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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 류승국 교수 추모 문집 원고(이동준 선생님의 글을 수정해 드린 것임)///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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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광
2016. 4. 19. 9:57
도원선생을 추억하며:
구도(求道)와 행도(行道)의 역정
이동준 (성균관대 명예교수)
1.
6.25 사변 중 1.4 후퇴로 부산피난 때, 아마도 1951년 후반 어느 날인 듯싶다. 부산 범일동, 조선 방직 임원(전무?)이시던 우리 어머니 4촌 형부 되시는 윤상구 씨 댁에 방을 얻어 다다미 3쪽에 부모님과 3남매 5식구가 살 때였다. 하루는 근 삼십 되어 보이는 분이 아버님을 뵙고자 찾아 오셨는데 출타 중이셨다. 그 때가 내가 도원 류승국 선생과의 처음 만남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다.
선친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교수는 연희대와 이화여대 피난학교에 출강하셨다. 그 후 이화대학은 부용동 언덕 임시교사 터에 마루방 두 개 짜리 까치집 세 채를 지어 수학과 조병국, 심리학과 고순덕 그리고 국문과 이정호 교수 등 세 분 교수를 살게 하였다. 휴전 후 환도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집이 없었다.
1953년 후반 서울로 돌아왔으나 이화대학은 당시 신촌에 있던 부속병원 뒤쪽 밭 가운데 방 세 개짜리 허술한 기와집을 마련하여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해주었다. 우리 가족은 부업 비슷하게 닭을 키우고 오리를 길러 달걀과 오리알을 고개 너머 아현동 시장에 갖다 팔았다. 나는 고등학교 학생으로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닭장과 오리집을 청소하고 오물을 치운 다음 등교하였다. 맨발에 목 짧은 군화였다.
그 무렵 우리집에는 아주 자주, 거의 매일 오후에 도원 류승국 선생이 오셨다. 때로는 동문인 원승재(元勝載) 씨도 함께 오셨다. 물론 문안드리려 매일 오시는 것도 아니고, 노상 공부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밤이 아주 늦어도 말씀이 그치지 않는 것이다. 당시는 밤 12시면 통행금지 시간인데 12시 5분 전, 10분 전에 집을 나서시곤 하였다. 아직도 궁금한 것은 하구한날, 교통사정이 말이 아닌 시절에, 보나마나 차편은 없을 터인데, 어디에 기거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게 귀가하셨을까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의 강좌에 참가한 것도 그 때였다. 다석선생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일주일 1회씩, 처음에는 금요일,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목요일(?) 오후에 YMCA 강의실(당시는 천막교실)에서 세 시간 정도의 연속강의를 하셨다. 다석 선생은 교회 교인은 아니었지만 크리스챤으로서 반드시 성경책을 보자기로 싸서 들고 오시며, 그것을 탁자 위에 놓고, 말씀은 전혀 자유롭게 유‧불‧도‧기 어느 것에도 매이지 않고 미리 준비한 그날의 말씀자료를 16절 전지에 써다 붙여 놓고 말씀하셨다. 작은 키에 아랫 배에 도복(道腹)이 불쑥 나오고 머리는 삭발하고 수염을 길렀다. 겨울에는 두꺼운 검정 두루마기에 검정모자를 쓰셨다. 침은 항상 넉넉히 고여 있고 1일 1식이지만 항상 기운이 솟았다. 도원선생은 학산선생과 함께 으레 참석하였고 나도 고등학생으로 담임선생의 허락을 받아 조퇴하여 참석하곤 하였다. 함석헌‧김흥호 선생, 사위 최원극 씨, 그 밖에 거의 고정멤버가 늘 자리를 함께하였다. 참석인원은 열 명 안팎, 일정한 숫자는 아니었다. 때로는 몇이서 또는 개별적으로 구기동 선생댁을 심방하여 아무 소리 없이 한 자리에 앉아있거나 말씀을 나누기도 하였다.
도원선생은 다석과 매우 친숙하였다. 도원선생은 1958년 3월에 이천양정여고 김동옥 교장의 차녀이며 영어교사인 김순희(金順姬) 씨와 혼인하였다. 36세로 만혼이었다. 혼담이 오갈 때 도원선생은 대전 우리 선화동 집에 신부감의 사진을 들고 오셔서 학산선생과 의논 말씀을 나누기도 하셨다. 한동안 우리 집에 기거하실 때였다. 그리고 서울 어느 다방에서 양가 맞선을 보게 되었는데, 학산선생도 다른 자리에 떨어져 앉아 계신 일이 있다. 이대 영문과 졸업생임을 한 눈에 알아보시고 두 번 볼 것도 없이 모르게 일어나 나오시려는데, 순간 신부감의 눈에 띄어 ‘아이구 선생님!’ 하며 쫓아와 인사를 드리더란다.(***교정의견: 왜 일어나 나오시려 하셨는지, 독자로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혼사는 성립되었다. 그런데 다석선생은 아마도 혼사에는 뉘집이건 가지 않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경기 이천양정여고 강당에서 치른 류승국 선생 혼례에는 그곳까지 오셔서 유일하게 축사를 하셨으며, 그 때 적어오신 글이 지금도 사진으로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만학이었지만 젊은 시절 도원선생은 구도자(求道者)로서 정혼(精魂)을 바치는 듯하였다. 한퇴지(韓退之)의 「사설(師說)」에 “도 있는 곳이 스승 있는 곳(道之所存 師之所存)”이라 하였지만, 도가 높은 훌륭한 선생이라 하면 어느 곳이든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찾아 다녔으며 어느 종교와 학파를 가리지 않았다. 단아한 군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특히 깨끗한 영혼을 지닌 선비로서 기품이 있는 분을 흠모하고 존경하였다.(***교정의견 : 어색합니다. 같은 부류의 분들을 열거하면서, --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원선생은 가학(家學)으로서 누구보다 숙부되시는 류헌형(柳獻馨) 선생을 몹시 존숭하였다.(‘누구보다’를 ‘선생을’ 다음으로 옮기는 게 좋습니다) 학문과 행검이 높으신 분으로 일찍이 선생의 인격과 심상에 아로새겨진 분인 듯, 여러 번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아버님이신 류기형(柳琪馨) 선생은 단아(端雅)한 선비로서 도원선생 13세에 서거하였거니와, ‘葆眞齋’라는 액자(額子)에서 보듯이 그 휘호(揮毫)에서도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류씨 집안의 가훈은 효도(孝道)와 정직(正直)이었다 함을 나는 누누이 전해 들었다. 그리고 학문에 투신하면서는 성균관대를 비롯, 서울대, 동국대 등을 두루 다니면서 발분망식하였다. 주병건(朱炳乾), 민태식(閔泰植) 선생과 박종홍(朴鍾鴻), 고형곤(高亨坤) 선생, 김동화(金東華), 김잉석(金芿石), 김영수(金映遂) 선생, 고려대의 이상은(李相殷), 손명현(孫明鉉) 선생, 조용욱(趙容郁), 이희승(李熙昇) 그리고 이병도(李丙燾) 선생의 인품과 지조와 학문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재야의 선비로 행해(杏海) 김노동(金魯東) 씨를 매우 존숭하였다. 나는 면식(面識)이 없으나, 말씀 듣기로는 아마도 꿋꿋하고 구김살 없는 선비의 모습과 늠름한 기상을 칭송하였던 듯하다.
2.
