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해설-김문주 (시인, 문학평론가)
"김륭의 시는 말의 길, 길에 이르는 경로가 아닌 다양한 해찰의 방식으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매우 자주 말을 넘나드는 유희의 방식으로, 때때로 말의 길과 무관해보이는 엉뚱한 문
장들로, 그리고 결합할 수 없는 언어의 배합과 무심해 보이는 표현들로서 나타나지만, 여전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당을 수 없음, 그 미달과 결락(缺落)을 형상한다. 하여 김륨의 시는 정서적 자질로는 넘치도록 서정적이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서는 실험적인 것처럼 보인다"
시를 사는 자를 시인이라고 한다면, 김륭은 그야말로 시인이다. 그는 시에서, 비로소 생각하고
말하는 자이다. 때로 '운다고 말하기도 한다. "중심을 잃은 내가 나를 걸어보는 이야기" 라고
자신의 시에 관해 그는 말하지만. 중심을 잃고 쓴 시는 없을 터이다. 어찌 중심을잃고시를
쓰랴.
"말 위에" 더해진 말. "글 위에" 연혀진 글들 사이에 출몰하는 그,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그의 고독과 사랑과 욕망의 그림자를 본다. 지독하게 자신을 앓고 있는 그의 지극한
'서정'은 여간한 인내 없이는 잘 감수되지 않는다. 흰 눈사람의 검은 머릿속 이야기. '울
음이 울음을 밀고 있"는 저 생의 풍경이 어찌 내부에 쉽게 사람을 들이겠는가 -(부분)
개는 모름 / 김륭
어떤 날은 베개가
침대를 내려와 개처럼
짖는다.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자꾸
아는 이야기가 찾아온다는 듯
개 옆에는 개, 달 옆에는 달
그러나 개는 달처럼 반으로 접을 수 없고
낮보다 밤이 먼저여서
개의 발을 가만히 묶어놓는 빗소리
베개 대신 침대 위로 기어올라
자라기 시작한다.
괭이밥처럼, 좋다. 누워, 라고
노란 목소리 같은 걸 꺼내 내가 나에게
괜히 겁주지 않아도 되는
침대
풀밭에서 시들어가는
여자의 품속에서 발꿈치를 든
아기 꿈을 꿨다.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이
속으로 하는 말을 들었다는 듯
뼈다귀를 핥아주는
침대
어떤 가난은 개를 참 많이 키운다.
개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
목이 긴 장화를 신고, 가만히
여긴 어디쯤일까?
밤을 홀딱 벗겨놓은
침대가 타자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김륭
내일의 날씨가 우산을 들고 뛰어올 때까지
빗소리를 심었다 화분 가득
끓는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말이 있어서, 누구십니까? 나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람 나는, 끝이 난 다음에 시작되는 이야기 나는, 시작되지도 않고 끝이 나는 이야기 나는, 빗방울처럼 움켜쥔 배꼽으로 세상을 내려쳐보는 이야기여서, 그렇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천변 어딘가에 그림자를 숨긴 새들은 인간의 노래에서 도망 나온 글자들을 쪼아댔다
벌레보다 못한 말, 서서 잘 수 없는 말로 꿴 책이라니
엄마, 엄마는 왜 벌써부터
누워있는 거야
부리가 샛노란 말똥가리 두어 마리 데리고
죽은 듯 가만히 누워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떠내려오거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떠내려가다 보면
내가 가진 내 얼굴을 울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니
그래서 갑니다 이젠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당신에게
이번엔 엄마라고 불렀으니까 다음번엔 자기라고 불러도 될까, 하고
벚꽃고양이처럼 한쪽 귀 접어서
마지막 햇볕을 쬐는 듯 오늘의 기분이 우산을 들고
내일로 뛰어가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나는
나 없어도 울지 마, 라는 책에 몸을
비끄러매는 것이다
* 메리 올리버.
뱀이나 좀 고쳐줄래? / 김륭
정말 모르겠어 나는, 너를
그러는 편이 좋지
나의 마지막은 너, 너의 마지막은
나이니까
하나도 안 중요해
헤어지든 말든 나는 계속 슬퍼할 거야
오랜만이지? 슬퍼하는 내 앞에서
슬퍼하는 척
나는 널 보고 있는 게 아니야
만지고 있어 네 몸속 깊숙이 나를
쑤셔 박는 중이야
나는 뱀, 이게 전부
너는 자루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러니까
부탁해줄래 눈을 감고
뱀이 안 되는 게 너무 많아서
뱀, 뱀이 되었군
재미있겠군
이건 네가 한 말이 아니고
내가 한 말
나는 내 안에서
할 말이 너무 없어
고작 똥 싸고 오줌 누는
그 정도?
그래서 네 안에 깊숙이
풀어놓으려는 거야
말도 안 돼
이건 내가 한 말도
네가 한 말도 아니고
우리는 다정하게 그 말을 접어서
껍질을 벗기지 자유롭게
그리고 떠난다, 말도 안 돼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연애는 참 독해
돌아온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긴, 코브라농장이군
그러게 말이야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집을 나갔다 막 돌아온
목소리가 내 모가지를 움켜쥐며
말했다
뱀이나 좀 고쳐줄래?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2020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