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5일 새벽. 고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은 경기 하남시 창우동 부친
고 정주영 회장의 묘소 앞에서 서러움과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
1998년 11월 금강호의 첫 출항으로 시작한 ꡐ남북화해와 협력ꡑ의 상징인 금강산관광사업에 육로관광의 씨앗을 뿌린 이날. 분단 50년 만에 마침내 남북 대결의 현장인 군사 분계선과 지뢰밭을 뚫어 선친의 유지와 꿈을 이뤘다는 벅찬 감격과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몰린 처지가 교차하며 고인은 흘러 내리는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지난 4일 유명을 달리한 고 정몽헌 회장이 8일 6개월여 만에 꿈을 접은 주검이 돼 다시 창우동 부친곁으로 돌아왔다.
지난해 9월 대북송금 의혹 이 터진 뒤 누구 하나 도와 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좇기듯 살아 온 고인은 이젠 부친 옆에 나란히 누어 지친 몸과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유가족을 비롯해 현대 임직원, 각계 조문객들은 ꡐ그를 외로운 죽음으로 몰아세운 것은 아닌가ꡑ하는 자책감과 통한을 남긴 채 무거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대(代)를 잇는 꿈은 이뤄졌나=유가족과 현대 임직원들은 고 정몽헌 회장이 8형제 중 누구보다 선친을 빼닮았고 효심이 깊었다고 추모한다.
남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어린 시절 별명이 ꡐ촌색시ꡑ ꡐ촌 닭ꡑ이었다.
하지만 소탈하고 근면한 성격,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승부사 기질은 영락없는 판박이였다.
고인은 89년 1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북한 방문으로 시작된 현대 대북사업을 98년 6월 역사적 소떼 방북과 금강산관광으로 실현시킨 주역이 됐다. 92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정치 참여로 불거진 현대 비자금 사건 때는 선친을 대신해 옥고를 치렀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군사 분계선의 통과없는 금강산 개발사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 정명예회장은 군사 분계선의 통과를 우리 민족이 합일로 나아가는 출발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지난 2001년 3월 부친의 타계 이후 금강산사업을 업보처럼 물려받은 고인은 그 룹 경영위기 속에서도 육로관광 성사에 매달렸다.
89년 첫 방북 때 선친 이 고향 강원도 통천 작은 어머니 방에 와이셔츠를 벗어 놓은 뒤 ꡐ다시 와서 입겠다ꡑ며 남긴 말은 고인의 머리속을 온통 채웠다.
고 정주영 회 장의 수구초심이 담겨있는 금강산 관광사업은 끝내 부메랑이 돼 고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고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ꡐ짚신 한켤레 신고 맨몸으로 고향을 떠난 사람인데 망한다고 해도 구두는 신고 살 수 있을 것ꡑ이 라는 말을 하곤 했다.
비운의 후계자 정회장은 구두를 신은 채 현대가의 꿈과 도전, 시련이 담긴 현대 계동사옥에서 몸을 날려 선친이 있는 고통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정주영-정몽헌 부자의 대를 잇는 꿈은 그들을 억눌렀던 많은 시련과 고통, 억압과 겹치며 조문객들의 가슴 속으로 담겼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꿈을 그렸던 두부자에 대한 평가는 고스란히 역사의 몫으로 남았다.
◆현대가의 또 다른 꿈=고인의 죽음은 현대그룹 유동성 위기와 해체, 현대건설과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국민의 혈세인 수조원대 공적자금 투입 등으로 이어진 2000년 3월 형제간 경영권 갈등(왕자의 난) 이후 퇴색한 현대가를 한국 최고의 재벌가문으로 다시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고있다.
사분오열됐던 현대가는 고인의 죽음 앞에 하나가 됐고 고 정주영 회장의 꿈인 정의선 현대차 부사장을 비롯한 3세 경영인들은 화합의 손을 잡았다.
고 정주영 회장은 ꡐ현대의 목표는 해외 시장에서 벌어 들여 우리나라의 부를 창조하고 앞으로도 계속 커 나가 세계적인 규모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현대가 되는 것ꡑ이라는 유지를 남겼다.
창우동 선산에 못다 피운 꿈을 묻은 현대가와 현대 임직원에게 남은 영원한 숙제다.
유근석 기자
손길승 전경련 회장 추도사
정몽헌 회장님, 도저히 믿기지 않는 비보에 황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데 오늘 회장님의 영전 앞에 다시 서니 가슴이 메어질 뿐입니다.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우리는 지금 유능하고 헌신적인 기업인이자 남북한 경제교류의 선구자를 떠나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어찌 다 추스를 수 있겠습니까?