원해(願海) 주병건(朱柄乾) 선생은 일정시절에 청주고보(淸州高普) 교사를 지내시기도 하였는데, 나의 선친의 선생님이시기도 하였다. 들은 바에 의하면, 주선생께서 학교에 부임하실 때 운동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한국말로 “나는 주병건이요, 주병건!”이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는 일본말로 불러야(***'해야'로 바꿔야 합니다.) 하였는데도 말이다. 주선생이 충청북도 도청에 가서 항의하였는데, 일본인 교장이 천황폐하를 어겼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일본 ‘천황’이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하였는데 조선인을 차별하였다는 것이다. 주선생은 훗날 우리집에도 찾아오시고 주무시고 가신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아마도 도원선생은 그러한 성격을 지니신 주선생을, 인자하면서도 너무나 청빈하고 꼿꼿한 노선생을 매우 존경스럽게 대접하였으며 성대 양현재 재감시절에는 성균관 서재(西齋)에 방을 비워 머물러 계시게 하였다. 그리고 주선생께서 수유리 들어가는 길목 허술한 집에 사실 때에도 자주 찾아뵙기도 하였다. 나도 여러 번 동행하였다. 내가 박사과정 때 주선생의 수업을 받았는데, 학생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그 앞에서 경례를 하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또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이 어른이 어떻게 된 일인지 돌아가시기 전에 장례비용으로 쓰라고 일백 만원을 내놓으셨다고 한다. 도원선생은 학문이 풍성한 어느 누구보다도 주선생과 같이 가난하지만 꼿꼿한 선비를 존숭하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동교(東喬) 민태식 선생은 성균관대학과 서울대학을 거쳐 6.25 직후 대전 전시 연합대학으로 출발한 충남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신 분이다. 도원선생은 일찍이 동교선생과 학연을 맺으셨거니와 훗날 충남대학과 성균관대학 교단에서 사제(師弟)이면서 동료 교수가 되기도 하였다. 동교선생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한 성품과 군자다운 풍모는 고인(古人), 대인(大人)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족하였다. 때로는 6.25 때 서울대 교수모임에서의 일화와 같이 놀랄 만큼 용감한 분이었다. 선생의 휘호(揮毫)의 일점일획 아름다운 모습은 선생을 꼭 빼어닮은 듯 우아하기 짝이 없었고, 국내외 서법가(書法家)의 칭송을 받았다. 동교선생은 일찍이 경기중학에 합격하였으나, 어르신께서 그곳은 일제시 관립학교라 하여 물리셨으며, 그리하여 배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한다. 도원선생의 융사지성(隆師之誠)은 동교선생에 대하여서도 자초지종 한결 같았다. 너무나(***교정의견 : '몹시'로 바꿔야 함. '너무'는 부정적일 때 씀) 그립다.
박종홍, 고형곤 선생과도 매우 친밀하고 보통 이상의 관계였다. 도원 자신이 한국철학회 초창기에 서양철학의 조요한 선생과 함께 간사의 일을 보았거니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연구생으로 등록하고 다닌 까닭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도원은 박선생님과 고선생님을 끝까지 존경하여 마지않았다.
한번은 내가 고3 때 한 방에서 하숙할 때로 생각되는데, 열암(冽巖) 박종홍 선생의 철학개설(哲學槪說) 어느 구절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다시피 ‘참 잘 썼다’면서 감탄스럽게 말씀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는 박선생의 철학개설을 교재로도 쓰고, 다시 읽어보니 과연 이 책이 대표작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1967년에 열암선생이 미국 여행 중 이모저모를 적어서 도원선생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 사이의 사연을 짐작할 만하다. 편지의 일절은 이러하다: “서울 출발시는 그 더위에 김포까지 수고로이 전송하여 주셔서 생광(生光)이었나이다. / … 유명한 와이키키 해변의 웅혼하고도 아름다운 낙조를 바라보며, 야자수 그늘에서 김치 안주에 한 잔 기울이는 아취는 과연 신선놀음 같았습니다. / 켄터키 루이스빌에서는 장남과 동반, 링컨의 출생지를 찾아 옛날의 통나무집 순방도 감명적인 것이었습니다. / … 어제는 IBM의 원자계산기 컴퓨터 제작소 내부의 제시설과 제작과정을 안내받아 참관하였습니다. 인조뇌라고나 할까요. 그 정치(精緻)하고도 복잡한 구조가 조그마한 장치 속에 압축되어 비상한 일을 해내는 데는 경탄할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까지 이런 일이 가능하며, 질적 차이는 무엇인지 철학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 … 부디 귀체만중(貴體萬重)하심 비오며, 특히 영부인께 고맙다는 인사 전언하여 주시옵기 형처(荊妻)의 부탁입니다.”
또한 도원박사는 청송(聽松) 고형곤 선생에게 대해서도 매우 각별(恪別)하였고, 학문적‧인격적으로 너무나 잘 맞으며 존경하여 마지 않으셨다. 청송선생도 도원박사를 몹시 아끼시고 격의 없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어떤 테마에 대한 판단이 빠르고 핵심을 집는 점도 비슷하지만 찌꺼기가 하나도 없이 소통이 되는 듯하였다. 도원박사의 일람첩기(一覽輒記)는 놀랄 만하여 컴퓨터가 없던 시절, 청송선생은 어떤 구절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바로 전화를 걸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곤 하였다. 그리고 1983년 도원박사가 회갑을 맞이하였을 때 후학들이 동방사상논고(東方思想論攷)라는 방대한 분량의 기념논문집을 내었는데 청송선생은 ‘내가 본 道原’이라는 하사(賀辭)를 쓰셨다. 약간을 본다면: “근자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직에 취임함으로써 한국의 전통문화를 선양하고 이를 재조명하는 과업을 담당하여, 그의 심오한 학력을 경주하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진실로 이 자리에 이 사람! 이 자리가 사람을 얻었고, 이 사람이 이 자리를 얻었다고 할 것이다. 학문과 도략(韜略)을 갖춘 류박사로서는 그 일생에 있어 의당한 자리를 얻었음이요, 정신문화연구원으로서도 찾아내기 힘든 사람을 맞아들인 것이다. / … 모쪼록 이 연구원이 지닌 중차대한 사명을 다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의 학술문화를 진흥하고 민족정기를 바로잡을 것은 물론이요, 특히 정신문화의 기초 위에 민족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큰 공헌이 있기를 바라며, 이 거룩한 일을 감당해 나갈 건장한 힘이 그에게 주어지기를 지도(至禱) 지도(至禱).”라고 마무리하였다. 다른 한 말씀을 보탠다면, 자기저술(禪의 世界)의 1면에 소동파(蘇東坡)의 득도계(得道偈)로 일컫는 글을 붓으로 쓰시고 날인하여 도원박사에게 증정하기도 하였다: “到得還來無別事 盧山烟雨浙江潮.”
열암, 청송 두 분이 대선생이었지만 다 같이 서양철학자이면서 동양적 정서를 바탕으로 하는 점에서 같다고 하겠으나 대체로 성격도 대조적일뿐더러 한 분은 유학, 또 한 분은 불교학에 조예를 쌓으신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도원선생은 이론적으로 양면을 모두 관섭(關涉)하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원선생은 동국대학 대학원에도 등록을 하고 불교를 학술적으로 탐구하였다. 학문적으로 김동화 선생을 꼽았으며, 포광(包光) 김영수 선생이야말로 불교원전을 아주 정확하고 명확하게 해독해 주시는 분이었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큰 아들 인모(仁模) 군의 돌 때 서강대학 맞은 쪽 신수동(新水洞) 집으로 노선생 여러 어른을 모셔다 대접하였는데 그 때 김동화 선생이 함께 자리하셔서 뵌 일이 있다. 나는 도원선생이 36세에 혼인하여 얻은 첫 아들의 돌을 기념하는 뜻으로 마포 근처 어느 실 공장을 찾아가서 평생 쓸 수 있을 만큼의 실 한 보따리를 사다가 선사하였다. 옛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벌써 독일유학까지 다녀와서 대학교수로 법과대학장까지 지냈으니…….
경로(卿輅) 이상은 선생은 인격이 고결하시고 학문적으로 엄격하여 철저하게 정확을 기하시며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우리 시대 마지막 선비로 일컬어지는 분이었다. 뒤늦게(舊制) 제출된 도원선생의 박사학위논문 주심으로 심사평을 쓰셨다. 논문제목은 「유학사상형성의 연원적 탐구―人方文化와 관련하여 甲骨文을 중심으로」였다. 기왕에 말씀이 나왔으니, 그 「심사요지」를 여기에 옮겨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一. 본 논문은 갑골학의 성과를 도입하여 상고시대 동이족(東夷族)-회맥족(濊貊族) 문화의 윤곽을 탐색하고, 그것을 토대로 고대사상사 연구에 새로운 일면을 개척하였으며, 아울러 우리의 사상사 정리에 있어서 문제되는 주체성 확립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한 점에 있어서 큰 의의를 가진다.
