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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로 명절세러 가는 날 서울역에 무대뽀로 들이돼니
6시40분 구미행 입석표가 있어 구미역에 10시 지나 내려
요길하고 금오산으로 이동 올라갔다
십여년전에 올라갔을땐 정상은 미군부대가 점유 했는데
미군부대가 양보를 해서 정상을 되찾았다는 거를 어데서 봐서
다시한번와봤다
그때와 같이 올라같는데 오형 돌탑이라는거이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헌월봉정상에 서니 날씨가 좋아 경상도의 명산이 전수 보인다
동쪽으로는 보현산 팔공산 비슬산이
남쪽으로는 가야산 수도산 이
서쪽으로는 백두대간 황악산 민주지산 덕유산이
간만에 눈이 호강을 한다 하산길은 안가본 지경리 능선으로 하산하였다
금오산金烏山(976.6m)은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거인 같은 산이다. 구미 일대에 홀로 우뚝 솟아 주변을 호령하는 장군 같은 산이다.
금오산(金烏山)은 경상북도 구미시 남통동에 있는 산이다.
금오산의 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는데, 중국의 오악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고도 했다.
금오산이라는 명칭은 이곳을 지나던 아도(阿道)가 저녁놀 속으로 황금빛 까마귀가 나는 모습을 보고 금오산이라 이름 짓고,
태양의 정기를 받은 명산이라고 한 데서 비롯됐다.
금오산의 능선을 유심히 보면 ‘왕(王)’자처럼 생긴 것 같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양인데,
조선 초기에 무학(無學)도 이 산을 보고 왕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
해발 977m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이곳은 구미시의 성장과 함께 관광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좁고 긴 계곡 입구에는 금오산 저수지가 있으며 구미벌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이 산은 1970년 6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명산은 물론 족보를 따지면 홑산이 아닌, 수도지맥에서 분기한 금오지맥의 산이다. 지맥 이름에서 알 수 있듯 81km 산줄기의 맹주인 셈이다.
이 산은 예로부터 경북 8경의 하나로 꼽혔으며 기암절벽과 울창한 숲이 조화로워 경치가 수려하다.
인동 방면에서 금오산을 보면 능선이 흡사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 때문에 금오산 와불臥佛이라고도 한다.
정상 인근에 고원 분지가 있는데, 옛날에는 ‘성안마을’이라는 촌락이 있었으며, 해방 전후까지 1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가장 높은 봉인 현월봉에 오르면 북동쪽으로 구미시내와 낙동강이 보이며 동쪽으로 구미공단이 내려다보인다.
정상 일대는 미군기지가 있어 접근이 어려웠으나 2014년 시설물을 철거하고 등산로와 표지석이 세워졌다.
더불어 정상 부근에는 길이 2km의 금오산성이 있고 암벽 밑으로 벼랑 끝에 지지대를 세워 만든 약사암이라는 사찰이 있다.
북쪽 계곡의 중턱에는 도선굴이 있으며, 북서쪽의 거대한 암벽에는 보물 제490호인 금오산 마애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해발 400m 지점에는 높이 27m의 대혜폭포(일명 명금폭포)가 있어 시원하게 물이 떨어진다. 옛날에는 이 고장의 유일한 농업용 수자원이었다고 한다.
금오산은 구미시내에서 가까우며, 산 중턱 해운사 인근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다.
1970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산 입구에는 1993년 개장한 테마파크 금오랜드가 있는데 규모도 작고 시설도 낡아서 이용객은 많지 않다.
금오산은 구미시의 진산으로 금오랜드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해운사 방면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등산로이며,
이밖에 법성사, 칠곡 북삼고등학교, 칠곡 지경마을 기점 등의 등산로가 있다.
달이 걸린다는 뜻의 금오산 정상 현월봉懸月峯은 이름처럼 멋진 조망을 보여 준다.
탁 트인 정상에 서면 북동쪽으로 구미시가지가 막힘없이 펼쳐지고 멀리 낙동강 너머로 산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남으로 팔공산과 단석산,비슬산 동으로는 가야산에서 수도산까지 뻗는 장쾌한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장 대표적인 코스는 금오산저수지가 있는 케이블카 정류소 방면이다.
케이블카 정류소와 해운사를 거쳐 대혜폭포를 지나 할딱고개로 올라, 오형돌탑을 거쳐 마애석불과 금오산의 명소인 약사암을 거쳐
현월봉에 서는 것이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하산은 도수령을 거쳐 법성사에서 도로로 내려와 야영장을 지나 금오산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다. 총 11km 거리이며 5시간 정도 걸린다
금오산성 이야기
대개 산성(山城)은 임진년(1592, 선조25) 이후에 만든 것이었다.
