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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토소설/ 그에게로 가는 길
1회
글: 김향지 사진: 헤르메스
장지에서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뻔 하였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 때문이었다. 하관 후에 봉분이 만들어지고 그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그 비석에는 아버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생물연대와 슬하의 자식들 이름이 순서대로 새겨져 있었다. 비석 앞에 새겨진 네 명의 자식들 이름을 보니 아버지는 그래도 인간 본연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성공적이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학생 김 아무게 몇 년 몇 월 졸卒이라고 쓴 생몰 연대부분에서 나는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마치 여고 때 단체로 책상 위에 올라가 의자를 드는 기합을 받을 때처럼 막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나는 심각한 상황에서는 이상하게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여고 때 단체 기합을 받을 때면 얼마나 곤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벌에 대한 고통보다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 못해 그게 더 힘들었다. 이번 상황에서도 그런 예의 웃음이 터지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성으로 제어시켰다. 비석에 새겨진 그 졸卒이라는 말의 어감이 주는 바는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 졸도했다,졸도하겠다, 졸로갔다, 졸지에 등등 하지만 그 우스꽝스러운 어감에 비해서 졸卒이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의미심장하다. 보통 학교를 마친 경우에 그 졸이라는 단어를 쓴다. 이 때 졸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졸卒 역시 또 다른 의미를 시작하지는 않을까. 아버지에게는 어떤 시작이 놓여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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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
아무튼 아버지의 이번 생은 무사히 마쳤다.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칠십여 평생을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마감했다. 아버지는 이에 대해 매우 불만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아버지는 자신의 묘비명에 "민주투사 김 아무개"라는 말을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 아버지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아버지가 그렇게 유언했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부담감을 안고 그렇게 묘비명을 썼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죽음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자신의 삶에 대한 정리를 못하고 가셨다. 학생으로서의 아버지는 이번 생에서 무엇을 배우고 갔을까.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는 그다지 훌륭한 분은 아니셨다.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좀 인색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죽음은 신령스러운 힘이 있는 것 같다. 가해자였던 아버지를 동정케 하는 또는 이해하거나 용서하는 경지까지 이르게 한다. 아니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용서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치매로 과거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고 유아적 수준으로 퇴행한 것을 보았을 때, 또는 가끔 정신이 돌아와 그나마도 자식들 걱정하는 독백을 들었을 때, 그때 이미 아버지의 인간적 과오를 용서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버지의 졸업으로 인해 우리 가족은 아버지라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민주투사임을 자처하면서도 우리 가족에게는 지독히도 비민주적이었던 아버지. 가족들의 온 가슴을 깊게 휘젓고 간 아버지. 하지만 우리들의 노예근성은 그 압제자의 압제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그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에 어머니가 다니던 칠성사에 아버지의 영정과 신위를 모시면서 삼우제가 끝났다. 절에서 내려온 늦은 오후쯤 어머니는 기진해 쓰러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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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나는 그 옆에 앉아서 다른 곳보다 유난히 희게 남은 벽의 사각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아버지 장례식 때 영정으로 쓴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었던 곳이었다. 그 사진은 돌아가신 요즘의 나이보다 십년은 젊은 오십대 후반의 모습이었다. 곤색의 양복에 자줏빛 와이셔츠를 입고 감색 넥타이를 한 상당히 세련된 모습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자신의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그리고 보면 아버지는 상당히 자신의 죽음을 미학적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자신의 영정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미 마련해 놓았던 것을 보면. 