二. 본 논문은 다음의 세 가지 점에 있어서 우리 학계에 기여하는 바 크다고 본다.
ⓐ 갑골학의 성과를 도입함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고조선시대 연구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 단군관계 기록의 신화적 전설적 성격이 전항(前項) 신방법(新方法)의 연구로 인하여 점차 사실적 성격을 띠게 되어, 우리 고대사의 연대 측정에 새로운 서광이 비치게 되었다.
ⓒ 동이문화와 은상문화(殷商文化)의 밀접한 관계를 밝힘으로써 고조선 문화의 영역과 그 성격에 대한 인식을 좀더 명료하게 하였다.
三. 본 심사위원회는 이상 2개 항목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이 논문의 학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해박한 관계문헌의 조사, 참증(參證)에 대한 저자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였다. (1974.11.28.)
논문심사위원은 이상은, 민태식, 조용욱, 고형곤 그리고 이정호 선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원선생은 희랍철학의 대가 손명현(孫明鉉) 선생에 대하여서도 학문적으로 존경의 념을 가지고 계셨다. 특히 철학입문(哲學入門)」이 요령십분 잘 쓰여진 책이라고 말씀하였다. 나도 그 책을 가지고 앞뒤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논문 쓸 때 도원선생의 권유로, 나의 선친과도 잘 아시고 한 살 아래이신 손선생을 댁으로 찾아뵙기도 하였다. 희랍어? 다소 뜻밖이었지만, 그냥 조웻(Jowett)의 영역본이 잘 되어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보면 된다고 하셨다.
상은(象隱) 조용욱 선생은 연세가 높으셨지만 평소 도원선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그리고 노선생 몇몇 분이 정기적으로 소박한 오찬모임을 가지셨다. 한번은 도원선생이 만년의 상은선생이 들려주신 시문일절(詩文一絶)을 암기하였다가 일러주셨는데, 내가 묵은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가 얼마후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말로 풀이하여 한사(閑沙) 유만근 교수에게 전해드린 일이 있다. 화기만당(和氣滿堂) 사시춘풍(四時春風) 웃음 가득하셨던 상은선생께서 이런 글을 남기셨을까 하며 새롭게 느낀 바 있다.
冥路茫茫萬疊重 어둠길 아득하여라 겹겹이 쌓였는데
妻孥不復久爲群 처자식 이제 다시 오래 함께 못하리라
早知泡影須臾事 일찍이 물거품 세상 잠간일 줄 알았다면
悔把恩讎仔細分 은인과 원수를 너무 나누지 말았을 걸
이른 시절 나는 상은선생의 부르심으로 선생께서 학장으로 계시던 동덕여대에 몸 붙여 근무한 일이 있는데 그 때 그 학교는 교직원들이 그대로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도원선생이 그 학교의 입학식 때마다 오셔서 축사를 하였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이제는 나이 들어 진작 고애자(孤哀子)가 되었고, 그리고 어디가 절할 곳이 없으니, 절할 데가 없는 인생은 참말로 외로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일석(一石) 이희승 선생! ‘딸깍발이’, ‘대추씨 영감’을 되뇌이게(***교정의견 : 되뇌게) 하는 분이시다. 일석선생 역시 노선생의 모임에 참여하셨다. 도원선생은, 모두 연장(年長)이요, 그 중 훨씬 젊으셨다. 도원은 날이 가면서 일석선생이 존경스럽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약간 과장이었겠지만 이 분은 키가 작아서 택시를 타면 굽히지 않고 걸어들어간다는 둥, 식사할 때는 오래 저작하므로 밥이 식을까봐 한 숟가락 뜨고 주발뚜껑을 덮어놓으신다는 둥……. 그러나 식당을 선택할 때에는 얼마 이상 비싼 곳은 결코 가지 않으신다는 것……. 일석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獄苦)를 치르셨고, 국어대사전을 펴내신 국어학자이시지만, 한편 문필가이기도 하셨으니 박꽃이라는 시집도 있고, 벙어리 냉가슴, 먹추의 말참견, 소경의 잠꼬대, 심장의 파편 등의 수필집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재미스러움과 인생의 묘미를 보여주신 인간승리의 표본이 아니었을까? 다른 이야기로 내가 혼인할 때 아버님께서 처음에 이 어른을 주례로 모시려는 생각을 가지셨는데 신부댁 쪽으로 양보하였으며, 또 다른 한 가지는 일석선생 만년에 선생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예전 아주 이른 시기에 선생께서 친히 나의 아버님이신 학산 이정호 교수에게 세 번이나 찾아가셔서 서울대학으로 옮기기를 청하신 일이 있었느니라고 들려주신 일이 있다. 세상 일이 이렇게 얽히고 설키다니(***교정의견 : 붙여 써야 함)!
그리고 도원선생은 두계(斗溪) 이병도 선생의 학문적 정열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나도 자택으로 동행한 일이 있다. 두계선생께서 고령이심에도 화경(火鏡)을 가지고 들여다보시며 그치지 않는 학구적 자세를 지니셨으며, 한담설화가 아니요 학문과 관련되는 것 말고는 거의 다른 이야기를 듣기 어려우며,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든 혹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면 바로 그렇지 하고 흔쾌히 고치시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었던 듯싶다. 또 한 가지는 특히 백제 왕인(王仁) 박사 도동(渡東)과 관련한 연구에서, 한‧중‧일 삼국의 연표를 대조하여 일본 역사를 120년 당겨서 기록한 오류를 지적한 도원선생의 논의에 대해서는 역사를 다시 보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주의 깊게 공감을 표시하는 등 관심을 표명하였던 것으로 들은 바 있다.
위에서 나는 도원선생의 학문역정을 통하여 선생이 관계지었던 노선생님들과의 만남에 대하여 기억나는 것을 대충 적어보았다. 세월이 흐르고 아는 범위도 한정이 있으므로 과연 얼마나 정확하고 빠짐이 없는지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원선생 교유의 폭을 다 안다고 할 수도 없고 단편적으로 떠올려 본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내가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하기에 도원선생과 학산 이정호 선생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좀더 부연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도원이 학산선생을 처음 대하게 된 것은 6.25 전 학산선생이 일시 성균관대학에 출강하여 주역(周易)을 강의할 때였다고 한다. 그 한 학기의 수업이 평생의 연을 맺어놓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학산선생은 일제 말년(日帝末年) 8.15 광복을 전후하여 이미 학문의 중심을 ‘조선어문학’에서 ‘역학(易學)’으로 옮겨 전심전력하였으며, 역학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분이다. 도원선생이 수업 첫 시간 학산선생을 대하는 순간 바로 ‘형님’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래, 선생과 학생이었던 두 분은 평생의 지기(知己)요 동지(同志)로서 가족과 같이 되어버렸다.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의논하고 소통하였다. 도원이 학산을 존숭(尊崇)함은 흉내내기 어려웠으며 학산께서 도원을 애중(愛重)하심 또한 짝을 찾기 어려웠다.
