고 있듯이(일테면 「거대한 뿌리」 「성」 같은 시편들) 시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크게 위반했기 때문이다. 시라면 응당 고상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우아해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에 갇혀 있던 내게 그의 시편들 속의, 정도를 넘어선 과감한 시적 표현들(비속어, 욕설 등 일상 언어의 과감한 창조적 차용)은 당혹감을 넘어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전복과 위반의 진술들은 막힌 것이 확 터지는 해방감을 가져다주었다. 제도와 이념의 금기를 훌쩍 뛰어넘으려는 시인의 고투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세계의 발견과 개진에 뒤따른 기법과 표현에서의 그의 이러한 과격한 도전과 실험이 있었기에 우리 현대시는 그만큼 영토를 실질적으로 확장해 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정록 나무를 베면 뿌리는 얼마나 캄캄할까 ―― 이상국, 「어둠」 전문
가장 최근에 친 벼락이다. 봄이 되면, 나무는 깜깜한 어둠을 딛고 새싹을 밀어 올릴 것이다. 맨 처음, 씨앗 속의 어둠을 송두리째 끌어올려 초록지붕을 지었듯이, 다시 초록의 일주문 하나 세울 것이다. 발밑 어둠의 실뿌리를 더 깊게 박을 것이다. 잘려나간 그루터기의 겹눈, 칠흑 중의 칠흑은 발밑 어둠이다. 발바닥에 눈을 달고 세상을 읽자. 똥독에 빠진 쥐의 눈이 가장 반짝인다. 연필심은 종이보다 깜깜하다. 어둠의 핵에서 글이 나온다.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이 가장 어둡다. 새벽 일찍 쌀을 안치던 어두운 솥단지, 깜깜하기에 쌀보리는 더욱 희게 눈뜬다. 이진명 몸은 왜 있을까 ―― 김정환, 미상
김정환 시인의 시 구절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책장을 뒤졌으나 80년대에 읽으며 줄쳐 놨던 옛 시집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사람한테 문의하였지만 이 시구가 있는 시집과 시의 제목을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채로 이 시구를 만났을 때의 나를 불러보련다. 데뷔 이후 1992년 첫시집을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정환 시인께 부쳤다. “몸은 왜 있을까” 오직 이 한 구절을 허락도 없이 품고 있었던 오랜 빚을 갚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아아, 탄식의 수긍을 몸을 궁글리며 할 수 밖에 없게 만든 “몸은 왜 있을까”. 모든 오욕칠정과 생로병사와 살아 있다고 들고나는 이 물질적 숨의 현재, 이런 모욕이, 이런 치욕이 어디 다시 있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나이 삼십 중반. 무슨 제1의 대문짝이라도 되는 양 모가지 위에 얼굴을 올리고, 걸음 같지도 않는 걸음을 끌며 길거리를 헤매고 직장으로 십수 년을 흘러다녔다. 왜 이토록 피로하게 밥을 벌어야 하는지 돈을 벌어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아낼 재간이 없는 채. 그런데 답이 온 것이다. 몸은 왜 있을까, 질문이며 답인 이 시구를 받아올리자, 온 세월의 체증이 슬픔도 없이 녹아내리며 화장실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두 손 받쳐 지심으로 풀어 내리는 나를 보았다. 이 지난한 밥벌이의 되풀이가 똥 닦을 두루마리 화장지(세상 어디에 똥 닦을 휴지 하나를 거저 주는 데 있으랴) 한 뭉치를 사기 위해서라고 겨우 깨닫게 되자 화장실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 그날 오후의 나머지 일을 고요하게 마칠 수 있었다.
