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갑절의 영감을 주소서/왕하 2:1-14
1.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2.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3.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4.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5.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6.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7.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8.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9.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10.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13.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14.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
출 처| 류영모목사]
저희들 어릴 때는 사탕을 빨고 껌을 씹다가 충치가 많이 생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나온 어떤 껌 - 쟈일리톨이란 껌은 오히려 충치를 예방한다는 겁니다. 우선 충치가 발생하는 원인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충치균은 당분을 먹고 소화를 시켜 배설물로 산을 만들어 내고 그 산이 이빨의 법랑질을 파괴시켜 충치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이 껌은 매우 단 성분을 함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껌을 씹으면 충치균들이 당분인 줄 알고 열심히 먹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당분이 아니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배출합니다. 충치란 놈이 자기가 배출한 배설물이 달작지근하니까 그걸 또 먹습니다. 먹고 싸고 먹고 싸고 먹고 싸고 수백 번을 반복하는 사이에 충치균들이 영양부족으로 굶어죽는다는 겁니다. 가짜 당분에 굶어 죽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가짜 예배에 굶어 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늘어놓기는 하지만 어떤 기도의 응답도 기도의 능력도 체험하지 못하는 가짜 기도에 굶어죽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탄의 군대를 정복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하나님의 군대들, 나약한 성도들 때문에 한국교회가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굶어 죽어가는 그리스도인들, 영광스런 예배를 맛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오늘 이 땅의 교회들이 무력한 교회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I. 권세와 능력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에 영에 감동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속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신령한 눈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의 얘기로 나누어 집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이단적인 얘기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감동에 관한 얘기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과 마귀가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속였던 능력과 권세를 빼앗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탄은 우리를 속였습니다. 온갖 재미있는 것들이 땅에 있다구요, 세상에 있다구요. 아니였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하나님과의 영광스런 교제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아름다운 섬김과 사랑과 교제가 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광스러움을 온 땅에 선포해야 한단 말입니다. 사탄에게 빼앗긴 영토를 빼앗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 이름의 권세, 기도의 능력을 모르는 사람들. 복음의 파우워, 성령의 권능을 모르는 성도는 모두 직무 유기자 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무익한 종이라 일컫습니다. 무익한 종이 차지할 땅은 바깥 어두운 곳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구요. 그러나 권세를 가지고 만사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로에 승용차 한 대가 150km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습니다. 교통순경이 그 자동차를 세웁니다. 자동차를 세울 수 있는 권세가 순경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쌩~ 지나가 버립니다. 그 차를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거지요.
성령을 받으면 능력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능력만 있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을 지키는 간수의 손에는 모든 죄수를 놓아줄 수 있는 능력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들을 놓아 줄 수 있는 권세가 없습니다.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시대, 악의 권세에 갇혀 신음하는 이 시대 속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 멋지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펼쳐져 가는 21세기 하나님께서 쓰는 교회는 도대체 어떤 교회일까요?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을 마지막 때에 제사장 민족으로 쓰실까요? 능력과 권세를 아는 민족, 능력과 권세를 가진 교회, 능력과 권세를 아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오늘 본문에 이 능력과 권세를 집약한 한 단어가 나옵니다. "영감"이란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영적인 감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신령한 권세와 능력을 합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끔 그런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제단에서 이방선지자 850명과 대결하는 멋진 장면, 하나님 불을 내려주십시요 했을 때에 불이 떨어져서 거기 있는 모든 제물을 불사르고 이방선지자 850명을 멋지게 무찌르는 장면을 보면서 ‘야 나도 그때 한번 태어나서 그 장면을 봤으면 좋을 뻔 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오천명을 먹이는 영광스런 장면을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을 때에 야 나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도시락 하나 예수님께 갖다 드리고 오천명을 먹이는 영광스런 기적을 보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금 철이 든 다음에 생각을 해보면 그때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한국 땅에 태어났다면 내가 그것을 보았겠습니까? 그 땅에 태어났다고 한들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권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성령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는 이 땅,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릅니다.