삼우제도 지냈고 이제는 일상에 복귀할 일만 남았다. 하지만 나는 일상으로 복귀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듯 나도 정리할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녀와 만나기로 한 시내의 커피숍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 많이 힘들었죠, 기분은 어때요?" 그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나는 덤덤하게 괜찮아요, 라고 말했다. 택시 안이라 그렇기도 했지만 왠지 그의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그에게 한없이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태는 그에 대한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게 된다. " 언제 와요?" 나는 내일 출발 할 예정이라 말했다. 출발할 때 전화 달라며 그는 더 이상 통화를 길게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전화를 끊었다. 아, 이런 세심함이라니. 가슴이 아릿해져 왔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세심하고 다정했다. 이번 아버지 장례식에 그도 문상을 왔었다. 서울에서 이곳 마산까지 내려와 준 그를 보고 난 더욱 울음이 복받쳐 올랐었다. 검은 양복이 하얀 와이셔츠 검은 넥타이까지 맨 경건한 그의 조문을 받고 크게 읍소 했었는데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그도 눈시울이 붉어졌던지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과분하고 욕심나는 물건 같았다. 우연히 습득한 좋은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사용하다가 이제 아예 그 물건이 내 것 인양 착각하는 그런 입장과 같다. 이제는 정말 원래 있던 곳으로 가져다 놓아야 하는데...... 늘 그렇게 생각해 왔다. 나의 심장이 그걸 알려왔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련한 것, 아버지 장례식 때 그를 보고 서럽게 울었던 것, 이런 행위들이 위험 수위를 알리는 경고였다. 절대로 남자에게 빠져 들지 말 것, 그러기에 전에 먼저 내가 찰 것, 이라는 수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심장이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만하고 있었다. 그와 관계를 정리하기 전에 정작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와의 관계 규명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이일까. 그건 가끔씩 그가 먼저 던지는 의문이었다. "나를 사랑해요? 사랑하기나 하냐고요?" 그가 그렇게 물을 때 나는 말없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을 뿐이다. 그런 내 태도를 보고 그는 씁쓸해 하였다. 아버지의 위독 상황을 전해 듣고 내가 마산으로 내려오려고 기차를 탈 때 그는 역까지 배웅 나와서 말했었다. "내가 해 줄게 없네요. 우리 차라리 결혼 할까요? 결혼한 부부라면 이럴 때 같이 차를 탈 수도 있을 텐데......"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그에게 내가 너무 깊이 걸어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섣부르게 결혼이라는 소리를 꺼내지만 않았더라도 내가 그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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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아직 나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왜 에덴을 떠나왔을까.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것은 십년 전이었다. 어쩌면 영원히 만날 수도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다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에덴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하며 그녀의 연락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이번에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나는 연락처를 받아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칙으로 하면 그녀가 나에게 연락을 하라고 할 처지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서로 연락을 하면 안 되는 관계였다. 그런데 그 원칙을 깨고 그녀가 나에게 접촉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결정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하게 된 이유는 어머니가 전한 부가적인 말 때문이었다. 그녀가 에덴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도대체 왜? 그것도 그녀가! "영혜야!" 그녀가 내 앞에서 서서 웃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녀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나는 그러지 않고 약간 입소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오랜 만이예요." "서울에 있다고?" "네." "어머니를 우연히 만났었어." "들었어요, 어머니한테." "이렇게 만나게 되는 구나, 참 네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만나도 되는 건가요?" 나는 여전히 마음의 긴장을 풀지 못하고 말했다. "나 이제 증인 생활 안 해, 이제 더 이상 아니야." "더 이상 증인이 아니라고요?" "응, 아니야, 확실히."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듯이 그녀도 자신이 증인이 아님을 세 번이나 거듭 강조했다. 