이 탄 아아, 늬는 산山ㅅ새처럼 날러 갔구나! ―― 정지용, 「유리창」에서
정지용의 시 「유리창」의 끝연 10째줄이다. 이 시의 “산ㅅ새처럼 날러 갔구나”처럼 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사라진 정황을 볼 수 있다. 이 시는 정지용이 죽은 아이를 보고 지었다고 한다. 9째줄의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만 보더라도 불길한 상징이 잘 되어 있다. 정지용은 시를 지을 때 아무리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한다. 슬퍼도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일까. “날러 갔구나!” 이 한 구절이 내 마음 속에 오랫동안 맺히게 된 것은 내가 1960년대에 《새소년》 잡지를 만들 때부터였다. 잡지 《새소년》이 잘 나갈 때 마음 속에서 부정을 타서 《새소년》이 안 팔리면 큰 충격을 받을 것 같은 우려와 함께 “날러 갔구나!”와 같은 암시는 항상 내 마음을 불안케 했다. 새시대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암시해준 시구였다. 이태수 저 금박金箔 바람, 저린, 낯선, 눈부신… ―― 황동규, 「사라지는 마을」에서
우울하게 헤매면서 시에 이끌려 다니던 문학청년 시절, 유치환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그리움」)라는 ‘절규’에 빠져들곤 했다. 현실과 꿈의 동떨어짐, 방황과 갈등 때문이었다. 그 뒤 박목월의 빼어난 언어감각과 조지훈의 의젓한 지사적 풍모에 매료되고, 김춘수와 황동규를 가까이 느끼게 됐다. 스승인 김춘수의 ‘꽃’을 노래한 시편들, 서정의 옷을 입은 그 인식론(또는 존재론)의 세계는 매력적이었다. 이어 황동규의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시편들은 부러움과 극복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황동규는 여전히 저만큼 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감들이 황금빛 불을 켜고 있으며 그 금박 바람이 “저린, 낯선, 눈부신…”으로 읽는 그 황홀하고 서늘한 정신의 불빛이 전율을 안겨주고 있는 것 같다. 이하석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이 시구는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고등학생 시절에 ‘문득 내게 왔다’. 참 많이도 이 시구를 중얼중얼대며 다녔다. “시의 언어는 필연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예이츠의 말마따나 이 구절은 한용운이 살았던 삶의 한복판에서 필연적인 목소리로 나타났다고 믿으면서. “그래, 재는 불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지. 그건 다시 타오를 수 있는 것. 마치 이별이 끝이 아니라 만남의 시작인 것처럼 말이다”라고 믿으면서. 이 놀라운 전환, 끊임없는 부정으로 인해 열리는 큰 긍정의 꿈의 실현의지야말로 ‘한심하게 어둡고 쓸쓸했던’ 나를 밀어올리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장석남 산山에/산에/피는 꽃은/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 김소월, 「산유화」에서
미인이 좋은 건 그저 좋은 것이지 까닭이 있지 않다. 늘 명확한 그 사실 앞에 엉뚱한 까닭들을 늘어놓는다. 좋은 시가 왜 좋으냐고 하면 어떠한 답이 나와도 그 시가 가지고 있는 함량에 미달인 채로 구차하다. 뼈가 굳기 전부터 이 시가 좋았다면 거짓일 공산이 크다. 확실히 이 시는 천재의 산물보다는 달관의 산물이다. 이십대 후반쯤일까 이 시가 막 쳐들어왔다. 좋은 시는 막 달려 들어오는 것이다. 저 꽃은 하나의 절간이기도 하고 백골이기도 하다. 때로는 남모르는 연애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하다. 그래서 좋다. 흔히 도피를 현실 망각의 행태로 간주해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다. 예술이 현실 도피라는 걸 모르는 탓이다. 도피가 아니라 초월이라고 하면 책망에서 면할까? ‘저만치’ 피어 있으니 목마름이요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늘, 궁극적으로는 저만치 혼자서 피다 지고 싶었다. 다시 구차하다!
