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과 떠나는 지식의 최전선’ · 1 - 22(끝) 回 |
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22(끝). ‘평면지도를 찢어라’ |
원근법이 아니다 한국화의 多視點으로 세계를 보자 |
<22·끝> ‘평면지도를 찢어라’이어령과 떠나는 지(知)의 최전선 종군기자 생활의 마지막 날이다. 허전하다. 뭔가 무한히 계속되어야 할 화두를 남긴 채 갑작스레 필름이 끊긴 공백의 스크린. 그래도 물었다. “이제 결론을 낼 시간인데요.”
“결론이 어디 있어?” 이 교수의 핀잔이다. 그럴 줄 알았다.
결론은 없다. 항상 시작만 있다. 아니다. 이 교수는 항상 끝난 자리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이미 해결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 남들이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묻어버린 것. 그것들을 캐내면서 이어령의 화두는 시작된다. 이 교수가 잘 쓰는 말, ‘무덤(tomb)이 곧 자궁(womb)’인 것이다.
“세계 문명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결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이번에는 또 “중심이 어디 있어?” 라고 진짜로 화를 낼 기미다. 컴퓨터를 켜고 구글 어스의 지구를 돌리면서 “자, 보라고. 어디가 중심이야? 어디가 동이고 어디가 서야? 지구가 둥글다고 하면서 여전히 한국을 동쪽 끝에 놓고 있는 극동이라니, 웃기지 않아? 그리고 중국은 또 뭐야. 가운데 나라라고? TV도 못 봤나. 매일 보는 기상도를 보면 좌에 중국, 우에 일본,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한국이 있지. 진짜 가운데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이구만.”
농반진반 이 교수가 유쾌하게 웃었다. 갈 길이 먼데, 오늘은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그런데 지구본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요?” 슬며시 화제를 다른 쪽으로 옮겨본다.
그러자 이번에는 위키피디아 영문사이트로 가서 ‘Crates of Mallus’라고 쳤다.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 이름과 함께 둥근 공 모양의 지구본이 떠오른다. 2세기 때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라고 한다. 그 유명한 페르가몬(지금의 터키) 도서관 관장도 지낸 사람이라고 했다. 이 교수가 ‘여전히’ 라고 한 말은 그러니까 “18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라는 뜻이다. 놀랍다. 그 시대에 지구를 공 모양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 세계 지도를 그린 사람이 있었다니.
지구본이 아시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일본 전국시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서다. 하지만 그것이 일반 지식인 사회에 퍼진 것은 서양 문물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개화기 때의 일이라고 한다. 개화론자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은 지구본을 ‘진귀한 물체’ 라며 양이파의 열혈청년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에게 보여준다. 이런 나라들과 과연 상대해서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쿠마의 제자 뻘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같은 지구본을 놓고 정반대의 해석을 했다. “네덜란드도, 영국도, 작은 나라지만, 식민지를 만들어 부강한 대국이 되었다. 우리(일본)라고 못할 게 뭔가.” 결국 이런 생각이 애꿎은 한국 정벌론을 낳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어가던 이 교수의 지구본 화두가 드디어 한국으로 들어온다. “이들보다 백 년 전에 태어났는데도 한국의 실학자 홍대용은 달랐지. 둥근 지구를 바라보면서 그는 ‘천하의 중심에 중국이 있고 사방 끝자락에 오랑캐 땅이 있다’ 는 화이(華夷)사상이 얼마나 황당한가를 깨달은 거야.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정계(正界)이고 남들은 횡계(橫界)요 도계(到界)라 생각하지만, 실은 이 세상에는 횡계 · 도계란 없어. 모두가 다 정계인 것이지.”
그리고는 남북이 거꾸로 뒤집혀있는 호주의 낯선 세계지도(사진)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면지도를 찢고 지구본으로 세상을 보자구. 동도 서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어. 오랫동안 오랑캐 땅에서 살아온 한국. 중국만 있고 일본만 있던 아시아는 이제 가라. 서양의 원근법은 항상 그림을 그리는 자의 시점에서 풍경을 본다. 하지만 겸제의 금강산 그림은 어떤가. 여기저기 헬리콥터를 타고 그린 것처럼 다(多)시점으로 되어있지 않는가. 가까운 것이 작고 먼 데 있는 것을 크게 그린 역원근법(逆遠近法)의 세계. 그래서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온통 항아리처럼 둥글게 둥글게 그려진 그 전체의 기상.”
이 교수는 말을 멈추고 호주의 세계지도 속에 거꾸로 뒤집힌 한국 지도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끝내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 중앙선데이 제414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2.15
※ 역원근법(逆遠近法 · inverse perspective) : 조감도를 그리는 방법의 하나. 자연스러운 시각과는 달리 배경의 입체를 전경(前景)의 입체보다 크게 그리거나 화면의 중심을 향하여 집중하여야 할 선을 반대로 확산하여 그리는 방법으로, 특히 동양화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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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21. ‘자본주의의 끝’ |
양을 이끌거나 몰려하지 말고 양이 되라 그게 21세기 지도자다 |
<21> ‘자본주의의 끝’열흘 뒤면 을미년 설이다. 신문 지면마다 양 그림과 함께 설날 선물 안내가 한창이다. 그런데 양은 친숙한 듯 낯설다. 그래서 물었다.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고 멀리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짐승이 양(羊) 아닐까요.”
그런데 의외다. 핀잔 대신 칭찬이 돌아왔다. “이젠 정 부장도 전투 요원이 될 자격을 갖췄군. 그래, 우리는 지금껏 뻔한 게 아니라 모순되는 것, 애매한 것, 고정 관념 같은 것들과 전투를 벌였지. 12간지의 양이나 성경 속의 양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지. 그런데 정 부장, 잠 안 올 때 돼지를 세나 양을 세나?” 좋아할 틈도 없이 “그야 당연히 양떼지요” 라고 대답했다.
“그래 잠이 오던가?”
대답이 잘 안 나온다. 양떼를 세다 늘 실패했으니까. “그것 봐. 양(羊)은 영어로 ‘sheep’ 라고 하잖아. 그런데 h를 l자로 바꿔봐.” “아이구 sleep, 수면이네요.”
이 교수의 풀이는 언제나 나를 슬프게 한다. 엉뚱하게도 양이 잠과 연관된 것은 영어권에서 생겨난 속신이라는 거다. 공연히 양 세느라고 헛고생했구나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이 교수가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한자의 진선미(眞善美)에도 진만 빼고는 모두 양(羊)자가 들어있다. 착할 선, 아름다울 미. 그것뿐이랴. 마이클 샌델의 정의에 관한 강의를 듣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옳을 의(義)자속의 ‘양’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염소 밖에는 길러본 적이 없는 우리가 양과 친하게 된 것은 우리가 한자권과 영어권에서 살아왔다는 증거란다.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우리의 지도자 상이 목자(牧者)의 이미지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牧民心書)』만 해도 기존의 목민관에 다산이 접했던 천주교 신앙, 임금님이 용상에서 내려와 푸른 초원에서 양떼를 모는 모습이 겹쳐져 헷갈린다. 오늘날 한국 정치 지도자들이 서투른 것 역시 양을 쳐보지 못한 탓일 거라고 토를 달았다. 서구의 정치가와 기업가의 매니지먼트(management)는 양떼를 치는 비법에서 터득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옛날 목자는 양떼 앞에 서서 이끄는 형이었어. 나를 따르라 하는 인도형 지도자. 그런데 근대에 와서는 양들이 알아서 풀을 뜯어 먹으며 저절로 가게 하는, 즉 뒤에서 몰아가는 관리형 지도자가 나왔지. 셋째가 현대의 참여형 리더. 양떼 한복판으로 들어가 양들과 함께 움직이는 목자상이야. 그런데 미래형 지도자는….”
이 교수가 갑자기 뜸을 들인다. “미래형 지도자는 양털 가죽을 쓰고 양이 되는 목자야. 빅데이터를 이용해 양의 습성을 파악하거나 컴퓨터를 통해 자신을 양으로 시뮬레이션해버리는 거지. 실제로 양가죽을 쓰고 양떼를 친 종족들이 있었다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도 그런 비슷한 대목이 나와.”
이 교수의 이야기가 다시 한 단계 점프했다. “그런데 말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양치기의 리더십보다 그 많음이 더 중요해. 한 마리 양을 가진 자가 99마리 양을 가진 사람을 샘내서 ‘그놈의 양들 몽땅 늑대가 물어가라’ 고 저주하는 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불가능해. 반대로 99마리 양을 가진 양치기가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을 보고 ‘100마리를 채우게 한 마리를 달라고 하는 사회 역시 자본주의는 성공 못 해.”
이 교수가 꿈꾸듯 말을 매듭짓는다.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자기도 99마리 양을 가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사회. 99마리의 양을 가진 사람은 한 마리 양을 가진 사람이 언젠가 자기처럼 99마리의 양을 갖게 될 날을 위해서 모두 넉넉하게 풀을 뜯어먹을 수 있도록 더 넓은 초원을 찾아나서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만 자본주의가 꽃을 피울 수 있어.”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파하는 사람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사람들. 이런 말은 익히 들어봤지만 이 교수의 양몰이 방법의 네 번째 유형은 처음 들었다. “더 넓은 초원으로 가자. 그곳에 우리의 ‘지(知)의 최전선’이 있다.” 이 교수의 말에 가슴이 짠하다.
- 중앙선데이 제413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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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20. ‘비상구와 안전문’ |
좌우지간에 마음 놓고 생각해 봐 |
<20> ‘비상구와 안전문’약속시간보다 약간 늦게 나타난 이 교수가 들어오자마자 대뜸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을 터치하니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정이 예정보다 길어져서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잠깐 녹음했다고 했다. 이 교수가 한숨 돌리는 사이 휴대전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겼다. 실제와 가상의 경계가 묘했다.
“나가는 문이나 들어오는 문이나 문은 하난데 영어로는 들어오는 문(entrance)과 나가는 문(exit)으로 각각 다르게 부르지. 우리 같으면 그냥 출입문이라고 하면 되는 걸 말야. 서양에서 들어온 고속도로인데도 나들목이라는 말은 순 한국산이지. 나가고 들어오는 곳. 문과 달라서 고속도로 에서는 나가는 길과 들어오는 길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인데도 우리는 한꺼번에 싸잡아서 한마디로 불러. 어머니가 외출해도 ‘나들이 가셨다’ 고 하는 아이들은 모르면 몰라도 한국 아이들밖에는 없어. 서양에서는 ‘아우팅(outing)’ 이고 중국에서는 ‘촨먼(串門)’, 일본에선 ‘가이슈쯔(외출 · がいしゅつ)’ 라고 해. 출입이란 말도 쓰는 모양이지만 우리의 나들이와는 경우가 달라.” 자동차 문 바깥의 소음까지 녹음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나가고 들어온다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표현에서도 사용된다는 것이야. 예를 들어 ‘마음에 든다’ 는 말이 있지. 뭔가가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는 의미잖아. ‘정신나간다’ 는 말은 또 어때. 바깥으로 마음이 나갔다는 거지. 더욱 흥미진진한 말은 ‘마음 놓다’ 야. 이건 나간 건가 들어온 건가. 그렇지.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그 사이 지점에 마음을 ‘놓은’ 것이지. 한자말 방심(放心)하고는 달라. 그래서 한국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일생일대 운명이 걸린 시험장에 가는 아이를 붙잡고 ‘야, 마음 푹 놓고 잘 쳐!’ 라고 이상한 말을 하지. 그래서 ‘놓아둬’ 라는 말도 ‘버려둬’ 라는 말도, 이것이 버린 것이 놓은 것인지 잘 몰라. 비논리적인 것 같지만 세상에서는 ‘마음 놓고’ 하는 일이 있고 ‘버리면서 두어두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법이지.”
