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한 줄의 울림]
행복의 자녀, 고통에게
[한 줄의 울림 01]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신다의 울음 01]
몹시도. 더운 날이다. 이런 날은 아이스크림과 함께 선풍기 바람을 쬐며 책을 읽는데, 책도 더위를 식힐 만한 스릴 있는 책이 제격이다. 에어컨이 없기에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런데도 견딜 수 있는 이유. 무언가 해야 할 것이 있고 앞으로 해 나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야 할 날이 아직 많이 남아있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통증에 대한 두려움쯤이야. 두려움은 두려움으로만 끝나기 때문에 별로 아프지 않다. 그래서 다행이다. 더 나아가지 못해서 더 이룩하지 못해서 안달하기보다는 지금 눈 앞에 있는 두려움을 마주하고 의사의 진단을 받는 것이 더 현명할 것 같다.
삶은 진행 중이고, 내일의 삶이 조금 더 나을 것이고 그렇게 조금씩 발전하다 보면 어느 덧 소망의 하나를 이루고 그리고 또 소망의 둘, 소망의 셋. 그렇게 이루어갈 테니까. 삶들은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북램프의 불이 춤을 추는 것을 보면서 나는 또 어둠의 낭만을 만끽하고 아침이 오는 순간을 즐길 테니까.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이 내 삶도 어떤 의사 앞에서는 마냥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어떤 통증도 없이 그 순간은 지나갈 테니까. 깊은 시간이 통증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게 되기를.
[한 줄의 울림 02]
행복의 자녀, 고통에게
"박사님께 누가 이 모든 걸 가르쳐주었습니까?"
금방 대답이 나왔다.
"고통."
- 알베르 까뮈 『페스트』
[신다의 울음 02]
저 고통의 의미를. 내가 쓰고 있는 모든 글들이 지난날의 고통에서 탄생했다면? 뭐, 항상 고통스러웠던 건 아니지만, 때로는 내가 "고통"으로 불리기도 했으니, 비록 고통스럽지 않은 순간에도 나는 꽤 고통스러워 보였나 보다. 그러고 보면, 행복한 날들이 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즐거운 날이 있는 것과 행복한 날의 차이는 무엇일까. 즐거운 날은 순간순간 아픔을 잊기 위해, 고통을 잊기 위한 몸부림에서 잠시잠깐 즐겁고 그 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고통스런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 고통스런 순간들을 잊기 위해, 또 다시 즐거운 무언가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히 허전하고, 행복하지 않다. 한마디로 인생이 미래를 위해 저축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냥 소비만 되고 있는 것이다. 담배도 피웠고, 술도 마셨었고, 게임도 했었다. 그저, 불안한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싶어서, 고통스런 현재를 잊고 싶어서.
그 고통스런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은, 담배도 끊고, 술도 끊고, 게임도 끊었다. 나에게 이것들은 기호품이 아니라, 고통을 잊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지금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잘 모르는 누군가는 내게 이것들 없이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재미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 그 말에는 그냥 살짝 웃음을 보일 뿐이다. 나에게 누가 이 모든 걸 가르쳐주었다고 묻는다면, 나 역시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고통. 지금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삶을 살고 있으니, 인생은 책을 읽고자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달라질 수 있다는 건 확실한 것같다.
앞으로 누구에게 이 모든 걸 가르쳐주려 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겠다. 행복의 자녀, 고통에게.
[한 줄의 울림 03]
내가 인생을 헤쳐 온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나를 계속 가게 하는 것은 어떤 성취감이다
내가 인생을 헤쳐 온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존 칼라한
[신다의 울음 03]
가끔, 그런 날이 있다. 어떤 것을 열심히 했는데, 묘하게도 아무 만족도 느끼지 못하는 날. 그런 날은 왠지 그날 했던 일이 후회가 되곤 한다. 난, 정말 열심히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어떤 날은 그런 날도 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묘하게도 성취감이 돋는 날. 따져 보면, 별 의미 없는 것들을 한 날도 있다. 후회가 되는 날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그때부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늦게까지 잠을 못 잔다. 어떻게든 졸음을 쫓아버리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왠지 허송세월을 보낸 듯한 느낌이 든다. 성취감이 든 날은, 나름 만족감에 여유 있는 시간에 할 만한 것들을 한다. 평소에 안 읽었던, 조금 재미없는 책을 읽기도 하고, 평소에 안 보던 TV프로를 보기도 하고, 평소보다 좀더 일찍 잠을 청해 보기도 한다. 가끔은, 인터넷 신문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물론, 나는 내가 인생을 헤쳐 온 이유를 알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유혹들 속에서, 무너질 뻔한 나를 다잡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힘에 의해 억지로 끌려다니기도 하면서 그렇게 무너지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한다. 내 글을 보시는 분들은 어떤 분일까. 내 글을 욕하면서도 끝까지 읽는 분이실까, 정말로 좋아서 읽는 분이실까,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읽는 분이실까. 어떤 마음으로 보게 되든, 내 글을 보고 좋은 느낌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나의 글을 욕하기 위해서 끝까지 글을 보고 있는 분이라도 그분들의 앞길이 무너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길에 좋은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이 함께 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역시도, 나의 앞길에 좋은 사람들이 함께 할 거라 믿는다. 그 분들은 행복할 것이며, 혹시 지금 행복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행복해질 거라 믿는다.
나를 계속 가게 하는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며, 그러한 사람들이 함께한 성취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을 헤쳐온 이유, 지금 전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어쩌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한 줄의 울림 04]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내가 흐느낀 것은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안 마텔 『파이 이야기』중에서
[신다의 울음 04]
아무 인사도 없이 누군가가 날 떠난다면.
사실, 그런 경우는 살면서 참 많이 겪는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친구가 있기도 하고,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떠나서 생사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있기도 하다. 때로는 그 중에 어떤 사람은 내가 될 때도 있다. 인사도 없이 누군가가 떠나는 이유는 많고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가 그 사람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없어도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 존재. 물론,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 마음 깊은 곳까지 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었을 때에는 참 많이 속상하기도 하다. 그래서 자존감도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나를 다시 다잡고, 더 나은 내가 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그 사람이 떠난 것이 내가 못나서가 아니란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당황스럽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황은 언제든 다시 오게 마련이다. 그 "처음"을 현명하게까지는 모르지만, 잘 극복하였기에, 나의 지금은 별로 당황스럽지 않다.
과거에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인사도 없이 떠났듯이. 누군가가 떠나는 것, 누군가에게서 떠나는 것. 이제는 그것을 불편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잘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지금, 연락이 안 되는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하는 것도, 그 사람이 불편해할 지도 모르는 것이기에 나는 일부러라도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지 않기도 한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아주 기본적인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말로 나를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몇 사람만 있고,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돈만 있으면, 나는 행복할 시간을 매일매일 보낼 수 있을 것이므로.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른다.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나는 많이 애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 애쓰는 시간이 오래된다면, 나는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 행복한 죽음의 순간에, 나는 잘 살았다고, 나는 정말 행복하게 죽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를 위해 오늘도 행복하게 살아간다. 오늘도 치열한 행복을 살아간다.
[한 줄의 울림 05]
일이 없다면 모든 삶은 부패한다.
일이 없다면 모든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일에 영혼이 없을 때 삶은 질식하고 죽어간다.
- 알베르 카뮈
[신다의 울음 05]
여기서의 일이란, 꼭 돈 버는 일만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일, 설겆이, 빨래, 독서, 영화보기, 청소하기, 요리하기 등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모든 일들을 의미할 것이다. 만약,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점점 더썩어가는 시체와 다를 바 없겠지. 그래서 결국은 허무하게 삶을 마감하겠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느낌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에, 조금 아파도 견딜 수 있고, 조금 힘들어도 견딜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참아가면서 무언가를 하는 순간,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날아오른다. 그래서 그 영혼이 내 마음 깊숙이까지 들어가 나의 삶을 온전하게 만든다. 영혼이 없다면, 질식하고 죽어간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내가 쓰는 이 글에 내 영혼을 담는다. 그리고 그 일이 나의 삶을 이끈다. 일이 없다면 나의 삶은 부패하게 될 것이고, 열심히 무언가를 한다면 나의 삶은 아름다운 영혼이 가득할 것이다.
요새는, 비둘기가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비둘기가 사람과 너무 친해진 것 같다. 조금만 더 있으면, 사람 몸 위에도 올라오겠지 쉽다. 그 비둘기를 보노라면,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그 비둘기의 영혼까지도 아름답길 바란다.