장석원 날아간 제비와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어디로이든 가야 할 반역反逆의 정신//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시를 반역한 죄로/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 김수영, 「구름의 파수병」에서
여름의 산정에 삐쩍 마른 해골이 있다. 겨울 설산이 보낸 엄혹한 마른 바람이 보인다. 뽀개지는 듯한 통증이 몰려온다. 시가 두려워질 때마다 김수영을 읽는다. 비애의 정점에 다다른 시인을 본다. 그의 얼굴은 구름에 먹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곧 산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그는 다시 시를 쓸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반역할 것이다. ‘가장 높은 정신’(조정권)의 거처, 산정에 서 있는 반역자, 시인. 그의 정신과 구름의 방향.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디로든 가야 한다. 청빈과 쓸쓸함이 노래가 되는 순간. 이 염결성이 시인을 지키는 도덕이라는 것을 안다. 사랑의 끝이 보인다. 고요하다. 장석주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이 시구가 마음에 화살처럼 꽂혔다. 시인은 제 아내에게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놀라워라, “움직이는 비애”라니! 비와 비애의 음가音價가 겹쳐지며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비의 운동역학에 “비애”를 슬쩍 얹는 솜씨라니 ! 비애에 비의 운동성이 합쳐짐으로써 돌연 비애의 동학動學이 발생한다. 김수영은 아무런 운동성을 갖지 않은 정적인 것에 비의 운동성, 비의 속도를 부여한다. 대상적으로 존재하던 “비”라는 사물은 돌연 경계를 넘어 “움직이는 비애”라는 현존을 품는다. 시인은 음과 양이 하나로 포개지듯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 하나로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인식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지워질 때 움직이는 “비”는 움직이지 않는 “비애”를 품고 떨어지는 그 무엇으로, “비”라는 보편다수의 존재자에서 “움직이는 비애”라는 일자, 혹은 초월자로, 그리고 세계의 중심이 사물에서 사건으로 옮겨 간다. 장인수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시라는 놈이 나에게 기습한 경로는 아주 평범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국어 선생님은 교과서에 시가 나오면 무조건 외우라고 하셨다. 지금도 정철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수십 편의 시를 달달 암송하고 있는 것은 그 분 덕분이다. 달달 외우기 위해서는 밥 먹다가도, 똥 싸다가도,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하면서도 혀에 가시가 돋도록 연습해야 한다.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수직垂直의 파문波紋”,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라는 글귀가 서서히, 자꾸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시는 내게 엄습했다. 처음 읽을 때에는 싱겁거나 무덤덤했던 글귀였는데 어느 날 하루 종일 입술에 붙어서 팔딱이더니 전압이 세지면서 번개가 치고 온몸의 혈류가 범람하는 전율을 받게 된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수천만 개가 새우 떼처럼 튀었다. 그 이후 장석주의 시편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전윤호 고한읍 어딘가에 고래가 산다는 걸, 나는 몰랐다. ―― 이건청, 「폐광촌을 지나며」에서
이 나라에서 석탄이 가장 많이 나던 동네에서 자라며 광부의 아이들과 학교를 다니고 검은 산과 검은 강을 보며 자란 나였지만 나도 몰랐다. 고래를 잡으려면 동해바다로 가야 하는 줄 알면서 살았다. 내 친구가 고한초등학교에서 선생을 하고 가끔 도박에 미친 놈들이 손을 끌고 올라가 카지노를 찾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곳에 고래가 있는지, 그곳에 있는 고래를 누군가 보고 있는지. 가끔은 내가 뭔가를 놓고 사는 게 아닐까 하는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시를 읽으면 그렇다. 시인은 내 척추를 지나 심장으로 파고든다. 이젠 나도 고래를 잡으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정끝별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에서
내 스무 살의 ‘그 어떤 포스와 비전’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 스무 살 무렵, 학관의 전용(!) 화장실 벽에는 “님은 갔습니다. 지가 갔습니다. 그놈은 붙잡아도 갈 놈이었습니다”가 새겨져 있었다. 읽고 또 읽었으리라. 역시 그 무렵, 일요일의 나는 교회를 들락거렸고, 일요일을 뺀 허구헌날의 오전은 시와 사회과학을 한답시고 써클룸을 들락거렸고, 나머지 허구헌날의 오후는 술집을 들락거렸다. 시에 울고 사람에 울고 신에 울고 최루탄에 울고 술에 울었다. 초월과 역사와 현실 사이를 들락거리며 징징징 울던 그 무렵,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라는 구절은 얼마나 비장한 ‘포스’를 내뿜었던가. 얼마나 확고한 ‘비전’이었던가. 당신만 당신이 아니라 기리운 것이 다 당신이라는데…… 정병근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에서
기침을 하자고?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시인이 폐병쟁이인 줄 알았다. 마른 얼굴에 유난히 퀭한 눈을 가진 시인의 사진을 보면서 나도 기침을 하고 싶었다. ‘기침’은 살아 있고자 하는 자유의 분명한 언표임을, ‘눈雪’과 ‘눈目’이 다르지 않음을 지나오면서 더 절절히 공감하게 되었지만. 나는 기침을 자주 했다. 새벽녘 기침소리로 할아버지는 그 높은 존재를 알렸고, 아버지는 헛기침 끝에 우리를 나무랐다. 할 말이 없을 땐 자꾸 기침이 나왔다. 침묵이 나를 가로막을수록 기침은 더 날카롭게, 더 깊이 내장되었다. 기침은, 타성과 혼곤의 등짝을 후려치는 나 스스로의 죽비이면서 부조리와 억압에 항거하는 ‘한소리’일 것이다. 보라는 듯이. 들으라는 듯이. 하여, 기침은 지금도 저 희고雪, 퀭한目 ‘눈’과 함께 여태껏 내 폐부 속에 칼날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정일근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 ―― 김명인, 「동두천 2」에서
