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무더위에 수고 많으십니다.
별로 그냥 데면데면하신 것 같아요. 그렇죠
인급동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게 줄인 말인데 인기 급상승 동영상이라는 말에 이렇게 주인 말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인급동이라 이렇게 합니다. 요즘 친구들이 쓰는 단어라서 저나 여러분은 잘 이렇게 모를 수도 있어요.
2주 전에 우리가 결단의 찬양으로 불렀던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라는 이 예라모십의 찬양이 요즘 인급동 순위에 올라가 있어요. 이건 단순히 그냥 기독교 계통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전체 우리 한국에 노출돼 있는 우리 영상 중에서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제 급상승한 클릭 수가 급상승한 동영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가사의 내용과 우리의 삶이 좀 안 맞아요. 좀 괴리감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가사입니다. 그들의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 마요. 꿈꾸는 그 길을 걷고 길을 또 걷고 걸어요.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객관적으로 보면 여러분과 저는 지금 폭풍 속을 걷는 듯한 삶을 살지 않아요. 우리 중에 제 생각에는 한 한두 분 정도 우리 교회에서 좀 더 치면 한 두세 분 정도는 그래도 폭풍 속을 걷는 듯한 삶을 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나머지도 그리고 우리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폭풍 속과 같지는 않아요.
생각해 보면 이렇게 안전한 폭풍이 있을까요? 여러분 폭풍은 안전한 곳이 아니에요. 그 어디에도 안전이 없는 곳이 폭풍 속인 거예요. 지금 우리의 삶은 비바람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지도 않아요. 나름 피할 공간이 다 있는 삶을 살아요. 혼자 걷는다고 하기에는 친구가 너무 많아요. 두렵다고 하기에는 너무 안전장치가 또한 많습니다.
문제는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거예요. 지금 폭풍 속을 걷는 듯한 인생도 아니고 그리고 비바람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불안정한 삶도 아니고 혼자 걷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두렵다고 하기엔 너무 안전장치가 많아요.
문제는 그래도 사람들이 자기의 삶이 지금 폭풍 속처럼 느낀다는 것에 있습니다. 폭풍 속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느끼고 폭풍으로 삶이 갈기갈기 찢어 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거예요.
여러분 삶이 폭풍 속에 있다는 것은 위태위태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는 매일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겁니다. 매일 죽음을 상상하고 살며 결혼 생활도 직장생활도 자신의 내면도 평안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폭풍 속과 같다는 거예요. 여행을 다녀도 휴식을 가져도 자신의 삶은 폭풍 속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렇게 환한 세상이 이전에 없었어요. 대한민국 역사상 이렇게 환한 시대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희망적인 시대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환한 세상을 살고 이렇게 희망적인 시대를 살면서도 사람들은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 이렇게 완벽하게 출발하는 세대는 없어요. 이렇게 삶을 보장받고 출발하는 세대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그래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비록 역사는 그렇게 말하지만 실존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어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 너무 힘든다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커뮤니티가 이 땅에 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이전에 없던 친구들의 종류가 막 등장하기 시작했어요. 일촌 그리고 인친, 투친, 페친, 페이스북 기준으로 2019년도에 1인당 친구가 338명이었대요. 그러니까 페이스북 기준에 2019년 통계가 그래요. 1인당 친구로 맺어진 사람이 338명 이제 그로부터 한 5년이 지났으니까 최소한 500명, 아니 600명 더 넘을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그런데도 외롭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예요. 모임에 참석해도 외롭고 운동장을 함께 뛰고 있어도 외롭고 함께 여행을 다녀도 여전히 외롭다는 거예요. 혼자 있는 것처럼 느낀다는 겁니다. 외로움을 함께할 고민을 함께할 아픔을 함께할 친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렵다는 거예요. 세상이 두렵대요. 자기 혼자 버려진 것처럼 느껴져서 세상이 너무 두렵대요. 그리고 외롭다는 것입니다.
앞에 언급했던 이 동영상을 보면 젊은 친구들만 좋아할 것 같죠 아니에요. 찬양하는 장면이 이렇게 찍혀져 있어요. 근데 거기에는 어른들도 아이들과 참석한 3040 세대들도 똑같은 마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요나가 처한 상황은 심리적인 문제는 아니에요.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많은 이 외로움과 그리고 혼자 있는 것 같은 이 느낌은 어느 정도 심리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이 돼 있어요. 왜냐하면 이전에 없던 번영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인 거예요.
근데 요나가 처한 상황은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었어요.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나 이야기를 상상이라고 해요. 허구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실제가 아니다. 근데 요나의 이야기는 상상도 아니요. 그리고 생각 속에 일어난 일이 아닌 실제였습니다. 실제로 빛이 없는 상황이 요나의 삶에 닥쳤고 실제로 죽음이 그의 앞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고래 뱃속에 있습니다. 고래 뱃속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큰 물고기예요. 근데 이 큰 물고기가 사람을 삼키기도 하고 심해를 헤엄치고 다닌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게 고려일 거다 생각하고 그렇게 번역하기도 하고 그렇게 알기도 하는 거예요.
