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수양 버드나무가 휘영청 늘어져 있다. 미풍에 늘어진 가지가 공작 꼬리 부채를 부치듯 우아하게 흔들린다. 그 아래로 나무다리 하나가 놓여있다. 작은 아이 한 명도 있다. 계집아이인지 사내아이인지 알 수 없는 아이가 맨몸으로 물결을 즐기고 있다.
햇살이 따스하다. 차가운 듯 온화한 물의 감촉, 젖은 얼굴을 내밀때면 지나가는 바람의 입술이 살
결을 들여다보며 퉁퉁 부은 손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아이는 앞을 향해가던 헤엄을 멈추고 슬쩍 몸을 돌려 하늘을 향해 눕는다.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의 품새, 끝없는 모형의 변화를 일으키는 구름꾸러미, 강가를 둘러싸고 있는 반짝이는 녹음들.
꿈속의 아이는 행복하다. 물 위에 누워 하늘을 구름을 바람을 초록의 눈부심을 보며 행복하다는 말을 부드러운 발길질로, 대신한다. 다리 아래 그늘진 곳의, 음영과 태양 아래의 뜨거움을 잔뜩 즐긴 아이는 X자로 엮어진 다리를 잡고서 한참 동안 물결의 무늬를 본다. 무심한 듯 아니 곰곰이 무얼 생각하는 것이 우스우리만큼 진지하다.
나는 꿈을 자주 꾼다. 거의 매일 꿈을 꾼다고 해야 할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어두운 터널이나 굽어진 통로로 빠져나가다 몸이 끼여 답답해하는 꿈을 꾼다. 그럴 때면 발바닥마저 간지러워져서 기진해진다. 생시인 듯 깨어나 발을 문지르곤 한다. 고향의 산길을 헤맬 때도 있다. 꿈을 꾸면서도 이곳은 낯익은 길인데, 몇 번이나 이 길을 가는 꿈을 꾸었지 하기도 한다.
가끔 오늘처럼 물속을 노니는 꿈을 꾼다. 꿈을 깨고 나서도 한동안 수채화처럼 아련한 아름다움과 물속에서, 자유로웠고 행복했던 여운이 남아있다. 화가라면 그 순간의 장면을 잊기 전에 그림으로 빨리 표현하고 싶을 것이다.
물속에서 나는 언제나 자유롭고 안온하며 윤나게 반짝였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수영장에 가끔 가면 물결이 몸에 닿는 느낌이 특별하다. 매끄럽게 몸을 훑고 지나가는 감촉, 슬픔처럼 깊으면서도 끝없이 가라앉는 것 같은 나를 받쳐주는 물의 부력, 출렁이며 흔들리는 일정한 물의 리듬을 손가락 사이로 발가락 끝으로 느낀다. 쌕쌕거리며 줄을 서서 수영을 하는 게 마뜩찮지만 끝과 끝을 향해 헤엄을 칠 때 전해오는 익숙한 느낌을 즐길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물을 참 좋아하는가 보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 사무실에 앉아있던 날, 창밖의 움직임을 도적처럼 살핀다. 장마로 인해 도로에 사람의 발길이 없다. 기다렸던 순간이다. 이 틈이다 하고 문밖을 나가 두 팔을 펼친다. 그리고 몇 바퀴 휘휘 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여동생이 동네 사람들 흉본다며 소리를 꽥 지른다. 얼른 뛰어 들어온다. 잠깐 사이 옷은 젖어 들고 빗물이 가슴골을 타고 흐른다. 차가운 기운이 몸을 타고 흐르는가 싶은 순간 따스하게 스민다. 얇은 여름옷은 금새 몸과 하나가 되어 밀착된다. 물거품처럼 터져나는 묘한 즐거움에 아이처럼 낄낄거린다.
“나 정말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더하고 싶은 게 있어. 비를 쫄딱 맞으며 걷고 싶어.” 그 말을 할 때면 나는 속으로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 빗속을 걷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철벅거리며 물구덩이를 밟고 싶은 욕망에 빠지기도 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빗속 물구덩이에 무언가가 있는 듯하다. 그건 돌아갈 수 없는 순수함의 시간, 젊었던 부모님, 푸근하게 감싸주던 고향과 같은 내 유년의 총체, 혹은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나를 불러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어린 시절 장마철이 되면 마땅히 놀만한 게 없었다. 장난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외딴집에 살던 나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종일토록 마루청에 누워 바라보았다. 굴피지붕에서 떨어지는 물이 만들어 놓은 파인 홈 세는 것도 재미없고 쪄 놓은 감자도 옥수수도 다 먹고 나면 스물스물 지겨움에 주리가 틀려왔다.
그때 붉은 대야 가득 받아놓은 빗물 속에 발을 담갔다. 미끈덩 고무신이 벗겨지기도 하고 뽁 소리를 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몸으로 비를 맞고 물속을 찰방대는 느낌이 좋았다. 빙글빙글 몸을 돌리면 하늘도 산도 본래의 모습을 잃고 어지러워했다. 달려온 어머니가 불은 때를 벗기려 하면 냅다 도망을 쳤다. 하지만 이내 잡혀 등짝을 한 대 맞고 털 뽑힘을 당하는 꽁지 빠진 닭 신세가 되곤 했다. 입술이 파랗게 질리도록 놀다가 대청에 누워 있으면 어머니는 어느새 성냥 한 개비를들고 내 귀를 청소하기 시작하셨다. 방금 쩌낸 감자 같은 어머니의 무르팍 냄새와 조심조심하는 어머니의 손길은 꿈속으로 아득히 잡아끌었다.
비를 기다린다.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빗속을 걷는 여자가 되고 싶다. 바싹 말라버린 머리와 가슴을 흠씬 적셔 촉촉한 푸른 한 잎이 되고 싶다. 언제 한번은, 꼭 그렇게 했으면 한다. 부유하는 삶이 불안할 때 어머니의 뱃속처럼 절대적인 안정이 존재하는 곳을 찾게 된다. 양수 속 작은 한 점으로 시작한 생은 기쁨과 슬픔이 마를 날 없다가 겐지스강의 나룻배처럼 쓸쓸히 물속을 가라앉는 게 아닐까. 세상이라는 커다란 강물에 몸 담구고 살다가 그 물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빗방울 같은 존재이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비가 오는 날은 탄생처럼 기쁘고 죽음처럼 적막한 평온이 함께 한다.
아직은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숨어서 비를 맞지만,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몇 명쯤은 있다고 믿는다.
물을 좋아하는 수수한 여자가 감히 빗속을 걸어보자고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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