여기까지는 이 교수가 늘 하던 말이라 신기할 것이 없다. 그러나 지(知)의 최전선에 오면 모든 말이 다시 새롭게 들린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좌우는 싸워왔지. 그런데 우리말은 어때. 한참 말 싸움하다가 ‘좌우지간(左右之間)에 말야’ 라고 뜸을 들여. 좌와 우 사이에서 뭔가를 찾자는 거지. 너와 나의 입장 사이에 싸움을 푸는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이야. 그러니까 한국말에는 ‘잘하다’ 와 ‘못하다’ 사이에 ‘잘못하다’ 라는 이상한 말이 있는거고. 100퍼센트 잘한 것도 못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좌·우(左右)가 양극화하면서 잘 못하다는 말은 못하다의 의미로 기울어지고 말았지만, 분명 우리는 극단적 이항대립에서 벗어나 제 3항의 ‘거시기 머시기’를 찾으려고 했어. 말이나 논리로는 꼭 찍어낼 수 없는 세상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을 찾는 것이 창조적 삶이야.”
녹음된 분량이 끝났다.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고속도로에서 나가려고 하는 사람은 나가는 길을 찾고 진입하려는 사람은 들어가는 길을 찾는데, ‘나들목’ 이라고만 하면 어디로 가지요?”
녹음을 풀고 질문을 하자 이 교수가 ‘너 잡혔다’ 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고문실 비상구 표시등을 가리킨다.
“저 사람 남자야 여자야?” “남자네요.” “왜 남자지? 여자를 그리면 안 되나?” “그러게요.”
영어로 하면 남자라고 할 때에도 맨(man) 이고 사람이라고 할 때도 맨이다. 길거리 건널 때에 사인도 남자 모양이다.
“여자들이 발끈해서 비상문이나 횡단보도 아이콘을 여성 그림으로 바꾼 것도 있어. 그러면 아이들은 또 뭐랄까. 그래서 아이들을 그려놓은 픽토그램도 생겨났어. 비상시에는 자기밖에 안 보여. 문 안에 있는 나밖에 안 보인다고. 그러나 소방대원 눈에는 어떨까. 방 안과 밖이 모두 보이지. 방안에 있는 사람 시점에서 일본 사람은 그걸 비상구라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은 거꾸로 안전문 혹은 태평문이라고 해.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전체를 놓고 보면 나들이가 되고 나들목이 되는 거야.”
더 질문을 하려 들자 이 교수는 에버노트에서 긁어온 세 개의 비상문 표지판 그림을 넘겨 주면서 일어섰다. “좌우지간에 마음 놓고 잘 생각해 봐.”
- 중앙선데이 제412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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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9. ‘거시기 머시기’ |
현대 문명 사회에서 “이 말이 없었더라면” 살아갈 수 없을 뻔했던 한국인들 |
<19> ‘거시기 머시기’ | 와차마컬잇 ‘(whatchamacallit · what you may call it)’. | |
문득 이 교수의 얼굴이 시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21세기 ‘지(知)의 최전선’을 논하던 자리에서 갑자기 ‘거시기 머시기’ 란 말이 튀어나온 탓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골 장터라면 몰라도 탈구축이니 해체이론이니 하는 서구의 포스트 모던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토픽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정확히 거시기 머시기가 뭔지, 그리고 그게 어째서 한국적 사고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기자의 질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 교수는 늘 하듯이 컴퓨터의 에버노트를 열어 자료를 꺼내 보여준다. “그런데 내가 직접 말하기에는 좀 거시기 해서 그러는 건데 몇 해 전에 미국 교민이 올린 글이야. 한번 읽어봐요.”
기자는 초등학교 학생처럼 블로그에 올려진 글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신혼 초다. 남편과 뉴스를 본다. 뉴스는 물론 영어로 쏼라거린다. (남편 막 흥분해서) “야, 저놈 진짜 머시기 한데!!!…” (그리곤 말이 없다. 아무리 기다려도 뒷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참다못해)“머시기가 뭔데?” “아, 왜 그거 머시기 있잖아.” “글쎄 그 머시기가 뭐냐고?” “아, 그 거시기하고 머시기한 거 그거 몰라?” “글쎄 그 거시기하고 머시기한 그거가 도대체 뭐냐고?”
밤을 새워도 그 머시기하고 거시기한 그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남편은 수십 년 동안 하루종일 영어만 쓰다가 막상 집에 돌아와 한국말을 하자니 딱 떠오르는 말이 없으면 뭐든지 ‘머시기’로 표현했다.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나는 처음엔 그 머시기를 알아내려고 말도 시키고, 화도 내보고, 갈구기도 하고, 지근지근 약도 올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글쎄, 그게 머시기라니까’ 였다.
그렇게 같이 살다 보니 이젠 남편의 ‘머시기’를 다 이해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한마디로 ‘척하면 머시기’의 내공이 쌓인 것이었다.
글을 다 소개할 수가 없어서 유감이지만 거시기 머시기의 글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 오늘도 정말 머시기한 하루였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영어에도 머시기란 표현이 있다는 것이다. 와차마컬잇(whatchamacallit - what you may call it)이 그것이다. 이 말이 없었으면 미국 살면서 정말 머시기할 뻔했다.”
이 교수와 나는 모처럼 만에 한참을 두고 웃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 끝이 촉촉했다. 그러고 보니 이 교수의 글로 테마관을 꾸몄던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주제가 바로 ‘거시기 머시기’ 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빡빡한 데카르트 아이들이 싸우는 이 지(知)의 최전선에서 질식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거시기 머시기’ 의 방독 마스크가 꼭 있어야 한다는 거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지만 뭔가 분명히 우리가 서로 알고 있는 것, 말로는 잘 표현할 수 없는 안개에 쌓인 그 무엇 말이지.”
셰익스피어를 낳은 영어지만 그걸 말하려고 하면 ‘what you may call it (이걸 뭐라고 부르지)’ 처럼 한참 긴 문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한국말로는 그냥 ‘거시기’ ‘머시기’ 라고만 하면 다 통한다. 이 교수가 덧붙여 말했다.
“정 부장, 서양 사람 뒤통수 보고 따라가느라 참 힘 많이 들었잖아. 개화기 때부터 지금까지 말야. 그런데 스마트폰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인데도 이걸 좀 보라구.”
미국산 거시기 머시기의 이름이 붙은 초콜릿(사진)이었다. ‘와차마컬잇 (whatchamacallit-what you may call it)’.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초콜릿이었지만 언젠가 한번은 이 교수를 모시고 함께 먹어보고 싶었다.
- 중앙선데이 제411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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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8. ‘차부둬(差不多)’론 |
“이거냐 저거냐” 끝까지 따지는 서양 “이거나 저거나” 마찬가지라는 동양, 싸우면 누가 이길까 |
<18> ‘차부둬(差不多)’론 | 중국의 근대 사상가 후스(胡適 · 1891~1962) | |
이 교수를 따라 매주 ‘지(知)의 최전선’을 ‘종군(從軍)’한지도 어느새 다섯 달. 동서와 고금, 인문과 과학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의 생각을 제대로 쫓아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단 흐름을 파악하게 되니 비약이라 느꼈던 부스러기들이 어느새 직소 퍼즐처럼 짝이 맞춰지면서 멋진 그림 모양을 드러낸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실은 하나의 다면체로 구성된 하이퍼 텍스트였던 것이다.
“오목 밖에 둘 줄 모르는 사람이 바둑판을 보면 흑백 바둑알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하지만 바둑 둘 줄 아는 사람은 그 바둑알 하나하나가 그냥 놓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지.”
이 교수는 기자에게 늘 이런 말을 했다. 이어령 전선의 종군기자 노릇을 하다 보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 조금씩 보인다. 수 천년 내려온 서구 문명의 이항대립 체계를 삼항순환의 동양 체계로 새롭게 구축하려는 ‘지의 최전선’에서 혼자 외롭게 싸우는 이 교수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문맹자도 하나 둘 셋은 셀 수 있잖아. 그것만 알아도 돼. 하나가 둘이 되면 정보가 되지. 컴퓨터에서는 모든 정보가 1과0의 디지털로 처리 되잖아. 정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 예스냐 노냐를 따지는 거지. 그런데 2가 3이 되면 무엇이 되지? 예스도 노도 아닌 일탈이 생겨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그러니까 2는 정보고 3은 초월인 거여.” 천 · 지 · 인 삼재(三才)사상과 삼태극으로 올림픽을 삼킨 사람. 월드컵에서 bbb(before babel brigade)라는 ‘3b 통역장치’로 언어장애를 뚫은 사람. 난해한 라캉이론을 가위바위보라는 어린이 놀이로 일격에 깨뜨린 사람. 그가 왜 우리에게 보로메오의 도형을 보여주었는지, 왜 서양 사람들만 부르는 합창 ‘잘못된 결합’을 들려줬는지, 그리고 왜 아이들이나 하는 가위바위보 이야기를 되풀이 했는지. “2는 정보요 3은 초월” 이라는 이 교수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분명해 졌다.
“정 부장, 오늘의 전투는 아주 쉬워. 차부둬(差不多)라는 재미있는 이야기야.”
여전히 안 쉽다. 차부둬(差不多). 직역하면 ‘차이가 많지 않다’는 중국어로 ‘그게 그거’라는 의미다. ‘만만디(慢慢的)’와 더불어 중국 문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후스(胡適·1891~1962·사진)가 중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썼다는 풍자소설이 『차부둬선생전(差不多先生傳)』이다. 대충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중국 어딜 가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차부둬’ 선생이다. 그가 어릴 적에 어머니가 흑설탕을 사오라고 했다. 그런데 백설탕을 사왔다. 왜 백설탕을 사왔느냐고 나무랬더니 “백설탕이든 흑설탕이든 그게 그거잖아(차부둬)”라고 했다. 그의 ‘차부둬’ 철학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됐다. 기차를 놓쳐도 “오늘 가나 내일 가나”, 의사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수의사를 불러와도 “의사나 수의사나”라고 했다. 심지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숨을 거두면서도 “죽는거나 사는 거나, 차부둬(그게 그거)”라고 했다는 것.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 소수점 이하까지 계산하는 서양 사람 앞에서 대충대충 건성건성 살아온 중국인들은 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 차부둬(差不多)는 “이것이나 저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에 점을 하나 찍어보란다. 그럼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된다. 이것과 저것에 ‘나’자가 붙으면 그 사이의 차이가 사라지고 ‘냐’자를 붙이면 반대로 그 차이가 벌어진다.
점 하나에 세상이 바뀐다. 하지만 차부둬나 그 반대나 이것과 저것의 둘을 전제로 한 삶의 태도다. 그런데 한국에는 예스냐 노냐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의 3이 있다는 것이다. ‘거시기 머시기’라는 한국말의 묘한 사투리다. 이 이야기는 거시기 머시기 하니 다음 회로 미뤄야겠다.
- 중앙선데이 제410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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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7. 음양은 대립이 아닌 조화다 |
하나만 알아서는 안돼 둘만 알아서도 안돼 안 보이는 셋까지 생각해야 |
<17> 음양은 대립이 아닌 조화다
시무식에 이어 새해 덕담 나누기 행사가 끝나고 이 교수의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었더니 흥겨운 노래소리가 들렸다. 모니터에서는 유럽 사람들로 보이는 이들의 합창 동영상이 흘러나왔다. 왠지 약간 코믹한 분위기다.
“플란더스와 스완이라는 사람이 만든 ‘잘못된 결합(misalliance)’이라는 곡이야. 1950년대 후반에 나와서 인기를 끌었지. 그런데도 여전히 인터넷에 이 곡이 뜨는 이유가 무엇일까.”
“글쎄요, 무슨 내용인데요.”
“오른쪽으로 감아도는 덩굴식물인 인동(사진)과 왼쪽으로 도는 덩굴식물 메꽃이 서로 만나 사랑을 하게 돼었대. 양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지. 지나가던 벌도 한마디 해. 너는 왼쪽으로 돌고 또 너는 오른쪽으로 도는데 그럼 너희의 자식은 어느 방향으로 돌까? 그냥 똑바로 올라가나? 그럼 붙어있질 못하고 그냥 땅에 떨어져 죽을텐데 라고.”
“아, 좌우대립에 대한 풍자군요.”
“마틴 가드너란 사람이 쓴 『Ambidextrous Universe』라는 책에도 나와. 내가 1960년대에 읽었던 책인데 보니까 2005년에 3판이 나왔더라고.”
“그런데 이 동영상은 어떻게 찾으신 건가요?”
“하이퍼 텍스트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지. 이항대립에 관한 관련어들을 훑다 보면 이런 놀라운 곡을 발견하게 되지. 서양사람들은 정치의 좌우만이 아니라 ‘To Be or Not To Be’, 전통적으로 이거 아니면 저거지. 그러니까 이 노래의 배경에는 물리학의 패러티(parity) 법칙이 있는 거야.”