[한 줄의 울림 06]
밖을 내다보는 자는 꿈을 꾸지만
『교양의 발견』 / 이근철 / 한국경제신문사(한경비피)
당신의 시야는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때만 또렷해질 것이다.
밖을 내다보는 자는 꿈을 꾸지만, 안을 들여다보는 자는 깨닫는다.
Your vision will become clear only when you can look into your own heart. Who looks outsides, dreams; who looks inside, awakes.
- 칼 구스타프 융
[신다의 울음 06]
가끔은 내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밖을 내다보지 못할 때가 있다. 온전히, 내 마음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전혀 모를 때가 있다. 신문보다는 뉴스에 의존하는 상황으로서는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간접경험을 하다 보면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가 있다.그 감각이, 때로는 엄청난 발전을 가져오고 나를 무한대로 성장시킨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 한계란 없는 것 같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과학과 더불어, 책도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다양성에도, 이제는 그 변화를 짐작할 수조차 없다.
책의 홍수 속에서도 책이 소중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건, 그처럼 인류가 진화하는 만큼 책도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책은 제공하고,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도 책은 제공한다. 책을 봄으로 인해서, 또렷해지는 내 마음. 또, 또렷해지는 꿈과 또렷해지는 깨달음. 이 또렷해진 모든 상황들에서 나 자신은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 더 또렷해진 내 안의 발견, 자유로움의 발견이다. 자유로운 상황 속에서 진정한 내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그 또한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자유로움이다. 내게 주어진 이 자유로움 속에서 밖을 내다보며 꿈을 꾸고, 안을 들여다보며 내 자신을 깨닫는다.
[한 줄의 울림 07]
맞아, 세상은 불공평해
『딸에게 주는 레시피』 / 공지영 / 한겨레출판
맞아, 위녕. 세상은 불공평해. 절대로 공평하지 않아. 그러나 네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세상은 놀랍도록 공평하게 느껴질 거야."
- 공지영 『딸에게 주는 레시피』중
[신다의 울음 07]
처음 이 글을 보고는, 무언가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에 한동안 멍해 있었다. 공평하지 않아서, 공평해야 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고 있던 내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간단하면서 오묘한 진리를 건넨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공평해질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질 수도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질지도 모른다. 지금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더 많은 행복을 위해 살아갈 것이며, 지금 불행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불행에 빠져 영영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불·공·평·하·기·에
그런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가진 것 없다고 해서 절망스럽지 않다. 어떻게? 어차피, 불공평한 세상, 내가 세상을 평등하게 바꾸려는 억지는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길은 열린다.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을 해결해 나갈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불만이 쌓이고 억지 주장을 하며, 해결하지 못할 일들에 힘을 쏟게 된다.
불공평하다는 사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겐 너무도 많은 기회가 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왔던 길에 불공평함, 내가 가는 길에 불공평함, 내가 갈 길에 불공평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나는 비로소 그 불공평함이라는 서운한 감정에서 벗어나,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똑바로 보고 갈 수 있다.
날씨도 불공평하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다. 이런 날씨가 계속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또한 그렇게 되면, 이런 날씨가 좋다는 것을 잘 모를지도 모른다. 좋은 날을 위해, 오늘 불공평함을 받아들인다. 나의 삶에 불공평이 깃들더라도, 그건 온전히 나의 삶을 가꾸기 위한 길임을.
[한 줄의 울림 08]
실패 역시 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든 장애물에 부딪혀 넘어지고 실패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실패 역시 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슈레더-
[신다의 울음 08]
신문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신문을 보고 뉴스를 보니, 보는 눈이 확실히 달라진다. 더 깊고 은밀한 곳, TV에서는 차마 방영될 수 없는 것들까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고통이다. 행복은 아주 짧은 순간이다. 그러나 그 짧은 (행복의) 순간 때문에 고통의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즐겁지 않다. 20년 동안 삶이 고통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이제 아니란 걸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됐다. 그 고통의 노래가 '아이 게이뷰 유' 속에 들어있다"
- 스포츠동아 (2018년 10월 주말판-아티스트 박기영 인터뷰 중에서)
오직, 단 3분의 행복한 시간을 위하여다. 인내하는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그 열매는 너무나도 달착지근하기에 그 고통의 순간조차 행복하게 여길 수 있다. 그 열매를 위해서 우리는 넘어지고 실패하고, 또 다시 일어서고를 반복한다. 그 실패도 꿈이기에,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웃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문을 보기 전까지, 처음에는 구독을 망설였지만, 막상 보고 나니 역시 "종이신문"의 위력은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인터넷 기사로는 습득하기 힘든, 글쓰기 능력을 좀더 향상시킬 수 있었다고 할까. 신문을 본 날과 안 본 날의 글쓰기 컨디션이 다르다는 건, 나만의 비밀이다. 왜 그럴까?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활자로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일 거라는 것이 나만의 생각이다. 그 세상이 나에게 "글자들"로 형상화되어 내게 체화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신문을 보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도 엄청 빨라졌다. 처음에는 힘들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리 힘들지도 않고, 하루의 컨디션이 더 좋아진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조금씩 변화해가는 내 자신을 체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이 다른 내가 있을 것이다.
점점 더 세상살이에 힘이 붙고 있다. 세상은 정말 살 만하다고 느껴진다. TV뉴스의 기사 뒤에 숨은 진실을 볼 수 있는 힘,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담겨진 숨은 진실을 볼 수 있는 힘, 모든 것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몸과 귀와 눈과 마음으로 체험하면서 나온다. 그 숨은 진실이 세상을 아름답게, 세상을 보다 살기 좋게 만드는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한 줄의 울림 09]
불행하면 인생의 의미도 사라지는가?
『12가지 인생의 법칙』 / 조던 B. 피터슨 / 메이븐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행복을 이야기하는 수많은 책들과 달리 신작 '12가지 인생의 법칙'의 저자 심리학과 교수 조던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보통 인생의 의미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면 인생의 의미도 사라지는가? 행복은 예측할 수 없고 쉽게 사라진다.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목표로 삼을 수 없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면 불행해졌을 때 인생은 바로 실패한 것이 되어 버린다."
-2018년 11월 3일 (토) 서울경제, 김현진기자 「아프니까 인생인 거야」 중-
[신다의 울음 09]
맞는 말인데, 왜 이렇게 씁쓸할까.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갑자기, 내가 행복했던 그 전까지의 삶은 모두 거짓된 삶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들이 가끔씩은 나를 괴롭히곤 한다. 그럴 때, 그런 건 그저 기우일 뿐이라고 애써 외면하면서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 미래는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기에, 걱정 같은 건, 아예 마음의 저편으로 묻어두고 잠가버린다.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떡 하니 나타난 한 문장. 행복을 추구하지 마라. 그렇지, 사람은 행복하다가도 순식간에 불행해질 수도 있지.
그걸, 실패한 인생이라고 치부해 버린다면,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리겠지.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말에 처절하게 공감이 간다. 그저, 지금 살고 있는 이 순간을 누리다 보면 얻게 되는, 행복은 내게 주어지는 부가적인 몫이다. 그 부가적인 몫을 목표로 삼을 이유는 없다. 행복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행복할 때도 있고, 불행해질 때도 있고, 그러다가 또 다시 행복한 날이 오고,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이 의미 있게 느껴져서 더불어 나만의 "성공"이란 놈은 저절로 따라올 거다. 그리고 그 "성공"이 꼭 행복일 필요는 없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 그 삶을 살아가다가, 언젠가는 그 “행복"이란 놈을 쫓지 않았는데도, “나 정말 행복했었다. 불행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조차 행복했었다” 고 말하는 순간이 오겠지. 웃음도 점점 잃어가고 있는 요즈음, 강박적으로 추구하던 "행복"이란 놈을 잠시 밀어내고 나의 삶에 "가치"를 부여해 보려고 한다. 그 가치가 어떤 식으로 빛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모르는 미래에 나의 삶을 투자해 본다. 말 그대로 "투자"다. 이익을 낼지, 손해를 볼지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므로. 걱정일랑 말고! 더운 건지, 추운 건지, 조금은 헷갈리는 요즘 날씨. 조금은 헷갈리는 투자에 모험을 걸어 본다.