그녀는 표정도 밝았고, 주저함 없이 당당하게 자신이 배교했음을 알렸다. "왜죠?" "참을 발견했기 때문이지." "그게 참이 아니었던가요?" "그때는 그게 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이제는 아냐." 나는 혼란이 왔다. 그리고 아득히 어디론가 떨어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있던 그곳, 영적 에덴은 내가 늘 최종 귀향지로 삼고 있던 삶의 이정표 같은 곳이었다. 거기에 가고자 했던 것은 그녀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대 그녀가 에덴을 떠나와 버렸다니. 그것도 자신이 참이라고 고집하던 것을 부인하고는. 갑자기 이정표가 사라진 느낌이다. "끝이 안 보이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의심하게 되어 있지 않을까?" "......" "가난, 폭력, 이혼, 자식과의 생이별, 그리고 너의 배교......" "저 때문에 상심이 컸을 거예요." "한번은 일하고 돌아왔는데 내 눈앞에서 집이 불타고 있는 거야.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어." 나는 그때 문득 성서의 인물 욥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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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회
자녀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재난으로 잃고 자신의 몸에 욕창마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는데 그의 아내가 말하길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고 한. "그 이후 이 자매, 저 자매 집으로 전전하는 생활을 하면서 전도봉사를 나갔는데 사람들이 나보고 할머니라고 말하는 거야. 너무 놀라서 내 나이가 얼마나 되 보이냐고 물었더니 육십쯤으로 보인다는 거야. 이제 사십 초반인 나를 보고......" 나는 분노가 일었다. 정녕 과부의 두렙 돈까지 빼앗아야 했나. 우리가 진실로 참이라고 믿는 종교 안에서도 얼마나 불공평하던지. 종교생활을 순탄하게 하면서도 물질적으로도 부자인 형제자매가 얼마나 많은데. "지독한 벼랑이었지.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정말 참일까 회의하기 시작했어." 거듭되는 시련으로 믿음을 회의하며 에덴을 떠나오게 되었다는 참담한 그녀의 술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다시 욥을 떠올렸다. 욥은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고수했고 결국 나중에는 곱절되는 축복들을 하느님으로 받게 되었다. 결국 우리가 믿음이 약한 것인가. "이제 정말 참 진리를 발견했어, 영혜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회중을 떠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일 년 되었어." "일 년 만에 또 다른 진리를 발견 하셨다구요?" "이 번에는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앞으로 5년 후면 알 수 있어." 그녀는 열심히 자신이 믿게 된 새로운 믿음에 대해서 전하기 시작했다. 미륵불, 정도령, 구원. 그녀의 말들이 무의미하게 내 귓전에서 왕왕거리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십 년 전처럼 마주 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서로가 아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빙글빙글 원심력을 그으면서 멀리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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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S와는 어떻게 되었니?"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S라는 소리에 나는 쿵하고 어디론가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가슴의 주홍글씨를 파헤치고 있었다. " 헤어졌어요." 나는 아무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같이 살려고 했던 게 아니었니?" " 쉽지 않았어요." " 순간의 유혹이었니?" " 제가 언제까지 그 일로 성토당해야 하는 걸까요?" " 기분이 상했니? 미안하다. 널 보니 생각이 나서......" 그녀가 진정으로 미안 해 하는 눈치였다. "서울에서 뭐하니?" "잡지사 근무해요." "그럼, 글을 쓰는 일을 하는 거니?" "네." "잘됐구나, 넌 글 쓰는 거 정말 좋아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서먹서먹한 기운이 자꾸만 감돌았다. 그것을 메워보려고 그녀가 자꾸만 내게 질문을 했다. "결혼은 안 할 거니?" "........" "사귀는 사람은 있어?"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결혼 할 사람이야?" "아뇨." 내가 그렇게 말하고 또 침묵을 지키자 그녀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우리 노래방 갈까?" 그녀가 대뜸 말했다. "상 중이예요,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어제 삼우제였어요." "아, 그랬구나." 나는 더 이상 그녀와 할 얘기가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녀를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믿고 있는 종교 정말 좋아. 영혜, 네가 심성은 착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어. 어쩌다가 유혹당해서 그렇게 되었지만 말야. 이제는 그런 생활도 청산했으니 됐지 뭐. 그러니 나하고 한번......" "저, 지금 가야 해요." "아니, 저녁밥도 먹고. 좀 더 있다 가면 안 돼?" "서울 올라 가봐야 해요." 나는 일어서기 전에 핸드백을 열었다. 그리고 미리 봉투에 담아서 준비 해 온 것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제 마음이에요. " 그녀가 봉투를 받아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 안 할래. 