아, 물리학 무슨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진다. 용어부터 생소하면 진도 나가기가 쉽지 않은데.
“하하, 정 부장, 너무 골치아파 하지마. 이게 쉽게 말하면 대칭이론이야. 우리의 손은 하나인데 손등과 손바닥으로 나뉘어 있잖아. 동전도 하나인데 앞면과 뒷면이 있잖아. 모든 것이 이렇게 상반된 두 개의 대칭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 패러티의 법칙이야. 물리학에서 불변의 법칙으로 여겨져 왔지. 그런데 이 법칙이 깨지기 시작했어.”
“누가, 어떻게 했는데요?”
“중국계 물리학자인 리&양(리정다오와 양전닝)인데, 이들은 대칭성이 깨어질 수 있다는 이론을 처음 제시해 그 이듬해인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 서양 학자와 달리 이들은 음양의 원리를 아는 중국계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 태극문양을 그리고 한번 접어봐. 그 도형이 비대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그것이 대립이 아니라 보완하고 돕는다는 것을 알 수 있잖아.”
이 교수가 찾은 동영상 속 노래는 좌우가 양극화된 것의 비극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무너졌다. 패러티 법칙이 무너진다는 것은 우주의 좌우 대칭 구조가 비대칭 구조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양자택일의 ‘동전 던지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가 흐름을 받쳐주는 ‘가위바위보’가 우주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하나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이 물고 물리는 가위바위보의 비대칭과 순환관계를 만들어낸다고.
이 교수는 이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새로운 지성을 만들어가는 노력이라고 했다. 세계 문명이 아시아로 넘어오면서 데카르트의 세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시초에 불과하지만 여기서 큰 임팩트가 생기는데 바로 이곳에 젊은이들이 맞닥뜨려야할 지(知)의 최전선이 형성된다고 강조했다. 가위바위보의 후속 강연은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새로운 우주의 질서를 보고 있는 이 교수의 놀라운 시선이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인동초의 사랑을 노래한 음악으로 들려준 것이다.
- 중앙선데이 제409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5.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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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6. 보로메오의 고리 |
들숨 날숨만으로는 숨 막히는 세상 떨어진 두 원 맺어주는 제 3의 원 |
<16> 보로메오의 고리
“정 부장, 뫼비우스의 띠 알지?“ “그럼요. 안과 밖이 서로 바뀌며 무한대로 이어지는 띠죠.” “그럼 보로메오의 고리(Borromean Rings)는 알아?”
어쩐지 첫 질문이 쉽다 했다. 이건 또 뭘까. 우선 뫼비우스의 띠(Mobius Strip)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부터 이 교수의 설명이 시작됐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안과 밖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한 가정에서도 안사람 바깥사람으로 구분하잖아. 모든 건축도 벽이 있고 안과 밖을 나누고 있지. 그런데 무엇이 안이고 바깥인지, 이 분명한 사실이 뫼비우스의 띠 하나로 금세 무너지고 말아. 밖이 안이 되고 안이 밖이 되는 세상,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무한의 세계, 그 신기한 공간을 볼 수 있잖아. 뭐 이젠 신기할 것도 없어. 리사이클 운동의 로고로 쓰이고 있으니까. 하지만 한 걸음 더 나가면 난해하기로 이름난 자크 라캉이 자주 사용한 이런 도형이 되는 거요.”
이 교수가 노트북 화면에 낯선 도형 하나를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보로메오의 고리(Borromean Rings · 사진)라고 하는 건데….” 라캉이란 말에 바짝 긴장하자 눈치를 챘는지 이 교수는 “어려운 것 아냐. 르네상스시대 이름을 떨쳤던 보로메오가(家)의 문장(紋章)이었던 거야” 라며 구슬리듯 말했다.
자세히 보니 정말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두 원만 보면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다른 한 개의 원이 그 중 한 원과 매듭지어 있기에 세 원이 얽혀지게 된다. 그래서 한 고리만 풀려도 전체가 흩어진다. 수식으로 표기하자면 세 원은 a>b>c>a의 순환관계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 중요한 거죠?” 설명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성급하게 질문을 했다. 늘 그랬듯 이 교수는 상대를 궁지에 몰아놓고 스스로 쥐가 고양이를 무는 역전의 힘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번만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본인에게 직접 그 해답을 듣고 싶었다.
플라톤 때부터 서양사람들의 사고법은 동전 던지기와 같은 것이었다. 안/밖, 육체/정신, 선/악, 미/추 그리고 진실과 허위가 동전이 앞과 뒤로 엎어지듯 갈라진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끝난다. 햄릿처럼 ‘to be’ 가 아니면 ‘not to be’ 다.
그런데 가위바위보는 어떤가. 주먹과 보자기 사이에 반은 펴지고 반은 닫힌 가위가 있다. 보르메오의 두 원은 대립되어 있지만 또 하나의 다른 원이 그 둘을 잡아주듯 말이다. 가위가 있기 때문에 전체가 물리고 무는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무엇을 결정할 때 서양사람은 동전 던지기를 하고 동양사람들은 가위바위보로 정한다.
이 교수는 가위바위보가 원래 도교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였다. 뱀은 두꺼비를 이기고, 두꺼비는 지네를 이긴다. 그리고 지네는 뱀을 이기는 것이다.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서 최고의 강자란 없다.
설화가 아니라 한중일의 정치현실을 봐도 그렇단다. 관료는 정치가에게 약하다. 국회에 불려다니며 진땀을 흘린다. 그러나 관료들은 기업하는 사람에게는 큰소리친다. 규제라는 보도(寶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가는 어떤가. 기업가에게 약하다. 정치자금의 후원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항대립의 서양사상에서 평등이라고 하면 동시적인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동아시아 사회에서의 평등은 ‘화무십일홍’ 이니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 느니 하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시간과 그 순환 속에서의 평등이다.
그런데 21세기 새로운 지(知)의 전선은 서양을 지배해온 이항대립의 사상에서 벗어나 삼항순환의 가위바위보 사고법을 도입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계 · 상상계 · 상징계의 세 삶의 공간을 탐색하던 라캉이 보로메오의 고리에 눈을 뜬 것처럼 말이다.
들숨과 날숨밖에 모르는 서구 사상을 좇아가다 보면 숨이 막히고 만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멈추는 순간, 지식(止息)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들숨이 날숨으로 바뀌고 날숨이 들숨으로 변할 수 있다. 정치를 숨 쉬게 하라. 이념을 숨 쉬게 하라. 모든 사고와 경쟁을 숨 쉬게 하라. “정 부장, 어디 한번 시원하게 숨 쉬어봐. 이항대립이 아니라 삼항순환으로 크게 심호흡해 보란 말야.”
- 중앙선데이 제407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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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5. 소설과 역사의 차이 |
‘큰 이야기의 시대’는 갔다 大설 쓰지 말고 小설을 써 봐요 |
<15> 소설과 역사의 차이
『삼국지』만 해도 엄청 크고 긴 이야기인데 왜 소(小)자를 붙여 소설이라 부를까. 대하(大河)소설이니 장편(長篇)소설이니 하는 말 자체가 모순 아닌가. 지난주 이 교수의 빅 데이터 풀이에서 ‘소설’ 이야기가 나온 것이 마음에 걸려 흐름에서 벗어난 질문인 줄 알면서도 토를 달았다.
하지만 이 교수는 거꾸로 더 신이 났다. 빅 데이터의 빅(大)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소설이란 말은 서양에서 ‘노벨’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중국에서 상용되어 온 말로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거리에 떠도는 자잘한 이야기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패사(稗史)의 글 가운데 한 부류를 일컬었던 말이다. 우리가 말하는 빅 데이터는 큰 이야기가 아니라 패사의 소설과 같이 자잘한 이야기들을 모은 것이다.
미국의 한 대학생이 자신의 블로그에 매일매일 자기가 먹은 음식 이름과 그 정보를 기록했다. 4년 동안 기록한 자료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통계자료가 됐다. 젊은이가 먹고 있는 음식들을 분석해 여러 유의미한 사실을 추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셰익스피어니 민주주의니 정치 · 선거 · 경제 문제 같은 ‘큰 이야기’를 다룬 어떤 학생들의 자료보다 비싸게 팔렸다는 이야기다.
큰 이야기만 적은 역사책에서는 기록되지 않는 자잘한 이야기를 적은 소설 속 데이터를 통해 오히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지식인들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주장하기 위해 쓴 논문이나 저술 같은 ‘대설(大說)’에는 없는, 새로운 진실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큰 이야기’를 상실한 시대고, 자기 사상만이 모든 것의 해법이라는 큰 이념의 틀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두는 ‘대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드디어 포스트 모던주의 철학자 리오탈의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로 진입하려는 찰나다. 정말 대포소리가 들리고 기관총 소리가 귀를 찌르는 전투 현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그래서 이 교수는 “『생명자본주의』를 쓰면서 경제나 사회과학서적보다 에밀 졸라가 1883년에 쓴 소설 『여인들의 행복백화점(Au Bonheur des dames)』에서 더 많은 자료와 생각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파리에 처음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던 때의 생생한 그러나 자잘한 이야기들 가운데 크게 빛나는 빅 데이터가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SF작가가 쓴 미래소설을 보면 큰 것은 어지간히 맞추는 데 자잘한 것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 예를 들자면….” 이 교수가 소설 이야기를 하자 기자는 비로소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쥴 베른이 쓴 달나라 여행 말야. 우주 로켓이나 달나라로 향한 궤도를 그린 뛰어난 상상력은 오늘날의 우주선과 거의 일치해. 그런데 말야. 그들이 우주선 안에서 사용하고 있는 조명장치가 뭔지 알아?”
이 교수가 통쾌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전등이 아니라 가스등이었어.”
미국 환상문학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 (Fahrenheit 451)』 (사진은 동명 영화의 포스터)도 마찬가지였다. 화씨 451도는 섭씨로 따지면 233도인데 종이가 불에 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뜻한다. 책이 금지된 미래 사회에서 주인공은 책을 태우는 게 직업인데, 이런 얘기를 한다. ‘소설이란 게 웃기는 거 아냐. 한 번도 이 세상에서 우리와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얘기잖아. 전기는 다 죽은 사람들 얘기고.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책들은 필요 없어.’
“1953년에 쓴 작품인데도 벽걸이 TV가 나오고 제트카가 등장해.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흔한 스마트폰은 몰랐던 거지. 만약 그가 스마트폰이라는 걸 생각했다면 소설의 줄거리 대부분과 장면들은 모두 개정되어 할 거야. 무엇보다 종이책이 아니라 전자책 시대에는 화씨 451도란 말은 무의미해. 디지털은 불에 타는 물질이 아니니까 말야.”
이 교수가 기자에게 농담을 했다. “진짜 소설 한번 써봐. 명동이나 광화문 거리에서 매일 캠코더로 일정시간 촬영해보라고. 10년 동안 찍은 뒤 영상 데이터에서 거리의 변화, 행인들의 머리 스타일, 의상 색깔, 치마 길이 등의 변화를 분석해 보면 놀라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어깨에 힘주지 말고 대설 대신 소설을 써봐요.”
- 중앙선데이 제406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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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4. 구글의 빅 데이터 |
고전과 소설 속에 숨어 있는 깨알을 찾아라 |
<14> 구글의 빅 데이터
이 교수가 구글의 ‘ngram viewer’ 의 창을 열었다. 오색선의 곡선이 파도를 만든다. “대체 이게 뭐죠?”
대답 대신 검색창에 ‘cat’ 이라고 친다. 또 고양이 일곱 마리(이 교수의 컴퓨터) 이야기인가 싶어 시큰둥했는데, 곧 이어 ‘dog’ 이라고 치자 창에 두 줄의 곡선이 생겼다. 왼쪽에는 1800년 오른쪽에는 1980년이라는 연대숫자가 보인다. 통계 곡선 그래프가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잘 봐요. 구글 클래식 알고 있지요. 아이비리그의 대학 도서관에서 시작해 그동안 중요 도서관의 책들을 통째로 스캔해 만든 자료인데 그 책들에서 사용된 문자들을 검색하면 이런 통계곡선이 생겨.”