[한 줄의 울림 10]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984』/ 조지 오웰 / 민음사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 조지 오웰 『1984』
[신다의 울음 10]
요즘은 시민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줬다는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 과연, 그것이 시민의식이 향상되어서 그런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오늘날에는 심리학 서적, 자기계발서, 에세이 등의 패턴이 과거와 달라졌다. 무조건 열심히, 무조건 착하게, 무조건 된다, 라는 강박적 의식을 가진 책들은 더 이상 오늘날의 트렌드가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고, 별로 행복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과거에는 자신의 생색내기 수단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생색내기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생색내기조차 "생명"의 소중함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의미가 달라진다. 생명을 그다지 소중하게 다루지 않았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있기에 오늘날에는 생명의 소중함이 더 귀하게 여겨진다.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해서 지배를 당하고만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 주저앉아 생명을 구제하려는 노력은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기억을 지배하고 그로 인해 오늘날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더 나은 오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어떻게든 나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과거를 타산지석 삼아, 더 나은 미래를 남기기 위해 노력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도 있고, 웃음이 떠오르는 기억도 있지만, 그 과거들이 모여서 내일의 나를 만들어갈 발판을 만든다. 그러므로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저 말.
어떤 과거든지, 나의 오늘로 승화시켜 나간다면 내일의 나는 창조된 삶,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 희망에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즐거웠던 순간들은 마음껏 회상하면서 오늘 또 하나의 정진을 이루어나간다. 슬픈 순간, 기쁜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들이 내게로 오는 오늘. 더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다.
[마지막 한 줄의 울림]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 KSBS 1 드라마 【안단테】 중에서 (16부작, 2017~2018 방영)
[마지막 신다의 울음]
드라마 [안단테]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완성형이다. 누군가가 죽음으로서 불완전한 삶이 오히려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죽음은 그 사람의 생명이 끝날 뿐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오열을 하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대성통곡 후에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오늘도 살아가야 할 사람은 여전히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람이 마치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겨우겨우 그리움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관계는 지속되며, 그 사람과 맺은 추억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더욱 더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든, 또 누군가와의 관계가 불편하든, 그리 속상해 할 일은 아니다. 그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끝이 아니다. 그 죽음 때문에 사람은 더욱 더 열심히 살아갈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슬퍼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삶을 끝낼 정도로 절망하진 말자. 마지막 대성통곡으로 슬픔을 한없이 날려버리고, 새로운 삶을 돋우는 힘이 생겨나게 되기를.
<징검다리-02>
[한줄의 울림 + 시가 올 때는] 대나무 성장통
『사과가 필요해』/ 박성우 / 창비
속이 없는 게 아니야. 속을 비워 두는 거야!
- 박성우 청소년 시 <대나무 성장통>
[신다의 성장통]
때론, 속없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가 있다. 물론, 그 오해를 받는 사람이 나일 때도 있지만, 다른 사람일 때도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속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도, 견디고 견디다 결국 견디지 못해 속을 비우기로 선택한 거지. 속을 비우기로 한 결정은 너무도 오래전부터 고민해 온 끝에 이루어진 선택이다. 그 선택에 어떤 토를 달거나, 비난을 가할 수는 없다. 그랬다가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올 테니까.
지하철에서 나오는데, 누군가 큰 소리로 전화를 하는 걸 본다. 뭔가를 따지는 듯한 목소리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큰 소리로 무언가를 따지고 있을까. 그런 사람에게도 속없다고 따질 수는 없다. 뭔가 화나는 이유가 있겠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사람에게도 속사정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사건에 대한 화가 아니라, 사실은 화가 나는 다른 사건이 원인이 되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당한 사람은 또 얼마나 억울할까. 어쩄든, 깊은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사실 풀리지 않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풀리지 않을 때는 속을 비워두는 선택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참, 맑은 시들, 깔깔거리다가도, 나의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사춘기 시절의 아픔들과 방황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면서도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참, 따뜻한 시집을 읽었다.
3부
[문장이 내게]
어차피 우리 삶은 여행이니!
[문장이 내게 01]
멍 때림의 미학
『난 멍 때릴 때가 가장 행복해』 / 이상권/ 특별한 서재
"아, 선생님도 저랑 똑같군요! 그렇게 강물에 누워서 멍 때리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하신 거잖아요? 그치요? 선생님, 저도 그래요. 전 아파트에서 살고, 자연하고 멀리 떨어져 살아서 숲이나 강물이니 이런 것이 주는 편안함은 몰라요. 대신요, 그냥 침대에 누워서 멍 때리고 있을 때요.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소리도 안 나게 하고요. 그렇게 멍 때릴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래서 전 침대에 누워서 멍 때리기를 좋아하는데……."
[신다가 네게 01]
그래, 나도 그렇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허공 속을 꿰뚫고 있는, 천장에 있는 무수한 점만을 바라보며 공상에 젖어 있을 때. 그럴 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그렇게 멍 때리는 시간은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 종일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때로 그렇게 있다가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뭐하고 있는 건지, 걱정스런 시선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멍 때리는 순간은 창조를 위한 최고의 휴식시간이다.
무언가 하던 일이 꽉 막혀 있을 때 그렇게 한동안 멍을 때리고 있노라면, 문제가 풀리기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멍 때리는 시간은 행복할 뿐 아니라, 힐링의 시간이며, 나아가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주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좋은 시간들을 사랑한다. 어떤 사람은 멍 때리는 사람을 보면서 한숨을 짓기도 하고, 못 마땅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시각일 뿐이다. 멍 때리기를 하는 많은 사람들은 멍 때리는 시간의 여유가 최고의 휴식시간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멍 때리는 시간이 결코 시간낭비를 하는 시간은 아니다.
글을 쓰면서, 오늘도 멍 때리기를 시도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해야 할들이 우수수 생각나면서, 빠른 일과를 재촉한다. 멍 때리기에 성공했다는 반증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일상, 오늘도 멍 때리는 행복이 나를 즐겁게 한다.
[문장이 내게 02]
뭔가를 충분히 사랑한다면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 팀 페리스 / 토네이도
뭔가를 충분히 사랑한다면 그 일에 온전히 전념하기가 훨씬 쉬워진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해 당신이 지금 몰입을 하지 못해 고민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 게 맞다는 뜻이다. 모든 힘을 쏟을 만큼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면 승부를 걸어서는 안 된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일인데, 거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경쟁자가 존재해서 망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는 반드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경쟁자보다 더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고, 재능이 없다면 재능을 만들어야 한다. 성공을 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겨놓고 시작한다.
- 팀 페리스 『지금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중에서
[신다가 네게 02]
망설임 속에서 내가 글쓰기를 다시 시도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 얼마 후에 만난 이 문장은 내게 삶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내가 하려 했던 것이 안 되었던 이유는 몰입을 하지 못해서였다는 것. 그 일들은 내가 운이 없거나, 그것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몰입을 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현재의 삶에서 무한정 몰입을 하고 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지금 하는 일에 무한히 집중하고 있으며, 책을 읽는 것과 글쓰는 작업에 엄청나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글을 써나가는 이 순간들이 몹시도 즐겁다.
전에는, 뭔가를 써 나가면, "고통"이라는 것이 있었다. 쓰면서도,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자주 쓰지 못했다. 가끔, 힘이 들지 않을 때만, 글을 썼었다. 그 경험은 나를 글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책으로부터도 멀어지게 했다. 그러나 지금, 글을 쓰는 시간이 조금 수고스러울 뿐, 고통스럽지 않다. 쓰면서 떠올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재미가 나를 즐겁게 하고, 그 즐거움으로 하루를 가볍게 시작하고 가볍게 마무리할 수 있다.
내 삶이 이제 시작이듯이, 문장 하나하나가 주는 힘이 세상 속의 삶으로 퍼져, 모두가 행복해질 날이 되도록이면 빨리 오기를 바란다. 세상엔 위로를 주는 사람보다는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직은 더 많으니, 문장 하나하나가 나를 위로하고, 당신을 위로하고, 많은 사람을 위로하여, 지금보다 더 나아질 미래를 꿈꾼다. 나의 미래 꿈꾸기도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꿈꾸기가 내일의 나를, 내일의 세상을 열어갈 것이라, 새벽이 사라지는 언저리에서 힘차게 믿어본다.
