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동서원은 처음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를 배향한 사당으로 1630년(인조 8) 건립된 존양사에는 1665년(현종 6) 산당공(ㅅ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나 한 때 배향을 철회했다가,
1695년(숙종 21) 문곡공(文谷公) 김수항(金壽恒)을 추가로 배향하고, 이어서 1711년(숙종 37) 문곡공의 아들 농암공(農巖公) 김창협(金昌協)을 배향한 서원(書院)으로 되었다.
존양사는 1713년(숙종 39) 5월 16일 숙종대왕으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다.
녹동서원이라는 이름은 주자(朱子)가 부흥시킨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차용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오늘은 녹동서원이 사액을 받게 되는 전 과정을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녹동서원에 배향된 문곡 김수항과 농암 김창협이 어떤 사람들인지 먼저 알아보고 진도를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문곡 김수항은 안동김씨로 신천 군수를 지낸 김생해(金生海)의 현손이다.
김생해의 아들은 김대효(金大孝), 김달효(金達孝), 김극효(金克孝)인데, 김극효는 성종의 아들 경명군(景明君) 이침(李忱)의 외손이며, 광해군의 처이모부로서 왕실과 가까웠다.
김극효는 1564년(명종 19) 갑자식년시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동지돈녕부사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이후 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김극효는 아들이 다섯인데, 김상용(金尙容), 김상관(金尙寬), 김상건(金尙謇), 김상헌(金尙憲), 김상복(金尙宓)이다.
김극효의 장남 김상용은 우의정에 오르고 넷째아들 김상헌은 좌의정에 올랐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중심인물로 유명하다.
김상헌의 후손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조상의 의리론(義理論)과 명분론(名分論)을 배경으로 대대로 고관대작을 많이 배출하여 이른바 조선 말기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를 만들어내었으므로 흔히 김극효를 신안동김씨 중시조라고 말한다.
김상헌은 김극효의 아들로 태어나서 김대효의 계자가 되었으므로, 생부는 비록 김극효이지만 사실은 김대효의 아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김상관의 아들 김광찬(金光燦)이 김상헌의 계자가 되었으므로 역시 김대효의 손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삼수육창(三壽六昌)은 모두 김광찬의 아들과 손자이고, 조선 말기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는 김수항의 후손에서 이루어 진 일인데, 대체로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싸우자고 주장한 의리와 절개를 앞세웠다.
그런데 김상헌은 김극효의 아들이 아니고 김대효의 아들인데 어찌하여 김극효를 신안동김씨의 중시조라고 말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차라리 김생해를 신안동김씨 중시조라 한다면 모르겠지만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김상헌은 큰아버지 김대효가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대효의 계자로서 대를 이었다.
김상헌의 둘째 형 김상관은 김광혁과 김광찬을 낳았는데, 김상헌이 후사가 없었으므로 김광찬이 김상헌의 계자가 되어서 대를 이었다.
김광찬은 김수증(金壽增), 김수흥(金壽興), 김수항을 낳았는데 이름이 수자를 돌림자로 하고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 삼형제를 삼수(三壽)라고 불렀다.
김수항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창업(金昌業), 김창집(金昌緝), 김창립(金昌立)이다.
이들 6형제는 창자를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이 육형제를 육창(六昌)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김수항의 형제 삼수와 아들 형제 육창을 합하여 흔히 삼수육창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 말은 김수항의 가문이 그만큼 명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삼수육창 중에서 김수항과 둘째아들 김창협이 바로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김수항의 장남 김창집의 아들 김제겸(金濟謙), 손자 김달행, 증손 김이중 현손 김조순은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특히 김조순의 딸이 순조와 혼인하여 순원왕후가 됨으로 인하여 외척으로서 국정을 마음대로 농락한 이른바 안동김씨 60년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김수항이 높은 벼슬에 있을 때는 숙종이 집권한 초기다.
숙종은 조선의 19대 왕인데, 조선 500년 동안 왕위에 오른 임금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통성을 갖추고 나라를 다스린 사람이다.
실제 조선의 왕들은 대부분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다.
서자거나 혹은 적자 적손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등 하자를 안고 있었다.
적자가 아무 문제 없이 왕위에 올라 제대로 나라를 다스린 경우가 손으로 꼽을 정도 이므로 한 번 헤아려 보면, 최초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이가 5대 문종인데 즉위 2년 만에 병으로 죽었다.
어린 단종 역시 적장자로 왕위에는 올랐지만 즉위 직후 삼촌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해버렸으며,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 이지만 폭군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났다.
적장자가 아무 탈 없이 왕위에 올라 무사하게 마친 왕은 18대 현종이 처음인데, 바로 숙종의 아버지다.
숙종은 아버지에 이어 적장자로서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적장자로 왕위에 올라 정통성도 강력했지만 정치적 술수가 능수능란하여 당시 남인, 서인, 노론, 소론 등 이른바 사색당파로 나누어진 조정을 환국과, 출척이라는 정치적 기법을 활용하여 조정을 마음대로 주물러 왕권을 강화시켰다.
보물 제1936호 최석정 초상화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당시 명곡공 최석정은 영의정에만 여덟 번이나 올랐다.
영의정에 여덟 번 올랐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영의정에서 여덟 번 쫓겨났다는 뜻이다.
숙종은 당쟁을 이용하여 신하들 사이에 싸움을 붙여서 왕권을 강화했기 때문에 숙종 때는 당쟁이 극에 달하였다.
정치적 술수가 능수능란했던 숙종이 다스릴 때는 신하들이 꼼짝 못하고 당하였지만,
숙종이 죽고 나서 그 후손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당쟁의 여파가 끝까지 조선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조선 역사를 말할 때면 맨 먼저 당파싸움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숙종이 죽고 얼마 안 되어 1728년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과 소론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해가 무신년 이었으므로 무신란 혹은 주동자 이름을 따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하는데 모두 숙종 때 극단적인 당파싸움의 후유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론의 영수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은 1675년(숙종 1) 종실 복창군과 복선군 형제를 처벌하라고 주장하다가 집권 남인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영암에 유배되어 4년간 귀양살이를 하면서 영암과 인연을 맺었다.
영암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 영암 귀양지와 포천 본가 사이를 왕래하던 아들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 또한 그리하여 영암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김수항은 처음 영암에 귀양 왔을 때는 연촌공에 관하여 모르고 있었는데, 영암에서 존양사를 보았고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가서 연촌공에 관하여 알아본 다음 존경하고 사모하게 되었다고 <제존양서원병서>에서 밝히고 있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은 아버지를 찾아 고향 포천과 귀양지 영암을 왕래하면서 존양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1680년(숙종 6) 장희빈 일가가 몰락하는 경신대출척으로 김수항의 유배가 풀려 서울로 올라가 1687년까지 영의정으로 재임했고, 김창협은 1669년(현종 10) 진사시, 그리고 1682년(숙종 8) 문과에 급제하였다.
한편 영암 유림들은 노론의 영수 김수항의 도움을 받아 존양사를 사액 서원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고, 네 번의 시도를 거쳐서 비로소 사액을 받아 녹동서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