시인이 되고 국어선생이 되어 김명인 시인의 처녀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었다. 그 시절 나는 주당 45시간의 수업을 하는 교육노동자였고, 교실에서 교실을 떠도는 유목민이었다. 야학선생을 오래 한 나는 야학과 다른 분위기인 제도교육의 폭력에 가까운, 불합리한 제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필사를 하며 공부를 한 시집 『동두천』을 다시 읽으며 “캄캄한 교실에서 끝까지 남아 바라보던 별 하나”란 구절에 밑줄을 그었다. 그때까지 나는 미래의 ‘별’인 학생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주장자처럼 나를 쳤다. 단지 분노에 차, 별을 보지 못한 나에게 별을 보게 만든 그 한 구절 덕분에 나는 「바다가 보이는 교실」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 그 연작시가 내 처녀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정재학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에 끌음이 앉는다. ―― 이상, 「아침」에서
폐병을 앓았던 시인의 재미있는 구절이다. 결국 폐결핵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잃었지만 이상에게 폐병으로 인한 고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시는 찾을 수가 없다. 과거로부터, 앞으로도 시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있겠지만 이상은 ‘시는 결국 이미지이며 유희’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듯하다. 그것이 1930년대 시인들 중 그가 고립적인, 독자적인 위치를 갖는 이유일 것이다. 삶 혹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진정성의 척도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답답하고 재미없는 일이다. 시인은 스스로 환자이자 의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가진 시인이라면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이상은 보여주었다. ‘시에서의 진정성’과 ‘시에 대한 진정성’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둘의 사이가 그리 먼 것은 아닐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잠입자(Stalker)>에 나오는 어느 대사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요약해 주는 것 같아 말미로 대신한다.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아. 그래서 더욱 잊혀지지가 않아.” 정진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즈문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동지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冬天」 전문
1연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아직 끝나지 않고 있다. 전문을 다 옮길 도리밖에 없다. 이미 분석이 완벽하게 끝나 있는 시랄 수 있겠으나, 오히려 오독誤讀이 내게는 정독正讀이 된 경우가 많다. 그만큼 벼락으로 다가왔다는 이야기다. 이 시도 내게는 그런 범주에 속하는 시가 아닌가 한다. 이 시의 벼락의 정체는 마지막 쉼표(,)다. 이토록 호흡(리듬)과 의미와 리듬에 모두 걸려 영향하고 있는 부호를 나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마침표로 마감하면 이 시는 형식상의 리듬이 단절되고 산문적인 설명이 되어버린다. 꿈으로 맑게 씻는 이미지의 행위도 불가능해진다. 눈썹의 의미도 사실로 끝나고야 만다. 일거에 하나의 사물(반달)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개벽開闢이 벼락으로 왔다. 조말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 윤동주, 「길」에서
열일곱 살 때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가 도로道路로 질주疾走하’(이상)느라 막다른 골목이 좋았고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도 좋았다. 재미없는 교과서 속에서 이상은 이상해서 좋았다. 그는 열둘이라는 딱 맞춤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에게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했다. 많은 제십삼 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항상 줄을 잘 서는 학생에게 도주하기 좋은 막다른 골목은 쾌감이기에 충분했다. 윤동주는 너무 반성적이어서 거리를 두었다. 좀 쓸쓸해 보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너무 정직했다. 그래서 얼마 전 드라마 자막에 떠오른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는 신선했다. 그것은 반성적이었으나 막다른 느낌이었다. 내가 한창 길에 심취해 있을 때였다. 아침에도 걸었고 저녁에도 걸었다. 그것은 막다른 길이었으나 아스라이 멀어서 내가 걸어가고 걸어오는 길이 한없이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조정권 지난 여름은 줄곧 난행亂行만 당하고 겨우 한 줄의 시를 써서 수습하고…‥ 빈자貧者로다. 빈자로다. 나 이 땅의 일등 가는 빈자로다.” ―― 정진규, 「곳곳에 가을이 당도하였으매」에서
젊은 시절 내가 외우고 다닌 구절이다. 이 시의 빈취貧臭를 좋아했다. 그와 나는 한동네에서 살았다. 거나해지면 그 앞에서 나는 이 시를 낭송했다. 아름다웠던 시절이다. 한국 가톨릭의 빈승貧僧 구상도 그의 시엔 쇠락성이 있다고 말했다. 시에 매달려 있음의 세상! 우리가 추구했던 순수시의 빈취성貧臭性에는 상처받을 수 없는 순결과 도도한 처녀성이 자만심으로 살아 있었다. 누가 일등 가는 빈자라 자부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빈자로 남는다. 시인은 상처받을 뿐 훼손되지 않는다.