이 글의 모두(冒頭)에 나는 도원선생이 6.25 사변 중 부산 범일동 우리 집 거처로 찾아오셨고, 환도 후 신촌 집에 다니신 말씀을 하였다. 그 무렵 도원선생이 주동이 되어 당시 몇몇 교수님들로 구성된 ‘역우회(易友會)’라는 소모임을 만들었으며, 아마도 그때 나는 —고등학생으로— 연소하여 들은 바가 분명치는 않으나 머리에 스치는 이름으로 이정호 선생을 위시하여 박종홍, 김경탁, 한상갑(?), 류승국 선생의 성함이 떠오른다. 성균관 대성전과 명륜당이 접한 담장 서쪽에 있는 대학당(戴學堂) 마루방에 모여서 ‘세미나’를 하였는데, 이정호 교수가 역학(주역‧정역)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식사를 거르면서 하루종일 진행하였는데 한 과정이 끝날 때까지 집중적으로 행하여졌다. 도원선생의 대학원 수료증서에 ‘춘추학(春秋學)’을 전공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음을 본 적이 있는데, 또한 역학사상이 도원 평생의 철학적 기초가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할 것이다. 훗날 박종홍 선생께서 수업시간에 정역(正易)에 나오는 “天地匪日月空殼 日月匪至人虛影(하늘과 땅이 해와 달이 아니면 빈 껍질이요, 해와 달도 지극한 사람이 아니면 헛된 그림자이다)”이라는 문구를 써 보였다는 말씀을 들은 바 있다. 그리고 언젠가 열암선생을 뵈었을 때 선생은 내게 선친에 대하여 ‘젊으신 분이 언제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셨는가…’ 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열암은 학산보다 십년장(十年長)이시다. 나는 2004년 열암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 때 ‘열암의 실천유학’이라는 논제로 강연을 하였으며, 동시에 원고지 600매에 가까운 글이 박종홍 철학의 재조명이란 책에 들어 있으니, 특별한 인연이라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내가 들었던 한 가지 삽화를 넣을까 한다. 역시 환도 후 아마 1954년 쯤으로 생각되는데, 도원은 학산선생과 함께 부산 동래(東萊) 근처 범어사(梵魚寺)에서 하안거(夏安居)에 참여하였다. 당시 범어사에는 하동산(河東山) 스님이 계셨고 그곳은 동국대 교수이며 유명한 사학자이기도 하였던 해원(海圓) 황의돈(黃義敦) 선생이 머무셨으며 수만 시간 참선을 하셨다는 곳이다. 그보다 먼저 나는 부산 피난 시절에 중학생으로 아버님과 함께 범어사 황선생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낸 기억이 있다. 빈대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주무시는지……. 그런데 황선생님의 이상한 면을 보았다. 그것은 그 어른이 주무시다 말고 잠시 일어나 벽장에서 날김을 꺼내어 잡수시고 다시 주무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고, 그 해 하안거에는 기념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곳에서 온 분까지 여러 사람이 참여하였는데, 어느날 어떤 분(누구라고 하였는데 잊었음)의 만년필이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때만 해도 만년필은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원선생의 안중(眼中)에 글자가 휙 스쳐 지나갔는데, 그것은 주역의 문구로 ‘七日’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는 어느 것인지 기억하였는데, 지금은 분명치 않지만 주역 복괘(復卦)의 “七日來復”이거나 진괘(震卦)의 “勿遂七日得”, 아니면 기제괘(旣濟卦)의 “七日得以中道也”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만년필은 7일이 지나면 찾게 될 것이라고 화제가 되었더란다. 그런데 이레째 되는 날 아침에 학산선생이 “오늘은 만년필이 나오는 날인데…”라고 말씀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튼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날 저녁(?) 홑이불 속에서 만년필이 튀어 나왔다. 모두 재미있고 신기하게 여기며 담소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생각이 난다.
도원선생은 본디 성균관대학에서 유학을 근본으로 하여 동양철학을 전공하였으려니와 그곳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1955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임교수로서 출발은 충남대학교 철학과였다. 학산 이정호 선생이 동양철학을 겸하였음은 위에서 약간 일컬은 바 있지만, 성균관대학교에서는 1955년도부터는 동양철학과 교수로 모셔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교수는 집이 없었고, 자력으로 장만할 수도 없었다. 그 이전에 연희대학과 이화대학에서도 사택을 마련하여 살 수 있도록 해 드렸는데 당시 성균관대학은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그 소식을 알게 된 충남대학교의 민태식 총장께서는, 본디 동양철학 전공이시기도 하셨지만, 학산선생에게 “집을 마련해 드릴 터이니 이리로 오시오”가 되어 버렸다. 학산선생의 대전행(大田行)은 그러한 사연도 있었던 것이다. 대전 선화동 342번지, 339번지 등의 주택은 충남대학에서 주선한 것이었다.
그런저런 사정과 함께 도원선생도 대전행을 택하게 되었다. 우선은 당시 전임교수보다 우대하였던 특대강사로 모시고 이어서 전임교수로 영입하게 되었다. 충남대학교 철학과에는 이정호, 류승국 교수가 이른바 투톱(two tops)이 되고 민태식 총장도 강의를 하셨으며, 나중에 다시 류정기(柳正基) 교수까지 모시어, 알고 보니 충남대 철학과의 동양철학 부문은 한국에서 유수한, 매우 탄탄한 교수진을 갖추었던 것이다. 더구나 숭실대학의 이경(怡耕) 조요한(趙要翰) 교수를 특대강사로 모셔다가 서양철학 강의를 하시도록 하였는데 일주일의 전후반을 나누어 류승국, 조요한 두 분 교수가 방 하나를 세 내어 앞뒤로 번갈아 사용하였다. 두 분은 젊은 시절 초창기 한국철학회의 간사를 보셨거니와 평생토록 절친하였으며, 조요한 교수가 병환으로 77세에 임종하실 때까지 우의(友誼)를 돈독히 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으로 충남대 철학과는 처음부터 교과과정 자체를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거의 반반으로 균형있게 개설하였으며, 교수들도 동‧서 철학으로 거의 같은 수로 맞추었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지속되어 오는 듯하며, 매우 이른 시기부터 남다르고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당시에는 전교생 교양 필수과목이었던 ‘철학개론’ 강의도 동‧서 철학으로 각각 1시간씩 나누어 실시하였다. 동양철학개론은 류승국 교수가 담당하였는데 지나칠 정도의 열정적 강의는 어느 때이건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처음에 시간표 상으로 ‘동양철학개론’은 제7교시, 문리과대학장이던 로도양(盧道陽) 교수의 ‘문화사’는 제8교시에 배정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7교시 수업이 8교시가 되어도 계속되는 것이다―하기야 한 시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랴만. 몇 번인가 로도양 교수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다가 가셔서 기다리셨다. 결국 방법을 찾아내었다. 시간을 바꿔 류승국 교수의 수업을 마지막 8교시로 변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였다. 시간을 잊고 마음껏 강의하실 수 있도록!
다시 본제로 돌아가서 충남대학교의 이정호 교수는 잠깐 국문과를 거쳐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철학과 소속으로 동양철학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역경(易經)을 비롯한 고전과 선철유문(先哲遺文)을 강의하였다. 하기는 원래 조선어문학과 졸업논문(京城帝大)이 경전에 나타난 토(吐)의 연구였는데(정확한 제목은 확인 중), 토가 500개나 된다는 말씀을 듣고 저으기 놀랍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학산선생은 원래 충남 출신(예산)이기도 하려니와 충남 대전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논산 쪽 계룡산 줄기의 엄지에 속하는 향적산(香積山) 국사봉(國師峯) 중턱 용마바위와 거북바위 사이에 정관(貞觀) 송철화(宋哲和)씨가 토담집을 지니고 수양하면서 헌신적으로 학인(學人)들을 보살피고 있을 때, 용마바위 바로 밑에 있는 두어 칸 짜리 오막을 공부방으로 삼아, 매주 왕복하기를 반복하였다.
학산은 일요일 오후에 하산하여 월‧화‧수를 강의하고 수요일 오후에 다시 산방(山房)으로 향하였다. 당시 국사봉 정관의 댁에는 학인 여러분이 함께 모여 수련하고 연찬(硏鑽)하였는데,
학산 이정호 선생을 비롯해 도원 류승국, 원로학자로 역학원론(易學原論)을 쓴 삼화(三和) 한장경(韓長庚), 한문고전에 능통한 지장(地章) 이용휘(李容輝), 연산학교 교장 노헌(魯軒) 김근수(金近洙), 정역연구의 기초를 쓴 관수(觀樹) 백문섭(白紋燮), 원자력박사 화공(和公) 륙종철(陸鐘澈), 훗날
정역과 천문학을 쓴 삼정(三正) 권영원(權寧遠) 선생 등이 한 그룹을 이루어 열성적으로 공부하였다.
