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그랜트(Cary Grant, 1904∼1986)

"모든 남자들은 캐리 그랜트 같이 되길 원한다"..... 한때 이런 말이 유행할 정도로 캐리 그랜트가 전세계 남성들의 롤모델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1930-50년대를 풍미하였던 미남 배우 캐리 그랜트의 영화중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와 "샤레이드" 일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캐리 그랜트가 50살이 한참 넘은 나이에 출연한 영화여서 캐리 그랜트의 진가를 못 보여준 영화였다.
캐리 그랜트는 스릴러 액션 영화뿐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물등 다양한 장르에 모두 잘 어울리는 몇 안되는 배우중 하나였으며 이런 다양한 연기를 능청스럽게 소화시킨 원천은 어린 시절부터 서커스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영향도 컸었다.
영국 출신인 캐리 그랜트는 집안도 너무나도 가난하여 14살때 학업을 그만 두었으며 이후 서커스단에 들어가서 팬토마임과 연기를 배우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으며, 서커스단이 미국에서 공연할때 그는 기회를 잡았다.
워낙 인물이 좋아서 단원중에서 가장 눈에 띄기도 한 캐리 그랜트는 공연을 지켜본 헐리우드 관계자에 의하여 영화배우로 캐스팅되고 이후 그는 몇 년간의 엑스트라역을 지나 1930년대 후반부터 주연급 배우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잘 나갔던 배우들이 클라크 케이블. 게리 쿠퍼. 에롤 프린등이 있는 가운데 캐리 그랜트는 완벽한 외모와 건장한 체격조건으로 헐리우드 남성배우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탑클래스로 올라섰으며 1940-50년대까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였다.
이렇게 유명한 그도 아쉽게도 놓쳤던 작품이 두개 있었는데 그건 바로 007 시리즈 첫 작품인 닥터 노와 오드리 헵번의 출세작 "로마의 휴일" 이었다.
007 제임스 본드의 원작자 이안 플레밍은 캐리 그랜트가 제임스 본드라는 공식을 두고 소설을 지었으며 제임스 본드역으로도 영국 출신의 캐리 그랜트가 적역이라고 적극적으로 원하였지만 1962년 당시 캐리 그랜트는 58살의 많은 나이였기 떄문에 본인 스스로 부담을 느껴 출연을 고사하였고, "로마의 휴일" 역시 본인이 거부하여 "그레고리 펙"이 대신 캐스팅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레고리 펙과 캐리 그랜트가 꽤 닮은 면이 많은 거 같다)
1950년대 당시로선 파격적인 인센티브 개런티 지급을 받고 최고의 출연료를 받았던 캐리 그랜트는 다른배우들과는 달리 1966년까지만 활동하고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를 선언하여 관계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캐리 그랜트가 1986년 사망한 후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사실과 추문도 많이 들려왔다.
잘 생긴 외모와는 달리 술과 약에 쩔어 살았으며 의외로 폭력적인 행동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5번이나 결혼을 할 정도로 여성 편력이 많았지만 반대로 그가 동성애자라는 말도 들려온다.
실제 영화배우 랜돌프 스콧과는 오랜 기간동안 동성애 파트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두 배우는 아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캐리 그랜트는 천하의 바람둥이 라는 말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
영화 촬영중 만난 당대의 여배우들 모두 한번쯤 캐리 그랜트의 껄떡거림에 대부분 넘어갔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바람기도 다분히 많았다며 많은 여배우들이 증명하기도 하였다.
이런 여러가지 소문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캐리 그랜트가 그만큼 당대 최고의 배우로서 그 인기와 지명도가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영화속 이미지와는 달리 현실에선 각종 여러 스캔들이 많았던 배우중 하나였지만 캐리 그랜트가 출연한 영화들은 항상 해피엔딩을 추구하고 즐거운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고 있으며, 역대 영화배우 지명도및 순위에서 항상 BEST 10위 안에 드는 최고의 배우라는 영광은 아무나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캐리 그랜트 - 불우한 환경을 딛고 헐리우드 최고의 톱스타로|작성자 엘리어트
1986년 11월 29일 캐리 그랜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네 명의 전처(다이앤 캐넌, 베치 드레이크, 바바라 허튼, 버지니아 셰릴)와 아내(바바라 해리스) 그리고 딸 제니퍼가 남아 있었다. 자신의 연기 인생을 되돌아보는 순회 강연을 하던 중 하필 아이오와 주 데븐포트에서 수명을 다한 것이었다. 그랜트는 20세기의 대부분을 살았고 그 시간 동안 할리우드의 세련된 신사가 무엇인지를 정의해 놓았다. 사실 그는 영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말이다.
그의 초년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유난히 가난하거나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던 일을 제외하면 특이하거나 사건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랜트는 어머니의 입원에 대해 어른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결국 알게 된 가족의 비밀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발휘했고 그는 특히 친밀한 사이에서의 신뢰 문제로 늘 괴로워했다. 피가 섞인 가족의 수수께끼에서조차 철저하게 속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14세에 학교를 떠났고 밥 펜더의 코미디 극단에 입단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아버지의 사인을 위조했다. 그는 영국의 지방들을 돌아다니며 팬터마임과 공중곡예를 배웠는데 1920년에 「굿 타임즈」라는 쇼를 위해 브로드웨이로 보내졌고 자신이 원하던 경력을 만들기 위해 그곳에 남았다.