조창환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 이형기, 「황혼」에서
어느 위대한 영웅의 비장한 죽음과 그 자리에 흥건하게 흘러넘친 피를 연상시키는 황혼의 짙붉은 색감은 극한에 다다른 순수의 모습이다. 피와 죽음의 장면에 배음背音처럼 깔리는 절대침묵을 느끼는 순간, 나는 저 무서운 소멸과 황량한 무화無化에 대한 두려움 섞인 전율에 사로잡혔다. 일체의 잡음이 제거된 순수 그 자체인 죽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공포보다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인의 내면에 깃든 극한적 순수지향의 의지가 빚어낸 이 장면의 미학적 전율은 내 심리의 저층에 잠들었던 원색적 비장감을 깨워 일으켰다. 이형기 시 「황혼」이 보여준 환상과 꿈의 실재화實在化에 대한 치열한 탐닉은 한때 이미지의 감각적 형상화를 추구하는 내 시의 지향점이 되기도 하였다. 조현석 귓속에/복숭아꽃 피고/노래가/마을이 되는/나라로/ 갈 수 있을까/어지러움이/맑은 물/흐르고/ 흐르는 물 따라/불구의 팔다리가/흐르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죽은 사람도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권하는 나라로/ 아, 갈 수 있을까/언제는/몸도/마음도/안 아픈/나라로 ―― 이성복, 「정든 유곽에서」에서
엄마는 늘 아팠다. 시도 때도 없이 무릎 관절이 쑤셨고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했고 당뇨에 고혈압도 있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도를 낸 아버지가 근 1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그 기간 중 엄마는 몇 개월 동안 병석에 있었다. 예전에 앓았던 결핵성뇌막염이 다시 도졌다는 말을 이모에게서 들었다. 그때 나는 숱한 밤을 앉은뱅이책상에서 울다가 지쳐서 엎드려 잠들었다. 커다란 이불짐과 옷보따리를 지고 메고 판자촌이 즐비한 청계천 옆 왕십리로 이사를 했다. 그 시절 아버지 없는 집에 앓아누운 엄마를 보며 “갈 수 있을까. 언제는 몸도 마음도 안 아픈 나라로”를 생각하며 병이 낫기를 기원했다. 지금은 15년 전 돌아가신 엄마가 “일어나 따뜻한 마음 한 잔 권하는 나라”를 떠올린다. 딱히 마음 한 잔이 아니더라도 찬 술 한 잔이라도 권하기를. 천양희 움직이는 비애悲哀를 알고 있느냐 ―― 김수영, 「비」에서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詩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指紋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최영철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를 쓸 종이가 없어 날 지난 신문지 한 귀퉁이에 몇 줄을 끄적거려 그것을 천금인양 가슴 한편에 감추던 시절이 있었다. 시를 쓸 필기구가 없어 부러진 연필을 황급히 깎아 침 묻혀가며 눌러 쓰던 시절이 있었다. 멀쩡한 팔다리를 떼내어 버릴 수는 있어도 그렇게 얻은 시 몇 줄은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시절이 있었다. 호주머니에는 잘 해야 천 원 지폐 한 장이 고작이었다. 그것으로 낱담배를 사고 가락국수로 허기를 넘기고, 잔술 두어 잔이라도 마신 날은 찬바람이 씽씽 들어오는 어깨를 구부리고 두어 시간 집까지 걸어야 했다. 그리고 새롭게 뜬 아침 햇살 아래 지난밤의 모든 기대와 몽상을 찢고 불태워야 했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뜨거울 수 있었던 동력은 얄궂게도 그렇게 진저리를 쳤던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그다지 가난하고 외롭지 않게 된 지금, 나는 그래서 그다지 높고 뜨겁지도 않게 되었다. 자업자득이긴 하지만 그것이 두렵고 절망스럽다. 최종천 그러나 누구하나 정작 보면서도 보지 못할 아득한 헤루크레스 성좌 부근 광막한 시공 속에 이미 환원한 나를 ―― 유치환, 「모년某年 모월 모일」에서