한데, 그 때 도원선생의 경지는 학문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 듯하였다. 좀 기이한 이야기로, 한 때는 범과 같은 맹수조차도 선생을 좇는 흔적을 보이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학산선생은 정관 댁 근처에 동남향 양철지붕으로 옛날에 살던 헌 집을 옮겨다가 자그마한 집을 짓고 ‘향적산방(香積山房)’이라 하였으며, 평생의 공부터로 삼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향적산방은 이경 조요한 교수가 오셔서 젊은이들과 함께 강의를 듣기도 하였으며, 충남대 총장 민태식 선생과 문리과대학장 창애(蒼厓) 김순동(金舜東) 교수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다녀가시기도 하였다. 명필인 창애선생은 ‘香積山房’이라는 휘호를 남기기도 하였다. 용마바위와 거북바위, 국사봉의 그 터전은 일찍이 정역(正易)을 지은 김일부(金一夫) 선생이 만년에 머물며 문인들을 가르친 곳이기도 하다. 학산과 도원을 말할 때 국사봉과의 깊은 인연은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4.
류승국 교수는 충남대 철학과에 자리를 굳히는 듯하였다. 그런데 1950년대 말에 도원선생은 갑자기 서울 연세대학에서 철학과 교수로 오시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학산선생과 도원선생은 대전 침례교신학교 언덕 위 잔디밭으로 함께 가셔서 의논 말씀을 나누셨다. 말씀 끝에 결론은 서울 쪽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겠다는 방향으로 귀결되었다. 충남대학으로서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당시 사정이 그러한 점도 있고, 장래를 내다볼 때 서울행이 마땅하겠다는 뜻으로 말씀이 모아진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연대에는 철학계 거두인 정석해 교수가 계셨으며, 아마 류승국 교수 영입에 관계가 있었던 듯하다. 연대 철학과에서 새삼스럽게 동양철학 전임교수를 맞아들인다는 것도 새롭다 하려니와 이미 연대로 결정된 마당에, 성균관대에서 류교수가 대전을 떠나 서울로 오기로 한다면 성균관대학교로 오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곤란하게 되었다. 이미 연대로 결정된 마당에 모교(母校)일 뿐 아니라 이름이 유교의 상징인 성균관대학교이고 보니 곤혹스럽게 된 것이다. 누가 봐도 의당 성균관대가 적합하다고 할 것이기는 한데, 형편이 묘하게 되었다. 내가 듣기로는, 도원선생이 정석해 선생(당시 학장?)을 방문하여 그러한 사실을 여쭈었다 한다. 대답은 “아아, 그러면 모교로 가셔야겠지요…”라고 말씀하시더란다. 도원선생은 연대로 가실 뻔하였다.
이제 류승국 선생의 성균관대학 시대가 열렸다. 도원선생으로는 명실상부한 본향(本鄕)으로 돌아온 셈이다. 본격적으로 ‘성균관’이 중심이 되어 일생일대의 학문과 교육활동을 펼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도원은 문자 그대로 학불염(學不厭), 교불권(敎不倦)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면서 치열한 삶으로 경륜을 펼 무대가 펼쳐졌다.
이제 성균관대 동양철학과로서도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학문과 교육이 본궤도에 오르고 폭발적 발전을 거듭할 뿐 아니라, 교내외로 유학을 중심으로 동방학술이 다시 부상(浮上)하는 활력을 되찾고 학계에 영향을 줌으로써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교내적으로 학부와 대학원 교육의 내실을 기하고 고전 해독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학문의 위상에 맞도록 심화시키고 현대화하는 방향으로 자리잡아갔다. 학부와 대학원 교육을 확장하고 고급화함으로써 선도적으로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으며 여기서 배출된 석‧박사들이 경향 간에 퍼져서 대학교단을 비롯 전국의 학계를 뒤덮게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에 속했던 동양철학과는 유학과와 철학과로 이루어진 ‘유학대학’으로 승격하였고, 도원선생은 원래의 동양철학과 출신으로 처음 유학대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유학대학은 유학과 이외에 한국철학과와 중국철학과(동양철학 전공으로 나옴)를 신청하여 인가받았으며, 이것의 추진을 위해 도원선생은 문교부장관실(이규호 장관)을 방문하여 그 자리에서 허락을 받았는데 나도 동행하였다. 따라서 전액장학생인 양현재 인원을 3배수 가깝게 늘였다(12명→30명).
또한 도원선생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을 겸임하기도 하여 학교발전의 격을 높였다. 항시 성균관대학교의 교시에 입각하여 성균관대학교의 존재이유를 뚜렷이 하는 데 치력하여 마지않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전교생이 반드시 이수하여야 하는 교시과목인 ‘유학’은 그동안 경전강독 위주로 실시되어 왔는데, 도원선생은 이것이 고전강독에 머물지 않도록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새로 서술된 논설형 교과서인 유학원론(儒學原論)을 개발하여 전교생을 고르게 교육할 수 있도록 하였다.
5.
도원선생의 학술활동도 왕성해졌다. 이를테면 1960년대 초반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에서 열린 조선학회(朝鮮學會) 동경대회에서 발표한 「퇴율성리학의 비교연구」라든가, 성대 대동문화연구 제1집에 실린 「송대 성리학 형성의 연원적 고찰」 등은 도원 학술논문의 단초(端初)를 여는 것으로 공력(功力)이 집중된, 내용의 통찰과 깊이로 볼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계속하여 국내외에서 발표된 학술논문을 보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그 착상과 탐색 그리고 끈질긴 노력은 질과 양에서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만의 중화학술원에서 발표한 「한국 양명학에 대한 연구」라든가, 프랑스 파리대학의 국제 동양학자대회에서 발표한 「한국 고대사회의 단대(斷代)에 관한 연구」는 매우 주목을 받고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밖에 갑골문(甲骨文)과 고대문화의 연구를 통한 「유학사상연구의 연원적 탐구」는 박사학위논문이 되었으며,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과 한국고대사상의 특질」이라든가, 「신라시대 유불도 사상의 교섭과 전개」, 「왕인(王仁)박사 유적지 연구」 그리고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 등 중량감 있는 학술논문들을 일일이 말할 수가 없다.
도원선생은 「동서사상의 특수성과 보편성」, 「동아시아 삼국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비교」 그리고 「한국문화 속의 동양문화」와 같은 논문에서 볼 수 있듯이 널리 국제적 위상에서 아시아권과 동‧서 간의 학술문화적 성격을 특징지어 논술하면서도 항시 한국 학술사상의 본령을 철학적으로 구명하고 그 현대적 의미를 천명하는 데 유의하였다. 동서 고금의 학술문화가 어떻게 한국철학으로 수렴되고 하나의 초점으로 관통하여 겨레와 인류에게 빛을 발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선생의 뇌리(腦裏)를 떠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류승국 교수의 명성은 이미 국내외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1966년 5월 선생 44세 때 당시 서독정부(西獨政府) 초청으로 독일 종교 철학계를 시찰하고 돌아옴에서도 알 수 있다. 불교계의 이기영 교수(동국대), 개신교의 홍현설 박사(감신) 그리고 가톨릭의 박양운 신부(서울대) 등 네 분의 학자가 초청을 받아 동행하였다. 그곳에서 류교수가 발표한 논문제목은 「주체성과 종교」였다. 나도 이것을 영역하고 테이프에 취입하는 데 약간 거들었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도원선생은 1972년 50세에 ‘동양철학자’로서 한국철학회 회장으로 뽑힌다. 당시의 학계는 서양철학 판이요, 동양철학은 크게 빛을 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류승국 회장은 대번에 철학사상의 한국적 조명이라는 단행본을 회원들이 집필하여 간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특기할 사항은 도원선생이 1977년 55세의 비교적 젊은 연세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되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동양철학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선생께서 서거하실 때까지 34년간 정회원으로 재임하였으며, 학술을 지극히 애호하였던 선생으로서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서 긍지와 책임을 큰 보람으로 여겼던 듯싶다.
