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증군미 걸작정죽재급파초(贈君美 乞作亭竹材及芭蕉)」>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제목 「증군미 걸작정죽재급파초(贈君美 乞作亭竹材及芭蕉)」라는 칠언절구 2수(二首)는 1506년 초여름, 거제도 상문동 유배인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쓴 한시(漢詩)이다. ‘군미가 정자를 지을 대나무와 파초를 보낸 데 사례로 지어 주다’는 뜻이다. 거제시 상문동 유배객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이 집 곁의 시냇가(고현천)에 정자를 짓고자 하니 장평동 유배객 군미(君美) 홍언방(洪彦邦 1470~1526)이 대나무와 파초를 보낸 데 사례로 지은 글이다.
또한 이행(李荇)은 이 글 외에도 「파초를 심으며(種芭蕉)」와 「정군미 재걸파초재(呈君美 再乞芭蕉栽)」에서 말하길, 파초를 올(1506) 봄부터 장평(진들)의 군미에게 파초 포기를 좀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다. 마침내 파초를 얻어 집 가까운 시냇가(고현천) 땅에 심었다. 샘물을 길어다 물을 붓고 거적자리 걸어 비낀 햇살 막아 애지중지 가꾸니 한 떨기 푸른 잎이 구척 높이로 솟아올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군미(君美)는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셋째 아들 홍언방(洪彦邦 1470~1526)의 자(字)이다. 그는 홍언필(洪彦弼), 홍언승(洪彦昇), 홍언충(洪彦忠), 홍언국(洪彦國) 형제들과 장평동에서 함께 귀양살이를 했다. 특히 동생 우암(寓菴)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은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아버지 홍귀달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다시 해도(海島)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났다. 또한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이택지(李擇之)·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다.
1504년 갑자사화로 인해 26명 정도의 많은 정치인과 학자가 거제도로 유배 왔다. 당시에는 거제 치소가 고현성에 있어, 대부분이 구(舊)신현읍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이행(李荇)은 상문동, 김세필은 수월리, 홍언충(洪彦忠) 형제는 장평동 바닷가(삼성호텔)에 배소가 있었다. 1506년 당시, 거제도는 암울한 조선 사회에서 최고의 문학 공간을 창출해 내었다. 거제도에서 귀양살이 했던 이 글의 저자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 선생은 앞서 「소요동기(逍遙洞記)」편에서 충분히 소개한 바가 있어 생략한다. 이행(李荇)은 관노(官奴)의 신분에서 우∙좌의정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 한편 저자 이행(李荇)은 1506년 거제도 여름 동안, 태풍 속에 찢겨지는 파초의 이파리 소리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유배의 아픔을 느끼고 고독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일본의 중세 시인 바쇼는 '태풍 속 비바람에 쉬이 찢기는 연약함’ 때문에 파초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파초는 청아하고 한가한 시인에게 최고의 시재(詩材)꺼리 였다. 그리고 장평동 군미(君美) 홍언방(洪彦邦 1470~1526)이 봄부터 장평(진들)에서 키우던 파초를, 이행(李荇)이 와서 보니 큰 잎이 지붕 위로 높이 솟아 9척이나 되었다. 파초 포기를 얻어 온 이행은 시냇가에다 파초를 심어 놓고는, 한여름 파초 그늘 아래에서 파초 잎에다 시를 쓰기를 기대하며 시구(詩句)를 늘어놓는다. 예로부터 파초(芭蕉) 줄기는 계속 잘라도 속이 없는 가짜 줄기여서 불교에서는 사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空)에 비유하기도 한다.
● 다음 칠언절구 「증군미 걸작정죽재급파초(贈君美 乞作亭竹材及芭蕉)」 2수(二首)는 거제도 유배인 조선전기 문신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의 유배작품이다. 저자의 문집 『용재집(容齋集) 권6(卷之六)』 「해도록(海島錄)」에 실려 있는 한시로 첫 수(首)는 ‘先’ 운목(韻目)의 측기식이고 둘째 수(首)는 ‘魚’ 운목(韻目)의 측기식이다. 첫 수(首)에선, 유자도 대숲에 사는 군미(君美)가 정자를 지을 대나무를 배 한 척 가득 실어 보내 주어, 맑은 시내 굽어보는 띳집을 지었다. 둘째 수(首)에선, 군미가 보내준 파초를 시냇가에 심었다. 어젯밤 가랑비 내려 한 떨기 파초 잎이 무성히 피어나, 산중의 흥을 돋운다. 잎새 위에 칠언시(七言詩)나 적어볼까 한다.