[문장이 내게 03]
당신 곡물 안 먹습니까
『오버 더 초이스』 / 이영도 / 황금가지
"당신 곡물 안 먹습니까? 채소 안 먹습니까? 나무로 만든 집에 살지 않습니까? 혹시 벽돌집입니까? 그 벽돌은 나무 말고 뭐 다른 거로 구웠습니까? 당신 그릇은 뭐로 구웠습니까? 질그릇이나 사기그릇 안 쓰고 금속그릇만 씁니까? 그건 목탄 말고 뭐로 만들었습니까? 가구는 나무 아닙니까? 문짝은 나무 아닙니까? 의자와 탁자와 옷장과 침대는? 요리할 때도 추울 때도 절대로 식물은 안 태웁니까? 당신은 밧줄도 안 쓰고 끈도 안 쓰고 실도 안 씁니까?" 덴워드가 주변을 죽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혹시 여러분 배짱 좋게도 한 명 빠짐없이 식물의 사체를 걸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불온한 모습을 보이는 식물들 앞에서?"
- 이영도, <오버 더 초이스> p.319
[신다가 네게 03]
불온한 모습을 보이는 식물들. 식물들이 보이는 불온한 모습은 뭘까. 그저 사람들의 눈에 그들이 불온해 보인다는 의미일 거다. 그러고 보면, 나는 채소를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 깻잎과 상추, 김치 정도가 많이 먹는 채소라고 할 수 있을까. 고기는 많이 먹는데, 채소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양불균형을 딱히 걱정하지 않는 이유는, 끼니 때마다 김치는 챙겨 먹기 때문이다. 김치에 모든 필요한 영양소는 다 있다고 들은 것 같다.
<오버 더 초이스>에서는 식물과 동물의 대결이 나오는데,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식물이 반항하는 것은 불온한 모습들이다. 식물은 동물에게 먹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런 식물이 살아서 동물들에게 말을 걸고, 동물들을 죽이려 한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동물들이 아니라, 그것이 만약 사람이라면?
언젠가, 물도 좋은 말을 해 줘야 건강에 좋은 물이 되고, 식물도 좋은 말을 해 줘야 잘 자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식물이 비록 살아서 내게 말을 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도 자신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는 얘기일 거다.
사람이 먹더라도, 사랑받고 자란 식물이 더 건강에는 좋지 않을까. 식물도 식물 나름의 자존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들을 볼 때, 조금 더 다정하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로 여겨보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올린다. 오늘도 상추를 먹었다. 김치도 먹었다. 우리 식탁에 맛있음과 건강함을 더해주는 채소. 그 채소에게 오늘 사랑의 마음을 전해 본다. 채소야 채소야 채소야…
[문장이 내게 04]
희생이란 말에 주눅들지 않는 인생
『와신상담 100일만』 / 공공인문학포럼 / 스타북스
인간의 가치를 재는 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중요하다'라는 판단은 있을 수 없다. 우리들은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한 존재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필요로 하고 있는 것도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늘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 <와신상담 100일만> 95일차에서
[신다가 네게 04]
가끔, 어떤 사람은 그런 말을 한다.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나를 위한 게 아니고." 그 말의 이면에는 ‘너를 위해서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을 언뜻 보면, 많은 희생을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란 말 자체가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희생한다면, 나의 마음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 때문에 누군가가 희생하고 있다는 그런 말을 듣는다면 마음속에서는 정말로 많은 부담이 되어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 오히려 거리를 두게 된다.
나를 위한 삶이란, 나 때문에 누군가를 희생하는 삶도 아니지만,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삶도 아니다. 그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다가선다는 것. 그것은 결코 자신을 희생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일 성 싶다.
자식을 위한 희생.
부모를 위한 희생.
친구를 위한 희생.
사실, 따지고 보면 "희생"이란 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내 자신을 다치게 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말자.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 때, 내 주위의 사람도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그 말의 결과는 서로에 대한 원망이다. 희생적 원망을 받은 사람은 고맙다기보다 오히려 부담스럽고 그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지기만 한다. 껄끄러워하는 그 사람을 보면 희생당사자는 분노를 토해낸다. 그렇게 관계는 멀어져간다. 멀어져가는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위한다는 거짓 희생은 하지 말자.
싫은 건 싫은 거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마음이 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이렇게 살기로 했다.
희생 앞에서 부담스러워하고
희생 앞에서 절망하면서
희생을 더 이상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진정 희생적인 마음이라면, 굳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마음을 느낄 날이 오겠지.
하면서.`
[문장이 내게 05]
질투는 나를 명쾌하게 한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뭐라도 되고 있었다』 / 김지희 / 자화상
질투는 나를 명쾌하게 한다. 선택의 순간, 두 가지 기로에서 방황하게 될 때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이룬 사람에게서 더 질투를 느낄 것 같은가?' 질투의 저울이 크게 휘청대는 쪽이, 가장 '나다운 선택'일 것이다.
- 김지희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는데 뭐라도 되고 있었다>
[신다가 네게 05]
질투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나도 그렇고. 이 책을 읽다가 질투에 관한 반가운 문장을 만났다. "나는 무엇을 이룬 사람에게서 더 질투를 느낄 것 같은가?"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이 많으니 질투의 대상도 많다. 가까운 사람에게서부터 먼 사람에게까지. 사실, 이 글을 읽고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관심없는 분야에서 잘 되는 사람을 질투해 본 적은 없다는 걸 발견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잘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분야에서 잘 되는 사람들에게서 질투를 느끼곤 하지.
그러니까 질투란, 그것이 치기어린 이기적인 욕망 같은 것이 되지만 않는다면, 나를 아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건설적이고 현명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나, 질투 많이 한다. 그런데, 그걸 잘 표현하지는 않는다. 표현하지 않아도 질투의 대상이 될 것임을 아시는 분들이라 생각하기에 애써 표현할 이유를 못 느낀다. 뭐, 나도 가끔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니까, 결국은 셈셈인 셈이다.
나의 글도 질투의 감정으로 인해 더욱 더 발전된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웃는다. 더 많은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내 글이 어느 순간에 만족스런 글로 바뀐다. 만족스럽지 않은 글 때문에, 또 다른 글을 쓰게 되고, 만족할 때까지 글을 계속 쓰게 된다. 질투의 힘이다. 질투가 예전엔 나쁜 감정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질투가 나쁜 감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현명한 질투의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그 답이 바로 여기 있었다. 질투의 저울이 크게 휘청대는 쪽에, 내 인생을 걸어 봐도 괜찮을 것 같다.
[문장이 내게 06]
소중한 사람이 특별한 뜻을 담아
자네에게 선물한 책을 어떤 얼간이가 훼손했다고 쳐.
『오버 더 초이스』 / 이영도 / 황금가지
"티르 스트라이크! 못 알아먹겠다면 계속 비유로 말해주지. 소중한 사람이 특별한 뜻을 담아 자네에게 선물한 책을 어떤 얼간이가 훼손했다고 쳐. 그리고 그 바보가 화를 내는 자네에게 똑같은 책 사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 그 책을 받으면 자네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할 건가? 한 자도 다르지 않은, 내용이 똑같은 책을 받았으니까?"
- 이영도 『오버 더 초이스』
[신다가 네게 06]
예전에 비해, 요즈음은 정성이 들어간 선물은 찾기 힘들다. 시대가 바뀌어서, 요새는 정성이 들어간 선물보다는 실용성이 우선이다. 아무리 정성이 들어간 선물이라도 내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그다지 기쁘지 않다. 그래서, 돈을 선물로 받았을 때 제일 좋아한다. 소중한 사람이 특별한 뜻을 담아 선물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큰 감동은 없다.
물론, 선물한 사람이 자기 자식이라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그 외의 관계에서 주고 받는 정성스러운 선물은 그다지 특별해 보이진 않는다. 지금 아무리 소중한 관계라도 해도, 관계는 변하기 마련이어서, 당장 실용적으로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오히려 나에 대한 상대의 마음에 대해 그 진정성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현 세대의 문제점이면서, 동시에 장점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꼭 필요한 것만 사야 하는, 어려운 사람이 많은 시대. 일부 부유에 물든 층을 제외한다면, 웬만해서는 사치를 하지 않는 시대. 사치가 미덕일 수는 없지만, 더 나아가 사치가 악덕이기까지 한 시대. 정성 가득한 선물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 사치에서 멀어져간, 정말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는 현실적인, 그래서 상대를 정말 배려해주는 선물이 아닐까.
“나는 너를 이렇게 좋아해, 그래서 이렇게 정성스럽게 선물을 만들고 있어” 하고 보여주려는 마음보다는, 나 너를 이렇게 아끼고 있어, 하고 배려해주는 마음. 그것이 진정한 선물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의 선물이라면 조금 사치라 생각되더라도, 기꺼이 받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을까. [문장이 내게] 주는 선물. 어떤 얼간이도 선물을 훼손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조금은 여유롭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선물. 그 선물을 갖고 싶은 마음, 그 선물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문장을 전송한다.