이 큰 물고기 속에 있는 요나의 삶은 실제였어요.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삶 그러니까 고래 뱃속에 있었으니까 고래가 있는 곳이 곧 요나가 있는 곳이에요. 고래가 지금 깊은 바다 속에 있기 때문에 요나도 깊은 바다 속에 있는 것이고 고래 주변에 물들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요나도 지금 물에 둘러싸여져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요나의 상황을 잘 표현해놨어요. 우리 3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절 읽습니다. 시작
주께서 나를 깊은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바다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요나의 상황을 잘 표현한 단어와 이렇게 동사들이 오늘 본문의 곳곳에 있어요. 기품 큰 던지셨으므로 넘쳤나이다 둘렀고, 그러니까 요나는 이런 표현을 통해서 지금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있는지,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자신에게 닥친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문 3절에 보면 이게 잘 나와 있어요. 우리가 대충 이렇게 읽었잖아요. 근데 자세히 보면 요나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잘 나와 2-3절에요.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쳐나이다.
그러니까 요나는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물과 그리고 자기 위에 쏟아부어진 파도와 큰 물결을 표현하기를 주님의 파도라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쏟아부은 파도와 하나님이 자기에게 쏟아부은 물결이라는 거예요. 어쩌면 하나님께 맞는 매라서 요나가 이 상황을 더 처절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5절 이후로도 요나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표현해 놓았어요. 물이 자기 영혼을 둘러쌌다는 거 아니에요? 자기 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둘러쌌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품이 자기를 에워쌌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해초가 자기의 머리를 휘감았다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썩으면서 구덩이에서 건졌다고 표현할 정도로 자기의 삶이 처참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요나는 이런 처참한 환경을 경험해야 했을까요? 여러분과 저는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왜 요나가 겪게 되었을까요? 인생에는 원인이 알 수 없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결과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경우는 원인을 정확하게 기록해 놨어요. 요나의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인 거예요. 자기가 왜 이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 둘러싸여져 있는지 어둠과 물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지, 육체와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지 요나가 스스로 고백했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쉽게 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기품 가운데 던졌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불순종하는 자신을 들어서 기쁨의 바닷속으로 하나님이 던졌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요나를 기쁨의 바닷속으로 던지신 것은 요나가 사명을 거절하고 도망다녔기 때문이고, 특별히 민족적인 이유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거절하고 도망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기품의 바닷속으로 던진 것입니다.
영적인 어둠,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과 그리고 인생에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은 성도들의 인생에 캄캄할 때는 우리의 불순종이 우리의 거역이 그 앞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요나의 삶을 비유하면 그래요. 왜 요나가 이 기음의 바닷속으로 잠겼는지, 빛이 없는 어두운 가운데 그가 갇히게 되었는지, 큰 바다와 물결이 그를 그 인생 위에 쏟아부어졌는지 요나는 스스로 말을 해요.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이라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라고 요나의 불순종이 사망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요나의 불순종이 영적인 암흑을 만든 거예요.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의 불순종을 몰라요. 저로부터 해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께 어떤 불순종을 하고 있는지 몰라요.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몰라요.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는 것도 몰라요.
사람들은 아는 것처럼 보이지만 몰라요. 심지어 자기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게 닥친 어둠과 그리고 괴로움들과 환란들을 해석해내지 못하는 거예요.
왜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문제없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불순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까 못 찾아내는 거예요.
사람들은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면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여러분과 제가 인생의 어려움을 만나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저는 평생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내 앞에 고난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의 어둠을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불순종하지 않는 사람이고, 나는 평생 하나님 앞에 문제없는 사람이고, 나는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람들은 어둠에 처해 보지 않으면 빛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둠에 처하지 않으면 빛의 소중함을 몰라요. 어둠에 처해 봐야 빛도 찾고 빛으로 나오려고 해요. 자신의 삶이 캄캄하지 않으면 빛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빛 대신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오지가 않아요. 자기의 삶이 어두워야 빛이신 그리스도의 앞으로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보지 않으면 소망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아요. 어디에 진짜 인생의 소망이 있는지 찾지 않아요. 그래서 헛된 곳에 삶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요.
근데 어려움을 만나야 위기를 만나야 고난을 겪어야 인생의 참된 소망이 어디 있는지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힘들지 않으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생각을 하지 못해요.
몇 번 말씀드렸잖아요. 군에서 가장 가장 예배를 잘 드릴 때가 있는데 이 친구들이 진짜 어려운 훈련을 가기 전이나 갔다 와서예요. 대부분의 전방 소초에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놨었어요. 제가 군생활 할 때 요즘은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예배를 드리기 정말 어려운 환경의 부대들이 있어요. 주기적으로 이제 전방 후방을 이렇게 애들이 교대 하는데 이 아이들이 교대하고 나와서 예배를 정말 멋지게 드려요.
사람은 힘들지 않으면 온전히 예배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고난이 없으면 내가 하나님께 어떤 약속을 했는지도 생각하지 못해요. 고난이 와야 어려움이 와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약속을 했는지 생각이 나요. 고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지 못해 이게 인생입니다.