언제나 성령은 내 안에서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를 통하여 역사를 이루어 가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그 일들을 나를 통하여 이루시겠다고,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이 주도가 되어서 아버지의 역사를 펼쳐 가셨습니다. 신약시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예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시대는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 시대를 이끌어 가십니다. 성령을 알지 못하면 성령과 접촉되지 아니하면 성령의 권능을 깨닫지 못하면, 이 세상을 정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는 역부족입니다. 성령의 권능, 영감이 갑절이나 필요한 시대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그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들도 있었고, 아예 팔아버린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승천하셨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다락방에 함께 모였습니다. 거기에 성령의 영감, 성령의 권능이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비겁했던 제자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락방 문을 걷어차고 예루살렘 거리,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외쳤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문을 걸어 잠그고 불안과 초조와 근심에 쌓여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이글거리는 불 덩어리로 용기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너는 왜 도망갔느냐? 원망하고 불평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었습니다. 서로 감사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앞 다투어 달려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광채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새 시대를 향한 소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전하지 말라는 재판장 앞에서 사람의 말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해 보라고 외쳤습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전 생애를 쏟아 헌신하는 것은 자신의 기쁨이었습니다. 모든 재산과 물질을 드려 아버지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투자했습니다. 자신도 놀랐지요. 이런 용기가 도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세상이 깜짝 놀랐습니다. 저토록 무서운 영향력이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단 말인가? 원수들도 놀랐습니다. 저런 파우워, 능력이 어디서 왔는가?
세상 사람들이 얘기했습니다. 저들은 술에 취했다고. 너희가 미쳤구나. 그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예수쟁이들의 영향력은 염병과 같다고 이방사람들이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향하여 총독이 외쳤습니다. 바울아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일찍이 구약의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것이다. 사람의 힘 말고, 내가 세상에서 배웠던 지식 말고, 내 노력 말고, 성령의 영감 말입니다.
II. 갑절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사는 그의 스승을 통해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선생님을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이제 생도로서 신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는데 내게 목회지를 약속해 주십시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생으로 공부하다 보니 가족이 살 길이 막막합니다. 내게 재물을 주십시오.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한 명예가 필요합니다. 권세가 필요합니다.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게 미래를 보장해 주십시오. 미래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한 가지 기도 제목 "갑절의 영감을 내게 주소서!"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이 "갑절의 영감을 주소서" 입니다.
이 기도를 한 배경이 있습니다. 솔로몬 이후 두 나라로 나누어 졌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사악하기만 했습니다. 그 악의 절정이 아합왕과 왕후 이세벨 시대에 펼쳐지게 됩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큰 등불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엘리야, 엘리사 같은 능력의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엘리야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제자 엘리사 시대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엘리야 시대 보다도 아합과 이세벨 시대보다도 세상은 한층 더 악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나 엘리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별로 알려지지 않은 보통사람이었습니다. 족보가 화려한 것이 아니고, 학력이 찬란한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겨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배경, 족보, 상황을 초월하여 인물을 쓰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비범한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이체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인생의 걸레쪽지들 같은 사람들만 선택했다구요.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로 전락했다고 혹평했습니다.
니이체의 평은 바른 평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미련한 자를 택하여 지혜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자이십니다. 가난한 자들과 없는 것들을 선택하셔서 부하고 있는 자들을 폐하려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땅의 걸레쪽지 같은 사람들이라도 불러서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 삼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사람의 상식에 구애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서 비범한 인물들로 사용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사 그가 엘리야를 처음 만났을 때 농부의 한 사람으로 12마리 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변화시키 위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어두운 시대를 밝히기 위해 나를 따라 나서지 않겠느냐는 부름 앞에 Yes 따라나섭니다. 그는 쟁기를 쪼개 장작 삼고, 밭 갈던 소를 잡아서 동리사람들을 대접하고 부모님께 큰절하고 스승을 따라 나섭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부름 앞에 주저 없이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매여있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당당히 달려갈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랬고 베드로외 12제자들이 그랬고 오늘 본문 엘리사가 그랬습니다.
어두운 한 시대 혜성처럼 나타나 불같이 역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당신 곁으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제자 엘리사. 내 스승과 함께 하던 하나님 나와 함께 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스승을 영광스럽게 쓰셨던 하나님 부족한 종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스승을 힘있게 붙들고 계시던 그 전능한 손으로 날 붙들지 않으시겠습니까?