[문장이 내게 07]
어차피 우리 삶이 여행이잖아?
『오즈의 의류 수거함』 / 유영민 / 자음과 모음
"뭐, 어차피 우리 삶이 여행이잖아? 그 여행길에서 뭐라도 하나 제대로 건져야 할 텐데 말이야……."
숙자 씨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삶은 여행이라는, 그 익숙하고도 평범한 말이 웬일인지 그 순간 내게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삶은 여행…… 천천히 말을 곱씹던 내 머릿속에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 p.152 (유영민 『오즈의 의류수거함』)
[신다가 네게 07]
삶이란 게 참 그렇다. 어느 순간엔 이게 정말 맞는 건데 확신하다가도 순식간에 확신하던 그 모든 게 바뀌는 순간, 가끔은 그 깨달음이 너무도 서글퍼서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내가 알던 건, 모두 잘못된 것이었다는…… 그건, 후회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진짜로 묘한 감정이다. 마냥 기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슬퍼할 수도 없는, 때로는 내가 몰랐던 삶에 대해 치를 떨며 분노하기도 하는. 그렇다고, 마냥 분노할 수만은 없는. 여행을 하다 보면, 마냥 좋다는 생각만은 할 수 없다.
하루 이틀 쯤이야 하고 우습게 보다간 그 하루 이틀에 발목을 잡히는 경우도 있다. 삶에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있기에, 그래서 재밌기도 하고 그렇기에 두렵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 삶을 즐기든 두려워하든 인생은 여행이란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네 삶은 참 행복해지지 않을까. 묘한 감정을 느낄 때, 또 때로는 분노할 때까지 행복에 젖어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조금은 아파해도 조금은 슬퍼해도 조금은 분노해도 나 자신의 중심을 잊지 않고 여행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삶은 여행이란 말…… 자꾸 곱씹어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말이지만, 다시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 의미를 잘 익혀서 내 머리로 내 마음으로 나의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삶은 여행이지, 삶은 여행이지……
[문장이 내게 08]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나?
『오일러 패러독스』 / 김상미 / 궁리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을 요구하는 대중의 엄격함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중들의 냉소적 이성을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대중의 잣대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잘못이라도 어떤 스타에겐 관대하고 어떤 스타에겐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과거를 철저하게 파헤쳐서 한 치의 윤리적 어긋남이 없는 자인지 판단하는 검증단계를 통과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않나?
그리고 그 검증단계에서 증거라고 떠오르는 과거자료들은 정확한 것인가?
그것도 누군가의 필터를 거쳐 나온 기억들인데남겨진 과거의 기억이 자료로있다는 것만으로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모한 환상이 아닐까?
이 일을 하는 나 역시 대중의 검증에서 자유로운가?
절대 아니다.
대중은커녕 친구 하울의 검증도 통과 못할 테니까.
- 김상미,『오일러 패러독스』pp.190~191
[신다가 네게 08]
그렇다. 나 역시 그 검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거를 돌아보면 치가 떨릴 정도로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이 보건, 적은 사람이 보건, 나의 글을 누군가에게 내보인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글쓰는 행위가 마냥 쉬운 것만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마구 고백할 수가 없다. 그 부끄러운 과거는 아마도 임종 직전에나 "나 그런 적 있었으니, 당신들은 그러지 마시오" 하는 명상집 정도에나 실을 수는 있을 거 같다. 대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연예인뿐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글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글의 의미에 가치 있는 세금이 붙고 그럼으로 인해, 비로소 그 사람의 글은 소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부끄러운 과거, 부끄러운 지금, 부끄러운 미래를 얘기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내공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따라갈 수 없는 고차원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인 듯하다. 그 부끄러움 앞에 고개 숙이고, 부끄러움 앞에 당당해진다면 나는 오늘 오히려 나를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나를 내보일 수 있을 것 같다. 《검증하시오. 나 부끄러운 과거 많소이다. 우리 서로 부끄러움을 나눕시다. 그렇게, 서로가 신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시다. 우리의 부끄러움이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치욕이라 여기고 분노만 하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 잊지 맙시다. 그 부끄러움을 통해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 절치부심. 아름다운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이렇게 당당히 나를 보이고 싶다. 그날이 언제든, 실수는 실수였을 뿐이다. 그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는 또 하나의 글을 남긴다. 다시는 글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함께.
[문장이 내게 09]
그 마음은 점점
『아무것도 안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 김신회 / 놀
처음에는 걱정이 됐다. 그다음은 서운했고, 그 마음은 점점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대체 어떤 오해가 쌓였던 거지? 가끔은 욱한 심정이 올라오기도 했다. 답담하고 속상한 마음에 혼자 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머릿속이 맑아졌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애정을 주고받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내가 거리를 두고 싶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내 절친일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종종 의문이 들었다. 대체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 김신회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신다가 네게 09]
때로는 아주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지만, 의도치 않은 사소한 일 또는 사소한 말때문에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진정성에 대해서 의심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그 관계가 깊지 않아서, 진심으로 대하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너무나 가까워서 더 이상 서로를 배려하지 않다 보면, 사소한 한 마디에 속이 상하게 된다. 가까울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필요한 걸 거다. 누군가를 내 뜻대로 움직이려고 할 때, 나의 조언이 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될 때, 서로간에 균열은 시작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단점은 쉽게 보이게 마련이고, 그 단점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덧 단점을 고치려 든다. 때로는 너무 가깝기에 이런 말은 해도 괜찮을 거야, 하며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 버리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서로간의 앙금은 점차 쌓이게 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어도, 이 사람에게만은 반드시 사랑받아야겠다는 마음이 싹트는 순간, 어쩌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그곳을 건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거리를 둔다는 것은 나를 지키면서 상대를 존중해주는 적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간에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이 있다면, 적당한 거리… 집착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스런 거리. 그 거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통해 나를 지키고 너를 지키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지켜내자.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은 거리. 그래서 무엇이든 한다면 의미가 되고, 사람의 마음이 죄가 되지 않는 거리. 그 거리에서 나도 있을 거다. 이 세상은 아직 살 만한 사랑스런 날이 많을 예정이므로!
[문장이 내게 10]
집필 예정
집필 예정입니다
[신다가 네게 10]
집필 예정입니다.
[마지막 문장이 내게]
자살 없는 세상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 위즈덤하우스
“그러니까 내가 시빌을 죽인 거로군요.” 도리어 그레이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녀의 가녀린 목을 나이프로 베어버린 것과 다를 바 없이 그녀를 살해했다 이거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군요. 새들은 행복한 듯 내 정원에서 지저귀고 있고요. 그리고 오늘 밤 당신과 만찬을 즐긴 다음 오페라극장에 가고, 그러고 나면 어딘가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겠지요. 오, 인생이 정말 놀랍도록 극적이지 않나요! 이런 일들을 책에서 읽었더라면, 해리, 난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을 거예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 일이 실제로, 그것도 바로 내게 일어나고 보니, 어쩐지 눈물을 흘리기에는 굉장히 경이롭게 느껴지는군요. 여기 내 평생 처음으로 열정을 다해 쓴 사랑의 편지가 있어요. 정말 이상하지요. 처음으로 열정을 다해 쓴 연애편지의 수신인이 죽은 아가씨라니. 우리가 망자라고 부르는, 말없이 창백하게 누워 있는 그들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요? 시빌! 그녀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고, 들을 수 있을까요? 오, 해리, 내가 한때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그녀를 사랑했던 날들이 몇 년은 지난 것처럼 아득해요. 그녀는 제게 모든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밤이 오고 말았지요 – 그것이 정녕 어젯밤이었단 말인가요 – 어젯밤 그녀의 연기는 너무 형편없었고, 전 비탄에 잠겨 있다시피 했어요. 그녀는 그렇게 된 모든 이유를 제게 해명했지요. 처절할 정도로 애처롭게요. 하지만 제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저 그녀가 천박하다고만 생각했지요. 그런다가 문득 저를 두렵게 만드는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어떤 일이었는지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그 순간 전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어요. 그래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리라 마음억었어요. 제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그런데 이제 그녀가 죽다니요. 맙소사! 이럴 수는 없어요! 해리,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요? 제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걸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나를 바로잡아줄 게 아무도 없다는 걸 당신은 모를 겁니다. 그녀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됐을 거예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어요. 그건 이기적인 행동이라고요.”
