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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금강경강좌제24강 제32분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24강 응화비진분 제32
應化非眞分 第三十二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하고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가
수보리야 약유인이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로 지용보시하고 약유선남자선녀인이 발보리심자가
持於此經하야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지어차경하야 내지사구게등을 수지독송하야 위인연설하면 기복이 승피하리니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라
운하위인연설고 불취어상하야 여여부동이니라
何以故오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
하이고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하며 여로역여전하니 응작여시관이니라
佛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니라
불설시경이 하시니 장로수보리와 급제비구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문불소설하고 개대환희하야 신수봉행하니라
金剛般若波羅蜜經 下 終
제32, 응화신은 진실이 아니다[應化非眞分,응화비진분]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금 은 보화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 이가 있고, 만약에 또 다른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서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경전을 가지고 네 글귀만이라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서 설명하여 준다면, 그 복이 앞의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하여 설명하여 주는 것’인가?
상(相)에 끌려 다니지 않고 여여(如如)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이니라.[不取於相 如如不動,불취어상 여여부동]]
왜냐하면, 모든 작위(作爲)가 있는 것은 마치 꿈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반드시 이와 같이 관찰하도록 하라.[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말씀하여 마치시니 덕이 높으신 수보리 존자와 여러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천신들과 아수라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모두 다 크게 기뻐하여 믿고 받아들이며 받들어 수행하게 되었습니다.(끝)
관념을 떠난 교화
응화비진이라고 하는 말은 ‘응화신은 진짜가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이런 뜻입니다.
응화는 응화신(應化身)이지요. 몸 신(身)자를 씁니다. 응신이나 화신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뜻으로 봅니다.
세 가지 시각으로 부처님을 볼 때 부처님은 법신, 보신, 화신 세 가지 몸이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이 하필 세 가지 몸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여래십호하면 열 가지 이름으로써 부처님을 보는 입장이니까요.
응화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을 한다면 응(應)은 맞춰준다는 뜻입니다. 응대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예를 들어서 누가 부르면 대답해준다, 응해준다고 할 때의 응입니다. 누가 질문을 해오든 어떤 일을 하자고 하든 내가 응해준다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 중생들에게 맞춰주는 것이 응입니다.
화(化)는 교화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응화란 ‘응해서 교화한다’라는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그러한 부처님의 입장을 소위 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보지요.역사적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흔히 응신, 화신 이렇게 표현합니다. 응화신 부처님을 비유하여 ‘천강유수 천강월’ 이라고 합니다. ‘일천 강에 물이 있으면 일천 강에 달이 있다’는 뜻이지요. 이때 하늘에 떠있는 단 하나의 달은 법신을 상징합니다.
지금 전세계에 불교도가 대단히 많습니다. 불교도가 많기 때문에 수행처나 설법처도 그렇게 많습니다. 사찰이나, 법당, 수행처에는 다 부처님이 계시지요. 또 불상도 있습니다.
불상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이런 정신까지도 모두 합해서 응화신((應化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강유수 천강월이지요. 천강에 물이 있으니까 천강에 달이 비치듯이 부처님이 곳곳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달은 하나지만, 달빛은 초생달이냐 보름달이냐에 따라서 그 달빛의 강도가 다릅니다. 이렇게 달라지는 달빛은 보신(報身)입니다. 공덕의 몸이지요.
우리는 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처님처럼 저렇게 환하게 밝은 달빛은 아니지요.
부처님의 위덕을 표현할 때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과 같다[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는 표현을 합니다. 부처님의 영향력, 공덕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영향력은 마치 천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과 같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공헌한다든지 인류에게 뭔가를 남기려면 그 정도 위력을 한 번 발휘하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만 그런 것이 공덕의 몸이고 보신이지요.
우리는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행이 부족하고 덕이 부족한 까닭에 그 공덕이 부처님과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과 부처님은 본질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차원은 같지만 나타나는 현상은 차이가 있지요. 그야말로 그믐달이 되어 버리면 캄캄해서 신발도 못찾습니다. 그런데 초 오일 육일 칠 일쯤 되면 달빛은 아주 희끄무리하게 밝지요. 어지간한 길도 찾아갈 수 있는 정도가 됩니다. 이제 보름달이 되면 산중에서도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옛날 목판본 활자는 아주 크기 때문에 저는 달빛에 글을 많이 읽었습니다.
지금은 야경하는 사람이 따로 있습니다만,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도 있고 해서 학인들이 매시간 바꿔서 순번제로 야경을 했지요.
그런데 저는 공부하는 학인으로서 휘영청 밝은 달빛이 아까운 거예요. 그래서 도량을 돌면서 목판으로 된 큰 활자로 된 경전을 책을 읽었지요. 보름달 달빛이라면 충분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밝은 달빛이 있지요.
석가모니 같은 분은 천 개의 태양이 마치 뜬 것과 그런 밝음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천강유수천강월은 응화신이라고 했습니다만 진짜 달이 숨는다든지 부처님이 교화를 거둔다든지 하면 그 응화신은 사라지고 맙니다. 달이 사라지면 물에는 달이 없지요.