내가 왜 이런 걸 받아야 해." "죄송해요. 그렇게 마음을 전해서요.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괜찮은데..." "그리고 앞으로는 더 이상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피차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뭐?"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총총 걸어서 나왔다. 무조건 걸었다. 시원했고, 섭섭했고, 아팠다. 그 봉투에 든 돈은 하느님 대신에 내가 그녀에게 주는 위로였다. 정말 조금의 위로라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배교자!' 내 입에서 자꾸만 그 소리를 되씹고 있었다. 그건 그녀에게 하는 비난의 말인지 내게 하는 비난의 말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불온했던 시절이었다. 밤마다 술을 먹고 들어와 군부 독재자 전두환을 욕하는 아버지를 견디는 일은 지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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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나는 아버지가 죽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버지는 죽지를 않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광기도 도무지 죽어지질 않았다. 아버지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면서도 정작 집에서는 독재자였으며 폭군이었다. 나는 그 망할 민주주의가 저주스러웠고 전두환도 저주스러웠고 술도 저주스러웠다. 오로지 밤에 편하게 걱정 없이 잠자는 것만이 나의 진정한, 아니 우리 가족들의 소망이었다. 대학을 다니다가 자퇴를 하고 회사엘 들어갔다. 가족을 아니 아버지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집을 나오는 것뿐이었다. 아버지와 싸우고 아니 정확히 아버지에게 죽어라고 악을 쓰고 달려들다가 죽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고 집을 나왔다. 그 후로 집을 들어가지 않았다. 우선 취직을 했다. 신발 만드는 공장엘 들어갔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조금의 돈이 모이자 방을 하나 얻어서 나왔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다시 대학엘 진학하고자 마음먹고 입시학원에 등록을 했다. 낮에는 신발공장에 다니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진학 준비를 위해 공부를 했다.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국문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앞에 다니던 대학은 법정 계열이었다.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과를 어머니가 공무원을 원을 했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이나 쳐보려고 들어갔었다. 공부를 해 낼 수가 없어서 자퇴를 했다. 입시학원에서 S를 만났다. S는 학원 강사였다. 그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을 하는 데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웠다. 남자는 아버지 같은 폭군만 있는 줄 알았는데 세상에 이런 남자도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남자였다. 자상하고 부드러워서 그가 너무 욕심이 났다. 결국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나의 자취방에 놀다 가곤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전도 봉사를 나온 그녀와 만났다.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 할까요?" 누가 왔는지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나에게 그녀가 웃으면서 대뜸 한 질문이 그것이었다. 황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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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신이 계실까요? 신이 계신다면 왜 이렇게 세상의 불공평을 방관만 하고 있을까요?" 그녀는 삼십대 중반의 아줌마였다. 아줌마의 입에서 범상치 않은 말들이 튀어 나와서 나는 놀랬다.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전도 봉사를 나왔다고 했다. 나는 '성경'이란 말에 그녀가 교회에서 나온 줄 알았다. 나는 교회는 싫어요, 라고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이 교회에서 나온 사람은 아니라면서, 왜 교회가 싫으냐고 물었다. 나는 대충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있는 십자군 전쟁이며, 세계의 큰 전쟁들이 알고 보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전쟁이기 때문에 모순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면서 나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그때 S가 내 자취방으로 놀러 와서 얘기가 중단되었고, 나는 형식상 다음에 오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거절 할 수가 없어서 내방에 그녀를 들였고 그렇게 해서 정기적으로 그녀가 내 방을 방문했다. 나는 그녀와 정기적으로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점점 성경에 대해서 신빙성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내가 하고 있는 행위, 즉 S와의 사랑이 심각한 부도덕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S는 내가 성경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바른 양심을 가지기 위해서 결심 했다. S와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S는 나와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내와 이혼을 하겠다고 했다. 