[마지막 신다가 네게]
물론이다. 자살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어떤 경우든, 자살을 해서는 안 된다. 죽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은 많은 순간이 있더라도, 자살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자살하면 조금 편해질 것 같지만, 자살 이후의 삶은 더욱 더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자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삶은 더욱 더 비참해지기도 하니까.
도리언 그레이는 연기가 형편없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고, 그녀는 자살을 선택했다. 도리언 그레이에게 그 사실은 그 무엇보다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사실이 도리언 그레이의 정신을 갉아먹는 사건이 된다. 자살은 사람들의 정신을 그렇게 갉아먹는다.
누군가 나에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물론 당연히 있다고 말할 것이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나만의 방법으로 자살을 하려고 시도는 한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자살시도는 나를 죽음까지 내몰지는 않았다. 자살을 하기 위해 나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은 겪지 않은 것 같다고.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자살을 하고 싶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반드시 자살을 하게 되어 있다면, 세상에 자살을 안 할 사람이 없겠군요! 라고
그렇다. 자살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며, 자살을 하는 것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니다. 세상은 어느 누구에게나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을 준다고 한다.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때로는 주위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청해야 할 때도 있다. 때로는 육체적인 피로를 견뎌야 할 때도 있고, 정신적인 피폐함을 겪을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러한 고통을 견디고 견디고 견뎌낼 때, 비로소 삶은 풍요로워지고, 어느 순간, 그 처절한 고통이 행복의 순간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자살보다 나은 삶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손을 내밀게 되면 온정의 마음은 곳곳에서 손을 내민다. 자살을 시도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조금은 용기를 가지고 도움을 구해보자. 당신이 도움을 청한 손길은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되고, 그렇게 도움을 받은 당신은 또 다른 누군가를 도와주는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자살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자살이 없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이 세상이 그래도 살 만하다고 믿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당신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징검다리-03]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 공지영 / 해냄
그래 그 돈을 버는 동안 너는 보게 될 거야.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돈 앞에 비굴한 자와 당당한 자, 두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 돈 때문에 얼마나 자신의 자존심을 팔아야 하는지, 천박한 인간이 돈을 가졌다고 다른 이들을 얼마나 상처 입히고 있는지, 그리고 이 세상에 사람들이 돈이라는 것을 따라 어떻게 몰려다니고 자신을 잃어가며 전혀 되고 싶어 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인간으로 변해가는지.
[신다의 결심]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먹고 살 방도를 마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위의 걱정은 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나는 걱정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나도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대 때에도 글을 썼다. 그때는 주위의 걱정에 흔들렸다. 나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없을 거라는 부정적인 절망에 일자리를 알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경력도 없고, 그렇다고 국문과를 졸업한 마땅한 기술도 없었던 청년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오랜 방황 끝에, 큰아버지께서 소개해준 기획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일을 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나는 포토샵과 일러스트레트, 그리고 퀵 프로그램을 다루는 맥킨토시를 배울 수 있었다. 그때는 “낙하산”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회사에 다니는 것이 부끄러운 줄 몰랐고, 그래서 내 멋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회사를 1년 넘게 다닌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내 힘으로”라는 말을 외치고 있었다. 내 스스로 노력해서 내 스스로 취직하여 내 스스로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다, 라고 하며 그 회사를 나오고야 말았다. 20대의 짝이 없던 청년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객기였다. 그 회사를 나오고 1년여쯤 지났을 것이다. 카피라이터가 되었고, 한달도 되지 않아 “강제 퇴출”이라는 꼬리표를 또 달아야만 했다. 나는 맥킨토시를 다루던 기획사를 멋대로 뛰쳐나온 것을 그때가 되어서야 후회를 했다. “낙하산”이었어도 계속 붙어 있었다면.
그 후로도 그런 후회는 한참이나 계속되었지만, 지금의 나는 더이상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내 선택이 지금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으며, 내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것을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내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 현실에 안주하면서 글 따위는 쓰지 않을 거라며 편안한 인생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늘따라 새삼, 공지영 작가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말이 내게 아름다운 추억의 한 페이지처럼 다가온다. 분명히, 방황하던 나를 누군가는 응원을 했을 것이고, 나는 지금 이렇게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지금의 나는 작은 밀알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큰 수확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 수확을 위해, 나는 오늘 “글”이라는 농사를 되도록, “처절하게” 그리고 “열심으로” 짓고 있다. 이 열심의 순간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비춰지길, 오늘 간절한 마음으로 또 기도해 본다.
4부
[시를 쓰고서]
소나기처럼
[시작하는, 시를 쓰고서!]
소나기
한낮 땡볕 햇살 내 눈 쑤셨다
어깨 앉은 빗줄기 한 가닥 내 몸 밝혔다
우르릉 쾅 내 삶 무너지는 소리 들렸다
무심코 내려오는 빗줄기 내 사랑 적셨다
다른 끝을 찾는 사람들의 분주(奔走)한 세상
아침에도 저녁에도 내 영혼 비췄다
[혼자서 감상! 시작한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내 영혼을 비추는 건, 자연이다. 햇살이고, 비이고, 구름이고, 파란 하늘이고, 땅이고, 나무이고, 꽃이다. 내 삶을 비추고 있는 자연들이 내게 휴식을 제공한다. 그 휴식 속에서 오늘 하루를 편안히 마감할 수 있다. 어쩌면, 내 삶은 이제부터가 정말 시작일지 모른다. 조금은 늦은 시작, 조금은 늦은 도전. 그러나 바로 지금이, 시작하기에, 도전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삶이 시작되었다. 그 삶이 내게 웃으며 손짓할 때까지, 나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시를 쓰고서! 01]
공중 전화기 앞에 서면
공중전화기 앞
망설이는 사람들
어디에 어디에
전화를 거는 건지
나도 따라
한번쯤 걸어보는 건
그래도 누군가
있을지 모를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연인들
팔짱 끼고 걷는
거리에 서면
하늘이 뿌옇게 흐리다
사람들 줄지어
드디어 차례가 오면
목적없는 전화 긴 시간의 통화
기다림의 시간 아까워
나도 따라
다이얼을 돌린다
공중전화기 앞에 서면
괜시리 망설여지는 건
그래도
누군가 있을지 모를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혼자서 감상! 01]
지금은 공중전화에서 전화 거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전에 비해 공중전화 자체가 줄기도 했고, 공중전화가 가끔 눈에 띄기도 하지만, 핸드폰은 공중전화의 사용을 망설이게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공중전화기 앞에서 줄서서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전화를 하던 시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기쁜 일이었다. 핸드폰,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사람이 많이 그리웠다. 그러나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화를 걸어 대화할 수 있고, 만나자는 약속도 쉽게 할 수가 있다.
통신의 발달로 그리움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시도 더 이상 “그리움"이란 소재로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움"이란 소재로 글을 쓰는 건, 아직도 우리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공간이동"이 불가하며, 살아있는 사람과 죽어있는 사람이 만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끝없는 삶의 주제가 될 것이다.
[시를 쓰고서! 02]
열대어네 집
내가 그들 곁으로 가면
밥 달라고 아우성
손 닿을세라 부리나케 튕기는
치어(稚魚)들의 몸부림,
먹이인지 적인지
내 살 쪼아대는 그네들의 놀이,
엉겁결에 새 살이 돋았다 사라진다.
시간따라 출렁이는 물결의 삶, 삶들.
약한 고기는 죽어서 힘센 이들의 밥이 되고
힘센 이들의 세월은 길기만 하다,
몸부림 사라진 그들의 오만한 몸짓.
그러나 오늘도
내가 그들 곁으로 가면 밥 달라고 아우성
닿을세라 부리나케 튕기는 성어(成魚)들의 안간힘.
[혼자서 감상! 02]
지금은 키우지 않지만, 예전에 열대어를 키우던 적이 있었다. 진짜 열대어였는지 모르지만, 수족관 주인이 열대어라고 하니까 열대어라고 믿고 키웠던 것 같다.
관상용 어항 속에 그들은 유유히 잘도 노닐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가 그들 앞에 가면 그들은 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밥이 오는 줄 알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들은 나를 쳐다보며 평소보다 조금 더 날렵하게 헤엄쳤다. 그리고 먹이가 들어가면 잽싸게 낚아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 중 한마리가 죽었다. 그들은 죽은 이들의 살을 쪼아댔다. 죽은 것을 먹는 것인지, 그냥 쪼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얼른 그 물고기를 꺼냈다.