그래서 응화신은 ‘진짜가 아니다’ 하는 말을 하는 거예요.
須菩提야 若有人이 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로 持用布施하고 若有善男子善女人이 發菩薩心者가 持於此經하야 乃至四句偈等을 受持讀誦하야 爲人演說하면 其福이 勝彼하리니
수보리야 약유인이 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로 지용보시하고 약유선남자선녀인이 발보리심자가 지어차경하야 내지사구게등을 수지독송하야 위인연설하면 기복이 승피하리니
만약에 어떤 사람이 무량아승지 세계와 같은 칠보로써 보시에 사용한다면 만약에 또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 이 경전을 가지고 경전체이거나 내지 사구게등 만을 수지독송 하야 남을 위해서 연설할 것 같으면 그 복은 저 복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저 복은 무량아승지세계칠보로 지용보시한 사람의 복이지요. ‘그 사람이 얻는 복이 얼마나 되겠느냐’‘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하는 말들은 앞에서 여러 번 있었으니까 이쯤 되면 이해할 만하니 여기서는 생략이 되었습니다.
보살심을 발한 사람으로서 그 보살정신으로 금강경 또는 금강경 사구게만이라도 잘 간직하고 외우고 쓰고 남을 위해서 이야기해 주고 금강경 한구절로도 남의 아픔을 달래기도 하고, 자기자신이나 남을 위로하는 정도만이라도 할 것 같으면 그 복이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무량아승지세계의 칠보로써 보시하고 얻은 그 복보다도 훨씬 뛰어나다고 했지요.
이런 이야기가 금강경에 자주 나왔습니다. 앞에서는 삼천대천세계칠보로 보시하는 사람과 비교를 하였는데 이제는 무량아승지세계칠보를 보시한 사람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보살심
저의 개인입장입니다만 금강경이 소의경전으로서 모든 경전의 대표로서 부족하다고 하는 말을 공석상에서 여러 번 하였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금강경에는 보살사상 내지는 보살심 보살행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은 우리들의 상병을 고치는 데는 아주 뛰어난 처방전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특징은 보살행에 있습니다.
부처님도 평생 보살행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재산을 가지고 대시주자가 되어서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다 나눠드리는 보살행으로 일관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근본취지는 보살행에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에는 그런 것이 좀 부족해요.
그런데 여기서 ‘보살심을 발한 사람’ 이라고 해서 모처럼 보살심이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실 우리가 보살심을 발해야 됩니다. 아무리 지혜가 높고 깨달음이 출중하다 한들 보살심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다른 사람을 안타까와하거나 다른 사람을 깨우쳐 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것을 독각이라고 하고 소승이라고 하지요. 또 자리행, 자기만 이롭게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것을 사정없이 매도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볼 때 금강경은 좀 부족한 면이 있지요.
불교 전반에서 봤을 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점도 금강경을 공부하는 분으로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云何爲人演說고 不取於相하야 如如不動이니라
운하위인연설고 불취어상하야 여여부동이니라
위인연설 위인연설 설법 설법 자꾸 이야기를 하는데 뭐가 도대체 위인연설이냐. 뭐가 남을 위해서 연설하는 것이냐, 비수와 같은 질문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하지 않았지요. 위인연설은 다양한 포교활동이나 법회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저처럼 이렇게 법문하는 것이라든지 누군가를 법회하는 장소에 인도하는 것이 위인연설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그런데 이제 여기서 하나의 눈을 또 새롭게 떠야 할 것이 바로 ‘무엇이 위인연설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질문만으로도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설법, 포교, 연설 이런 것을 다 깨뜨려버리고 싹 쓸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시시한 연설 같은 것을 여기서는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답은 ‘불취어상 여여부동’입니다.
상을 내지 않고 여여부동한 그 모습의 삶,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설법하는 사람이다, 설법의 실체다, 설법의 진면목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여부동한 삶은 상내지 않는 삶이고 생색내지 않는 삶이지요. 어떤 일을 하고도 거기에 대해서 이미 시침 딱 떼고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정 시침을 떼고 싶어서 떼도 좋아요. 그런데 자연스럽게 시침을 떼면 그건 더 좋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어떤 좋은 일을 하고도 그것이 아주 작은 흔적으로도 머리에 남아있지 않지요. 하나의 예화가 될지 몰라도 어느 사찰에 많은 시주를 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 절에서 제일 공로자’‘제일 시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주지스님이 버선발로 뛰어내려가서 영접해드리고 절에 오면 대중방이 아닌 주지실로 모시고 상도 따로 차려다가 대접 할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저 늘 후원에 가서 대중과 같이 일하고 같이 함께 섞여서 식사하고 같이 법문 듣고 같이 봉사하고 그래서 그 사람이 큰 시주자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어떻습니까. 겉으로라도 그 사람은 최소한 불취어상여여부동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혹 한 두 사람이 그 사람이 그러한 사람인 줄 알게된다면 그 사람을 얼마나 존경하겠어요. 주지스님도 크게 눈여겨보지 않고, 그렇게 대접받으려 하지도 않고, 여여하게 신도들 올 때 오고, 갈 때 가고 신도들 앉는 자리에 같이 앉고 서는 자리에 같이 서고 흔적없이 아무런 자취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상당히 존경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써 이미 큰 설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말로 설법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두고두고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인연설입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100퍼센트 이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늘 이 대목에 그렇게 이해하고 또 저 혼자 그렇게 감동을 합니다.