끈질기게 따라 나서는 엘리사에게 스승은 말합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갑절의 영감이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왜 갑절의 영감을 구했을까요?
이스라엘 전통에 의하면 장자는 다른 자녀들보다 갑절의 상속을 받았습니다.
“갑절의 영감” - 어두운 시대 영계의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암울할수록 앞장 서 달려나가는 장자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배나 더 헌신하는 사람들, 배나 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배나 더 하나님 앞에 쓰임받길 원하는 아름다운 영혼들이 필요하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시옵소서.
이는 스승보다 나아지겠다는 인간적인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인간 됨됨이가 스승 엘리야의 절반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갑절의 영감 - 그것은 이 시대의 요청아니겠습니까? 스승의 시대보다 엘리사의 시대는 한층 더 패역해 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시대가 지도자들의 사악함에 있었다면, 엘리사의 시대 그 사악함에 온백성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지나간 시대가 정치적 타락에 머물러 있었다면 엘리사 시대 그 타락이 종교전반에까지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스승 엘리야가 심판의 선지자, 불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면, 제자 엘리사는 치료의 선지자, 위로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부성적인 선지자였다고 하면 엘리사는 모성적인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치료하는 일은 부수는 일보다 더 어렵습니다. 위로하는 일은 심판하는 일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십시오. 자신의 사명, 자신의 사역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가를 자각한 기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다고 하면 우리는 오늘 칠갑절의 영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요구했다고 하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할진데 10갑절, 20갑절 100갑절의 영감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III. 갑절의 영감이 필요한 때입니다
엘리사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1)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받고 산길을 내려올 때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조롱했습니다.
어른을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도 문제거니와 이는 영적 지도자를 존경할 줄 모르는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고 방황하는 한 시대의 아픔을 보여줍니다.
거역의 영, 압살놈의 영이 역사하는 때, 거역의 영이 역사하는 사람의 특징은 영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령한 세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뤄나가는 영광스런 나라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눈이 까막눈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오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끔찍한 범죄의 행태들, 더 이상 어른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음주, 흡연, 강간, 살인 - 청소년들로부터 연령이 급격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폭력이 남자들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여대생, 여중생에게까지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땅에 영적감각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얼굴을 구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자기 욕망에 집중되어져 있습니다. 자기 욕심에 온갖 시선을 집중하고 살아갑니다.
2) 당시 선지학교가 벧엘, 여리고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선지학교 출신들 중에 이렇다 할 선지자가 등장하고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소식이 알려지자 생도들은 스승의 시신을 찾아 사흘을 헤맵니다. 이성은 발달했지만 그들의 영성은 무디어져 있었습니다. 이적과 지적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초월적인 능력에 있어서는 전혀 무력한 신학도들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의 세속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엘리사 시대 아닙니까? 위복주의 신앙 가지고는 이 험한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내 욕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라고 착각하는 한 세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가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과 이웃들을 보더라도 안타까움이 없습니다. 온갖 관심이 세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조그만한 것을 세상에서 얻으면 행복해 하고 기뻐합니다. 그것이 떠나고 잃어버리면 나는 쓰러지고 넘어지는 무력한 신앙인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은 발달했지만 영성은 죽어있습니다. 이런 썩은 신학을 가지고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신령함과 이적과 기사을 모릅니다. 복음의 능력을 모르는 메시지는 이 시대에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아무리 모아서 세상에 파송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주변이 세상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 초비상이 걸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이 중단되고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는 메아리만 되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행여 주께서 촛대를 옮기시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 성령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시옵소서. 젊은이들이 갈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시대는 날로 악해져만 가고 어두워져만 가고 있습니다. 성직자들이 신령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복음의 영감을 상실했습니다. 갑절의 영감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하나님 내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새벽에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몸부림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우리 교회에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 예배에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한국교회에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오늘 이 땅의 위정자들, 정치가들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공무원들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수출하는 기업가들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시옵소서" 한국교회에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IV. 갑절의 영감을 받으려면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제자를 데리고 네 개 지역을 데리고 다닙니다. 각 지역에 도착할 때마다 어지간 하면 이곳에 머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묻습니다. 그 얘기는 이 지역을 극복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① 길갈
첫 번째 도착한 지역이 길갈이라고 하는 지역입니다.