그 살을 쪼아대던 그 열대어들은 꽤 오랫동안 살아있었다. 조그맣던 그들은 점점 몸뚱이도 커져갔다. 그들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최선도 결국은 그들에게 주는 먹이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씁쓸한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현실을 인식한다면, 그래서 더욱 더 치열하게 고민한다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날부터 치어와 성어들이, 한데 어울려 논다. 그들을 살피는 나의 눈길이 조금은 더 날카로워졌지만, 지금은 내 기억 속에서 잊혀진 열대어들이다.
[시를 쓰고서! 03]
네가 사랑이란 놈이냐?
커피
두스푼에 설탕 두스푼?
진한 커피색
조금은 쓴
맛이 있네
그 속에
나같은 너가
보이고 있네
그런 네가
나를 젓고 있어
찻술로 저으면
너가 그속에 흐물거린다
나를 마시고 있는
네가
사랑이란 놈이냐?
[혼자서 감상! 03]
지금은 마시지 않는 커피, 커피를 마실 때는 커피의 쓴 맛보다는 단 맛에 취해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커피를 끊어야 했던 것일까. 커피와 나와는 왠지 맞지 않아 커피를 끊은 지도 몇 년은 된 것 같다. 지금은 어떤 차를 마시며 사랑이란 걸 느낄 수 있을까. 커피가 주는 느낌이 진정 사랑이었을까, 라는 의문부터 지금 나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까지. 모호한 듯, 모호하지 않은 차의 향기. 그래서 결국은 나는 사랑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을 던졌을 뿐. 어쩌면, 평생에 답을 찾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것 자체로 된 것 아닌가. 질문을 던진 그것만으로 답을 찾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시를 쓰고서! 04]
산 바라기
잘 있거라, 산천초목 풍경들아
멀리 보이는
다른 산만 자꾸 바라보는 당신을
난 감당할 수 없어,
잘 자거라 나무들아
산천초목 어우러져 흥겨운
회식(會食)마저 비참하여,
당신은
저 산에 가려니 설렌다, 설레인다
자꾸만 말하지, 나는 당신이
저 산에 반해 버릴까, 다시는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당신을 보내네.
기다릴 수 없어 여길 떠나려니
혹시나 당신 저 산이 아니었나
실망하고 다시 돌아올까 염려되어
여길 뜨지 못하고 당신 뒷모습 망연자실(茫然自失)
바라보고만, 바라보기만.
[혼자서 감상! 04]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추억 속에 있는지, 지금 현재 있는지, 미래에 있을지 모를. 그런 세상도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세상. 여유 있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려 노력하여도 전전긍긍하는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하루, 나는 행복하였는가. 행복의 깊이와 넓이가 나의 삶을 결정해주지 않듯, 나의 삶이 나를 놀라게 할 재주는 없나 봅니다.
전전긍긍하며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하고 또, 내가 선택도 하기 전에 누군가에 의해 선택된 삶. 그런 삶들을 “바라보고만, 바라보기만.” 하는 나의 마지막 어느 날에 나의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어 뛰어든 삶. 그 과정에 좌절도 절망도 하겠지요.
그 좌절과 절망이 실망으로 바뀌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오늘도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내가 있습니다.
[시를 쓰고서! 05]
코딱지를 후비며
나에게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나는 자주 코딱지를 후빈다 나에 대한 고백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움이 부끄럽지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일상이 그렇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가 코 속을 스며드는 바람에 콧물이 흘러내릴 때 콧물은 가끔 공중도덕을 무시하며 길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러나 미끄러지지도 않는 일상에 침을 뱉든 콧물을 내려앉히든 도덕은 도덕이고 길은 길이다
코딱지만한 한국에서 코딱지를 후비는 일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끔, 아주 가끔, 사람들은 이상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버릇은 어쩔 수가 없어서 나는 그것을 이해 못하기는 하지만 내가 하는 행위는 시원하기만 하다 코가 뚫렸기 때문이 아니라 코딱지가 없어서 시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상한 것은 우선은 파내고 볼 일이다 우선은 없애고 볼 일이다 코딱지를 후빈다는 더러운 행위는 코딱지를 씻겨낸다라는 깨끗한 행위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구호시위를 걸어놓고 무정부주의 연합을 결성이라도 해보겠다는 의지도 비추어 본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코딱지를 후비는 행위는 나에게는 아주 좋은 버릇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주 멋진 놈이고, 멋진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콧물이 흘러내려 입 안에 착 달라붙는 달착지근한, 엿 같은.
[혼자서 감상! 05]
시는 시일 뿐이라고 하면, 아마도 저놈의 괴리감에 몸서리를 칠 거다. 시가 나의 일상을 소재로 할 때도 있지만, 누군가의 일상이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은 살 만한 것일까, 엿 같은 것일까. 사실, 엿은 맛있지 않나? 하지만, 엿이 엿 같은 이유는…… 그것을 씹으면, 이빨에 착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맛은 있지만, 이런 종류의 씹기는 힘들다. 그러므로 엿은 씹으면 안 된다. 그저, 쪽쪽 빨아먹어야만 그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데, 성미 급한 누군가 (나라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에게는 그것 또한 고역이다. 언제 다 빨아먹나.
어찌되었든, 먹고 또 먹으면, 못 먹을 리 없건마는, 엿은 그 양면성 때문에 영웅이 되기도 하고 나쁜 녀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코딱지를 후비는 행위에 영웅성을 부여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하면, 도저히 이해 못할 영웅성. 가끔, 그런 현실도 세상에 존재하길 바라면서.
[시를 쓰고서! 06]
도둑 한 마리 세상에 나가려고 하신다
도둑 한 마리가
집에 드나들었다 검정
면사포를 쓰고
은빛 나는 식칼 한 자루
손에 들고
매일 그녀 집에
드나들었다 공포로 일그러진
공포로 이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슬프다, 과연
슬플까?
그녀의 집엔
없는 게 없다 밥도 있고
집도 있고 사람도 있다 도둑 한 마리
밤이 되면 그녀의 집에
몰래 들어가
아침이 되어서야 집을 나온다
무엇을 하는지
시멘트를 뒹굴며 슛-
점프, 나이스! 쇼를 하면서
슬픈 그녀 집에 드나들었다
공포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공포로 이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보인다 도둑이 쓰고 가는
검정 면사포같은
그늘, 공포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공포로 이그러진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그녀는 과연
슬플까?
도둑이 매일 긴장하듯 그녀도
매일 슬프기만 하다
[혼자서 감상! 06]
매일 긴장해야만 하는 삶은 슬픈 것일까. 이 도둑은 뭐하는 놈일까. 그녀는 이 도둑을 왜 거절 못할까.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다. 이 도둑을 거절하는 순간, 그로 인한 식칼의 분노가 그녀를 압박할 것이기 때문에.
협박에, 위협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은 슬프기만 하다. 그리고 그 슬픔은 이 남자도둑이 아니라 우리 보통사람들인, 연약한 남자든, 또 건장한 여자든 마찬가지일 거다.
아는 게 없는 무지한 사람은 세상의 무엇으로부터 피해를 당하기가 쉬워서, 그래서 배워야 한다는 서글픈 현실. 그녀는 어쩌면, 그 서글픔을 도둑에게 가르치려 하지는 않았을까.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려면 많은 이들의 남모르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이 서글픈 현실. 직접적인 충고는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는 진리같지 않은 진리.
그래서 그녀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도둑을 받아들여야만 했을 거다. 식칼의 분노, 감정의 분노가 그녀에게 향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이렇게 시작된다. 약자는 계속해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현실. 약자가 더 이상 약자에만 머무르지 않는 현실이 어서 빨리 오기를 바라고 희망해 본다.
[시를 쓰고서! 07]
수증기 사랑찌개
1.
증오가 불꽃 튀며 세상을 향해 폭발했다 내려앉은
산 강 육지 바다 저마다 제 길을 갔다 아무도 뒤
돌아보지 않았다 떼 지어 날아간 까치 한 마리
푸·드·득·
날개짓하며 열정의 시간 속으로 날아올랐다 그때.
내게 폭발한 화산(火山)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요리사는
감정이란 양념들 꽉 찬 냉장고 문을 연다
끼이익 어둠에 갇힌 훈훈한 소리들
살고 싶어 발버둥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요리사, 시간이란 비장의 요리로 곧 죽을 목숨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들에 의한
마지막 요리를 해 낸다
2.