아무리 말로 청산유수처럼 잘 한들 무슨 큰 효과가 있겠습니까.
물론 불교의 역사에는 어떤 사람이 자기 혼자서 금강경을 읽는데 나무 팔러 갔던 일자무식꾼 총각이 문밖으로 지나가면서 듣고서 큰 깨달음을 얻고 나중에 그 이름도 유명한 육조혜능 대사가 되었습니다. 육조혜능스님은 나무 한 짐 팔러 갔다가 다이아몬드 한 짐을 짊어지고 온 것이지요. 금강경을 지고 왔으니까요. 그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읽은 것은 진정 위인연설이지요. ‘누구에게 들려주겠다’ 하는 마음도 없이 자기 혼자 묵묵히 읽고 있었는데 들은 사람은 그렇게 온 천지를 진동하게 하는 듯한 큰 충격과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좀 가깝게 이끌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오히려 앞서 말한 신도의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금강경의 가치
육조혜능 스님이라고 하는 위대한 성인을 탄생시킨 경전이 바로 금강경입니다.
육조혜능 대사가 나무 한 짐 팔러 간 지게에다 다이아몬드를 한 짐 지고 오게 되었지요.
우리가 금강경을 제대로만 공부하면 나무 한 짐 같은 우리의 무가치한 인생을 다이아몬드 한 짐과 같은 빛나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금강경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린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그런 사례가 분명히 있으니까요. 그래서 공부하는 우리들은 그 점을 참으로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얼마만치 가슴에 와 닿게 공부하는가 하는 것만이 우리의 숙제고 우리의 할일이지요. 이 지구만한 다이아몬드의 가치보다도 금강경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했는데도 도대체 그런 말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부처님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요. 어리석은 중생들을 놓고 장난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만치 깊게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문제이지 결코 금강경이 잘못되었거나 부처님이 잘못 되었거나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태양은 아주 밝습니다. 그런데 맹인은 늘 어둡다고 합니다. 누구의 허물입니까. 태양의 허물이 아니지요. 눈을 못 뜨는 맹인의 허물이지 저 밝은 태양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말 금강경의 가치는 금강경 안에서 이야기한 대로 그와 같은 가치가 있는 가르침에 틀림이 없습니다. 육조스님 말씀이 난 김에 곁들여서 드리는 말씀드립니다.
何以故오 一切有爲法이 如夢幻泡影하며 如露亦如電하니 應作如是觀이니라
하이고오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하며 여로역여전하니 응작여시관이니라
이것이 금강경의 마지막 사구게지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하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하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니라.
일체 조작이 있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다. 그러니 응당히 꼭 이와같이 관찰을 하라.
그러니까 유위법이라고 하는 눈에 일차적으로 비쳐지는 이 현상 너머 실상을 볼 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현상에 속아 살아서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말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 한마디를 딱 하면 새기지도 않고 그냥 말소리에 반응해 버리지요. 그러면 백발백중 오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오해하게 되어 있어요. 말을 듣고 그것을 잘 새겨보고 어떤 심정에서 나왔는가 그 사람이 무슨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는가 이런 배려까지 할 줄 알고 깊이 새기면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세상을 보는데 일차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부족한 관점입니다.
그런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니 일체 유위법이라고 하는 것을 꿈이요 환영이요 물거품이며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갯불이다,라고 꼭 그렇게 실상을 꿰뚫어 보는 관찰이 필요합니다.
佛說是經已하시니 長老須菩提와 及諸比丘比丘尼와 優婆塞優婆夷와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聞佛所說하고 皆大歡喜하야 信受奉行하니라
불설시경이 하시니 장로수보리와 급제비구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 일체세간천인아수라가 문불소설하고 개대환희하야 신수봉행하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설해 마치시니 장로 수보리와 그리고 여러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 천, 인, 아수라가 부처님의 설하신 바를 듣고 다 크게 환희해서 믿고 받고 받들어 행하더라 하였습니다.
여시아문부터 신수봉행까지가 모든 경전의 시작과 끝이지요.
경전은 다 여시아문에서 시작해서 끝에는 거의 환희봉행이나 신수봉행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빨리 읽는 요령이 있어요. ‘여시아문하야 신수봉행하니라’ 하면 경 한편이 다 끝납니다. 금강경을 이렇게 해서 마칩니다.
다음시간에는 금강경 총정리를 다시 한 번 해 드리겠습니다.
출처 : 염화실
[출처] 금강경 강좌 제24강 - 무비스님|작성자 단장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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