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행복한 이기주의자(웨인 다이어 지음)」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한다.
◈ 나를 진짜로 사랑하는 방법
당신은 당신의 감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입니다. 이미 내렸거나 아직 내리지 않은 선택의 관점에서 삶을 들여다 보십시요. 그러면 당신의 현재 모습 당신의 현재 가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당하게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게 됩니다. 한층 행복해지고, 멋진 삶을 산다는 것은 유별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 앞에 아직 열려있는 선택들을 훨씬 더 잘 깨닫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하시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내린 선택의 총합입니다. 적당한 양의 동기 부여와 노력만 있으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합니다.
위대한 사람이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다들 이성을 잃고 해매는 상황속에서도 차곡 차곡 '자기실현'을 이룰 수 있는 능력입니다. 뒤를 돌아보세요. 늘 당신 뒤를 따라다니는 또 다른 당신 자신이 보일 것입니다. 딱히 붙일만한 이름도 없으니 그를 '죽어 있는 나' 라고 불러 봅시다.
당신은 그를 두려워할 수도 있고, 당신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죽음은 끝도 없이 당신의 어때를 짓누릅니다. 그리고 삶은 제대로 숨을 고를 여유도 없이 짧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십시요.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을 이렇게 모른 척 하면서 살아도 되는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y)의 단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주인공 이반 일리치. 그는 죽음의 신을 기다리며 다른 사람에게 철저히 휘둘렸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는 사회에 순응하기 위해 지금까지 자기 인생을 자유롭게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해 왔습니다.
「만일 내 인생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면...」, 이전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 다시 말해 그동안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느낌이 결국은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사소한 충동이 일면 그것을 곧바로 억제하며 살아왔는데, 실은 그런 충동이 오히려 진짜이고, 그외 모든 것들은 가짜였던 것 아닐까? 직책, 생활과 가정사, 사회적 또는 직무상의 이해관계도 모두 가짜였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모두 성실하게 지키고자 노력했던 그는 갑자기 그 모든 것들이 덧없게 느껴졌습니다. 「지켜야 할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노라. 대체 언제까지 죽어 있을 작정인가?」, 이렇듯 죽음을 넘나드는 통찰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내가 실제로 감당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불안, 미심쩍음, 그리고 정말이지 제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요컨대, 「나의 삶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려면 먼저 매우 그릇된 통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통념은 '똑똑함'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이의 인생을 저울질합니다. 사회가 똑똑함이라고 부르는 여러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읽고, 쓰고, 계산하고, 빠른 시간 안에 해결하는 능력으로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똑함에 대한 통념이 성취의 진정한 잣대라고 단정짓습니다.
그러나 내가 일하고 있는 지금의 정신병원에는 남들이 추켜세우는 똑똑한 환자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무슨 생각이 드는 줄 아십니까? 「똑똑함의 참된 척도는 이 순간을 얼마나 제대로 사느냐! 그것은 바로 지금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의 몫이구나!」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덧없는 불행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똑똑한 사람인 것입니다. 행복을 선택하면 '신경질'이라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궁극의 방패를 얻게 됩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애초에 신경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실제로 신경은 성질을 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체를 해부해 놓고 눈을 씻고 들여다 봐도 성깔을 부리고 있는 신경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로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신경질을 내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의기 소침 해지기 보다 행복을 선택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입니다. 나는 방금 그들이 문제를 '해결'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제 해결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하고 소중해질 수 있는 능력'을 똑똑함의 잣대로 삼습니다.
오늘은 이 문장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내가 행복하고 소중해질 수 있는 능력을 똑똑함의 잣대로 삼는다」우리는 모두 사회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병은 주사 한 방 정도로는 절대로 나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필히 '열등의식'이라는 전염병이기 때문입니다. 그 병에 대해 지금껏 알려진 유일한 치료 방법은 '자기사랑'이라는 약을 대량 복용해서 '자기실현'이라는 결과물을 내는 것입니다.
사회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안중에도 없는 듯 보입니다. 진정 현재의 순간에 행복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사람은 본래 자신을 아름답고 귀중한 사람이라 여기도록 타고났으나, 일련의 사건으로 버려지거나, 사회적 잣대에 갖혀 이상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때가 되면 자기 불신이 활개를 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게 되면서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판에 박힌 질문들과 자신을 부정하는 말들이 계속됩니다. 이런 자기 불신은 자기실현을 어떻게 방해할까요?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중차대한 일이 힘에 부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드뭅니다. 어떻게 하면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지 않고, 상대방이 택한 것을 너그러이 허용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요? 매우 간단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나를 중요하고 소중하며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일단 자기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인식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에게 내 지시를 따르게 강요하면서까지 '나의 가치'를 강조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에게 확신이 서면,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아지기를 바라지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됩니다.