그랜트는 브로드웨이 코미디에서 연기로 눈에 띌 때까지 생계 유지를 위해 몇 년 동안 온갖 막일을 했고, 1931년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겼다. 곧 「금발의 비너스(1932)」, 「나비 부인(1932)」 등 그의 이력서를 채울 몇 가지 경력이 생겨났고 바로 그때 매 웨스트가 끼어들었다. "가끔 나를 보러 올라오는 게 어때요?"라는 유명한 대사가 등장하는, 자신의 인기 있는 작품 「다이아몬드 릴(1933)」에 그를 출연시킨 것이다.
그녀는 그랜트를 스타로 만들어 줄 기백과 성적인 매력, 세련미, 신사다운 태도 등이 어우러질 때 얼마나 호소력을 발휘할지 알아보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잘생긴 주연 배우이자 현실적인 코미디언으로 자리 잡은 그는 「놀라운 진실(1937)」과 「베이비 길들이기(1938)」, 「연인 프라이데이(1940)」를 비롯한 스크루볼 코미디의 고전들에서 주인공을 연기했고, 「현대의 여신(1940)」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연기를 선보였다.
코믹한 효과든 드라마틱한 효과든 신체적인 표현에 언제나 능했던 그랜트는 세속적인 남자이자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의 연인, 신뢰할 수는 없지만 여전히 강한 호소력을 지닌 세련된 도시인 역할에 아주 중요한 전례를 세웠다. 그의 억양과 자세, 태도와 행동 그리고 전반적인 연기는 판단과 교육, 능력과 혈통의 우월함을 넌지시 표현했다. 그에게는 그을린 피부와 바르게 탄 가르마 그리고 환한 미소가 있었다. 장신의 운동선수 같은 체격은 위험을 기꺼이 떠안을 능력을 보였고 매 순간 끊임없이 남성성을 발산했다. 이 모든 특징들이 더해지면서 그랜트는 히치콕을 비롯한 다양한 감독들이 원하는 인물상을 각각 유연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후기의 역할과 아버지 노릇
성숙해진 그랜트를 볼 수 있는 역할들로는 「오명(1946)」과 「나는 남자 전쟁 신부였다(1949)」, 「나는 결백하다(1955)」, 「러브 어페어(1957)」,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작전명 페티코트(1959)」, 「샤레이드(1963)」등이 있다. 그러다가 그는 62세의 나이로 극적으로 은퇴하여 1966년 드디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의 마지막 20년은 자신의 유산과 딸에게 바쳐진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할리우드의 가장 거물급 남자 주연 배우였던 그로서는 참으로 특기할 만한 일이다. 더구나 그 시절은 흘러간 세월을 육체가 여지없이 드러내고 난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 일하는 남자들에게 악명 높게 심지어는 어리석을 정도로 관대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에게 아카데미 공로상을 안겨주고 「페니 세레나데(1941)」와 「논 벗 더 론리 하트(1944)」로 두 번의 아카데미 후보 지명과 네 번의 골든글로브 후보 지명을 안겨준 비평계는 그에게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그들에게 아첨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에 온전한 평가를 받기에는 그의 독특한 재능과 페르소나가 일반적인 틀을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영향은 계속 살아남아 제임스 본드 같은 인물들에게 개성을 더하고 그의 작품의 회고전이 열릴 때마다 새로운 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제임스 본드는 NO!
제임스 본드의 창조자 이언 플레밍은 캐리 그랜트를 바탕으로 그 쾌활한 스파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배우 그랜트가 「나는 결백하다(1955)」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같은 영화에서 성공적으로 확립한, 차분하고 부드러우며 세상을 잘 아는 남자의 페르소나를 살펴보건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랜트는 본드 시리즈 1편 「살인면허(1962)」에서 본드 역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그 역을 소화하기엔 58세의 나이가 너무 많다며 출연을 거절했다.
· 결국 본드 역을 맡은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 두 사람은 캐리 그랜트를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된 것 같다. 코너리는 외모로 무어는 유머감각으로.
· 「살인면허」를 촬영할 당시 플레밍은 처음에는 코너리의 연기가 '정제되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는 생각이 바뀌었다.
· 이언 플레밍이 제임스 본드를 머릿속에 그릴 때 염두에 둔 다른 배우들로는 데이비드 니븐과 렉스 해리슨 등이 있다.
· 본드 캐릭터는 멀린 멘셜이라는 실제 스파이를 모델로 했는데, 그는 2차 대전 동안 플레밍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다.
· 캐리 그랜트가 거절한 그 밖의 유명한 역할들로는 「롤리타(1962)」의 험버트 험버트 역과 「마이 페어 레이디(1964)」의 헨리 히긴스 역 등이 있다.
"모든 사람이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나조차도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다니까요."
[네이버 지식백과] 캐리 그랜트 [Cary Grant] (501 영화배우, 2008. 8. 29.,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