내가 원한다면 결혼하자고 했다. 그와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 방을 옮겼다. 학원도 그만 나갔다. 침례 받은 교인이 되었다. 그렇게 마음을 세울 종교를 만나면서 희망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가 밤낮으로 열망하던 민주주의 보다 내가 믿는 종교에서 제시하는 '신의 나라'가 더욱 나에게는 강력한 희망이 되었다. 그것을 믿고 또 내가 믿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기 위해서 집집을 전도봉사 다녔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전도가는 길에 다시 S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S는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S가 안타까웠다. S에게 전도를 해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러면 그도 성경공부를 해보면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 줄 깨닫고 마음을 돌이키겠지 라고 생각했다. 내가 S에게 성경공부를 제안했다. 그는 좋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S를 만나게 되었다. S를 다시 만난 내가 이번에는 흔들리게 되었다. 침례 받은 교인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죄를 짓고 말았다. 몸의 기억은 강력했다. 이상하게 나도 S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S와 살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사실을 S의 부인이 알게 되었고 이것을 회중의 장로에게 전화로 고발을 했다. 나는 이 일로 인해서 회중에서 제명처분을 당하게 되었다. 제명처분 당한 사람은 회중의 형제자매와 교분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완전히 죽은 사람 취급당하였다. 하지만 복귀의 길은 있었다. 언제나 뉘우치고 돌아가면 일정한 단계를 거쳐 제명처분이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S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회중의 형제자매와 그들과 누리던 에덴을 포기하는 길을 택했다. 주홍글씨를 가슴에 박은 채, S와의 삶을 택하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단 한순간의 헛된 꿈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꼬리를 밟고 형사를 대동해서 찾아 온 S의 아내에게 머리채를 낚아 채였다. S는 아내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싹싹 빌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것은 환멸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서울행 기차를 탔다. 십년 동안 고향 쪽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살았었다. 하지만 늘 생각했었다. 내가 다시 돌아갈 곳은 그곳, 에덴임을. 나를 진리의 길로 인도한 영적 엄마인 그녀가 있는 곳, 단호한 도덕적 표준으로 나를 일깨워 주던 영적형제자매가 있는 곳으로 언젠가는 회개하고 돌아가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슴속의 주홍글씨는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나를 괴롭혔다.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의 내면에도 욕망이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내 가슴속의 주홍글씨가 그 욕망을 제어하는 또는 비트는 제어장치 역할을 했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나를 시니컬한 괴물로 만들어 갔다. 나는 행복이나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 생각하며 철저히 방어벽을 쌓고 열심히 일만 했다. 하지만 독도 약이 되는 경우도 있듯이 그런 수형의 세월 끝에 야간대학도 졸업하고 글을 쓰는 직업인 잡지사 기자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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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 이 집 스테이크 괜찮죠?" 그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네." 속으로 오늘은 꼭 말하리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여길 벌써부터 함께 오고 싶었어요." 그는 맛있거나 좋은 것을 보면 내 생각이 난다 했다. 나는 마음이 아렸다. 나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녜요,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별의 장소로 북한산 자락의 레스토랑은 적합한가. 헤어지자는 이유는 두 가지 시나리오로 준비했다. 하나는 헤어지는 이유를 그에게 두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내게 이유를 두는 것. 첫 번째 이유는 너무 잔인하다. 차라리 두 번째 이유가 정당하다. 나에 대한 환멸을 심어주는 것. 그런데 그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커피를 주문했다. 수정덩어리 같은 검은 각 설탕이 녹기를 기다렸다. 그와 만난 것은 사진 때문이었다. 모 대학의 평생교육원의 사진반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그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어느 통신업체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후에 사진 에세이를 쓰는 게 그의 소망이라고 했다. 여성잡지사에서 주로 인물 탐방 기사를 쓰던 나는 인물 취재를 할 때마다 사진 기자를 대동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언젠가부터 나도 사진을 배우고 싶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미소가 더 눈부셨다. 