그리고 도원선생은 1978년 가을부터 일본 쓰꾸바대학(筑波大學) 초빙교수로 1년간 한국사상사와 동양사회사상사를 강의하였는데 대단한 반응을 일으켜 교수, 학생을 막론하고 청강을 하여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당시 선비풍의 학자 다까하시(高橋 進, 부총장을 지냄) 교수는 도원선생을 존중하였고 한국철학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으며, 학문적으로 도원선생과 친밀하였다. 나에게도 초청의사를 보였으나, 일정시절 학교에 다녔어도 일본말을 못하는 나는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런데 도원선생에게 가장 어울리고 경륜과 포부를 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983년, 도원선생께서 회갑을 맞이하는 해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국가예산에 의해 운영되는 이 곳은 1978년 6월에, 실은 고(故) 박종홍 선생의 유지(遺志)에 따라 국가적 차원에서 대통령이 설립한 학술기관이다. 한국학의 본산으로서 국민정신을 고양하고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겨레와 인류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숭고한 목표를 가장 훌륭하게 수행할 인물이 누구일까? 필자가 앞에서 이끌어 보았듯이 나는 청송 고형곤 선생의 도원 회갑논문집 「하사(賀辭)」에서 잘 말씀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촉망(囑望)이 어떠하였는가? 류승국 교수는 1978년 6월 이 연구원이 개원할 때 철학연구실장을 위촉받았는데, 실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해 9월부터 쓰꾸바대학으로 가게 되어 있으므로 그 직(職)을 사양하였으나, 이미 결정하여 보고가 된 상태이니 떠날 때까지만이라도 부탁한다고 하였다. 성대 교수로서 정신문화연구원을 겸직하는 것인데, 다시 쓰꾸바로 파견하는 식으로 얼른 해임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것은 본디 ‘정문연’은 연구원일 뿐 대학원 설립이 전혀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오직 도원선생의 주창으로 ‘한국학대학원’이 설립되고 한국학과 아래 여러 전공을 두게 되었으며, 철학은 ‘한국철학전공’으로 개설되었다. 연구소란 왔다갔다 변동이 있지만, 학교는 영원한 것이며 인재를 양성해야 연구소도 계승 발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전국에서 모여 든 학생들은 학비를 면제받고 장학금까지 받는 특혜를 누렸다. 우리집 여식도 여기서 석사를 마치고 외국유학을 떠난 일이 있다. 대학원의 존립은 한때 곡절이 있었지만 건실하게 커 가서 이제 이곳에서 배출한 석‧박사가 그 얼마인가!
1980년대 전반은 서슬이 시퍼렇고 시국이 어수선하였다. 그러한 시절에 불편부당(不偏不黨) 어디에 치우치지 않고 정도(正道)를 지키며 연구원 본연의 임무를 활기 있고 원만하게 수행하는 것은 남다른 지혜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학문의 존엄을 지키며 이상과 현실을 결합시켜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표를 보여준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주체적으로 소신을 관철하면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여 소정의 임기를 다한 것은 도원선생이 처음이었다.
몇 가지를 보태어 말해보도록 하겠다.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원장은 부총리급이었다. 누구나 명분이 있지만 그것을 반드시 지키기는 쉽지 않다. 내가 듣기로는 류승국 원장은 관계부처의 장관이 연구원을 방문할 때 자기가 직접 나가지 않고 부원장(?)으로 하여금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한다. 연구원은 권력기관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나름의 위상과 존엄이 있다.
류승국 원장은 3년의 임기 동안 연구원 사업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크고 작은 학술연찬을 비롯, 국내외 학술대회를 열어 학술적 성과를 집약하였으며, 엄청난 분량의 한국학 학술논문과 서적이 출간되었다. 사회지도층 및 젊은 교수들과의 완전히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상호교육하고 납득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든가 등등 연구활동의 정상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백과사전 편찬부를 독립적으로 운영하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내실 있게 추진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 연구원의 직제였던 ‘연구원(硏究員)’의 명칭을 ‘교수(敎授)’로 바꿔서 대학교수와 동등하게 만든 것도 류승국 원장이 작심하여 조치한 것이다. 나아가 교직원의 복지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교통사정이 어려웠던 시절 교직원용 연립주택을 건설하여 충분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등 중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원선생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직책을 하늘이 주신 소명으로 알고 일생일대의 절정기에서 성력(誠力)을 다 바쳤음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앞에서 도원선생의 학산 이정호 선생과의 남다른 관계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다. 일찍이 학산은 도원회갑논총 「서문」에서, 그리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 취임을 축하하는 별폭(別幅)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그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도원 류승국 교수는 호학독행(好學篤行)의 사(士)이다. 충북 청주시 북교(北郊) 은곡(隱谷) 마을 한적한 곳, 죽리(竹籬) 속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엄격한 가훈을 받고 성장하였으나, 불행히 일찍 엄친(嚴親)을 여의고 인자하신 편시하(片侍下)에서 효성을 다하였다. 그 자당(慈堂)께서는 후일 독실히 불교에 귀의하여 만백세(滿百歲)의 향수(享壽)를 하시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도원은 일찍이 가빈(家貧)하여 약관 전에 일시 교문을 떠나 사회에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있으나, 이내 거기서 나와 학문에 입지(立志)하여 국가의 자격 검정을 거쳐 대학에 진학하였다. 그 후 일로매진한 호학독행의 자취는 누구도 쉽사리 추종하기 어려웠다.
학(學)은 동서를 겸하고 교(敎)는 선불(仙佛)을 넘어서 중심을 유(儒)에 두었으니, 그의 평생 치력이 공자의 정신 재건과 세계 평화의 기성(期成)에 있음은 자타가 아는 바이다. 그의 고매한 착상, 명쾌한 이론, 심오한 조예는 항상 중인(衆人)의 선망과 주위의 흠모를 받아왔다. 그가 젊어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힘써온 유학 중흥과 성균관대학의 유학대학 창설과 한국철학과 설치 등은 거센 파도와 싸워 이룬 그의 숨은 공적이라 하겠다.
그의 후학 양성에 대한 열의는 지나칠 정도로 엄정하여, 그 문하에서 배출된 석‧박사와 국내외의 유능한 인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최근 그의 도략(韜略)과 경륜이 알려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원장직을 맡게 되니, 이는 실로 적재적소의 쾌사(快事)로서 한국 정신문화의 대발전과 전통사상의 총정리와 우리 나라(붙입니다) 및 세계 각국의 인재 발굴과 앞으로 다가올 무량세계(無量世界)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인재 완성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아 장래의 인류문화와 사회복지에 크게 이바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금년 류교수의 회갑을 당하여 여러 문인 제자들과 평소 그를 아끼고 상종(相從)하는 사우제위(師友諸位)들이 뜻을 모아 기념논문집 동방사상논고를 간행한다는 말을 듣고 기쁨과 하의(賀意)에 넘쳐 무사(蕪辭)를 불고(不顧)하고 몇 자 사연을 기록하고 아울러 졸시(拙詩) 일절(一絶)을 붙여 서(序)에 대하는 바이다.
理之本原原乎性 道之大原原於天
六十平生性理學 只祝餘生天道宣
(「도원의 회갑에 즈음하여」, 도원철학산고 pp.486-487.)
천도운행(天道運行)에 무왕불복(無往不復)이라. 일시(一時) 작소지탄(鵲巢之歎)이 불무(不無)하였으나, 만시지감(晩時之感)은 있지만 그래도 사필귀정(事必歸正), 도원이 앉을 자리에 앉게 되니 산중 학옹(鶴翁)이 기쁜 마음 어디다 주체할 길 없습니다. 더구나 부원장에 김형효(金炯孝) 박사가 당(當)하였으니 두 분은 천정(天定)의 명콤비라 하겠습니다.
한국 문화의 재정리, 재구축, 국내외에의 천명, 계승 인재의 양성, 국가의 문화 정책에 공헌, 국정의 중요 시책에 기여… 등등, 그 지다한 역할은 표현을 초월하며, 석일(昔日) 세종(世宗)께서 지으신 집현전(集賢殿)의 구실을 오늘에 구현하여야 할 소명(召命)이 있다고 봅니다.