시를 읽다 보면 놀라우리만큼 닮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청마 선생의 위 구절은 T.S. 엘리어트의 「게론쫀」의 끝에 나오는 다음 구절과 많이 닮았다. “바스러진 원자로서, 떨리우는 곰좌의 궤도 저편에 회오리치는 벨라슈 프레스카 캐멀부인은” 한창 시를 공부하던 시절 내가 좋아하는 시를 모아 놓고 보니, 박목월의 「하관」, 유치환의 「모년 모월 모일」, 정지용의 「유리창」 등으로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는 시였다. 청마 선생의 이 작품은 우리 시단에서 보기 드물게 드높고 명료한 정신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닮은 상상력과 감수성을 만날 때는 경이와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전율은 청년으로서 느끼는 좌절과 고독을 달래 주었던 것 같다. 나는 엘리어트의 시를 좋아해서 어느날 교보로 시집을 사러 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없는 것을 알고도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교보 직원에게 들킨 적이 있다. 내 호주머니 속에 든 것을 모두 꺼내놓으라고 하여 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책을 주면서 다음에 오면 갚으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다음에 가서 책값을 갚으려고 하니 없었던 일이 되어 있었다. 탐구당 문고판 엘리어트 시집 당시 값은 2천 원이었다. 1978년의 일이었다. 최창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서
내 삶의 길을 크게 벗어났거나, 너무 멀리 나왔다는 생각이 들 때에 백석의 시는 엄하고도 얼마나 정감 어렸던지, 나는 그대로 꼭 따라 했던 것이다. 아궁이에서 불씨를 화로에 담아, 꼭같이 무릎을 꿇고…… 시를 쓰거나보다, 시를 빚거나보다, 시를 산다는 일이 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줄곧 내 우매한 정신의 불씨를 살려주는 싯구는 참으로 많으나,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고 저 백석이 다가 낀 화로의 불씨로 보태보는 것이다. 최치언 너는 해바라기처럼 웃지 않아도 좋다 배고프지 나의 사람아 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 이용악, 「장마 개인 날」에서
모든 것이 다 엉망진창인 시절이 있었다. 엄마는 자꾸 꿈속에 찾아와 밥을 해주시며 ‘배고프지 않니, 배고프지 않니’ 그랬다. 그런 날이면 북쪽으로 머리를 둔 옥탑방에 누워 천장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장들을 보았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울면 지는 거니까. 그러나 울었다.“배고프지 나의 사람아/엎디어라 어서 무릎에 엎디어라” 되뇌이며 울었다. 한명희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김광균, 「설야」에서
김광균의 「설야」와 신경림의 「갈대」를 놓고 망설인다. “머언 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와 “산다는 것은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본다. 난독의 시절이자 남독의 시절이었고 사춘기로 접어들까 말까 한 시기였다. 눈 내리는 소리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이 구절은 야한 비디오 화면처럼 저절로 자꾸만 떠올랐고 나는 몰래 혼자 설레어하며 부끄러워했고 그러면서 몰래 이 구절을 계속 읊조렸다. 「갈대」를 읽고는 산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나는 내 삶에 대한 비극적인 예감으로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한편 그 괴로움을 즐겼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괴로웠던 기억보다는 설레고 부끄러웠던 기억에 한 표를 던지기로 한다. 세상에, 눈 내리는 소리가 옷 벗는 소리로 들리다니! 한미영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정현종, 「섬」 전문