아무튼 나의 시선이 간간이 그에게로 향하는 것을 나도 느낄 수가 있었다. 첫날의 뒤풀이였는데도 노래방에서 술집 또 포장마차로 휩쓸려 다녔다. 나도 술이라면 어지간하게 마시는 주당이 되어 있었던 즈음이라 술자리는 스스럼없이 사람들과 어울렸다. 눈을 떠보니 황당했다. 그와 함께 자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그다음 수업을 들으러 갈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다음 수업을 참석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수업 받으러 가지 않았다. 그 다음 시간도 갈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그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도 한번은 만나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가 먼저 전화를 하다니 의외였다. 그는 왜 수업 들으러 오지 않았느냐, 불편하면 자기가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냥 사정이 있어서 안 갔을 뿐이지 수업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했다. 종강되는 날까지 그날 우리가 잠을 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그에게 더 이상 예쁘고 조신하게 보일 필요도 없었다. 처음 만남부터 갈 때까지 가버렸기에 그는 나를 그렇고 그런 여자라고 생각 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나보다 4년이나 연하였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전망을 바랄 게 없었다. 나는 그게 편해서 있는 그대로 그에게 보여줬다. 주로 나는 시니컬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고 있었다. 4년 동안이나! 그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보통의 남녀 사이에 있는 어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서로가 기대한 게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요즘 그것이 깨어지고 있었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나보다 4년 연하라 해서 그가 어려 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나보다 뭔가를 더 이해하는 것 같았고 더 너그러운 것 같았다. 내게 있어서 남자란 어떤 존재인가. 여고 때 어떤 시를 만났었는데 거기서 '여자에게 있어서 남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이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그 시가 문제였다. 그 시를 만난 이후 나는 남자를 이분법으로 보았다. 이 남자는 내게 있어서 기쁨일까, 슬픔일까. 하긴 그렇기도 했었다. 슬픔이거나 기쁨이었다. 처음에는 기쁨이었다가 나중에는 슬픔으로 변하기 십상이었다. 남자들이 내 삶의 중간지대에 남아 있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남자들은 왜 나를 떠나가는가. 그런데 그는 달랐다. 그는 나를 떠나가던 많은 남자들처럼 같은 이유를 달지 않았다. 너는 너무 무거워, 너는 너무 강해, 너는 너무 비현실적이야, 몽환적이야. 나를 떠나는 남자들의 이런 공통된 이유가 그에게는 오히려 관심이었다. "참 특이하네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의 말버릇은 그랬다. 무슨 별종이나 관찰하는 것처럼 나를 관찰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의 방향까지도 정해주곤 했다. 그건 나를 가두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을 다시 한 번 생각게 해주는 안내였다. 나는 그의 여유로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궁금했다. 나는 부드럽고 여유로운, 그리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남자에게는 이겨먹을 자신이 없었다. 쓸데없이 내가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게 늘 언제나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들통이 났다. "거봐요, 그렇게 웃으니까 참 좋네요." 그는 완전 나를 어린애 취급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앞에서 시니컬하게 구는 것도 힘이 들었다. 동생에게 못되게 구는 누나가 없듯이 더 이상 나는 그에게 못되게 굴 수 없었다.
-계속-
10회
"설탕이 조금씩 녹을 때마다 맛을 봐요. 맛이 점점 달라져요." 그가 커피를 맛보며 말했다. "우리 헤어져요." "......." "왜요?" 그의 눈이 커졌다. "난 이 설탕처럼 상진 씨에게 달콤함을 줄 수 없는 여자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충분히 가치가 있는 사람 이예요, 당신은. 그리고 이 설탕은 단맛만 나는 설탕이 아녜요." "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 여자예요. 여자로서는 좋은 여자가 못 되요." "좋은 여자 바라는 거 아녜요. 그대로가 좋아요." "내 치부까지 발가벗겨 보이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좀 그나마도 여운이 남게 미학적으로 헤어져요." 내가 울먹이다 시피 말했다. 그러다가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난 말예요....." 나는 내친 김에 술술 말했다. 내 치명적인 약점인 주홍글씨에 대하여.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난 차라리 홀가분했다. 밖으로 나와 아래로 걸어 내려가려다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는데 통 유리창으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넋 나간 듯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미안해요. 나는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바삐 걸어 내려와서 택시를 탔다.