“여기 곡선이 아래로 확쳐진 것이 개야. 1930년경이지. 그때 나온 책들 속에서 개라는 단어가 줄어든 것은 세계를 휩쓴 대공황기를 보여줘. 개는 사람과 똑같은 식량을 소비하니까 못 키우는 것이지. 그런데 이 곡선의 고양이는 반대로 올라가고 있잖아. 관심이 개에서 고양이로 옮겨갔다는 증거야. 이게 바로 빅 데이터의 위력이거든. 대공황이 개와 고양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한 눈에 볼 수 있지.”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 ‘KOREA’ ‘JAPAN’ ‘CHINA’ 라는 단어를 차례로 집어넣었다. 19세기 때만 해도 중국의 곡선은 하늘에 있고, 일본은 중턱에 그리고 한국은 거의 땅 위에 깔려 있다. 세계의 책 속에서 한국이란 국명이 거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50년부터 갑자기 한국의 곡선이 올라간다. 한국전쟁 경제성장 IT붐이 일어나면 곡선은 치솟는다. 세계인들이 동아시아 삼국에 대한 관심을 일목요연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세계의 어디에 있는지 어휘 검색으로 단 1초만에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교수의 데이터 사냥을 도와주는 도깨비 방망이구나-. 헌데 그것도 다가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데이터는 책 속 어휘가 아니라 유명 소설 작품 속에 숨어 있어. 소설 자체가 실은 역사의 빅 데이터거든. 소설의 소자가 작을 소(小)잖아. 자잘한 데이터들이 가득 차 있거든.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의 경우 사람들은 보통 장발장, 빵 훔친 것, 은촛대, 코제트 정도를 떠올리잖아. 그런데 소설의 큰 줄거리가 아니라 작은 부스러기들에 눈을 돌려봐. 놀라운 자료들이 숨어 있어. 그래서 소설은 대설이 아니라 소설인거야.”
“그럼 『레미제라블』에서 뭘 찾아내셨는데요?”
“소설을 보면 나폴레옹 군대가 제일 두려워한 것은 영국 웰링턴 장군의 정예부대가 아니라 급조된 켐트 장군 사단의 신병들이라고 씌여 있어. 어느 역사책에서도 나오지 않는 자료거든. 갑자기 투입된 그 신병들은 훈련도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닥치는 대로 각자 알아서 싸운거야.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 지도 하룻강아지들이라 몰랐으니 무식하게 싸웠을 수 밖에. 그야말로 요즘 같은 게릴라전, 비대칭전이잖아. 여기서 나는 근대 전쟁, 현대 경영학의 효시를 찾아낸 거지. 명령 하나로만 움직이는 부대가 아니라 개개인이 살아있는 조직이 대 나폴레옹을 이겼다는.”
“워털루 전투가 1815년이니 19세기 초반에 이미 근대의 조짐이 생겨났다는 의미군요.”
“그런데 문제는 웰링턴 장군이 그들의 승리를 보고도 달갑지 않게 여겼다는 거야. 새로운 전법, 새 시대가 오고 있음을 몰랐지.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웰링턴 장군이 있나? 훌륭한 지휘관이란 명성을 얻는 순간 벌써 그는 낡은 구식 장군이 됐음을 이 작은 데이터로 알 수 있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단순한 문학 작품이 아니라 3000년 전 희랍 문화의 백과사전 이라고 했다. 무슨 옷을 입고 무기는 어떻게 생겼고 당시 왕들의 커넥션은 어떻고 등등 모든 것이 들어있는. 여기서 찾아낼 수 있는 보물이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내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도대체 그런 자료는 어디서 얻느냐’고 묻는 경우가 많아. 데이터가 아무리 많아도 유효한 것을 끌어내려면 항상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해. 그래서 빅 데이터 연구에 인문학이 중요한 것이지. 관심이 많아야 하고 또 잡(雜)스러워야 돼. 잡담이니 잡학이니 하는 것처럼 사람이 약간 잡스러워야 남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과 접할 수 있어.”
독수리의 눈과 개미의 눈을 동시에 가지라던 말이 또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 중앙선데이 제405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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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3. 파이 빅 데이터 |
신발 장수는 모자 장수를 배워야 한다 |
<13> 파이 빅 데이터
“정 부장, 3월 14일이 무슨 날이야?”
시작부터 이 교수의 질문이 허를 찌른다. 화이트 데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답을 기대하신 건 아니겠지. 하지만 다른 생각은 퍼뜩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 누구나 그렇게 대답하겠지. 3월 14일은 파이(π)데이야. 원주율 말야. 아인슈타인의 생일이기도 해. 외국 대학생이나 젊은이들은 이날 파이에 3.14라고 써서 나눠먹어(사진). 똑같은 날인데 어떤 사람들은 사탕을 먹고 어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기념하지.”
“화이트 데이는 일본이나 대만, 우리 같은 몇몇 나라에만 있는 거 아닌가요?”
“그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때? 수학과 과학이 생활화된 서양 사람들과 신세 지면(한 달 전 발렌타인 데이) 갚아야 하는 동양 사람들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고 말이야. 물론 그 뒤에서 돈 계산하는 업자들은 빼고. 서양에서는 파이가 생활화된 경우가 많아. 이안 감독의 영화 ‘파이 이야기’(Life of Pi · 원작자 얀 마텔) 봤어? 주인공 이름부터 파이지만 작품 곳곳에서 원주율을 주요 코드로 써먹고 있지. 227일간 표류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왜 하필 227인지 궁금했는데요, 그게 왜 파이와 관련이 있지요?”
“22를 7로 나누면 3.14가 나와.”
오랜만에 원주율이란 말을 들으니 초등학교 수학시간이 떠오른다. 3.141592…. 그런데 이 교수는 소수점 뒤 20~30줄까지 외웠다고 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땐 그랬어. 숫자로 이야기를 만들면 외울 수 있었던 거야. 원주율같이 수천 자리 무한까지 가도 안 풀리는 것을 무리수라고 부르잖아. 피타고라스는 모든 세상 원리를 숫자로 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리수를 발견하고서는 낙담한 거야. 무리수를 발견한 제자를 바닷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세상에는 무리수의 경우처럼 과학이나 숫자로 안 풀리는 게 있다는 것을 알고 절망할 줄 알아야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거든. 요즘 한참 떠도는 빅 데이터란 것도 그래서 생긴 것이지. 파이의 계산을 소수점 아래로 2조쯤 넘어가면 신통하게도 01234의 순서로 숫자의 빈삭도가 등장하는 것을 알게 된다나봐. 빅 데이터를 가지면 무질서 속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거지.”
“카오스나 퍼지 이론도 같은 맥락 아닌가요?”
“그렇지. 요새는 인터넷에 들어가 클릭 한 번 해도 자기도 모르게 정보를 남기고 되고 그것을 모으면 어마어마한 빅 데이터가 된단 말야. 페이스북이니 아마존이니 접속해서 물건을 사거나 검색할 때마다 지구 규모의 천문학적 자료가 쌓여. 그걸 분석하면 지금까지 인간의 이성이나 직관으로 판단할 수 없던 사실을 찾아낼 수 있지. 경영 마케팅 정책결정 선거 모두 앞으로는 빅 데이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이야기야.”
이 교수는 이런 얘기를 전작 『젊음의 탄생』에서 DIKW의 역사법칙 (DATA, INFORMATION, KNOWLEDGE 그리고 WISDOM의 순서로 되어 있는 데이터 우선의 시대)을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어느 젊은이가 이 교수의 그 말을 새겨 들었다면 지금 그의 몸값은 천장 높은 줄 모를 것이다. 지금 와서 빅 데이터 세상이 되고 보니 그것을 배운 전문가가 태부족이니 말이다.
“옛날의 모자 장사는 남의 머리만 보고 다녔지. 신발 장사는 신발만 보고. 하지만 지금은 신발 장수가 위를 보고 모자 장사가 땅을 보고 다니는 세상이 됐어. 이종 업체간에 깊은 연관성이 생겼기 때문이야. 모자와 신발이 서로 어우르는 상호작용을 하는 시대이기 때문이지.”
전에는 무관했던 업종 간에 제휴바람이 부는 이유다. 빅 데이터 시대를 맞아 야후가 상품 판매업체인 CCC와 제휴를 맺은 것도 그 때문이다. 두 회사가 일부 정보를 서로 합쳐 나눠 갖는 전략이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최근의 빅 데이터 열풍을 도넛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겉은 커보이는데 가운데는 구멍이 뻥 뚫린 거 있잖아. 아무리 티끌이 태산 되는 빅 데이터의 DIKW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을 분석하고 응용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거든. 실은 데이터에서 태고적 지혜로 거슬러 올라가는 U턴의 시대가 오고 있는 거야.”
- 중앙선데이 제404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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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2. 인터페이스 혁명 |
세상 잇는 트위터는 하늘 · 땅 연결하던 그 옛날 노고지리 |
<12> 인터페이스 혁명
“인터페이스는 컴퓨터 용어라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를 텐데요.”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지만 역시나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어. ‘얘야, 사이좋게 놀아라.’ 어렸을 때 들었던 어머니의 충고가 21세기 정보전선의 매뉴얼이 될 줄이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그리고 사람과 기계 사이, 그 사이가 바로 인터페이스란 거지. 그런데 그게 다 망가지고 있어.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놀라는 어머니 말만 잘 들었어도 세상이 이 지경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스티브 잡스가 별건가. 바로 사람과 기계(컴퓨터)의 인터페이스에 착안해 사이좋게 놀았던 사람이잖아.”
그렇다. 그가 사람과 컴퓨터 사이에 있던 거추장스런 키보드를 없앴기 때문에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기막히게 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쿼티(qwerty)키보드 있잖아. 그게 100년 전 마크 트웨인이 치던 타이프라이터 키 그대로라는 거야. 스티브 잡스가 똑똑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멍청했던 것 뿐이라고. 멍청해지지 않으려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숨겨진 인터페이스를 찾아야해.”
“하늘과 땅 사이의 인터페이스라는 게 구름 잡는 소리 같아서 잘 모르겠는데요.”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 질문을 했다. 어차피 종군기자를 자처하지 않았는가.
“정답이야, 구름. 요즘 클라우드(cloud) 컴퓨팅이라고 하잖아.”
그리고 이 교수는 시조 한 수를 읊는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옛날 농업시대에는 구름 위에 뜬 노고지리를 하늘과 땅, 겨울과 봄, 그리고 밤과 낮 사이의 인터페이스로 삼았다. 종다리, 종달새, 그리고 하늘 높이 떠 있다 하여 고천자(告天子)라고도 부른 새다.
“옛날 사람들은 노고지리 소리를 듣고 봄과 새벽이 온 것을 알고 일터로 나갔어. 그런데 그 새가 요즘 트위터(twitter)의 새가 된 거야.”
이 교수가 트위터의 로고를 보여준다. 하늘과 구름을 배경으로 새가 그려져 있다.
“트위터라는 말은 새가 짹짹거리는 의성음에서 따온 영어야. 요즘 아이들은 140자의 트위터 속에서 참새처럼 재잘재잘 입방아를, 아니 엄지방아를 찧어대지.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는 말야….”
이 교수의 감상적인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사람이 사는 들판과 산이 접속되는 인터페이스에는 도깨비들이 살았어. 인간들처럼 노래를 좋아한다고 했지. 혹을 떼었다 붙이기도 하고, 방망이를 한번 휘두르면 황금이 쏟아져 나와. 인간과 친했다가도 심술이 나면 솥뚜껑을 솥 안에 집어넣어 골탕도 먹인다고 했어. 도깨비 이야기는 삶이 고되고 가난한 초가집 사람들에게 도깨비 방망이의 꿈과 신선한 놀라움을 주었던 거야. 우린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싸움도 하고 사이좋게 놀기도 했었지.”
지금 다른 나라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전신주를 세우는 ‘도깨비 장난’을 한다. 통신위성이고 우주선이다.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하고 한탄하던 김소월의 ‘초혼’ 시대가 갔다. 트위터의 종달새와 클라우드 컴퓨팅의 구름 위에서 그들은 “금 나와라 뚝딱” 하며 미래를 움직이는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른다.