정몽헌 회장님, 회장님은 우리나라 경제가 한창 도약기를 맞이하던 70년대 중반부터 현대그룹의 산업현장과 경영일선에서 사려 깊고 멀리 앞을 내다볼 줄 아는 경영인으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계를 대표하는 젊은 기업인으로서 역사적인 사명감을 갖고 금강산 육로 개통과 개성공단 개발을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이제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니 이 참담한 심경을 어떻게 달래야 합니까.
돌이켜 보면 남북교류와 협력의 여정에 회장님의 손길,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회장님은 육로와 바닷길을 열어 분단된 민족이 화 합할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개성공단은 앞으로 남북한 경제협력과 민족통일의 초석이 될 것입니다.
정몽헌 회장님, 회장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들은 우리 민족의 앞날을 위한다는 신념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버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며 여기까지 오시지 않으셨습 니까?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고 하실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왜 이렇게 홀연히 떠나셔야 했습니까?
기업인으로서 이제 한창 꽃을 피워야 할 때에 이렇게 꼭 떠나셔야 하셨습니까? 이제 누가 회장님의 빈자리를 대신 한단 말입니까?
같은 기업인의 길을 걷고 있는 저로서도 회장님이 겪은 그 간의 외로움과 통한을 다 짐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회장님의 영전을 대하는 마음이 더욱 애통하고 편치 않습니다. 회장님이 생전에 한국경제 발전을 위해 진력하시다 못다 하신 일은 이 제 남아있는 우리 기업인 모두의 몫입니다.
우리 기업인들은 회장님의 뜻과 같이 우리나라 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회장님이 생전에 그렇게 염원하시던 남북한 경제교류를 통한 평화 정착과 궁극적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 일찍이 앞날을 보고 뿌려 둔 씨앗은 반드시 민족의 통일 과 후세의 번영을 위한 큰 버팀목으로 자라나야 합니다.
정몽헌 회장님, 이승에서의 모든 고뇌와 슬픔을 이제 내려놓으시고 영면에 드시기를 삼가 바라옵니다.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
영결식 이모저모 … 2000여명 모여 고인명복 빌어
8일 고(故)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회장의 영결식이 진행된 서울아산병원 잔디광장에는 현대 임직원과 정․재계 등 각계 인사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2000여명의 조문객이 참석,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천구 의식중 간간이 흐느낌
○…영결식에 앞서 오전 7시부터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층 빈소에서는 약 30분간 천구(遷柩)의식이 엄수됐다.
천구의식이란 발인(發靷)을 위해 관을 옮기기 전에 유족들이 올리는 제례로, 상주 영선군과 미망인 현정은씨 등 유족들과 장례위원장인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 등이 참석했다.
유족을 제외한 일반인 출입이 통제된 가운데 열린 천구의식 중 간간 이 빈소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천구의식에 이어 오전 7시 30분부터는 장례식장 1층 발인장에서 발인제(發靷祭)가 치러졌다. 이날 발인제는 고인의 관을 실은 검은색 대형 승용차 옆에 친 병풍 앞에서 진행됐으며, 먼 발치에서 식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눈물을 훔치며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화환 안와
○…서울아산병원 잔디광장에 차려진 영결식장에는 좌석 1000여개가 배치됐으며 단상 위에는 중앙에 고 정몽헌 회장의 대형 영정이 걸렸고, 향탁에는 위패 2개와 대형 촛대가 놓여졌다. 식장 좌우에는 고인의 생전 모습이 방영될 대형 발광 다이오드(LED) 멀티비전이 설치됐다.
○…고 정회장의 빈소가 마련된 지난 4일부터 각계 각층으로부터 보내 온 화환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봤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화환은 영결식이 치러진 이날까지도 보이지 않아 눈길을 끌었다.
한 조문객은 ꡒ김 전 대통령과 현대의 관계가 껄끄럽다고 하더라도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 화환조차 보내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ꡓ고 아쉬워했다.
○…고 정몽헌 회장의 장례 규모는 조문객 수나 비용 면에서 선친인 고 정주영(鄭周永) 명예회장 때에 비해 훨씬 작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조문 마지막 날인 7일까지 정 회장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8,000여명으로, 지난 2001년 정 명예회장 타계시 청운동 자택빈소를 찾은 2만5000여명의 3분의 1에 그쳤다.
또 각계 인사들이 대거 몰려왔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빈소를 찾은 유력 인사 면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느껴졌다.
특히 고 정주영 회장 빈소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한광옥 비서실장을 보내 조문한 것을 비롯, 최규하 전 대통령을 제외한 전직 대통령이 모두 빈소를 찾았으나 이번 정 회장 빈소에는 노무현 대통령 등 전현직 대통령들의 조화만 놓였을 뿐 전현직 대통령의 직접 조문은 없었다.
선친의 장례식 비해 조촐
○…장례비용면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컸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우 서울 종로구 청운동 자택에 빈소가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조문 객 접대 등에 약 8억원이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번 정몽헌 회장 장례의 경우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임대료를 포함해 2억원 내외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