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 우리 사회를 쥐고 흔들었던 ‘정치깡패’ 중 유지광(柳志光)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오야붕’이었던 이정재는 5ㆍ16쿠데타 이후 사회정화와 구악일소라는 명분을 내세운 군부의 신속한 형 집행으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정재 밑에서 2인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임화수는 영화배우와 감독들을 쥐락펴락하던 영화계의 대부였다. 유지광도 저지른 죄로 보자면 4ㆍ19 때 학생 데모대에 발포를 명한 최인규 내무장관, 이승만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세도를 휘둘렀던 곽영주, 야당 집회와 선거 때마다 정치깡패들을 동원하여 방해공작을 편 이정재, 4월 18일 고려대 학생 데모대를 무자비하게 테러한 신정식, 정계와 연예계 사이에서 채홍사 노릇을 한 임화수 등에 못지않다(이들은 모두 사형 당했다).
하지만 유지광은 재판 과정에서 ‘모든 것이 내 잘못이며 내가 오야붕을 잘 못 모시고 부하를 제대로 못 가르쳤으니 나를 벌하라’는 논리를 내세웠기에 재판부는 그의 목숨을 살려준다. 유지광도 처음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다시 15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5년 6개월간 복역한 뒤에 석방된다. ‘의리의 사나이’였기에 목숨을 건진 유지광은 1974년에 동서출판사를 통해 『大命』이라는 자서전을 펴낸다.
이 책의 제13장 ‘임화수의 여인천국’편을 보면 조미령이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여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임화수가 조미령을 유혹해보려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끝끝내 실패하는데, 그 대목이 이렇게 끝난다.
아무튼 연예가의 네로 임화수도 좋아했던 여인에게는 마음이 약했던 모양이다. 구슬리다 안 되니까 최음제 요힘빈까지 이용하려고 했으니……. 조미령 건은 여인 007작전의 귀재 임화수가 실패했던 유일한 케이스인 것 같다.
아주 드물게, 깨끗한 처신으로 자신을 지킨 배우였다는 것이다.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재미있는 표가 하나 보인다. 1950년대 국내의 대표적인 영화잡지 『국제영화』에서 1957년에 애독자 투표로 선정한 남녀배우 베스트 10인의 표가 나와 있다.
1위 최무룡 : 6,052표
2위 김동원 : 2,697표
3위 김승호 : 1,767표
4위 이민 : 1,109표
5위 윤일봉 : 744표
6위 노능걸 : 406표
7위 전택이 : 392표
8위 박암 : 372표
9위 이예춘 : 206표
10위 김진규 : 108표
1954년에 데뷔한 김진규는 이때 겨우 10위에 턱걸이를 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최고의 인기배우로 급부상한다. 김진규는 <로맨스 빠빠> <표류도> <이 생명 다하도록> <하녀>를 찍은 1960년부터 인기스타의 반열에 들어선다. 한편 1957년 여자배우 베스트 10은 아래와 같다.
1위 조미령 : 3,524표
2위 주증녀 : 2,511표
3위 최은희 : 2,006표
4위 이경희 : 1,884표
5위 노경희 : 1,209표
6위 양미희 : 485표
7위 윤인자 : 465표
8위 문정숙 : 431표
9위 이민자 : 279표
10위 김삼화 : 186표
195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중에서 그 인기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이런저런 인터넷 자료를 찾아보니 조미령(趙美鈴, 1929~)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해놓고 있다.
동양적인 외모와 우아한 기품으로 한국영화 중흥기를 장식한 1세대 배우인 조미령은 1937년, <임자 없는 자식들>이란 제목의 연극을 통하여 배우로 처음 데뷔한다. 소녀배우로 출발하여 한국영화 황금기의 문을 그녀가 열었다.
무대 활동을 하다 해방이 되고, 1948년 이규환 감독의 수작 <갈매기>를 통하여 영화배우로 입문하는데, 6ㆍ25전쟁이 일어난다.
휴전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 최은희ㆍ문정숙과 더불어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장식한다. 흔히들 윤정희ㆍ문희ㆍ남정임을 한국영화 1세대 트로이카라 일컫는데, 한국영화사 1세대 트로이카는 바로 조미령ㆍ최은희ㆍ문정숙으로 봐야 한다.
6ㆍ25 전쟁 직후, 수도 서울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인구 180만의 서울에서 국도극장 단일 영화관에서만 무려 1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한국영화 중흥기의 활력소가 된 영화이자 당대 최고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춘향전>이다. 이규환 감독의 작품으로, 미남배우 이민이 이몽룡으로, 조미령이 춘향이로 등장한 영화다. 특히 부산 송도에서 촬영한, 춘향의 옥중 환상 장면인 ‘바다에서 몽룡과 춘향이 만나는 장면’이 일품이라고 전해지지만 현재 우리 세대가 이 영화를 볼 수 없음은 통탄할 일이다. 이 영화의 대 흥행으로 조미령은 5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한다.
그녀의 대표작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영화 중흥기의 불을 붙인 고전 <춘향전> - 이규환 연출(1955)
2) 한국영화 최초의 베를린 영화제 출품작 <시집 가는 날> - 이병일 연출(1956)
3) 당시의 결혼 풍조를 꼬집은 <자유결혼> - 이병일 연출(1958)
4) 전후 김기영 감독 최고의 걸작이라 평가되는 <10대의 반항> - 김기영 연출(1959)
5) 벙어리 딸로 열연한 <마부> - 강대진 연출(1961)
6) 인현왕후로 열연한 당대 대 흥행작 <장희빈> - 정창화 연출(1961)
7) 분단을 주제로 한 작품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영화 <비무장지대> - 박상호 연출(1965)
8) 불교와 샤머니즘 사상을 바탕에 깐 문예영화 <역마> - 김강윤 연출(1967)
그 외에도 <아리랑> <저 하늘에도 슬픔이> <아빠 안녕> <혈맥> <몽땅 드릴까요> <장마루촌의 이발사> <신식 할머니> 등 수많은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당시 관객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톱스타로 군림하였다.
그녀는 윤정희 등 신인 여배우들이 등장한 이후 엄마 역 같은 조연으로도 활약을 했는데 1969년 <눈 나리는 밤>을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은퇴한다.
하와이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1981년 일시 귀국하여 한 편의 영화를 찍게 되는데, 바로 조문진 감독의 리메이크 작 <두 아들>이다. 원래 1970년 황정순ㆍ윤정희ㆍ문희ㆍ최무룡ㆍ신성일 등 초호화 배우로 찍은 <두 아들>은 흥행에 크게 성공했지만 조미령과 이덕화ㆍ안소영 등이 열연한 리메이크 판 <두 아들>은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조미령은 단아한 체구와 조신한 이미지가 한국적 어머니상에 딱 들어맞는 여배우였다. 연기파였지만 연기의 폭은 그다지 넓지 못했던 듯하다. 이미지에 맞는, 전공분야만 잘한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래는 조미령의 대표작 10선
<갈매기> - 이규환 감독(1948)
<춘향전> - 이규환 감독(1955)
<시집 가는 날> - 이병일 감독(1956)
<자유결혼> - 이병일 감독(1958)
<10대의 반항> - 김기영 감독(1959)
<마부> - 강대진 감독(1961)
<고려장> - 김기영 감독(1963)
<혈맥> - 김수용 감독(1963)
<비무장지대> - 박상호 감독(1965)
<역마> - 김강윤 감독(1967)
조미령 씨가 살아 계시다면 어느덧 83세. 세월은 무상하고 인생은 유한하다. 그러나, 영화는 무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