“우리가 실패한 나로호 말야. 그 이름만이라도 아이들에게 꿈과 감동을 줄 수 있었는데 말이지. 남의 기술 빌리지 않아도, 돈 들이지 않아도 로켓 이름쯤이야 우리 힘으로 할 수 있었잖아. 인류가 처음 쏘아올린 인공위성의 이름은 스푸트니크(Спутник, Sputnik)호야. 러시아말로 ‘길손’, 그러니까 여행의 동행자라는 뜻이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푸트니크의 연인』이라는 소설까지 썼어. 거기 도전한 미국의 위성 이름은 또 어떻고. ‘익스플로러(탐험가)’에 ‘선구자(파이어니어)’,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놀라운 주인공 이름들…. 나로호의 이름엔 그런 것이 없어. 시(詩)도, 인문학도, 신화도, 스토리텔링이란 게 없어. 과학 기술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한계거든.” 노교수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없다.
- 중앙선데이 제403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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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1. 컨테이너와 해병대 |
바다와 육지 사이, 해군과 육군 사이 거기 새로움이 있다 |
<11> 컨테이너와 해병대
“대륙 파워와 해양 파워 중 한국은 어디에 속하는가, 응답하라” 고 했던 시리즈 모두(冒頭)의 이야기가 에디슨과 테슬라로, 다시 유선과 무선으로 엮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이퍼 텍스트이고 새로운 지(知)의 담론 방식이구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앞으로는 해양과 대륙의 이항 대립이 아니라 그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생각해 봐. 대륙 세력은 전쟁으로, 해양 세력은 무역으로 세계를 제패하려 했어. 그런데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것은 거함 거포가 아니라 작은 알루미늄 상자였어.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말콤 맥린(Malcom McLean)이 발명한 것, 우리가 지금 이 정도 살게 된 것도 바로 이 마법의 상자 덕분이지.”
“그 상자란게 뭔가요?”
“컨테이너(container)야. 육지와 바다는 수송 시스템이 전혀 다르잖아. 트럭으로 짐을 실어와 풀어서 배에 옮겨 싣고 가서는 다시 또 내려야지. 그 과정에서 손상 · 분실 · 시간 · 비용이 크게 발생했거든. 그런데 한 트럭 운전사가 그 불편을 더는 기발한 생각을 한 것이 컨테이너 상자란 말이지. 트럭과 배, 육지와 바다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이 상자만으로 간단히 메울 수 있었거든. 땅과 바다의 차이를 없애버린 사고의 전환이야.”
말콤 맥린(Malcom McLean·1913~2001), 바로 이 사람이었구나. 컨테이너를 발명하고 세계적인 운송업체가 된 ‘Sea Land’를 창업한 인물. 포브스가 2007년 ‘20세기 후반 세계를 바꾼 15인’ 중 하나로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 고속도로나 항구에서 쉽게 보는 그 컨테이너에 21세기가 담겨 있었다니 놀랍다.
“해병대도 마찬가지야. 이게 육군과 해군을 그냥 모아놓은 게 아냐. 바다에서도 싸우고 육지에서도 싸울 수 있는, 땅과 바다의 새로운 인터페이스에서 생겨난 군대지. 하늘과 땅에서 싸울 수 있는 공수부대도 그렇잖아. 패러다임이 바뀐 거야. 학문에서도 그런 것이 생겨나고 있어. 그걸 우리는 요즘 융합이니 ‘통섭’(統攝 · Consilience)이니 하고 부르고 있지.”
컨테이너 같은 것, 해병대 같은 것. 그 단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 1794~1866)이다. “그는 통섭 외에도 새로운 말을 많이 만들었어. 과학자를 뜻하는 사이언티스트(scientist) 라는 말도 이 사람이 처음 쓴 말이야. ‘ist’가 붙으면 보통 ‘쟁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당시엔 반발도 많았대. 그전까지는 ‘내추럴 필러소퍼(natural philosopher)’ 나 ‘맨 오브 사이언스(man of science)’로 불렸는데 이상하다 이거지.”
이 교수는 그가 괴테 작품을 번역했을 정도로 언어와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소개했다. 학문세계의 해병대라는 이야기다. 아이작 뉴턴과 함께 케임브리지대에 동상이 서있을 정도인데, 우리는 통섭이란 말은 알아도, 그 말을 퍼뜨리는 에드워드 윌슨은 알아도, 그 말을 창조해 낸 진짜 개혁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오래된 이야기야. 우리는 지금도 고등학교부터 문과와 이과로 나누지만 이 폐단은 이미 백 년 전에 영국에서 제기됐어. C.P. 스노우가 쓴 ‘두 개의 문화’는 쉽게 말해 ‘뉴턴(물리학)’과 ‘셰익스피어(문학)’가 완전히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 현상을 비판한 글이지.”
바다와 땅 사이, 하늘과 땅 사이, 육해공군으로 싸우는 세상이 아니다. 학문 역시 새로운 인터페이스에서 생겨나고 있는데 우리는 말만 통섭이지 그걸 상상도 실감도 하지 못한다. 이 교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중앙선데이 제402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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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10. 유 · 무선 통신의 부침 |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숨은 지도 찾기 |
<10> 유 · 무선 통신의 부침 |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 |
“애들 교과서에는 마르코니가 무선 통신을 발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테슬라가 원조지.”
이 교수의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1856~1943) 이야기는 100년 전 일인데도 순식간에 오늘의 문제로 이어진다. 리모컨, 교류전기, 모터, 형광등도, 네온사인도, 레이저도, 수직이착륙기도 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인류가 에너지를 공짜로 쓰도록 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는 것이다. “공기처럼, 물처럼. 이를테면 우주 에너지를 만들어 무선으로 보내는 거지. 테슬라 코일은 그가 꿈꾸던 세상이었어.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가공할 힘으로 비밀 병기를 꿈꾸고 있으니 역사는 진화하는 게 아니라 퇴화하고 있는 것이지.”
검색을 해보니 테슬라 코일(Tesla coil)이 마침 과천 국립과학관에 설치돼 있다. 220볼트를 400만 볼트로 증폭시키는 것을 형광등 실험을 통해 보여주는데, 가장 인기 있는 코너라고 했다. 애들 데리고 여기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이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땅에서처럼 바다에는 전신주를 세울 수 없어. 항해하는 배에서 절대로 못하는 것이 유선 통신이나 전화거든. 그러니까 무선 기술은 해양세력권의 꿈이었던 것이지.” 이 교수는 타이타닉의 침몰은 무선 통신의 시대의 개막과 극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했다. 당시 타이타닉호에는 무선 통신사가 4명 있었어. 배가 빙산에 부딪히자 이들이 구조를 청하는 무선을 쳤지만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던 배의 통신사가 무전기를 끊고 자고 있었다고 해. 그때 그 녀석만 졸지 않았어도 더 많은 사람을 구조할 수 있었을 텐데….”
‘타이타닉’하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뱃머리에 서서 십자 허그를 하는 장면과 셀린 디옹의 애절한 노래 선율을 떠올릴 테지만 역시 이 교수는 타이타닉의 침몰에서 정보시대와 바로 이 칼럼 3회에서 언급했던 해양과 대륙세력이 반전되는 신(新)지정학으로 이어진다.
“마르코니는 무선통신 기술을 영국에서 특허를 내고 그곳에 회사도 세웠어. 그의 조국 이탈리아는 구대륙의 지는 해라 관심이 없었던 거지. 섬나라 영국이 세계의 정보를 쥐고 있었다는 뜻이야. 이 같은 무선 기술은 영국을 통해 미국으로 전달되고 두 나라가 거대한 해양국가의 세력권을 형성하잖아. 그래서 영불간 도버해협보다도 영미 간의 대서양 바다가 더 좁았다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게 돼. 인터넷 용어만 해도 거의 모두가 해양문명권에서 생긴 것들이야. 내비게이션이란 말이 바로 항해한다는 뜻이 아닌가. 블로그는 웹(web)과 로그(log)의 결합어인데, 로그가 뭐야. 배에서 통나무(로그)를 던져 속도를 잰 것을 기록한 항해일지 잖아. 물론 대륙도 만만찮아. 컴퓨터를 시동하는 ‘부팅(booting)’은 부츠를 신는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노마드(nomad · 유목민)들의 생활습관에서 나온 용어거든.”
인터넷 공간을 바다로 보느냐 초원으로 보느냐. 해양과 대륙이 맞서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교수의 이야기는 바둑 같다. 돌들을 여기저기 그냥 툭툭 놓는데, 어느새 그것들이 모여 거대한 집을 만든다. 유선과 무선 이야기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지정학 문제로 점프한다. 거대한 문명을 읽는 섬세한 더듬이다.
“컴퓨터망이 광케이블에서 무선 와이파이로 옮겨가고 있지만 아직도 경합 중이지. 특성이 서로 달라. 유선과 무선은 대립이 아니라 공생해야 하는 것처럼 새로 대두되는 브릭스 국가의 랜드 파워(land power)와 기존의 시 파워(sea power)역시 갈등과 대립으로 가서는 인류의 미래는 없어. 내가 10년 전 디지로그 문명을 주장하고 한중일 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지. 랜드 파워인 중국과 시 파워인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 반도의 사활을 건 미래 전략이 나와야지.”
마침 이번 주는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 맞춰 한중FTA라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정치외교적 스탠스는 더욱 중요해졌다.
“중국이 대륙에 유선 전화를 놓았다면 세계의 동(銅)이 동났겠다. 무선 휴대전화는 중국을 바다로 만든 거야. 유선이냐 무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교수가 크게 웃는다.
- 중앙선데이 제401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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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9. 에디슨과 테슬라 |
추월하려면 차선을 바꿔야한다 |
<9> 에디슨과 테슬라 (Edison & Tesla) 지(知)의 최전선에서 이 교수의 첨단 무기는 말(語)이다.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의 어원을 파고들어 개념을 끄집어낸다. ‘아시아’가 그랬고 ‘바이러스’가 그랬다. 기업의 이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름이 아주 중요한데, 우리나라 기업들의 이름은 로마나이즈(romanize)가 쉽지 않아. 일본은 안 그렇거든. 예를 들어 카메라 회사 캐논은 관음보살의 ‘관음’(觀音 · 일본어 칸논 kannon)에서 나온 말이야. 창업주가 독실한 불교신자였대. 그걸 규칙이나 표준을 뜻하는 그리스어 ‘canon’ 으로 슬쩍 바꾼 거지.”
“이름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가 뭔가요?”
“정치가가 권력에, 기업가가 돈에 관심 있듯 인문학하는 사람이 글자에 관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게다가 이름에는 중요한 뜻이 담겨있거든. 미국의 전기 자동차 테슬라(Tesla ·사진) 얘기를 해볼까. 왜 하필 테슬라라고 붙였을까? 이걸 알려면 에디슨과의 관계를 알아야해.”
테슬라가 사람이었구나. 재빨리 검색을 했다.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 · 1856~1943). 크로아티아 출신의 천재 물리학자이자 전기공학자, 발명가. 미국으로 건너와 교류 발전기(AC generator)를 만든 그는 직류를 고집하는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과 사사건건 부딪히며 결국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 ‘전류 전쟁’ 은 공학사에서는 아주 유명한 얘기인데, 대부분의 우리는 에디슨만 알고 테슬라에 대해서는 별로 들어본 적도 없다.
“테슬라의 위대한 점은 전깃줄이 막 깔리고 있을 무렵에 이미 무선 시대를 생각했다는 거지. 무선 통신은 마르코니가 발명했다고들 알고 있는데 사실 테슬라가 2년 먼저 한 거야. 오늘날 리모컨 블루투스(bluetooth)의 기초가 다 그 사람에게서 나왔어. 이 사람 생각이 너무 앞서가서, 일설에는 이 사람이 죽었을 때 연구자료를 CIA가 모두 가져갔다는 얘기도 있어. 전파나 레이저로 무기를 만든다고 생각해 봐. 하여튼 실리콘밸리 애들이 전기 자동차를 만들면서 이 에디슨의 라이벌 이름을 썼다는 것은 시대를 앞서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야지.”
이 교수는 ‘쉬프트(shift)’라는 말을 강조했다. “중국이 우리를 쫓아오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훌쩍 뛰어넘어(shift) 앞서는 것은 정말 무섭다” 고 했다. 유선을 뛰어 넘어 무선으로, 휘발유차를 뛰어 넘어 전기차로 바로 가는 것. 3D 프린터로 집과 바이러스를 찍어내는 것. 그런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이 강대국 사이에 끼여있는 대한민국이 진정 추구해야할 길이라고 했다. 테슬라(Tesla,전기차)는 벤츠나 도요타를 쫓아가지 않고 그것을 넘어섰다(shift)는데 포인트가 있다는 것이다.
