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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하시고 말하게 하시는 예수님(마9:27-3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중의 하나는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소개하며, "너희들은 이제 나를 따르지 말고 저분을 따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런 세례 요한도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아입니까?"라고 묻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누가복음 7:22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냥 그 말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어둠을 몰아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맹인이 눈을 뜨고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고,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나고 손이 펴지는 이런 것을 전부 연결하여 보면 한 인간의 인격적인 완전한 회복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병을 고쳤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질병에서 고침받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순간의 구원만이 아니라 영원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행하신사역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볼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내가 눈을 떠서 영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고 세상의 잡소리만 듣고 살던 내가 이제 진정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두려워서 전도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도하기 시작합니다. 찬양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언어가 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을 뜨고 말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구원의 상징적인 사건 2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맹인이 눈을 뜬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 지중해 지방에는 특유의 기후와 햇빛, 그리고 석회성 먼지 때문에 맹인이 많았습니다. 맹인들은 혼자 다닐 수 없었기에 짝을 지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그들은 생계 유지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구걸을 하였습니다. 눈먼 맹인, 그가 나면서 맹인이 되었든지 살아가는 도중에 실명이 되었든지 간에 그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앞을 보고 살아도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두 눈을 보지 못하고 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답답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27절,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여기에는 이 맹인들의 부르짖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문장이 한 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길게 해야 하나님이 들어 주실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도의 내용입니다. 또 기도하는 자의 믿음입니다. 특히 공적인 기도할 때 길게 해야 유창한 기도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짧을수록 더 많이 준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중언부언하기 쉬운데 예수님의 기도나 성경에 나오는 기도를 보면 단순하고 짧습니다. 기도의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입니다. 구약예언에 메시야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온다고 약속되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바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바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었고 예수님 앞에서 그 사실을 고백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걸음 나아가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저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차마 당신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사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단순하면서도 간절한 부르짖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가 굉장히 단순하지만 이 가운데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이 기도는 둘이 합심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두 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 주님께서도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모여서 합심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합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둘째로 이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본문에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통성기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기도내용을 입으로 크게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우리는 간구라고 합니다. 부르짖음입니다. 이렇게 부르짖을 때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염려와 걱정과 우리의 문제가 주님 앞에 다 내려 놓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에게 절박한 찬스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눈을 뜰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이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예수님에게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생 일대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체면이나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인생에서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못 만나면 다음 주에 만나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약속된 날이 아닙니다. 오늘만 우리의 날입니다. 이 맹인들에게는 적어도 그런 태도가 있었습니다.
셋째, 끈질긴 기도입니다. 이들은 "따라오며" 기도했습니다. 한 군데 가만히 앉아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따라가면서 응답하실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에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적당히 하다가 그만 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메시야로 믿을 진데 끈질겨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내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새벽기도를 하는데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믿음의 조상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켜왔는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기다림입니다. 인내입니다. 어떤 때는 15년, 20년, 4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쉽게 응답을 기대합니다. 물론 급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급한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급한 데 하나님은 하나도 급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인내와 끈질김으로 기다릴 줄 알고 할 수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28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고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 그렇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맹인들이 찾아왔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끈질기게 주님께 구했습니다. 이것이 이들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끈질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응답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이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그때 이들은 "주여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 전능하신 예수님, 죽은 자도 살리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불퇴진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주님이 지금 이런 믿음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여 그러하오이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과 기도는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믿지 않거나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은 마치 한쪽 날개로 날으려고 하는 새처럼 푸드덕 거리다가 날지도 못하고 떨어지고 맙니다. 성도들이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과 기도라는 이 두 날개를 달아야 합니다. 이 두 날개를 가지게 될 때에 영의 세계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을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29절,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너희 믿음대로 되라. 얼마나 분명한 하나님의 법칙입니까? 