나는 독특합니다. 상대도 독특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나에게 순응하게 되면 그 사람 나름의 독특함을 잃게 됩니다. 내가 그들을 좋아했던 이유는 그들에게 남다른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독특함을 깨닫는 것부터가 똑똑함의 시작입니다. 행복하고 소중해질 수 있는 인생의 첫 관문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일을 잘하게 되면 어느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넉넉해 집니다. '부를 쌓으려면 더 내어줘야 한다'는 말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말이 도저히 마음에 와닿지 않고 마냥 어려웠다면,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서 당신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하면,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집니다.
확실하게 말하겠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면 재정적인 상황 또한 나아지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돈이라는 것은 결국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파는 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들에게 필요한 자신의 가치를 만들려면 그들의 입장에서 자신을 봐야 합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존감이 돈을 만듭니다. 내 환자 중 노아라는 환자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했건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만에 하나 "나도 사랑해" 라는 응답을 가족들에게 받지 못하면, 자신의 가치 전체가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노아가 자신이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문제 자체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가 사랑의 메아리를 듣던 못 듣던, 상대방의 대답은, 자기 고유의 가치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은 상대방의 사랑을 '원할'지 모르지만 당신이라는 사람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데 상대방의 사랑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키우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리저리 시험대에 오르다가, 자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불행한 감정에 못 이겨 스스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다시 땅굴로 들어가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망치는 행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일단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와 그 생각이 계속 유지되게 만드는 '심적 구조'를 이해하면 공략에 나설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 '다른 사람이 말해주는 평가'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편이 수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굉장히 익숙한 변명들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혹은 퇴짜를 맞거나 거절당할 가능성을 미연에 예방하기 위하여 지금 이대로가 훨씬 속 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다른 사람들로부터 연민이나 관심을 얻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요? 당신이 불행한 것에 대한 탓을 돌릴 희생양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요? 혹시 당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단정짓는 순간, 성장하거나, 개선되거나, 더 행복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은 현상 유지!,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자신을 깍아내리는 상태를 지속시킵니다. 애써 일어서려는 것보다 주저앉아 있는 것이 훨씬 덜 위험할 뿐 아니라 마음속도 편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점점 아니꼽고, 꼴보기 싫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당신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성장'입니다. 이것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성장하는 것을 모른 척하는 것은 '죽은 삶'을 살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혐오가 자기 사랑보다 더 건전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감정을 통제하겠다'는 '당신의 의지'입니다. 아직도 지금 당신의 불행을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요.
오랫동안 방에 혼자 갇혀 있어야 한다든가 반대로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엘리베이터 안에 며칠 동안 계속 서 있어야 한다든가, 엄청 오랜 시간 동안 특히 싫어하는 음식만 억지로 강요당한다든가, 불행한 감정을 떨쳐낼 때까지 스스로 방금 말한 벌 가운데 하나를 받아야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방법을 사용하면 아마도 상당히 빨리 불행한 감정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당신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실제로 있든 없든, 그것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하려 들지 말고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내팽개치지 말고 날이면 날마다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드는 일들에 안주해 있지 말고, 생각해 보면 행복하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훨씬 쉬운 일입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겠다고 마음먹는 일이 압도적으로 훨씬 더 쉽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의 행동이나 감정과는 무관합니다. 사람은 단 하나의 자아상만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는 이분법적 분류로도 나눠지지 않습니다. 실제 사람의 자아상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게다가 심지어 시시각각 변합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가?"
부정적인 이미지들만 떠올라서 '아니오' 라고 답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육체적, 지적, 사회적, 감정적 측면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나름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활동하는 개수 만큼이나 많은 자아상을 갖고 있으며, 그 모든 행동을 통해 내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내 뒤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그림자, 내 불행, 내 행복, 나름 뛰어난 부문에 대한 가치 평가, 부족한 부문에 대한 가치 평가, 이 모든 것들을 그냥 '나를 사랑하지 않음'으로 한데 묶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나는 존재합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조건의 전부입니다. 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며,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내 행동이 스스로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때가 아예 없지는 않겠으나 그것은 나의 가치와 무관합니다. 나는 언제까지고 나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겠노라 작심할 수도 있고, 나의 자아상을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당신의 모든 신체적 조건을 좋아하세요. 자기 수용이란 자신의 모든 조건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몸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을 싫어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을 인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과 마찮가지 입니다. 그리고 똑똑함의 기준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의 몸에 관한 이미지 뿐 아니라, 그 밖의 다른 경우에도 이런 식의 마음가짐이 가능합니다. 자기 나름의 기준을 적용하면 누구나 자신을 똑똑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을 모아 놓았을 때, 일부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숙달의 경지에 오르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속도가 늦더라도 어쨌든 학습 과제를 완전히 숙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환자들을 봐온 바,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 그러니까,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학문상의 기술을 숙달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럴만도 합니다. 현재의 에너지를 그렇게 애매모호한 문제 해결이나 흥미도 없는 일을 배우는데 쏟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을 확실히 합시다. 당신은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똑똑해질 수 있습니다. 이 전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기 경멸입니다.