“전기차 이용을 높여야 한다면서 충전소를 곳곳에 세워야 한다고 하잖아. 그러나 그런 식이라면 장래성이 없어. 그럼 그게 지금의 주유소와 무슨 차이가 있나. 각자 집에서 충전할 수 있도록 해야지. 집집마다 태양열 에너지를 만들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거잖아.”
그는 에디슨 대신 테슬라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남의 뒤를 쫓아가서는 절대로 그를 앞설 수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과학과 기술의 수준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상상이거든.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지. 그것도 과거를 쏘우트(thought)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재를 씽킹(thinking)하는 살아있는 인문학. 아직도 창의 교육의 상징으로 아이들에게 에디슨을 가르치는데 그건 아니야, 에디슨이 왜 테슬라에게 이기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 미래를 만드는 일이지.”
이 교수는 칸트가 아니라 테슬라를 인문학자로 읽고 있다. 테슬라 전기 자동차와 구글 무인 자동차가 앞으로 인간의 생활과 사상을 어떻게 바꿀지 보여주기 위해서 두툼한 인쇄물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 중앙선데이 제400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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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8. 검색과 사색 |
세균과 바이러스의 차이를 아십니까 그 사이에 새 인문학이 |
<8> 검색과 사색 에볼라(Ebola) 바이러스 완치 간호사를 포옹하는 오바마 대통령 사진이 이번 주 초 신문 1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외신은 그녀가 어떤 치료를 통해 음성 판정을 받게 됐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고 전한다. 이 교수의 책상 위엔 “10월 1일부터 60일 이내에 치료 방법을 알아내지 못하면 인류는 엄청난 위험에 직면할 것” 이라는 앤서니 밴버리 UN 에볼라 긴급 대책 기구 수장의 말이 실린 기사가 프린트돼 있다. 문득 이 교수가 물었다.
“정 부장, 세균과 바이러스(bacteria & virus)의 차이를 알아요?” “네? 글쎄요…. 전 문과라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를 거야. 세균은 세포핵이 있는 생명체고 바이러스는 유전자 정보만 있는 비생명체지. 세포 속으로 들어가 기생하면서 비로소 증식을 해. 바이러스는 생명과 물질 사이에서 존재하는 세계야.
21세기는 이것과 저것의 접속점에서 정쟁이 벌어지고 있어. 知의 최전선도 바로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지. 자, 그 전선을 보여줄게. 미사일도 방호복도 필요 없어. 내 고양이와 쥐만 있으면 돼.” 과연 노 교수의 마우스(쥐)가 “클릭 클릭” 하고 울었다.
동영상이 요란한 배경음악과 함께 모니터에 가득 찬다. 그리고는 다시 드롭박스에서 ‘에버노트’ 프로그램을 열고 자료 하나를 쓱쓱 프린트해 건네준다. ‘오토데스크사의 유전학 엔지니어가 3D 프린터로 바이러스를 제작, 곧 암세포를 공격한다’는 제목이 보인다. 10월 17일자 뉴스다. 동영상에서는 뉴스의 주인공 앤드류 헤셀 (Andrew Hessel,사진)이 지난 5월 TEDx에서 강연하는 모습이 흘러나온다.
“와, 이건 뭔가요?” “3D 프린터로 바이러스를 찍어낸다는 거잖아. 제약회사가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암세포만 골라 공격하는 바이러스 하나를 만드는데 지금은 1000달러 정도지만 머지않아 1달러 수준으로 떨어질 것을 기대한다지. 그런데 암세포뿐이겠어? DNA를 조작해서 바이러스를 잡아먹는 바이러스를 만든다고 생각해 봐.”
정말 놀라웠다. 어디서도 보고들을 수 없었던 얘기가 노학자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처음 만나 들었던 3D 프린터로 집짓는 이야기가 바이러스를 찍어내는 뉴스로 점프한다. 이게 바로 지(知)의 최전선이고 지식의 하이퍼 텍스트다. 첨단 무기가 만들어지는 현장이다.
“서울대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간 책이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 균 · 쇠』라지. 그런데 여기서 균은 그냥 세균(germ)이야. 100년 전 얘기를 읽고 있는 거지. 21세기의 전선은 세균이 아닌 바이러스야. 그런데 세균과 바이러스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낡은 책을 읽고 있는 것이지.”
“이런 얘기들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아 내십니까?”
“관심과 관찰과 관계지. 인문학자로서 나의 최전선은 말이고 개념이야. 말이 나오면 언어의 전선이 형성되거든. 그 말에 관심을 갖고 검색을 하다 보면 수억 개의 정보 중에서 유의미한 것들을 고를 수 있지. 그럼 그것을 과학적 · 역사적으로 면밀히 관찰하고 내 분야와의 관계를 설정한 뒤 개념적으로 정리하지. 아시안 게임을 생각하다가 아시아란 말의 어원을 찾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7권 7장에 나오는 유럽과 아시아의 비교론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식이야. 인류학자가 화석을 뒤지듯.”
그의 컴퓨터 화면을 슬쩍 보았다. 에버 노트에 ‘10463’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인터넷을 서핑하며 관심을 갖고 정리해둔 파일 개수다.
“책으로는 아직 안 나온 것들이야. 살아있는 정보들이지. 책이나 도서관에 있는 것은 이미 누군가 생각한 것들, 즉 쏘우트(thought)야. 과거분사지. 하지만 나는 지금 검색을 통해 씽킹(thinking)하고 있어. 최전선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분사야. 국경 없이 창궐하는 에볼라와 싸우기 위해서는 국경 없는 의사회뿐만 아니라 국경 없는 지식인단도 필요한 때지. 쏘우트가 아니라 씽킹하는. 그런데 우물 안 개구리들은 우물 안을 비추는 달빛만 바라보고 있으니….”
- 중앙선데이 제399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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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7. 에볼라의 이면 |
무차별 박멸 작전에 인간과 공생하던 바이러스가 역습 |
<7> 에볼라의 이면 에볼라(Ebola) 바이러스의 창궐로 지구촌이 난리다. 치사율이 최고 90%에 이르는 무서운 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 관계자는 “6주 안에 막지 못하면 발병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 이라고 경고했다. 도대체 에볼라가 뭐길래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이 교수가 색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방역(防疫) 문제가 아니라 문명학적인 지(知)의 최전선 차원에서 읽어보자는 것이다.
“우선 에볼라 바이러스라는 게 이번에 처음 생긴 게 아냐. 1967년 독일 미생물학자가 아프리카에서 발견해 파스퇴르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하면서 알려졌지.”
“그런데 왜 에볼라라고 부르게 됐나요?”
“콩고에 있는 에볼라라는 작은 강 근처에서 발견됐거든. 그런데 병명은 조심해서 붙여야 해. 광우병 사태 때 경험했잖아. 공식 명칭인 BSE(소해면상뇌증)라는 용어를 안쓰고 광우병이라고 하니까 다들 얼마나 패닉이 됐나. 소가 미친 게 아닌데. 일본 신문은 BSE라고 썼는데 우리는 광우병이라고 썼지. ‘장질부사로 돌아가셨네요’ 하지 않고 ‘염병으로 돌아가셨네요’ 해봐. 뺨맞지. 특히 전염병 이름은 객관적으로 붙여야 해. 감정을 넣어 공포심을 조장하면 안 되는 거거든.”
“에볼라는 지역 이름이잖습니까.”
“마찬가지지. 왜 아프리카의 강 이름을 넣어서 아프리카에서 재앙이 오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느냐고. 문제는 전세계가 글로벌화로 월드 시스템이 됐기 때문에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아프리카에서 생긴 일이 세계적인 재앙이 됐다는 것이야. 옛날에는 풍토병이라 해서 그 지역의 일로 끝났는데.”
“다른 시각은요?”
“바이러스를 보는 인간의 인식에 대한 것이지. 파스퇴르 이후 모든 병은 바이러스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무조건 바이러스 죽이는 방법만 연구해온 셈이잖아. 하지만 바이러스는 지금까지 인간과 상생해 왔거든. 모든 생명체가 다 함께 살아온 거 아냐? 그런데 인간이 세균은 무조건 죽여야한다고 하니까 세균이 이빨을 드러낸 거지.”
“자연의 복수인가요?”
“문명이 가져온 해악이랄까. 인간이 먼저 바이러스를 적으로 돌려놓고 공생할 생각을 안 했기 때문에 역습이 시작된 것이지. 몇천 년을 같이 살던 바이러스가 신종이나 변종이 되어 인간을 공격하고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준비가 필요한데 우리는 너무 태평해. 지금 미국 회사가 백신을 만들고 있다지만 환자가 늘어날 경우 약을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어. 백신이 부족할 경우 누구부터 맞혀야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나. 리스트도 미리 만들어놔야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시선을 돌렸더니 진짜 종군 기자가 된 느낌이다. 그동안 우리는 아프리카를 너무 몰랐다. 지구 반대편에서 생기는 일로만 알았는데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아니며 지구 공동 생명체의 일원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린 탓이다. 이 교수가 말을 이었다.
“과장 보도도, 과소 평가도 다 해를 줄 수 있지. 이럴수록 믿을만한 미디어의 역할이 중요해. 정말로 중립적인 과학적이고 지적인 대응 말이야.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에볼라와의 경쟁에서 스타트부터 지고 있다고. 그들(바이러스)은 민첩하게 조직적으로 앞서가는데 우리는 느린 걸음으로 뒤처지고 있다고.”
이 교수는 지금을 ‘지적 이종 격투기 시대’라고 불렀다. 어느 한 전공이나 지식만 갖고는 어림도 없는 세상이다. 아레나가 달라진 것이다.
“전염병은 인간과 인간의 접촉에서 나와요. 우리가 혼자 사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야. 그런데도 타자의 슬픔이나 가난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지. 에볼라 바이러스의 의미에 대해 10분만 검색하고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질 텐데.”
그래서 세균학은 인문학이 되고 정치학이 된다.
- 중앙선데이 제398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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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6. 아날로그 결핍증 |
닭다리 네 개 그리는 아이들 동물원에는 동물이 없고 채소가게엔 채소가 없다 |
<6> 아날로그 결핍증 아시아라는 말에는 아시아가 없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동물원엔 동물이 없다” 는 말로 화두를 꺼낸다. 또 선문답인가.
“북극에만 사는 백곰과 남극에만 사는 펭귄이 한 장소에서 사는 곳이 동물원 아닌가. 진짜 생태계에는 그런 동물은 존재하지 않지. 백화점도 마찬가지야. 식품 매장에 가면 과일과 야채가 같은 코너에 있잖아. 생산지와는 상관없이 바나나와 복숭아가 어깨 동무를 하고 있어. 그런데 동물원과 백화점이 생긴 것은 모두 같은 시기였어요. 도시화 산업화와 함께 그런 탈(脫) 자연의 비현실 공간들이 등장하게 된 거라고. 서구 근대의 지적 시스템이 만들어 낸 산물이지.”
때묻은 생각을 씻어내는 말의 샤워가 계속된다.
“농산물 파는 슈퍼에 가봐요. 거기 자연이 있나. 오이는 비뚤어진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런데 요즘 반듯한 오이가 아니면 상품가치를 잃어. 특히 미국이나 일본이 심해. 규격이 똑 같아야 값도 똑같이 매길 수 있기 때문이지. 그게 어디 농산물인가, 공산품이지. 생물은 원래 불규칙한 것인데, 그래서 자연은 직선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슈퍼에서는 반대지.”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일정한 규격에서 벗어난 농산물들은 폐기처분 한단다. 굶주리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영화 ‘파이 이야기’ 봤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바나나가 물에 뜬다는 말을 아무도 안 믿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목욕탕에 바나나 송이를 넣어봐. 정말 뜨거든. 그런데 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믿으려 하지 않을까. 현대인들은 피가 흐르는 현실이 아니라 고정 관념을 믿으니 그래요. 정 부장은 쇠고기를 어디에서 사나. 정육점이야, 슈퍼야?”