요나도 기음 속에 빠지지 않았다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을 겁니다. 그가 고래 배 속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랐을 거예요. 많은 물들로 그의 영혼이 둘러싸이지 않았다면, 많은 수초들로 그의 인생이 휘어 감기지 않았다면 자신의 소명에 순종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 위에 파도와 큰 물결을 쏟아붓지 않았다면 요나는 평생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거예요.
요나는 분명히 사명과 소명을 명확하게 받았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기쁨의 바닷속으로 던지셨던 것입니다.
캄캄한 인생 앞에서야 우리의 생각이 고쳐지고, 캄캄한 인생 앞에 서야 삶이 고쳐지고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고쳐져요. 우리가 어둠의 절망 가운데 처해보지 않으면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쁨의 수렁에 빠져보지 않으면 잘못된 삶을 고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인생이 어둠으로 둘러싸여야 진리를 탐구하기 시작해요. 사람이 그래요. 사람이 평안하면 진리를 찾지도 않고 진리를 탐구하지도 않아요.인생이 어렵고 괴롭고 힘들어야 진리를 찾고 진리를 탐구합니다. 시련이 우리 인생을 둘러싸야 하나님의 이름을 진솔되게 부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진실되게 불려본 적이 있나요? 하나님 이라고 정말 진실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나요? 사람이 인생이 없으면 인생에 고난이 없으면, 인생에 어려움이 없으면, 환란이 없으면 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이름도 진솔되게 부르지 못하는 것이 이 인생이에요. 환란을 만나고서야 그때서야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요.
지금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이 하나님이 들으셨을 때 어떻게 느껴질까요? 진솔되게 느껴질까요?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 주요라고 부를 때, 아버지라고 부를 때 이 부름이 하나님의 귀에 진솔되게 들릴까요?
우리가 고난을 만나지 않으면,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조차도 진솔되게 부르지 못합니다. 인생의 회복은 인생의 희망은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으로 보일 때 시작돼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보여질 때 인생의 희망이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희망으로 보일 때 교회도 회복이 시작이 되고, 인생도 회복이 시작하고, 가정도 회복이 시작되기 시작합니다. 가난해지지 않으면 문제가 엄습해 오지 않으면 어려움에 둘러싸여지지 않으면 유일하신 하나님을 못 봐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하신 그 하나님을 못 보고 못 경험해요.
이게 인생의 교만이에요. 조금만 여유 있어도 조금만 삶이 부유해져도, 조금만 기회가 많아져도 세상에 널린 이 하나님을 못 만나요.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분이잖아요. 계시지 않는 곳이 없는 분이에요. 근데 못 만나요.
요나는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봤다 이렇게 고백해요. dy나는 소명을 받고도 사명을 받고도 하나님의 성전을 보지 못했어요. 요나가 고난의 끝에 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성전을 봤다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요나가 이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고 이제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고려에게 명령하셔서 토해내게 하셨던 것입니다. 2절 전반절입니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그러니까 고난이 눈앞에 오자 하나님의 일을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7절 전반절입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인생의 고통으로 피곤해지고 나서야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인생이 캄캄해지고서야 나서야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다 상달됐다면 난리가 났을 거죠. 세상은 우리의 많은 기도는 하나님께 들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쓰레기 취급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인생의 고난을 겪고 나서야 누나가 드디어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마찬가지예요. 여러분과 저가 인생의 어려움 속에 처해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못해요. 내 마음의 소원은 기도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기도는 못해요. 교회의 어려움이 떠나가잖아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못 드려요. 하나님이 응답하실 만한 기도도 못해요. 그래서 이제 여러분에게 희망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앞길이 캄캄해졌다고 해서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앞길이 어두워졌다고 실족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온 거예요.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진솔하게 부를 그때가 온 거예요. 비로소 내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할 때가 온 거예요. 비로소 이제는 상달되지 않는 기도를 내 마음 뜻대로 하나님께 드렸다면 이제 비로소 하나님이 들으실 기도를 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 이게 기회가 아닌가요? 어쩌면 이게 더 은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어려우면 인생의 힘듦은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실전적인 어려움은 아니더라도 이 땅에 많은 젊은이들과 어른들이 이 외로워한다는 건 교회에는 기회인 거예요. 힘들어 한다는 건 교회의 기회인 거예요. 혼자 걷지 않을 거리는 이 찬양에 막 사람들이 매료되고 거기에 빠져서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지금 이 땅에 교회의 기회가 왔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할 거거든요.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할 거거든요. 다시 진솔된 기도를 하기 시작할 거거든요. 영적인 어둠과 캄캄함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게 합니다. 이 땅에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렸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했어요.
근데 영적인 어둠과 캄캄함은 다시 이 땅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는 자리로 이끌어낼 거예요. 여러분 이게 기회지 않을까요? 그래서 절망 앞에서 주저앉지 마십시오. 힘들다고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때가 된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름을 진솔하게 부를 때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할 때가 된 것이고,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의 눈에 들어올 때가 된 거예요.
우리 교회에 있는 어려움들이 여러분과 저를 이렇게 이끌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 어려움들이 여러분과 저를 이렇게 멋지게 이끌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