스무 살이었다. 새내기 문학도였던 내게 정현종의 「섬」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오롯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알베르 까뮈에 심취해 있었고 까뮈가 스무 살에 읽었다던 그의 스승 장 그르니에의 산문집『섬』을 읽은 것도 스무 살, 그 무렵이었다. 가슴에 섬을 품고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연애는 수없이 내 안에 떠 있던 섬으로 인해 좌초했다. 떠나간 사랑을 탓하느라 청춘을 소비했다. 돌이켜보면 연애가 실패한 건 내 책임이었다. 섬은 내게 사랑의 은유와도 같았다. 왜냐하면 나의 연애는 끝없이 미끄러지는 운명을 반복하는 어떤 실현 불가능한 욕망의 치환이었으므로. 나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아직도…… 함성호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별 헤는 밤」에서 따는, 나는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생명의 존귀함이 아니라 나라는 우주에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그때 문득 이 한귀절로 나는 나라는 닫힌 우주에서 나라는 열린 우주로 귀환했다. 귀환이라는 것은 본래 그랬다는 말이다. 불가에서는 이 본래의 모습을 깨닫는 것을 ‘견성’이라고 한다.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러고 보니 나는 참 못생긴 얼굴이었다. 폭력 앞에서 비겁하며, 이익 앞에서 이기적이고, 공동의 선 앞에서 게을렀다. 이것이 나의 본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이후 내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단지 이 본래의, 못생긴 내 얼굴을 보고 난 후 나는 비로소 내 시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공자는 시경 삼백 수의 뜻을 한 마디로 말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이 말을 나는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 이 부끄러움을 통하지 않고 시는 없다. 허만하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망설임 끝에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의 이 구절과 「향수」의“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울음 우는 곳…” 중에서 「백록담」 쪽 구절을 고른다. 의예과 학생시절 다방에서 문리대 친구가 읽던 시집을 어깨 너머 훔쳐 읽었을 때 만난 추억의 구절이다. “꽃도/귀향 사는 곳”(「구성동九城洞」)도 좋지만, 이 구절은 「백록담」 구절에 비해서 색채감이 덜하고 앞연에 기대어 비로소 그 빛남이 더해지는 듯해서, 홀로서기로도 반짝반짝하는 인용문을 든다. 도체비꽃이 어떤 꽃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 아버지의 고향 뒷산에서 처음 보았던 도라지꽃의 신선한 푸름보다도 더 새파란 꽃인 것은 짐작할 수 있다. 릴케가 그의 「두이노의 비가」에서 말한 용담꽃도 이렇게 새파랄 수 없는, 나에게는 환상의 꽃이다. 도체비꽃이란 말이 그 앞 구절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와 내통하는 것도 얄밉다. “아름다움이란 무서움의 시작이다.” 허 연 교실내에 쌓인 두터운 먼지가 다정스러움 김소월 김수영 휴학계 ―― 김종삼, 「시인학교」에서 한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통닭 10마리를, 다른 한 손에는 김종삼의 시집을 들고 터미널에 서 있었다. 살기 싫은 휴가병이었다, 나는.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던 날 김종삼 시집 『북치는 소년』을 샀다. 덜컹대는 직행버스 안에서 시집을 읽었고, 다시 살고 싶었다. 그날 난 아주 나른한 계시를 받았다. 통닭 냄새를 맡으며 제외된 자들이 주는 눈부심을 알았다. 절창絶唱은 제외된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시를 씀으로써 세상에서 제외되고 싶었다.