이 자기 경멸은 당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줄 뿐입니다. 선택은 언제나 당신의 몫입니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오류지대'는 언제든 새롭고 가슴 설레는 일들에게 자리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단 길에 들어섰다면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세세히 알 필요 없습니다. 모든 선택의 기준은 나 입니다.
세상은 눈길 닿는 곳마다 '의무' 천지입니다. 독특한 개인은 자신을 등지고 스스로 동의한 적도 없는 일련의 규칙과 원칙, 의무에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제대로 분별도 못한 채 말입니다. 인성 편향이 자기 내부가 아닌 외부에 더 기울어져 있는 사람이 전체의 75%에 달합니다. 참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자신을 통제하는 중심이 외부에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왜 기분이 나쁜가?" 라는 질문에 "부모님이 나를 구박해", "내 친구들이 날 좋아하지 않아", "운이 안 따라줘서" 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외적 범주에 드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왜 기분이 좋냐고 물으면 "친구들이 잘해줘서", "운이 트여서" 라고 대답하는 사람 역시 외부에 내가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고, 비난 혹은 영웅 숭배라는 양극단 행동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영웅은 당신 자기 자신입니다. 흑백논리라는 덫입니다. 나의 중심이 외부에서 내부로 옮겨지면, 비난이나 영웅 숭배 행위에서 자연스레 벗어나게 됩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옳고 그름의 문제는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인 옳고 그름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옳고 그름에 대한 당신 생각이 당신의 행복을 어떤 식으로 방해하는지 한번 살펴보실까요. 옳다는 말에는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이 암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생각입니다.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그 선택이 무언가 다른 결과나 훨씬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항상 옳게 행동해야 하며, 안 좋은 사람이나 상황이 오면 나는 불행해질 것' 이라는 함정에 빠집니다. 옳바른 선택만 해야 한다는 이 생각은 미지의 세계를 피하고 확실성만 구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흑과 백, 네와 아니오, 선과 악, 옳고 그름, 세상을 양극단으로 딱 잘라 나누려고 하는 이분법적 성향인 것인데 실제 현실에서는 이 두 부류에 꼭 들어맞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 양극단 성향은 결혼생활 등 관계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대화를 나누다가도 결국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이 그르다는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지?" 라는 말은 단골 메뉴입니다. 당신은 혹시 선택을 내리는 것이 버거운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옳고 그름의 이분법적 성향이 낳은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원하는 삶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옳은 선택을 내리는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가기로 했든,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가 현재 당신이 얼마나 짜임새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 훨씬 좋은 척도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 절대 따르고 싶지 않은 '의무'가 있다면, 따르지 마세요.
앞으로 있을 당신의 모든 선택에 옳고 그름이라는 이 범주가 없어지는 순간, 선택을 내리는 일이 예전보다 한층 수월해질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당신보다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며 삽니다. 사회에 대한 반항심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오늘도 당신의 하루가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 내지 누가 맞다 틀리다고 말하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 스스로가 주도하는 삶으로 꾸려가기를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충실하게 되면, 외부에 그 어떤 지원도 요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당신에게 알아서 끌려올 테니까요.
심리적으로 복종된 삶을 떠나십시요. 당신을 외부에서 내부로, 원래 있어야 할 제자리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당신의 행동을 스스로 평가하고, 스스로를 신뢰하면서 그때 그때 끌리는 대로 선택을 내리는 즉흥적인 사고를 연습하십시요. 마음 가는대로 당신만의 행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모름지기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공식 자체를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시인(詩人) 도리스 워셰이(Doris Warshay)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머나 멀리 여행을 떠나고파라
내 영혼 안에 있는 기쁨에 닿고 싶기에
내가 알고 있는 한계를 바꾸고
내 정신과 영혼이 자라는 것을 느끼고 싶기에
생활하고 존재하고 '살아가고'파라
내 안의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싶기에
☞ 여게에 오시는 모든 분들이 위 글과 위 시(詩)와 같이 세상을 사는 마음의 중심이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아오게 하고, 나 자신을 회복함으로써 내가 원하는 삶과 행복을 만끽하시는 축복과 은총의 인생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