이 길갈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고 거기에 기념비를 세운 땅입니다. 요단강을 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실진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 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인가?
칼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군사들의 머리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길갈 땅에서 할례를 행했던 것입니다. 그 땅에서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더러움이 굴러갔도다. 죄악이 굴러갔도다. 너희가 진정으로 아버지 앞에 쓰임 받기 위하여 회개할 수 있느냐? 너희 몸을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느냐? 이 시간에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교회에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을지어다.
루터는 등불을 가까이 할수록 그림자가 커지듯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죄에 민감한 성도가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사람, 자신의 영혼에 정결함과 진실함을 잃어버린 사람을 하나님이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도구로 드린 사람을 하나님이 붙들어 쓰십니다.
② 벧엘
두 번째 도착한 지역이 벧엘입니다. 너는 벧엘을 극복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이 받아야 될 축복을 가로채고 홀로 먼 길로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창28).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아버지 내 할아버지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갈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루스라는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해는 서산에 졌습니다. 배는 고프지요. 돌베게 베고 그날밤 잠을 자는데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살아갈 존재인지 알았는데 이곳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구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까? 어떤 교회를 쓰실까요? 어떤 민족을 쓰실까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느냐. 찬송 한곡을 불러도 하나님 앞에 접촉되어질 수 있느냐? 한번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느냐. 네가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한 존재임을 아느냐? 네가 벧엘의 신앙을 확보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재단 신앙, 예배의 영광을 아는 신앙,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앙, 그만이 하나님 앞에 붙들림 받을 수 있습니다.
③ 여리고
세 번째 도착한 지역이 여리고라고 하는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첫 성에 도착했을 때에 거대한 금성철벽, 난공불락의 성 - 여리고성이 나타납니다. 전폭적으로 하나님만 신뢰했습니다. 군사의 힘에 의하여 무너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함성을 질러댈 때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구나. 이 신령한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었구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구나.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소리를 질러라. 백성들이 함성을 질러댈 때 금성철벽, 난공불락의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함성에 함께 하셨던 것이지요. 나의 작은 신음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신다.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했던 것처럼 내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사람, 내 축복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사람, 내 예배가, 내 헌신이, 내 충성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사람,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펼쳐가게 되는 것입니다.
④ 요단강
마지막으로 요단강으로 엘리사를 데리고 갔습니다. 겉옷을 벗어들고 요단강을 내려치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네가 무엇을 요구하느냐? 갑절의 영감을 원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내려와 회리바람속에 그를 태우고 하늘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에게 겉옷이 뚝 떨어집니다.
그 순간 엘리사는 자기의 옷을 찢어버렸습니다. 자기를 부인해 버렸습니다. 이기심을 찢어버렸습니다. 옛 행실을 찢어버렸습니다. 옛 가치관을 찢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는 신령한 옷을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들어서 갑절의 영감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너무 어두워 졌습니다. 영적 무관심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 악함이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복음이 왜 이토록 무력하게 느껴집니까? 이 땅에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힘이 없습니까? 세상을 정복하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신음하고 있습니까?
V. 주님을 놓치지 않으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이 남아있습니다. 길갈이든, 벧엘이든, 여리고든, 요단강이든 스승을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쓰시던 내 스승을 놓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영광스럽게 쓰시던 내 스승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연기자들을 보면 잘 생기지 않았는데 시청자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전원일기에서 일용 어머니 역으로 나오는 탤런트 김수미씨입니다.
그가 쓴 자서전 적인 책 가운데에 그의 일곱 살 때 경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를 따라서 들에 나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막내딸인 자기 이상으로 아끼는 송아지를 어린 딸에게 맡기면서, 그 아버지는 개울로 멱감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송아지를 맡기면서 말하기를 “큰성 시집갈 밑천이여, 잘 먹여라!”얼마후 갑자기 천둥소리가 요란하더니 온 천지가 깜깜해졌습니다. 얌전히 풀을 뜯던 송아지가 천둥소리에 놀라 언덕 아래로 뛰어갑니다.