매사를 신중숙려(愼重熟慮)하여 공정하게 얻은 결론은 이것을 과감히 시행하여 개혁과 쇄신의 중정성(中正性)을 잃지 않도록 하며, 군의(群議)의 선자(善者)를 채택하고 타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기에 인색치 않음은 대인의 포황불하유(包荒不遐遺)의 아량일까 합니다. 위에 대하여는 시무(時務)를 바로잡는데(띄어쓰기) 건백(建白)을 게을리 말고, 아래에 대하여는 군소(群小)를 용납애육(容納愛育)하는 온아(溫雅)를 베풀으면 만사는 흡연(翕然)히 귀일(歸一)하리라 생각됩니다.
도원 원장 평생의 일자리라 생각하시고 더욱 자중자건(自重自健)하시어 정의입신(精義入神)과 이용안신(利用安身)의 실(實)을 거두시기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아에 졸음일수(拙吟一首) 기록하여 축하의 뜻에 대신합니다.
已甲夜半生癸亥
天地設位泰運開
道之大原出於乾
世界一家自此來
계해 2월 7일 향적산방에서 학산 근축(謹祝)
(「道原 원장의 취임을 축하하며」, 도원철학산고 pp.488-489.)
위의 인용은 다소 길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도원과 학산의 각별한 관계와 실제에 맞는 기대와 희망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말씀을 오므리는 뜻에서 그대로 적어보았다.
학산과 도원은 연세가 십 년의 차이가 있고 생신이 다 같이 음력 2월 17일이다. 두 분이 모두 열세 살 때 부친을 여의었다. 도원은 이 점을 되풀이하여 말씀하면서 무슨 기연(奇緣)이나 되는 듯이 하였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생일이 2월 17일이며 세종대왕과 박종홍 선생이 돌아가신 날도 바로 그 날이라는 것이라면서 흥미롭게 생각하였다. 학산께는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심방(尋訪)하였고, 만년에도 과천 우리집에 오셔서 역학 강의를 되풀이하여 듣고자 하였다. 십여 년 전 학선선생께서 작고하신 다음 1주기 때 성묘시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도원선생은 추모의 글을 써 오셔서 학산의 비묘(碑墓)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내어 읽기도 하였다. 그 후 도원께서는 작고하시기 전까지 매년 학산선생의 기일(忌日)과 한 달 터울로 세상을 떠나신 부인 자은당(慈恩堂) 김혜숙(金蕙淑) 여사의 제사에 참여하고, 어떤 때는 축문(祝文)을 써 오시기도 하였다. 도원선생의 진리에 대한 향념(向念)과 스승을 높이는 뜻은 예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도원선생조차 이제는 이 세상에서 뵐 수가 없게 되었다.
6.
1986년 류승국 교수는 그동안의 휴직을 마치고 성균관대학으로 복교하였다. 정문연 재임기간에도 대학원 한 강좌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2년 뒤 성균관대학을 정년퇴임하였다. 하지만 89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대학원에 나오셔서 강의하였고, 교실은 마지막 날까지 학생들로 가득 찼다.
정년과 함께 경희대학교에서는 광릉수목원 근처에 위치한 사회복지대학원 원장으로 모셔갔다. 그리고 다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도원선생 스스로 일찍이 명륜동에다 ‘동방학술연구원’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훗날 정년 뒤에는 잠실에다 재단법인 ‘동방문화연구원’을 다시 열고 동방학술문화강좌를 개설하여 강의하였다. 도원선생은 평생 건강하였으며,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고 묵직한 논문을 계속 내놓았다. 그리고 접촉하는 사람들을 공석 사석을 막론하고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누가 알았으랴, 그렇게 건강하신 분이 속으로 중병을 안고 계신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상배(喪配)하신 뒤 4,5년에 홀연히 세상을 떠나셨다.
도원 89세의 생애, 20세기와 21세기의 시작, 도원선생이 겹쳐서 살았던 기간은 진실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격변과 격랑의 시대였다. 도원은 이 험난한 시대를 뚫고 일어서서 겨레의 혼을 일깨우고 인류의 나아갈 길을 추구하여 치열한 삶을 살았던 ‘이신순도(以身殉道)’의 표본이었다. 도원의 삶을 총괄적으로 돌이켜 본다면, 주역 건괘(乾卦)에 비겨서 30대 충남대학교 시절까지는 주로 학문을 닦은 잠룡(潛龍) 시대라 한다면, 40대 성균관대학교 이후에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는 현룡(見龍) 시대, 그리고 군자(君子)의 종일건건(終日乾乾)을 거쳐 50대까지는 비약을 시도하는 약룡(躍龍) 시대, 그리고 60대에 이르러서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의 직을 수행하는 등 학문적 경륜을 펼치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할 것이며, 끝으로 70대 이후로는 항룡(亢龍)의 시대로 마치 공자(孔子)가 주유천하(周遊天下) 이후 그러하였듯이 원위치(原位置)로 돌아와서 학문을 성숙시키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심하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위에서 필자는 2015년 2월 도원선생 4주기를 기하여 우선 그동안 매년 발표해 온 도원학술과 관련한 논문들과 선생의 삶을 회상하는 글을 모아 추모문집을 내고자 하는 뜻에 따라 선생에 대한 추억담(追憶譚)을 적어보았다. 시간을 가지고 생각을 가다듬지 못한 채 듬성듬성 생각나는 단편(斷片)을 써 보았으나 소루하기 짝이 없다.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2011년 2월 27일, 선생이 서거하시고 3월 3일 영결식이 있었다. 나는 장례위원장으로 영결사(永訣詞)를 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학술원에서 연락이 왔다. 그 때의 추모문을 보내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도원 류승국 선생의 서거를 애도하며」라는 제목으로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13호(2001.4.)에 실렸는데, 그것을 이 글에 넣어 다시금 선생에 대한 추모의 념을 표하고자 한다. 그리고 도원선생이 2010년에 작성한 「인류문명의 역사적 전환과 가치관의 변천」이라는 도표를 첨부한다.
【첨부】
道原 柳承國 선생의 逝去를 哀悼하며
2011, 辛卯年 2월 27일.
우리 시대의 큰 스승 道原 柳承國선생께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셨습니다. 평상시의 선생의 모습으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평생 약을 자시거나 주사한 번 맞지 않고 늘 건강하셨지요. 滿面의 웃음과 함께 구김살이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항상 꿋꿋하고 기상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셨지요. 그 의지력과 통찰력은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웠지요. 慈親께서 百壽를 누리셨기에 아마도 앞으로 5년 10년은 아무 문제 없으리라 믿고 또 믿었거늘, 이렇게 허망하게 홀연히 떠나시다니,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승의 삶 89년, 짧지 않는 세월, 初年의 逆境을 뚫고 不死鳥인양, 마치 孔子가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라 하였듯이 매우 이른 시기에 오로지 진리를 탐구하고 참 사람되기를 뜻하여 一瞬도 방심하지 않고 치열하게 일생을 불사른, 너무나도 고독한 절대적 삶을 살아온 우리 스승을 이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學不厭 敎不倦”이라는 문구를 수십일 동안 식음을 전폐한 병상에서도 써보여 주셨듯이 선생의 일생은 진실로 배움의 연속이요 영원한 스승이셨지요. 인간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인정이 넘치고 한없이 따뜻하였지만,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며 옳고 그름을 판별할 때에는 엄격하기 짝이 없으셨지요.
선생 스스로 훌륭한 스승이라면 遠近을 막론하고 그 어느 곳이든 찾아 다니고(붙여쓰기) 평생토록 존숭하셨지요, 이를테면 선생의 말씀으로 願海 朱炳乾, 東喬 閔泰植, 鶴山 李正浩, 洌巖 朴鐘鴻, 聽松 高亨坤 선생과 孫明鉉, 金東華, 金芿石, 金映遂 그리고 多夕 柳永模 선생을 꼽기도 하셨지요. 성균관대학, 서울대학, 동국대학에서 그리고 유교를 비롯, 불교, 도교, 기독교의 진리를 가릴 것 없이 사람들과 교유하고 그 頂上을 추구하셨지요. 동서양의 벽을 허물고 最高의 고전정신과 현대, 미래가 만나는 약동하는 현실을 추구하셨지요.