*「증군미 걸작정죽재급파초(贈君美 乞作亭竹材及芭蕉) 2수(二首)」* 군미가 정자를 지을 대나무와 파초를 보낸 데 사례로 지어서 주다. / 이행(李荇 1478~1534)
君居柚島竹林邊 그대가 유자도의 대숲 가에 살면서
斫得琅玕滿一船 대를 베어 배 한 척에 가득 실어서
遣乞故人能不惜 조금도 아낌없이 벗에게 보내 주니
結茅還擬俯淸泉 띳집을 지어 맑은 시내를 굽어볼거나
又
昨夜溪村小雨餘 어젯밤 가랑비 내린 시냇가 마을에
芭蕉消息定何如 파초의 소식은 어떠한지 궁금하구려
一叢儻助山中興 한 떨기가 혹여 산중의 흥을 돋우고
七字猶堪葉上書 칠언시를 잎새 위에 적을 수도 있으리.
[주1] 군미(君美) : 홍언방(洪彦邦 1470~1526)의 자(字). 아버지는 이조판서 홍귀달(洪貴達)이고 형제는 홍언필(洪彦弼), 홍언승(洪彦昇), 홍언충(洪彦忠), 홍언국(洪彦國)이다.
[주2] 유자도(柚島島) : 거제시 고현만 장평 앞바다에 있던 섬. 조선후기부터는 죽도(竹島)로 불림. 지금은 삼성조선소 건설로 사라짐.
◉ [파초(芭蕉) 개요] 옛 시인들의 시(詩) 주제였던 남국의 식물, 파초(芭蕉)는 다년생 식물로 잎이 넓고 선인의 풍취가 있어 도교의 팔선(八仙)이 지니고 다녔다는 8가지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주로 남부 해안지방에서 자라며, ‘감초(甘草)’라고도 한다. 옛 사람들은 파초의 잎 모양으로 만든 파초선(芭蕉扇)이라는 부채를 즐겨 사용하였고 조정의 삼정승이 출행할 때 머리 위를 가렸던 식물로도 유명하다. 파초는 겨울에 죽은 것 같다가도 이듬해 봄이 되면 새순이 나오고 불에 타고도 다시 살아 나온다하여 장구(長久)와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상징으로 여겼다.
폭염 아래 파초는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로 초록 하늘을 만들어 눈을 씻어준다. 그래서 파초의 별명이 녹천(綠天)이다. 송나라 학자 장재(張載)는 파초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파초의 심이 다하여 새 가지를 펼치거든, 새로 말린 새 심이 은연중 뒤를 따르나니, 원컨대 새 심으로 새 덕 기르는 걸 배우고, 이내 새 잎으로 새 지식 넓힘을 따르련다.[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그리고 끊임없이 새잎을 밀고 올라오는 파초의 자강불식(自彊不息)은 거제도의 정신이기도 하다. 중국이 원산지인 파초는 고려시대에 씌어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파초를 뜻하는 초(蕉)가 실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1200년경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 덧붙여 《강경순 양초부략》에 의하면, 파초는 식물 중에 가장 연약하다. 너무 건조하면 마르고 너무 음습하면 썩는다. 4월이 오고 훈훈한 남풍이 불어오면 묵은 줄기[宿莖]에서 새잎이 나오면서 묵은 줄기는 꺼멓게 떠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못 신게 된 짚신을 말오줌에 담가 놓았다가 뿌리 근처의 땅을 깊이 파고 빙 둘러 묻어 주면 싹이 윤기를 띠며 빨리 크고 기운차고 왕성해진다. 된서리가 오고 나뭇잎이 떨어지려 할 때가 되면 힘센 종[健僕]에게 줄기를 한 자쯤 남겨 두고 베어 버린 후 뿌리를 캐어 움[土宇] 속에 갈무리하도록 한다. 움 속에 갈무리할 때는 복판으로 몰지 말고 가장자리로 줄지어 심은 다음 등겨[糠]로 덮어 준다. 사람의 훈기도 싫어하지 않으며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싫어하는 것은 차가운 습기로, 이를 쐬면 손상되기 일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