믿음이 역사의 통로인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 믿음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온 사람은 이 여인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는 어떤 믿음으로 주님앞에 나아왔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다 안다는 것때문에 예수님을 만났어도 불신하고 대적함으로 아무런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문제는 내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알기는 다 알겠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기에 막힘이 없도록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의 믿음대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모든 것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0절,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믿음의 크기는 바로 능력과 기적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은 인색해서 안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내가 구하지 못해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이라는 기도에 관한 책이 있습니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인데, 그 책의 제목은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정을 합니다. "나는 이렇게 축복을 준비하였다, 십자가도 준비하였다. 구원도 준비하였다. 너희는 내 자식이다. 나는 너희에게 축복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왜 너희는 받지 않느냐? 제발 빈다. 문을 열어라. 나에게 기도하라. 나를 신뢰하라.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희에게 주고 싶은 이 모든 축복을 가져가라. 하나님이 더 안타까워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성령충만하기를 나보다도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내가 예수 잘 믿는 사람되길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우리는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원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더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은 있으나 실제가 없습니다. 정말 실제가 있었다면 이렇게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네가 그 사실을 믿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맹인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영적으로 맹인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잘 보고 살아왔으나 영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죄는 수없이 보았지만 거룩은 보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예수님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이제 눈을 열어서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의 살아계신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맹인이 눈뜬 것만 기적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변화가 기적입니다. 지난 날과 오늘 나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이 기적을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고치신 다음에 30절에 보면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금하신 이유는 복음이 생략된 채 기적만 전달되는 것을 예수님이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병 고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고치는 것은 구원을 위한 기초 작업이지 그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간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전도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은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 수가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체험적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사건이 있습니다. 32절,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귀신이 쫓겨나고 벙어리가 말하거늘". 이 사람은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과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관계속에서 얻어지는 행복을 잃고 산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관계가 틀어지고 대화가 단절되게 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귀신의 역사였습니다. 전혀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 이유가 어찌됐든 간에 모든 관계가 파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스스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을 환영하셨습니다.
어쩌면 억지로 끌려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억지로 끌려 왔든 스스로 왔든 주님께 나아온 자는 받아 주십니다. 또 따지고 보면 "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선택하셨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나아왔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주님께 나왔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형편은 보십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그러기에 긍휼히 여기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은 기꺼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예수님께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처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막혀있는 담을 허시고 먼저는 하나님과 나사이, 그리고 너와 나사이에 막혀있는 담을 허시고 둘을 하나로 연결시키기위해 이땅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수화라도 있으니까 대화가 통하였지만 그 당시에 무슨 수화가 있었겠습니까? 그저 무시 당하고 조롱당하기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통이 심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육적인 벙어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인 벙어리입니다. 입이 있지만 하나님을 찬양할 줄 모르고 입이 있지만 기도할 줄 모르고 입이 있지만 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적인 벙어리입니다.
또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저와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수많은 전파들이 공중에 날라 다닙니다. 그 소리를 듣고 영상을 볼려면 반드시 수신기가 있어야 하고 채널을 맞추어 놓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소리, 텔레비젼 소리, 라디오 소리, 시끄러운 음악소리 그야말로 우리를 괴롭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수많은 소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께 체널을 맞추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새벽에, 혹은 깊은 밤중에 철야하면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 양문교회 성도들은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언제나 들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원인은 바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귀신이었습니다. 귀신은 어둠의 영입니다. 귀신은 미혹의 영입니다. 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악한 영입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런 어둠의 영을 쫓아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33절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고통의 원인인 귀신이 떠나니까 육체의 질병이 치료되었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사람이 듣게 되고 일어나지 못하던 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귀신들이 인간의 육체를 억압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꾸짖고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서 귀신을 추방해야 합니다. 귀신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능력앞에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34절,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기적을 실제로 목격하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기적이 분명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도 거절하고 대적합니다.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역사했다고 조롱합니다.
한번 이렇게 마음속에 불신앙이 지배하기 시작하면 무엇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너무 똑똑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길가의 마음 밭처럼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새들이 와서 다 쪼아먹었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어린아이같이 단순해야 합니다. 그저 주님 말씀이라면 아멘하고 순종하며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거기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하시고 귀을 열어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애를 고쳐주시고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그 믿음으로 서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인 장애입니다. 물론 육신적인 장애도 주님께서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또 육신적으로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볼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을 못한다고 할지라도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건강한 성도가 행복한 성도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진정으로 눈을 뜨고 입을 열어서 영적 장애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그러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