90지경에 이르는 지난해에도 10번의 학술발표를 하셨지요. 5년전 喪配하시고 자녀들의 보살핌이 있었지만, 10평 오피스텔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대화의 연속, 밤에는 홀로 앉아 명상하고 사색하며 책을 읽다가 모르는 새 새벽 5시가 되는 일이 허다하였지요. 개인적으로는 晩境에 이르러 좀 지나친 일이셨지요. 悠悠自適 安息을 취할 법도 하였지요.
하지만 선생은 인류를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민족의 현실을 아파하고 세계화시대 인류문명의 앞날을 염려하는 마음을 잠시도 놓지 못하였지요. 선생은 누가 문병왔을 때 병상에서 李濟馬 東醫壽世保元의 문구를 써주셨지요. 그 내용은 聖人이 욕심이 없다고 함은 한갓 淸淨寂滅하여 욕심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성인의 마음은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우려한다. 그러므로 비단 욕심이 없을 뿐 아니라 개인의 私慾에 미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우려하여 개인의 사욕에 미칠 겨를이 없는 자는 반드시 ‘배우기를 싫증내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성인의 욕심없음이다. “조그만큼이라도 개인의 사욕이 있다면 요순의 마음이 아니며, 잠시라도 천하를 근심하지 않는다면 孔孟의 심법이 아니다[毫有一己之慾, 則非堯舜之心也; 暫無天下之憂, 則非孔孟之心也]”라는 것이었지요. 이러한 정신이 선생으로 하여금 念念不忘, 晝夜로 걱정하여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한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선생은 평생 학문에 종사하셨거니와 手不釋卷, 최근까지도 책 보따리를 무겁게 들고 다니셨고 손에서 책을 놓을 때가 없으셨습니다. 선생의 연구주제는 매우 굵직하고 논점이 뚜렷하였지요. 학문에서 이념성과 과학성을 강조하고 고증정신이 분명하였지요. 선생의 탐구의욕은 대단하여 과연 發憤忘食이라 할 것입니다. 1960년대말에 甲骨學과 金石文 연구를 통해 韓中上古시대를 연구할 때, 방 주변에 책을 둘러놓았을 뿐 아예 침구를 깔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였던 일은 이제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연구와 사색을 즐기셨으며, 글쓰기를 위주로 하는 저술가 타입과는 다르셨지요. 하지만 때마다 깊은 연찬에 의한 연구발표를 통해 수많은 創見과 획기적 업적을 남기셨지요. 일찍이 출간되었던 한국민족사상사대계 개설편한국의 유교유학원론동양철학연구 그리고 한국사상과 현대 등에 보이는 선생의 저술이 그러하며, 중국에서 韓國儒學史와 韓國儒學與現代精神으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지요. 그리고 최근 1, 2년 사이 성대 유교문화연구소에서는 선생의 저작을 네 권의 책으로 출간하였는 바(붙여쓰기) 한국유학사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유가철학과 동방사상 그리고 도원철학산고가 그것이며, 이는 선생의 사상과 학문세계를 결집한 바라 할 것입니다.
선생은 평생을 주로 성균관대학교에 몸담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내시기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은 스스로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심을 무엇보다 뜻 깊게 여기셨지요. 외출시에는 언제 어디서나 학술원 뱃지를 착용하셨지요. 서울에 翰林洞이 있었듯이 조선시대 三代四翰林 선비집안의 후예로서 학문의 소중함을 잠시도 잊지 않으셨지요.
선생의 학문적 업적가운데 특히 ‘동방사상 형성의 연원과 본질(유학사상형성의 연원적 탐구:갑골문과 人方문화를 중심으로)’, ‘檀君史實의 이념성과 과학성’, ‘광개토대왕비문과 한국고대사상의 본질’, ‘百濟 王仁博士의 학술전파와 역사적 위상’, ‘송대성리학형성의 연원적 탐구’, ‘동서사상의 특수성과 보편성’, ‘한국문화 속의 동양문화’ ‘Confucian Humanity and World Peace’를 꼽을 수 있으며, 그밖에 수많은 연구와 새로운 관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은 韓中上古文化와 관련하여 우리가 탐구하여야할 매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셨거니와 그 중에서도 고구려 ‘廣開土大王碑文’의 고증과 해석 그리고 백제 和邇吉師 王仁博士의 문헌학적 연구는 우리 역사를 다시 읽어야할 한국학술사의 획기적 업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께서는 최근에 동방사상의 본령과 韓國易學에 의거하여 인류사의 변천과 획기적 전환 그리고 미래세계를 전망하는 도표를 배열하고 그 특징적 성격을 간명하게 부여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첨부도표: 「인류문명의 역사적 전환과 가치관의 변천」]. 이는 인류문명을 통찰하는 거시적 안목으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世紀的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도표는 선생께서 인류에게 바치는 마지막 선물이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선생은 인류는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고 하셨지요. 나무가 자라서 ‘낭기’가 되듯, 사람은 자라서 ‘사랑’이 된다는 말씀을 병상에서 되뇌이며 사람들에게 써주시었지요. 이제 인류는 낳고(生) 자라는(長) 봄, 여름을 지나 열매를 맺는(成) 가을, 성숙과 결실의 시대, 모순과 대립을 넘어 하나의 세계, 성숙한 인간과 성숙한 사회, 감성에서 이성으로 그리고 다시 영성으로, 생명과 평화와 상생을 이루는 ‘大同世界’, 어떤 이념이나 종파를 막론하고 人人個個가 주체적 각성을 이루는 새 세상을 이루어야 하고 또 이루어질 것을 믿어 마지않으셨지요.
60년간의 교단, 선생께서는 지난 학기까지 대학원 강의를 하시면서 국내외에 산재한 수 많은 학자를 키워내셨지요. 동방사상과 한국철학에 대한 자각과 학풍조성에 근본적 轉機를 마련하셨지요.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 후학들은 스승의 남기신 뜻을 받들어 뿌리신 씨앗을 키우고 가꾸어서 열매맺을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할 것을 다짐하나이다.
2011년 3월 3일 아침, 선생을 떠나보내는 영결식이 있는 날입니다. 여러 어른과 학인들이 이제 세상을 여의신 선생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간곡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道原선생이여,
선생께서는 殞命하시기 7일 전 子弟 仁模씨에게 붓으로 “順天命”(하늘의 명을 따른다)이라 써주시고, 醫療를 그치라 하셨지요.
선생께서는 떠나셨지만, 그리움은 날로 사무칠 것입니다.
선생이 남기신 빈 공간을 어찌하리이까?
가족들의 슬픔을 어찌 달래리이까?
道原선생이여, 하지만 이제 무거운 짐 벗으시고, 반가운 얼굴도 만나시고, 영원한 安息에 드소서.
어이 어이
어이 어이.
2011년 3월 3일
後學 李東俊 泣書
人類文明의 歷史的 轉換과 價値觀의 變遷
大韓民國學術院 會員
哲學博士 柳承國
成均館大學校 名譽敎授
1. 人倫社會로서 東方社會(君主封建社會) 前近代社會(東洋的價値)
1)身分上下社會 1.宗敎中心社會
2)縱的主從社會 2.天尊時代
3)抑陰尊陽社會 3.義理社會
4.春‧生의 播種期
伏羲卦圖
2. 利益社會로서 西歐社會(民主共和制社會) 近代社會(西洋的價値)
1)大衆人權社會 1.科學中心社會
2)橫的平等社會 2.地尊時代
3)盛陰衰陽社會 3.功利社會
4.夏‧長의 成長期
文王卦圖
3. 東西和合의 大同社會(人類世界化社會) 脫近代社會(世界的價値)
1)人類共同社會 1.人間中心社會
2)義利縱橫社會 2.人尊時代
3)調陽律陰社會 3.利義雙全
4.秋‧成의 圓熟期
正易卦圖
복희역/주역/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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