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이가 대상포진에 걸렸다.
처음에는 젊은 것이 대상포진이라니 참 어이없다 싶었다.
병원에서 받아온 대상포진 약을 먹고 푹 자러 간 첫 날은 속이 안 좋고 머리가 아프다며
한 밤중에 수시로 찾아와 호소하는 바람에 나도 잠을 못 자고 힘들었다.
대상포진 약은 다 먹었는데 아직 낫지를 않아 병원에서 다시 약을 받아와 먹고 있다.
스트레스와 과로 등으로 면역력이 떨어지면 대상포진에 걸린다는데
20대에 대상포진이라는 좀 그렇다.
예림이는 12월 중순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주 5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서초동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9시부터 4시까지 도서관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일을 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단순한 기호를 입력하는 아주 무료한 작업이었는데
매일 하루치 입력한 자료량과 정확도등의 기록을 경신하는 재미로 신나게 다녔다.
날씨도 차가운 12월과 1월 4주 꼬박 일했다.
시급으로 보자면 꽤 높은 편이지만
그렇게 방학 내내 쉬지 않고 일해도 대학 등록금에는 모자란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그보다 이른 12월 초, 예림이는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예솔이는 정시 접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두 딸에게 열심히 살아온 기념으로 10일간의 역사 여행을 내가 제안했다.
예림이와 예솔이는 수능 준비를 스스로 EBS 인강 보며 공부하는 바람에
부모로서 특별한 경제적 지출을 한 것이 없다.
EBS 교제 몇 권 사준 것과 하루 3끼 밥 챙겨준 것이 전부이다.
고 3기간 뿐 아니라 홈스쿨링하는 내내 자녀들에게 투자다운 투자를 한 것이 별로 없다.
그랬음에도 두 딸이 편안히 공부해 준 것이 고마워 부모로서 약간의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게다가 4남매의 장녀로서 여러모로 책임을 느끼는 예림이에게
약간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은 맘도 있었다.
예솔이는 1월 말에 여행을 가게 되면 대학 합격 통지를 못 받을 수도 있다며 부담스러워 했지만
대학 합격은 언제든(?)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격려하며 걱정 말고 일단 떠나라고 했다.
그렇게 여행을 밀어 부쳐서 여권 만들고 여행 경비 입금하고
도서관에서 책 빌려와 여행에 대한 공부를 하는 중,
여행 출발을 4일 앞 둔 목요일 예림이 다니는 대학에서 장학금을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외부 장학금으로, 예림이에게는 아주 필요한, 꼭 받고 싶은 장학금이었다.
장학금 신청을 위해 준비할 서류가 몇 개 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총장님 추천서, 부모 재산세 납부 증명서를 비롯한 공식 서류 몇 개와
학업 계획서, 자기 소개서 같은 것들...
낮에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 여행을 떠나야 한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예림이는 당장 장학금 신청이 더 중요해서 여행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부모로서 결정하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이번 여행이 경비면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함께 가는 팀도 좋아 포기하기 아까운데
학교에서 추천한 장학금은 포기하기가 더 어려웠다.
여행을 포기하고 장학금 신청을 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장학금도 중요하지만 여행도 가치 있는 일이니 포기하지 말자고...
만약 이번에 장학금을 못 받게 되더라도
나중에 다른 장학금 받을 수도 있으니 일단은 계획했던 여행부터 잘 다녀오라고 했다.
나도 한 번쯤 쿨한 부모 역할 해보고 싶었다.
많은 고민 끝에 예림이 예솔이는 여행을 떠났다.
예솔이는 정시 2개에 바로 합격해서 날아갈 듯 가벼운 맘으로 출발했고
예림이는 서류 준비를 마치지 못해 나에게 몇 가지를 부탁하고 떠났다.
여행은 아주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런데 10일 여행 끝에 예림이는 대상포진에 걸려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면서 여행 마지막 며칠은 잘 때 추웠고 등이 간지러웠다는 말을 하기에
등을 봤더니 심상치 않았다.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대상포진이라며 약을 줬다.
젊은 것이 그깟 여행에 대상포진에 걸리냐고 퇴박을 줬다.
아주 열악한 환경으로 여행을 간 것도 아닌데 뭔 고생을 했다고 병에 걸리냐고 퇴박을 주었다.
예솔이가 옆에 있다가 언니가 첫 날 밤에 잠을 못 잤단다.
여행경비를 아끼느라 경유하는 비행기를 이용하다보니
첫날 인천에서 밤 12시에 출발하여 첫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30시간이 걸렸단다.
그리고 그 첫 날 밤 예림이는 장학금 신청에 필요한 자기 소개서와 학업 계획서 마무리하여
나에게 메일로 보내느라 새벽 3시까지 잠을 못 잤단다.
결국 2일 넘게 잠을 제대로 못 잔 셈이다.
아마 그 때 몸에 무리가 갔나보다.
좋은 경험 쌓게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고생하게 된 것 같아 미안한 맘도 들었다.
여행 후 예림이는 병 때문인지 약 때문인지 평소 습관 때문인지 정말 많이 잤다.
밥도 안 먹고 자고 자고 또 잤다.
그렇게 자다 하루는 일어나 장학생 면접을 보고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장학생 발표가 났다.
총장 추천을 받은 학생 2명 중 한 명만 장학생으로 뽑히는데 예림이가 선정되었다.
기뻤다. 온 식구가 아주 기뻤다.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모두 기뻐하셨다.
외할아버지는 큰 소리로 ‘할렐루야’를 외칠 만큼 기뻐하셨다.
아마도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올해부터 대학생이 2명이 되는 우리 집 상황을
누구보다 많이 걱정하던 차라 더 기뻐하셨던 것 같다.
대상포진과 바꾼 장학금 같은데 이 정도면 할 만 한 듯... ㅎㅎ
나는 아마도 계모인듯...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