증오의 기포 투명한 사랑 속으로 흡수된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가슴의 열 서서히 내려앉는다
시끌벅적한 양념 가득 훈훈한 정 넘쳐흐른다
투명한 사랑 요리사
하늘 땅 불 물로 범벅된 옷 입고
거리 가득 열정이란 요리로 사람들 데운다
이미 흡수된 증오의 기포, 하늘 멀리 증발한다
기억의 어두운 창고로 날아간 까치 한 마리
살가운 빛놀이를 한다, 그때
내게 다가온 사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리사는
감정이란 주검으로 꽉찬 냉장고 문을 연다
발버둥치던 떼들의 놀란 마음
시간의 바장함으로 완성된 처음
수증기 사랑찌개 익어가는 노을
속(續)에서 끓어오르던 증오의 열 가라앉힌다
[혼자서 감상! 07]
끊임없이 도전하지만, 쉽게 내 마음처럼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슬픔에 앞서 증오의 감정이 먼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사실은, 내 실력이 부족한 걸, 내가 약간 부족했을 뿐인 건데, 오히려 아무런 죄도 없는 상대에게 증오의 감정을 내비치게 된다. 그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해서도 글쓰기는 필요한 듯하다. 그 순간의 감정에 나를 내맡기기보다는 글쓰기를 통해서 나를 정화해가는 과정, 그 과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거친 다음에 글쓰기는 더욱 더 완벽해지기 시작할 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리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아름다운 요리사는 자신이 하는 요리에 맛뿐 아니라, 감정까지 담을 것이다. 그 감정을 잘 버무려서 정말로 누구나 감탄할 최상의 맛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엔 무엇보다 사랑이란 최고의 양념이 반드시 있겠지. 끊임없이 도전하고, 끊임없이 좌절하지만, 나는 도전이란 것을 멈추지 않는다. 언젠가, 감정으로 꽉 찬 냉장고 문을 열어 사랑으로 꽉 찬 요리를 할 수 있는 그런 요리사가 내가 되기를 바라본다.
아름다운 하늘,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시간, 아름다운 사람이, 그 울타리에 많이 모여들 수 있기를,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즐길 수 있는 울타리가 만들어지기를.
[시를 쓰고서! 08]
금빛토론
- 사람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나무 같은 냉정함
어떠한 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갈대와 같은 침착함
[혼자서 감상! 08]
아주 오래 전에는 토론을 많이 한 적이 있었다. 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고, 소설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아카데미에 들어가 토론에 대해서 배운 적도 있다. 토론에서 중요한 것은 침착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떤 경우에도 상대에 대한 비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비난을 하는 순간, 이미 그 토론에서 비난한 사람은 그 토론에서 진 것이다. 이기려고만 애를 썼기 때문이다.
토론의 목적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을 반영함으로서 보다 더 나은 방향을 찾아보자는 데에 있다. 국회의원들이 하는 토론은 토론이라기보다는 그냥 이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 이상 토론이 아니다. 더 나은 방향, 더 나은 삶, 더 나은 정책방향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의견들을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러다가 더 좋은 의견이 생각나면 그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토론이다.
기존에 자신이 생각해 왔던 그대로를 상대에게 관철시키려는 태도, 그 상태로는 결코 올바른 토론이 될 수 없다. 더 좋은 방향을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는데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 역시 직무유기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함. 그 침착함에 유연성을 더한다면, 토론의 효과는 정말 무한대로 발전할 것이다.
[시를 쓰고서! 09]
집필예정
집필예정입니다!
[혼자서 감상 09]
집필예정입니다!
[시를 쓰고서! 10]
집필예정
집필예정입니다!
[혼자서 감상 10]
집필예정입니다!
[마지막, 시를 쓰고서!]
소나기, 그 후
1. 콘크리트
사라지듯 툭 튀어오른 방울 같은 날들
너무 오랫동안 단단하여 쉽게 바꾸지 못하는 생(生)
그런 날이 지고 있다
2. 진흙더미
저 세상 끝 떨어진 칼날 같은 방울
갑자기 들이닥친 변화에 유유히 스며드는 삶
실패한 첫, 사랑처럼 파인다
3. 무지개
서로 다른 인생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엇갈린 7가지의 목소리, 오늘도 아름다운 불협화음
[마지막, 혼자서 감상!]
소나기가 내린 뒤의 햇볕이 내리쬔 마른 땅은 전보다 더 단단하게 굳는다. 그렇게 굳어버린 삶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비가 다시 내리면, 굳었던 땅은 다시 또 질퍽거리기 시작한다. 인생은 한가지로 굳어지지 않는다. 변화가 찾아오면, 쉽게 흔들리곤 하지만, 곧 땅이 굳듯이 그 변화는 유유하게 스며들어, 나를 만족시키거나 또는 실망시켜 굳은 결심을 갖게 한다.
나의 삶은 지금부터다, 라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보다는 “오늘과 내일을 즐겁게 살아보자, 하루를 재밌게 살아보자” 이런 다짐으로 시간을 보낸다. 우리의 다름이, 우리의 불협화음이, 보다 아름답기를, 바라고 바라고 또 바란다.
[에필로그-생각이 내게]
여백의 아름다움
세상을 오로지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생각하려는 사람들의 단점은 여백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 한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글의 행과 행 사이에는 드러난 사실보다 드러나지 않은 진실이 더 많다는 걸 잘 모른다. 그 여백을 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진심은 보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이성에 의지해서만 물건을 파는 시대는 지났다. 반드시, 감성에 호소해야만 물건도 팔리는 시대다. 전근대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데에 두려움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기자신을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평가하게 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은 아닐까. 얼굴과 표정이 모두 똑같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두려움을 반영한 그림이기 때문이 아닐까. 감성이 없는 얼굴. 왕을 위해 어처구니없는 희샘만을 강요받았던 시절. 이성적인 판단이 냉정하게 요구받던 시절. 그 시대에 감성은 결코 오늘날처럼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어떤 경우에는 마치 "왕"을 연호하듯 맹렬한 충성을 바치는 비합리적인 이성을 강력하게 내세우는 단체도 있지만, 더이상 그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오늘날은 합리적인 감성시대이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5천원, 6천원 무제한 반찬과 밥을 제공해주는 식당들이 오늘날은 즐비하다. 그리고 거기서 밥을 먹을 때는 누구는 많이 먹고, 누구는 적게 먹는다고 투덜대지 않는다. 내가 적게 먹어서 손해 볼 것 같다고 생각되면, 다른 식당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너무 많이 먹는다고 자신이 먹을 밥과 비교하지 않는다. 5천원, 6천원을 주고 이만큼 먹으면 되었다고 나만 배부르면 된다고, 그렇게 심리적으로 평준화된 사회가 무제한 식당이다. 이성적인 사고라면 이것처럼 불합리한 시스템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많게 먹든 적게 먹든, 똑같은 돈을 내고 먹으니 말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감성이 등장한다. 이성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을 법한 밥이, 합리적인 감성에 의해 이 5천원, 6천원짜리 밥은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게 되며, 내가 먹는 것에 충분한 만족을 준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무제한 밥상이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왕을 연호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막 당선되면, 당장 눈에는 환호하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저마다의 셈법은 따로 있다. 왕이 왕의 위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반역의 씨를 키우게 되듯이, 대통령도 대통령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탄핵의 씨를 뿌리게 된다. 그리고 이 탄핵의 씨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어느 단체, 어느 기관, 어느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합리적인 감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리더는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다.
여백의 아름다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너무 빡빡하게, 조금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오로지 "이성적 사고"에 의해서만 상대를 움직이려 한다면, 이미 여백의 아름다움을 잃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계, 생각만 해도 너무 갑갑하지 않은가.
가을이 가고 있는 길목, 조금은 여백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다. 사람과 사람 사이, 글과 글 사이, 시간과 시간 사이에 있는 여백을 마음껏 누리는 내가 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조금 여유로운 나로 돌아간다. 그때는 심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별것 아닌 것들이 많다. 합리적인 감성의 힘이다. 여백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나를 기쁘게 한다.
[신다도 쓴다 – 작가의 말]
절정 충만한 하신다의 글들을 접하고 나니
당신의 절정 충만한 욕지거리, 환영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받은 절정 충만한 감동만은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당신의 절정충만한 하신다 삼행시 퍼레이드, 적극 추천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받은 절정 충만한 감동을 마음껏 펼치옵소서!
제게 이 글을 쓰게 허락하신 세상의 모든 남녀노소 여러분!
절정 충만한 기쁨의 삶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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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글을 보는
아주 잠깐 동안만큼이라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하신다 드림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