말꼬리를 흐렸더니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정육점에 통째로 매달린 쇠고기를 사세요. 그래야 자기가 먹는 쇠고기의 모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지. 슈퍼에 진열된 고기들은 무슨 고기던 똑같이 썰어서 비닐 포장되고 바코드가 찍혀 있어요. 그래서 요즘엔 다리가 네 개 달린 닭을 그리는 아이들이 많다는 거야.”(웃음)
설마 싶다가도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물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날로그 결핍증에 걸리게 되겠지.”
비타민 결핍증이면 몰라도 아날로그 결핍증이란 말은 처음 듣는다. 과연 여기는 지(知)의 최전선이다. 당연시되던 일상의 모든 것들이 허공에 붕 떠서 신기루처럼 보인다.
“초등생이 커터 나이프로 친구의 목을 벤 사건이 생겼어. 일본에서 말야. 찔린 아이가 피 흘리며 죽었는데도 보호소에 감호된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아이 만나면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라고 했다는 거야.” 남을 찌르고서도 그가 아파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는 이상감각은 아날로그의 현실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었다.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친구를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다니. 기자 근성으로 되물었다. “전쟁터에서 칼로 적을 죽인 사람과 화살을 쏘아 죽인 사람은 느낌이 다르거든. 미사일로 보이지 않는 도시를 공격할 때 군인의 마음과도 비교해 보세요.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캐나다에서 대학 강의실에 들어와 여학생들을 모아놓고 쏘아 죽였던 범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고. 총으로 죽였을 땐 태연하던 범인이 저항하는 여학생을 칼로 찔렀을 때는 당황해 하면서 자기도 자살해 버리거든. ‘이것이 살인이구나’라는 아날로그 감각이 되살아난 거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2000년 넘게 쌓아 온 형이상학은 피가 흐르는 정육점 살덩어리의 아날로그 감각을 빼앗아갔다. 그들과 싸우다 보면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던 말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을 하다 미쳐버린 니체처럼 될지도 모른다.
“정 부장. 니체가 되어도 좋다면 종군기자 한번 해볼래요? 지금 지식인들은 붕대로 머리를 싸매고 후방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데, 그걸 사람들은 연구실이라고 부르고.” 농을 하듯 웃으며 말하는 이 교수의 얼굴에는 일말의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 중앙선데이 제397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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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5. ASIA와 亞細亞 |
‘아시아’ 라는 말의 기원 3000년 전 설형문자에 기록 본래 뜻은 ‘비유럽’ 인데… |
<5> ASIA와 亞細亞 막판에 북한의 벼락 손님들까지 방문해 화제가 된 아시안 게임으로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도 의외의 질문이 돌아왔다. “정 부장, 아시아란 말이 무언지 생각해본 적 있어요?”
아시아. 영어로 Asia. 한자로는 亞細亞. 그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변명이 아니라 다들 그랬을 것이다. 지구촌 인구의 65%를 차지하는 아시아인 중 인천 아시안 게임이 열리는 동안 아시아란 말이 어디서 생겼는지, 그 뜻이 무엇인지 생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아시아라는 말은 기원전 3000년 설형문자에도 찍혀 있었지.” “그렇게 오래됐나요?”
“아카드(Akkad)말의 아슈(ASU)는 해가 뜨는 동쪽 땅을 의미하는 말이었어. 그게 그리스로 흘러들어가 아시아란 말이 됐지. 해가 지는 서쪽 땅은 에레브(EREBU)야. 그게 오늘의 유럽(Europe)이 된 것이고.”
놀라워하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별거 아냐. 구글에 들어가 몇 초만 두드리면 다 나와. 당장 쳐봐요. 헤카타이오스(Hecataios)라고, 왜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여행가 있잖아. 화상검색도 해봐요. 옛날 지도가 나올테니.”
정말이다. 2300년 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세계 지도를 복원한 그림이다<사진>.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위에는 ‘EUROPE’ 아래에는 ‘ASIA’라는 말이 선명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동서가 아니라 남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 다를 뿐이다. ‘LIBYA’란 말도 나와 있다. 아프리카 대륙일 것이다.
아, 그 옛날부터 이 지구에 유럽과 대치되는 아시아라는 것이 있어 왔구나. 그런데 아시아인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부르고 멋대로 말뜻을 확장해 오늘의 아시안 게임이 인천에서 벌어졌다.
“저는 한자말 ‘亞細亞’ 를 영어로 표기한 것이 ASIA인줄 알았습니다.”
“그 반대지. 마테오 리치(1552~1610)가 선교사로 중국에 와 있을 때 한자말로 번역한 것이지. 서양 사람들이 이름 붙여주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한 셈이야.”
유럽을 구라파(歐羅巴)로,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기하(幾何)란 말도 그가 다 번역한 한자어란 것이다.
“그런데 정 부장. 아세아라는 말에는 ‘가늘 세(細)’자가 들어있는데 대명이든 대청이든 대(大)자 좋아하는 그들이 그걸 자기네들 사는 땅 이름이라고 생각했겠어? 아세아라는 오랑캐 땅의 서양 이름으로 알았겠지. 거기다 일본 사람들 역시 근대화를 하면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쳤으니 그들에게도 아시아란 없지. 침략 대상으로의 대동아가 있었을 뿐이지.”
결국 아시아란 말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럽 땅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두루뭉수리로 확대 재생산한 말이니 아시아인의 정체성이 생길 리 만무하다. 아시아는 유럽인의 가슴과 머리에만 있고 막상 아시아인의 염통에는 없는 말인 셈이다. 기자 본능으로 한국의 메달 수만 셈하던 머릿속에 또 다시 벼락이 떨어진다.
“정 부장, 비행기 몰 줄 알아?. 나침판 바늘을 동남아 방향으로 놓고 날아가 봐. 타이가 아니라 타히티가 나올 걸.”
이번엔 웃음 대신 부아가 치밀었다. 한국에서 보면 동남아는 분명 서남쪽에 있는데 왜 동남아라고 불러야 했나. 스포츠란 것도 따지고보면 희랍에서 온 것이 아닌가.
룩(Look) 아시아! 진짜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의 높이 뛰기, 기술의 빨리 뛰기, 부정의 장애물 넘기-.
“이 경주에서 이기려면 젊은이들이 독수리의 눈과 개미의 눈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해. 우리가 무심히 쓰고 있는 작은 단어 하나에도 앞으로 우리의 운명이 걸릴 수 있거든.” 이 교수의 결론이었다.
- 중앙선데이 제396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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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4. 만리장성과 길 |
대륙과 해양 충돌 조정할 수 있는 힘이 우리가 추구할 어젠다 |
<4> 만리장성과 길맞다. 지(知)의 최전선은 지금 해양에서 대륙으로, 서양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한 세기 전 유행하던 지정학(지오폴리틱스)이 새로운 지문학(지오컬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잠든 사자는 깨고 달리던 토끼는 낮잠을 잔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달려라 토끼!라고 외쳐도 요즘 젊은 세대들 앞에는 ‘한자’라는 험준한 만리장성이 가로막고 있죠. 영어만 열심히 배우면 다 되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요.”
“그래? 그러면 넘으려 하지 말고 눕혀. 만리장성을 눕히면 큰 길이 되잖아.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스케일의 토목술인데 중국인은 돌로 만리장성을 만들고 로마인들은 길을 만들었지. 성은 막고 길은 뚫는 것인데 사실은 같은 거란 말야. 만리장성의 벽을 눕히면 로마 가도가 되고 로마가도의 길을 세우면 만리장성이 되는 거지.”
그러고 보니 88올림픽 때 이 교수가 만든 캐치프레이스가 ‘벽을 넘어서’였다. 그리고 모든 올림픽 개회식 연출가들이 넓은 운동장을 하나 가득 메우려고 할 때, 그는 굴렁쇠 굴리는 6살짜리 아이 하나를 텅 빈 운동장에 등장시켜 정적과 공백의 퍼포먼스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베이징 올림픽은 어땠나. 13억의 인해 전술과 인류 문명의 4대 발명이라는 종이 · 화약 · 나침반 등을 들고나와 중국 파워의 위세를 세계에 자랑하려고 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중국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를 비롯해 자성의 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도광양회(韜光養晦 · 빛이 밖에 퍼지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름)’의 외교정책은 일시적인 전략이 아니라 100년을 두고 지켜야 할 중국의 문화요 정신이라는 해석이었다.
“내가 새천년 준비위원장 시절 한중일 학자 세미나를 열었는데 그때 한국 참가자 한 분이 중국을 지나(支那)라고 호칭한 글을 인용하다가 큰 소란이 벌어졌어. 왜 중국을 멸시하는 호칭을 썼는가. 사과하지 않으면 회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하는 거야. 그때 나는 좌중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이런 농담을 했어. ‘중국이라는 호칭도 따지고 보면 우습지않아요? 우리는 매일 기상예보 시간에 한중일 지도를 보는데 왼쪽에 중국 대륙, 오른쪽에 일본의 섬이 있고 그 가운데 한국의 반도가 있습니다. 기상도를 보면 한반도가 가운데 있으니 한국이 중국이 아닌가요?’라고(웃음). 중국 학자들도 피식 웃고 말더군. 대국사람답게.”
그러더니 이 교수는 옆에 있는 책 한 권을 펼쳐보였다. 거울에 비친 것 같이 똑같은 두 얼굴이 보였다. <그림>
“정 부장, 둘 중 어느 쪽 얼굴이 더 즐거워 보이지?” “저는 아랫 쪽 같은데요.”
“그럼 정 부장은 오른손잡이야. 통계학적으로 오른손잡이는 그림의 왼쪽 눈을 주로 본대. 왼쪽 눈이 웃고 있으면 전체가 웃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지. 왼손잡이는 그 반대고. 좌우만 바뀐 같은 얼굴인데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보이는 것, 이걸 가지고 좌우가 싸우다니…. 우리는 지금까지 영국, 미국,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양 문명을 따라 경제발전도 하고 국위도 상승했어. 그런데 북한은 냉전 때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에 포함됐었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남쪽을 인공적인 섬나라로, 북한은 대륙의 일부로 만들어 놓았어. 지정학적으로 말야.”
지난 회 ‘응답하라, 한국은 대륙국가인가 해양국가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나왔다. 우리는 반도국가인 것이다. 대륙과 해양의 충돌을 초극해 양극을 조정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우리가 절실하게 추구해야 하는 어젠다가 돼야하는 이유다.
- 중앙선데이 제395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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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3. 중국의 ‘도광양회’를 읽는 하이퍼 텍스트 |
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 응답하라, 한국 |
<3> 중국의 ‘도광양회’ 를 읽는 하이퍼 텍스트 지난 회에서 이어령 교수가 유리와 시멘트를 ‘잉크’ 삼아 3D 프린터로 집을 ‘출력’한 중국을 빗대 “잠자는 사자가 이제 눈을 떴다” 고 한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기사를 찾아봤더니 시진핑(習近平·사진)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3월 27일 중국 · 프랑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 강연에서 바로 이 말을 했다. “중국은 깊은 잠에 빠진 사자다. 만약 잠에서 깨기만 하면 세계를 떨게 할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해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그러나 평화롭고 온화한 문명의 사자다” 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뻔한 말도 예사롭게 넘기지 않는다. 중국을 잠자는 사자라고 한 말은 나폴레옹의 정확한 워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자가 아니라 거인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그냥 지도를 가리키며 한 말이라고도 했다. 당시엔 중국을 용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어도 사자로 지칭한 예는 찾아볼 수 없고 라이온이라고 하면 보통 영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ADHD증세로 끝까지 읽은 책이 거의 없었다는 나폴레옹인데도 『손자병법』번역서만은 늘 옆에 두고 읽었다고 했다. 그래서 황화론처럼 그역시 중국의 잠재력을 평가하면서도 경계심을 품었던 것은 사실일 수도 있다.
‘잠자는 사자’가 2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냉전 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외교정책으로 내세운 도광양회 (韜光養晦 · 빛이 밖에 퍼지지 않도록 감추고 어둠 속에서 은밀히 힘을 기름)와 연결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잠자는 사자’ 같은 중국 경계론을 피하기 위해 만든 이 말은 구체적으로 ‘不對抗’(맞서지 말라) ‘不樹敵’(적을 만들지 마라) ‘不?旗’(깃발을 올리지 말라) ‘不當頭’(선두에 서지 말라)의 4불(不)과 초월과 초탈을 권한 양초론을 들 수 있다.