-계속-
마지막회
아버지의 49제였다. 아침 일찍 가족들과 칠성사로 갔다. 오늘 드디어 아버지는 수미산을 넘어 염라대왕 앞에 도착하여 심판을 받는 날이다. 염불소리 목탁소리와 함께 나 역시 진심으로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49제의 가족들의 태도나 기도가 아버지의 재판에 영향을 준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난 한 번도 아버지를 위해서 뭔가를 해 본적이 없었다. 단지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혹은 빨리 죽기를 염원하는 것 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위해서 뭔가를 하고 싶었다. 과거의 내 종교적 신념이 무엇이든 아버지를 이롭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백배든 천배든 할 수 있었다. 지상에서 외로웠던 아버지. 밤마다 술을 먹고 토악질하듯 고함지르던 것을 어쩌면 이제는 조금은 이해 할 듯도 한데. 아버지가 원하던 정치적 에덴, 내가 원하던 종교적 에덴. 그 둘은 그 어떤 공통점이 있었던 같기도 하다. 단지 형상이 달랐을 뿐. 아버지, 저승에서는 제발 자숙하시고 계세요. 다음에 내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면 그때는 서로 가슴을 터놓고 얘기나 좀 해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노했는지, 난 왜 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 그때는 뭔가 말 할 수 있지 않겠어요? 49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의 가로수들이 와락와락 내 곁으로 달려드는 것처럼 한 얼굴이 내 마음으로 달려 들어왔다. 서울을 떠나 온지, 한 달.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 데 집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어떡하나 저 남자를. 눈물이 나왔다. 그가 나를보고 웃었다. 나도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그냥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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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진,출연:헤르메스
작가 프로필
김향지 경남 진주 출생 창원대학교 국문학 석사 동의대학교 대학원 철학박사수료 초·중·고 학생들의 독서·논술지도와 동의대학에서 논리학을 강의함 창원 외국인 인력지원센터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 강의함
1981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장편소 설「파란 낙엽」을 완성함 1982년 경남공업전문대학 학보사 주최 고교현상문예 단편소설 「탈출광」당선 1982년 인천대학교 학보사 주최 고교현상문예 단편소설 「추이」당선 1983년 대구대학교 학보사 주최 고교현상문예 단편소설「돌개바람우흐로 흐르는 강」가작 당선 1996년 경남문학 신인상 소설부분 단편소설 「우리는 미국으로 갈 것이다」당선 2007년 부산 영상작가원 창작시나리오 공모 장편영화시나리오「빙화」우수상 수상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용목」최종 심의작으로 오름 그 외 꽁트 「금붕어」,「여우비」,「술과 여자」등이 『여고시대』, 『향장』, 『샘터』의 공모에 입상됨. 『낮은 시』동인으로 활동하여 동인시집 1, 2, 3권을 공동 출간함. 소설 동인 「윌」동인으로 창작활동을 하고 있음. 파스칼 융합논술연구소(http://cafe.daum.net/pascal)운영 희진 논술학원 운영 경남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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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향지님의 좋은 소설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방문해 주십시요. 앞으로 기대가 큽니다.
감사합니다.(경남ㅁ소설가협회 카페에 스크랩해 갑니다.)
헤르메스님! 환영합니다
여기에도 가입을 해주시고, ,,,
앞으로 좋은 글 많이 보여주세요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