허영자 서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 서정주, 「추천사?韆詞」에서
열일곱 살 때 처음 읽은 미당의 이 시구는 지금 읽어도 나의 고개를 떨구게 만든다. 아니 절벽에서 툭 떨어지듯이 나의 고개를 절망적으로 꺾어지게 한다고 함이 더 옳을 것이다. 그만큼 이 구절은 비극적인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는 시구이다. 인간의 한계― 유한한 목숨과 의욕에 못 따르는 능력의 한계, 찬란한 꿈에 비한 현실의 초라함 등을 이 한 구절은 절실히 감지케 하기 때문이다. 이 시구에서 역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간절함 때문에 나는 수십 번, 수백 번 이 구절을 읊조려 왔으며, 아마 앞으로도 여러 번 같은 일을 되풀이하리라 생각한다. 허형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 한용운, 「알 수 없어요」에서 60년대 중반, 법대로 가기를 권하신 아버지의 명령을 배반(?)하고 시인이 되기 위해 국문과를 택하여 상경한 서울은 참으로 우울의 극치였다. 날마다 흑석동 연못시장 안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지지고 볶은 문학론만 해도 하룻밤이면 족히 서너 말은 될 성싶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고 정치사상사, 중소기업론, 동양철학 등 전공과 관련 없는 과목을 공부하면서도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며 시집은 닥치는 대로 사서 읽어 제쳤던 시절, 밤새 미당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고 있던 어느 날 밤, 만해가 내게 와 나의 정수박이에 기름 한 바가지를 붓고 떠났다. 알 수 없는 시에 대한 희열을 맛본 순간이었다. 아마, 네루다의 시처럼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신념은 그 뒤의 일이지 싶다. 홍신선 귀신鬼神도 쓸쓸하여 살지 않는 한 모롱이, 도체비꽃이 낮에도 혼자 무서워 파랗게 질린다. ―― 정지용, 「백록담」에서 막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였다. 그때까지도 문청 기분을 완전히 청산 못한 나는 천둥벌거숭이로 살았다. 대학 시절의 글 친구인 박제천이나 한국시 동인인 오규원 등등 숱한 사내들과 어울려 술과 시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절제한 술과 젊음, 그리고 독서로 지새운 시절이었다. 학생들에게 어쩌다 그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지금도 거침없이 ‘화류계 뜬 시절’이라고 말한다. 화류계라니? 말 그대로 술과 책에 빠져 살던 황음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 한편으로는 청계천 8가를 곧잘 혼자 헤매었다. 끼니도 거른 채 고서점, 헌 책방이 늘비한 그곳을 헤매며 책 구경 내지 낡은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았다. 그렇다. 헌책더미에서 마침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에서 낸 『지용시선』를 찾았던 날의 그 득의양양함이라니. 지금도 그날의 째지던 기분은 마냥 생생할 밖에…… 집에 돌아와 풍문으로만 듣던 지용의 시를 나는 감격에 겨워 읽었다. 그때만 해도 정지용은 풍문 속의, 이름 석 자조차도 복자로 표기해야 했던 때가 아니던가. 작품 「백록담」을 읽어가다 4번에서 만난 이 한 구절은 나에게 충격이었다. ‘쓸쓸함’이, ‘홀로됨’이 말 그대로 ‘파랗게 질려야 하는’ 공포 자체라니. 그러나 정신의 도저한 경지는 이 공포를 극복한 자만의 것임을 나는 이즈음 체감으로 새삼 깨닫는다. 어즈버, 나도 이미 별수없이 늘그막에 들어선 것이다. 황병승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 기형도,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축축한 손길이 다가와 나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짓누르는 밤의 숲처럼. 처음 이 시를 읽어내려가던 스물일곱, 겨울, 나의 12월.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와 유리창 너머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내의 고통스러운 침묵이 나의 입을 틀어막았고, 그것은 등 뒤의 짐승처럼 나를 두렵게 했었다. 그리고 다시 펼쳐든 페이지, ‘거의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던 그때의 사내는 여전히 축축한 손을 내밀어 스물일곱, 겨울, 12월 쪽으로 나를 질 질 질 끌고 간다. 황인숙 하늘나라 다가올 때마다 맑은 물가 다가올 때마다 라산스카 나 지은 죄 많아/죽어서도/영혼이/없으리 ―― 김종삼, 「라산스카」에서 그냥 하염없이 좋다. 김종삼 선생의 모든 시를 좋아하지만 내 머리와 혀에 그 맛이 가장 짙게 감도는 시는 이 「라산스카」다. 끝없이 울려 퍼지는 조종소리처럼 사무쳐서 온몸이 저리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에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를 얘기했는데, 「라산스카」는 아름답도록 슬픈 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