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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돌목까지 조선 해군이 몰리게 된 속 터지는 경과에 대하여
"조선 수군이 수전을 잘하고 선박도 견고하니 어두운 밤에 몰래 나가서 습격하되 조선의
큰 배 한 척에 일본은 작은 배 5~6척 내지 7~8척으로 대적하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일시에 붙어 싸운다면 격파할 수 있다." (1596년 12월 21일 『선조실록』)
강화 협상을 위해 일본에 다녀온 황신黃愼이 일본 고위층에게 들었다며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를 했을 것이다. 그 대비는, 두 달 뒤 조선 해군총사령관
이순신의 파면이었다.
그리고 1597년 7월 16일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밤중에 병선 5~6척으로 가만히 우리 진영 배를 포위했는데,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날 이른 아침 복병선이 이미 불태워져 부서지자 사령관 원균이 크게 놀라 변을 알리는데,
갑자기 각 배 옆에서 적선이 충돌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실색하였다.’
조선 해군은 궤멸됐다. "겁낼 때에 겁낼 줄 아는 것은 병가의 요긴한 계책"이라며 경상우수사
배설이 퇴각시킨 전함 열두 척만 살아남았다. (조경남, 『난중잡록』, 1597년 7월 16일)
8월 3일 전임 사령관 이순신이 복직됐다.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8월 3일)
한 달 뒤 추석이 왔다. 일본 해군은 육군과 합세해 남원으로 치고 올라갔다. 남원성을 지키던
지휘관은 명나라 장수 양원이었다. 기마술에 능했던 양원은 산세 험준한 교룡산성에 있던
조선군 본부를 "비겁하고 우둔하다”며 말달리기 좋은 평지인 남원성으로 옮겨버렸다.
남원성 동서남북 네 문 가운데 동문을 제외하고 모두 일본 해군이 배치됐다. 일본군이
개미 떼처럼 성벽을 타고 넘자 양원은 말을 타고 도주했다. 추석 다음 날 4만 남원성민이
몰살됐다. 훗날 명나라 정부는 양원을 참수한 뒤 사과 명목으로 그 목을 조선으로 보냈다.
조선 정부는 천조국天國 장수 양원을 위해 사당을 지어주었다.
(1598년 10월 8일 『선조실록)
바다에서, 조선 수뇌부는 적지에서 어렵게 획득한 '심야 기습 포위작전' 첩보를 새까맣게
무시했다. 일본군은 타깃 선정은 물론 공격 방법까지 정확하게 정해놓았고, 조선군은 이미
예고된 타깃을 정확하게 저격당했다. 원균이 전임 이순신으로부터 인계받은 군량미 9914 석,
화약 4000근과 각 배에 나눠 실은 수를 제외하고도 남아 있던 총 300자루(이분, 「이충무공전서」
「이충무공행록」)는 수장됐다. 육지에서, 조명연합군 사령관 양원은 현지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가 선호하는 작전만 고집하다가 패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조선육지와 바다가
뚫려버린 것이다. 여기까지가 명량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조선에서 벌어진 오만 잡사 가운데
일부다.
- 복귀한 해군사령관 이순신이 전쟁을 준비한 방법에 대하여
남원 함락 전날인 음력 8월 15일 복직한 해군사령관은 병력이 적으니 해군을 해체하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정부 명령서를 받았다. 이를 거부하고 이순신이 정부에 올린 보고서가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배가 열두 척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였다.
(이분, 「이충무공행록」)
그리하여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명량해전은 상상을 초월한 정신력이 승리한
싸움이라고,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 또한 일기장에 "하늘이 도왔다(天幸·천행)”고 썼으니까.
그러하지 않았다. 하늘에 기댄 적은 일초도 없었다. 8월 3일 복직한 그날부터 9월 16일
전투 당일 아침까지 이순신은 몸이 불편한 날을 제외하고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
'일찍‘ 출발해 행군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전쟁을 준비했다.
8월 3일 진주에서 재임명 교지를 받은 이순신은 곧바로 섬진강 하구 두치진을 건너 구레로
갔다. 바로 이날 하동에 상륙한 일본 해군이 두치진을 건너남원으로 북상했다. 간발의 차이로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다. (게이넨-慶念, 「조선일일기」 1597년 8월 3일)
해군사령관이라면 응당 남하해 바다로 가야 했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해군 재건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군비(軍備) 확보였다.
장교 9명, 병사 6명을 동행해 곡성, 옥과를 거쳐 남하한 이순신은 순천, 보성(16일)에
닿을 때까지 군사를 모았다. 순천에서 정예 군사 60명이 모였고 보성에서는 12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분, 「이충무공행록」) 배흥립, 송희립, 최대성, 김붕만, 이기남 등
전라좌수영을 함께 지휘했던 역전의 전사들이 재회했다.
둘째는 무기 확보였다. 8일 순천에 있던 군사 창고는 조선군이 후퇴하면서 이미 파괴되고
없었다. 다행히 보성(15일) 창고에는 말 네 마리 분량의 무기가 남아 있었다. 이지,
태귀생, 선의 같은 활을 만드는 무기 제조 기술자도 합류했다.
바로 이날 해군 해체 명령서가 도착했다. 이순신은 거부했다. 군사와 무기 확보가 완료되고
8월 18일 이순신은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은 전함을 인계받았다.
한 척이 더 확보돼 조선 해군 함대는 열세 척이 됐다.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 복직 보름 만에
전투에 필요한 병력과 무기와 전함이 확보된 것이다.
셋째는 유리한 위치 확보였다. 회령포는 포가 좁아 전투에 불리했다. 이순신은 20일 함대를
해남반도 동쪽 이진으로 24일 해남 서쪽 어란포로 진을 옮겼다. 바로 다음 날 서진하던
일본 해군이 이진에 도착했다. 진지 이동이하루만 늦었으면, 전군이 궤멸될 위기를 모면했다.
29일 함대를 어란포보다 안전한 진도 울돌목 동쪽 벽파진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9월 14일 어린 앞바다에 일본 전함 55척이 진입했다는 첩보에 다음 날 울돌목을
건너 옛 전라우수영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마침내 전투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이순신은 끊임없이 첩보원 임준영을 적지로 내보냈고, 그 정보에 따라 움직였다. 그사이 두 차례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이순신이 직접 지휘해 전투를 치러 이겼다.
지휘관이 직접 나선 이유가 있다. 칠천량 참패의 기억은 현실적인 공포였다. 그 궤멸 장면을
목격한 경상우수사 배설은 병을 이유로 육지로 나가버렸다. 모든 병사가 앓고 있는 대참패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지휘관이 직접 나서서 전투를 지휘해 공포심을 잠재운 것이다.
전투 전날 그가 군사들에게 이리 말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그리고 그가 내린
명령은 “피란한 백성들은 즉시 육지로 올라가라고 하라”였다. 전쟁은 군인이 치르겠다는 말이었다.
- 박종인 저, ‘땅의 역사’ 3권에서
- 전남 진도 진도대교 아래 해협 이름은 울돌목이다. 물이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세서 울돌목, 명량(鳴梁)이다.
이순신 동상 너머 해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