어린 수미는 밧줄을 팔에 감았습니다. 송아지가 언덕 아래 자갈길에 도착하자 수미는 쓰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질질끌려 자갈밭을 뒹굴며 끌려갑니다. 손이 터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가냘픈 옷을 찢겨졌고 배에서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달려왔는지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댑니다. 천둥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밧줄 놔 버려!”그러나 어린 수미는 가시덤불에 팔뚝이며 배가 쓸려서 시뻘건 피를 흘리면서도 소리를 질러댑니다. “못 놔유, 죽어도 못 놔유! 우리 성 시집 못 가유!”구르다시피 뒤쫓아온 아버지는 송아지를 멈춰세웠고, 가슴이 찢겨져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아버지도 딸도 엉엉 울기 시작했습니다. 못 놔유! 못 놔유!
하나님 이 민족, 이 백성들이 주님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못 놔유! 주님 놓치고 나면 우리 민족이 망해요. 한국교회가 성령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나면 망해요. 못 놔유! 못 놔유! 어린 소녀의 외침이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씨름합니다. 환도뼈가 부러지는 고통 가운데도 못 놔유 못 놔유!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나는 당신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민족을 쓰시겠다는 약속을 주시기 전까지 못 놔요! 새벽마다 울부짖을 우리의 기도 제목이 아니겠습니까? 예배시간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 성령의 영감을 갑절이나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갑절의 영감이 요청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적 수준이 갑절이나 높아져야 이 민족이 살아납니다. 신앙의 부흥이 갑절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절이나 몸부림하며 뜨겁게 기도해야 될 성도들의 기도가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갑절이나 더 뜨거운 열심히 필요합니다. 갑절이나 더 헌신과 충성이 필요합니다.
왜요? 세상이 배나 악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탄이 배나 더 몸부림하며 삼킬자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가 배나 더 어려워졌습니다. 우리에게 갑절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갑절의 권세가 필요합니다. 갑절의 영감이 필요합니다.
쥐는 고양이보다 배는 더 빠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양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눈빛만 봐도 쥐는 꼼짝을 못합니다. 고양이에게 신비로운 힘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힘, 세상의 쥐새끼 같은 마귀를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신령한 눈빛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끌려 들어갔지만 사자의 입을 봉할 수 있는 권세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 땅에 마귀가 사자처럼 울부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우리의 가정에 흐르는 악한 저주를 물리치고, 이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입 벌린 사자의 입을 봉해 버릴 수 있는 권세가 오늘 우리 한소망 가족들에게 필요합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났다고 합니다.
어두운 시대를 빛나게 만들 수 있는 고난과 시련과 고통 가운데도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영광스러운 광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문제는 성령의 영감, 갑절의 영감입니다.
VI. 갑절의 영감으로 비상하자
뉴욕거리에 한 풍선 장사가 풍선을 팔고 있었습니다. 빨간 풍선, 파란 풍선, 노란 풍선, 하얀 풍선, 까만 풍선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흑인 소녀가 남의 집 접시를 닦으며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나는 평생 이렇게만 살아야 된단 말인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길을 걷다가 풍선 장수를 만났습니다. 그 많은 색깔들의 풍선 가운데 까만 풍선이 자신의 신세처럼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이 까만 풍선도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나요? 그럼 색깔이 문제가 아니지. 수소만 불어 넣으면 까만 풍선도 하늘을 나를 수 있단다. 아저씨는 수소를 푸우 푸우 집어 넣고 풍선을 묶어 놓았을 때 그 풍선은 둥실둥실 하늘을 떠 오를 수 있었습니다.
피부 색깔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부와 가난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신앙 경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잘나고 똑똑함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수소였습니다.
성령의 영감이 내게 임하면, 우리는 푸른 창공을 향하여 솟아 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배하신 영광의 세계를 향하여 솟아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저 풍성한 은혜의 세계를 향하여 솟아 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달려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영감이 우리에게 갑절이나 임하게 되면, 우리는 가정을 축복의 가정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 악한 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견고한 진을 파하고 사탄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영감을 붙드십시오. 요구하십시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