“시 주석의 ‘잠에서 깬 사자론’은 그동안 지켜온 도광양회의 외교 원칙을 부정하는 선언 아니냐며 인터넷에서는 불이 붙었지. 그런데 우리 블로그만 잠잠해서 ‘한국은 잠자는 토끼인가’라고 물었던 거야.”
“그럼 도광양회란 결국 잠에서 깨어난 사자를 경계하지 않도록 하자는 위장전술이었다는 말인가요?”
이 교수는 웃었다. “도광양회는 그 말 뜻 자체가 애매해. 중국인도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이거든.”
그러더니 별안간 낚시 이야기를 꺼낸다. “옛날엔 낚시로 텍스트의 의미를 하나하나 낚았다면 요즘은 그물로 ‘의미의 고기떼’를 잡아 올리는 하이퍼 텍스트의 시대야.”
하이퍼 텍스트로 줄줄이 연결되어 올라오는 검색어를 보니 ‘도광양회’ ‘무소작위’ 같은 말이 꼬리를 문다. 거기엔 고철로 쓰겠다고 들여온 우크라이나의 폐선을 초음속기 탑재가 가능한 항공모함으로 건조한 랴오닝(遼寧)호라는 이름까지 나온다. 이는 근양에서 원양으로 중국의 해군 전략이 바뀐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당연히 랜드(land) 파워와 씨(sea) 파워의 대결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EU 국가가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새로운 대륙세로 등장한 브릭스(BRICS)와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거지. 유라시아에 새 지정학론이 대두되는 이유가 이거거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 하이퍼 텍스트들은 결국엔 우리 등잔 밑으로 돌아와 “대한민국은 대륙 국가인가 해양 국가인가” 라는 절박한 질문을 던진다. 마이클 그린(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선임부소장)은 중앙일보 6월 11일자에 기고한 칼럼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다. 지금까지 진보냐 보수냐 하는 질문에만 익숙한 나는 뺨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얼얼하다.
“등잔 밑은 어두워. 잠자는 사자가 잠자는 토끼로 이어지기도 하는 하이퍼 텍스트의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지.” 이 교수가 덧붙였다. “이 검색어들을 봐요.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물고기 떼의 은빛 비늘이 보이지 않나요?”
- 중앙선데이 제394호 | 글 정형모 기자, 사진 중앙포토 | 2014.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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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과 떠나는 知의 최전선 2. 중국, 집도 3D 프린터로 ‘출력’ |
아톰에서 비트로 비트에서 다시 아톰으로 ‘디지로그’엔 벽이 없다 |
<2> 중국, 집도 3D 프린터로 ‘출력’
“정 부장, 3D 프린터 알지?” “네. 종이가 아니라 입체 구조물이 출력되는 기기죠.” “그걸로 집 지었다는 얘기 들어봤어?” “네? 아뇨. 총을 만들어서 문제가 됐다는 뉴스는 봤습니다만.” “이걸 좀 보라고. 중국 상하이의 한 기업이 3D 프린터로 집을 지었어. 200 평방m 짜리 집 10채를 ‘출력’ 하는 데 하루 밖에 안 걸렸대.”
이어령 교수가 건네준 PDF에는 집을 짓고 있는 커다란 3D 프린터와 그렇게 만들어진 집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사진). 재빨리 기사를 검색했다. 지난 4월 15일자로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는 상하이 잉촹(盈創)장식설계회사 (대표 馬義和·46)가 길이 32m, 너비 10m, 높이 6.6m 짜리 대형 3D 프린터에서 뽑아낸 구조물을 조립, 하루 동안 집 10채를 지었다고 보도했다. 한 채 가격은 4800달러(약 497만원). 소후닷컴은 8월 25일자 기사에서 “24일 창장(張江)첨단공업 지구에 들어선 이 주택에서 첫 거주 체험이 있었으며 다들 만족스러워했다”고 전했다.
“FT는 ‘집을 통째로 출력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구조물을 출력해 조립했기 때문에 세계 최초의 3D 프린트 하우스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사족을 달았네요.”
“중요한 것은 3D 프린터가 갖고 있는 의미야. 지금까지는 아톰(atom · 원자 ·물질의 최소 단위)에서 비트(bit · 정보의 최소 단위)로 가면 다시 아톰으로 변환이 안 됐어요. 그런데 3D 프린터는 (컴퓨터상의) 비트를 다시 (물질인) 아톰으로 변환시킨단 말이지.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디지털이 다시 아날로그로 자유롭게 넘나들게 됐다는 게 3D 프린터가 갖고 있는 핵심 맥락이야. 내가 늘 말하는 ‘디지로그’가 바로 이거거든.”
“지난해 3월 오바마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앞으로 4년간 미국 학교 1000곳에 3D 프린터와 레이저 커터 같은 디지털 제작도구를 완비한 디지털 공작실을 설치하겠다’고 했잖아요.”
“우리는 지금 무료 급식이다, 9시 등교다 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미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3D 프린터 체험 교육을 시키려 하지. 신기술이 많은데 왜 하필 3D 프린터일까? 그렇지, 지식의 최전선이 바로 거기 있거든. 디지로그는 우리가 먼저 한 말인데 실전(實戰)은 미국과 중국에서 벌이고 있으니 답답하다는 거지.”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2차 산업인 제조업은 3차 산업인 정보·서비스업에 뒤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통설이 깨졌다는 얘기야. 크리스 앤더슨은 ‘웹 2.0’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지(知)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인데, 2012년 『메이커스』라는 책에서 이렇게 단언했어. ‘이제 아이디어만 있으면 제조 지식이나 설비가 없어도 누구나 1인 메이커가 된다’고. 블로그를 통해 누구나 언론사 사장이 된 것처럼, 3D 프린터를 사용하면 누구나 공장 사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야. 오바마의 전략은 결국 제조업 공동화 국가인 미국을 정보화 사회와 산업화 사회가 결합된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뜻이지.”
“정말 10년 뒤에는 문명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상상조차 쉽지 않네요.”
“미국에 이런 농담이 있대. 10년 전에는 아이들이 밥을 먹지 않으면 ‘얘들아, 지금 중국에는 네 또래 수십만 명이 굶고 있단다. 어서 먹어라’고 했는데, 지금은 공부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거지. ‘공부 안 하면 중국 아이들에게 밥줄 다 뺏길 거다’라고.”
작은 바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역시 이곳에 오면 신기하게도 그것은 대하처럼 흐르는 문명의 ‘몽둥이’로 바뀐다.
“이렇게 ‘잠자는 사자’가 ‘눈뜬 사자’로 변했는데 잘못하면 한국은 ‘잠자는 토끼’가 되는 거지. 지식의 최전선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지 앞으로 그 이야기를 하자구.”
- 중앙선데이 제393호 | 글 정형모 기자 | 2014.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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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로 들어갔더니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여섯 대나 보였다. 지난해 팔순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 |
그의 책상 위엔 촉각 곤두세운 일곱 ‘고양이’가 있다 |
이어령과 떠나는 지식의 최전선 <1> 프롤로그
지난해 팔순잔치를 치른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 장관)는 여전히 바쁘다. 그는 오늘도 지(知)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야전(野戰)사령관이다. “선생님의 서재엔 어떤 신무기가 있나요?” 매번 들려주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을 하면서 비결을 물었더니 “고양이 일곱 마리”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을 찾았다. 서재로 들어갔더니 3m가 넘는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가 무려 여섯 대나 보였다. “고양이는요?” “저게 바로 내 고양이들이지.”
컴퓨터를 사과(apple)라고 부르는 것은 보았어도 고양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 본다. “컴퓨터로 하는 설계를 캐드(CAD)라고 하잖아. Computer Aided Design. 이건 내 사고(思考)를 도와주니 ‘Computer Aided Thinking’, 줄이면 캣(CAT)이지 뭐. 아무리 슈퍼 컴퓨터라고 해도 사람의 생각을 대신해 줄 수는 없어요. 사고의 주체는 인간이고 컴퓨터는 그 사고를 도와줄 뿐 대신해 줄 수는 없지. 그런데 사람들은 컴퓨터를 사고의 해결사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고양이가 여섯인데요?” “그래, 작은 고양이는 내 안방 침대 곁에 있지.” 그는 노트북을 작은 고양이라고 불렀다. 아마 잠자리에서도 노트북으로, 전자책으로, 메일도 보내고 메모도 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가 일곱 마리나 필요한 이유를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컴퓨터 전원을 차례로 켰다. “자, 이 컴퓨터에서는 인터넷을 열어놓고 TED 동영상을 들으며 중요한 내용은 마인드젯(mindjet)의 앱으로 정리를 합니다. 다른 컴퓨터에는 에버노트(evernote)의 DB를 검색하면서 중요 자료를 긁어 마인드젯의 메모 노트에 갖다 붙이고.”
이 교수는 수잔 블랙모어 교수의 최신 미메틱스 인터넷 강연이 크라우드 컴퓨팅으로 정리되어 한 편의 논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의 컴퓨터에는 마인드젯 말고도 ‘더브레인’, 국내 앱으로 ‘씽크와이즈’도 있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그리고 그 발톱으로 화면의 자료를 긁어 재빨리 DB를 구축해 가는 모습을 옆에서 보니 컴퓨터를 고양이라고 부른 것이 실감이 났다.
이렇게 자료로 모은 파일은 아래아한글로 변환시켜 드롭박스로 보내 저장한다. 그러면 일곱 대 아니 수십 대의 다른 컴퓨터에서 바로 불러내 원고 쓰기가 가능해진다. 해외 여행을 하는 경우도 서재에서 컴퓨터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새끼 고양이’들은 무릎에도 올라와 있다. 책상 맞은편 안락 의자 옆에는 아이패드, 갤럭시 노트, 킨들 같은 모바일 기기들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그가 자주 찾는 사이트는 ‘와이어드’ 전자판(www.wired.com).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꼭 들어가 본다고 했다. “논문이나 책이 되기 이전에 지식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취재한 기사들이지. 이미 나온 책을 보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같이 생각해가는 시대거든.”
디지로그나 생명자본주의와 같은 말은 인터넷을 검색해도 안 나오던데 그게 바로 이 같은 글로벌 지식의 싱크로나이즈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의 배와 함께 침몰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지금 뗏목을 만들고 있는 중이야. 이렇게 지식의 최전선이 형성됐는데, 정작 지식인들이 후방에만 앉아 있으면 되겠어요?”
- 중앙선데이 제392호 | 글 정형모 기자 /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 2014.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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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호모 파베르의 진화
매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을 만나면서 말씀 중에 언급하신 책을 가급적 읽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크리스 앤더슨의 『메이커스』입니다. ‘知의 최전선’ 코너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는 디지털과 결합한 3D 프린터가 가져올 제조업 혁명을 단언합니다. 아이디어만 있으면 누구나 사장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렇다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었죠.
지난 주말 한국공예 · 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기자 간담회가 열렸는데, 최정철 원장이 묘한 것을 가져왔습니다. 올해 제3회 공예 · 디자인 스타상품으로 선정된 11점 중 하나인 윤주철 작가의 ‘칠보투각머그’ 였습니다. 손잡이를 제주 바닷가 조약돌(몽돌) 모양에 고려 전기 청자칠보투각향로의 칠보문 투각 패턴을 적용해 3D 프린터로 뽑아낸 뒤 옻칠로 마감한 머그컵이었습니다. 사실 국내에서 3D 프린터로 뽑은 작품들 보면 아직 거칠던데, 이 작품은 수준을 한 단계 높였더라고요.
최 원장은 “지난 9월 파리에서 열린 메종&오브제 행사에 참가했던 윤 작가의 이 작품과 이인화 작가의 백자 잔, 이유주 작가의 한지 알람시계와 테이블 세트가 내년부터 퐁피두 뮤지업샵 · 기메 뮤지업샵 · 카루젤 드 루브르 아트샵 등에 입점이 확정됐다” 는 기쁜 소식을 전했습니다.
3D 프린터가 가져다줄 새 세상은 이미 우리 곁에 다가와 있었습니다.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의 시대입니다.
- 중앙선데이 제395호 | 문화에디터 | 2014.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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