산성에는 별장(別將)이 있었는데, 그 영헌(鈴軒)과 관청이 자못 고을의 관공서와 같았다.
그곳의 비옥한 전답과 평평한 구릉지대는 수백 호의 백성을 수용하기 충분했고, 아홉 개의 우물과 일곱 개의 못은 만이나 천이 되는 병사와 말이 물을 마실 만했고,
세 고을의 창고가 있었는데 몇 해의 군량미가 될 만했다. 지리적 이점과 천연적인 험준함은 참으로 우리 영남의 으뜸이었다.
여기에서 금오산의 군사적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그곳은 외구를 막을 수 있는 곳이라 하며, 자신의 선조인 장현광(張顯光)이 피신한 적도 있다고 했다.
금오산은 경사가 급하고 험난한 편이나, 산꼭대기는 비교적 평탄한데 이곳에 금오산성(金烏山城)이 있다.
고려 말기에 쌓았다는 석성인 금오산성은 북쪽만 트인 천험의 요새로 ‘성안마을’이 있다.
산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말했다. 산성의 축조시기, 산성에 있는 관청, 산성의 크기. 산성의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지리적 이점과 천연적 험준함이 영남의 으뜸이라 했다.
이처럼 그는 금오산을 경관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산과 부춘산에 비견되는 은자의 산,
그리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 그리고 지리적 이점과 천연적 험준함이 뛰어나 영남의 으뜸가는 산이라 했다.
약사암
헌월봉의 왼쪽에 하나의 크고 높다란 바위가 공중을 떠받들고 우뚝 솟아 있다.
중간에 입을 벌린 듯하며 큰 구멍이 나있고 좁다랗게 석문(石門)이 나있다.
구멍 안으로 십수 보 걸어가면 약사암(藥師菴)이 있다. 암자는 암혈에 지었는데,
용마루와 기와가 없어도 비를 가릴 수 있으며 또 창문이 없어도 바람을 막을 수 있었다.
암자에는 한 분의 늙은 스님이 있었다.
문에서 우리를 맞이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금강산에도 있지 않는 것입니다.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普德菴)은 구리 기둥에 쇠사슬로 되어 있어 기이하다고 하면 기이하다고 하겠지만,
이것에 비하면 풍치가 하등급입니다”라고 했다.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손발을 써서 이렇게 높다랗게 매달린 몇 칸의 집을 지었는지.
그 아래에 있는 약천(藥泉)에는 차가운 물이 돌구멍에서 흘러나오는데, 동료와 함께 표주박에 떠서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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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평소에 “잔치자리에서의 즐거움이 산 정상에까지 가보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한다”고 하며, 산정상에서 그 즐거움을 드러내었다.
우선 후망대의 높이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다. 높이는 만 길이나 되며 그 형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했다.
그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시를 읊었고, 가야산, 팔공산 등이 바라보이는 조망도 이야기했다.
금오산 산행
하늘의 고요가 들리는 도선굴과 명금의 대혜폭포
멀리서도 우뚝하다. 금오산에 대한 첫인상이다. 그 인상은 이 고장의 인물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먼저 채미정(採薇亭)에 든다. 채미, 굶어죽을 각오로 지킨 절의가 아닌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끝내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의 고사를 상기시킨다.
채미정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다. 명승 제52호다.
정문인 흥기문(興起門)을 들어선다. 수백 년 된 거목의 팽나무는 선생의 풍모요, 우뚝한 금오산은 드높은 절의다. 절의는 옳음이다.
그 옳음을 끝까지 지키는 이가 얼마나 되는가. 지키면 저리 높고, 높아서 숭앙된다.
경모각에는 숙종의 어필오언구가 걸려 있다. 높은 산을 흘러온 청류가 선생의 회고가(懷古歌)를 낭랑히 읊조리며 세상에 길이 전해주고 있다.
금오산(金烏山)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립공원이다.
산세의 규모가 컸더라면 국립공원이 될 만한 산이다. 해발 높이는 976m, 정상 현월봉까지는 3.3km다. 금오산 산명의 유래는 아도 스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도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스님이다. 그 스님이 태양 속에 산다는 황금빛 까마귀 금오(金烏)가 저녁노을 속에 비상하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금오는 태양의 이명이며, 삼족오(三足烏)라 부르는 신화 속의 새다. 금오산은 여수, 경주, 하동에도 있다.
구미의 금오산 말고는 한자 ‘오’ 는 모두 자라 ‘오(鰲)’ 자다. 무학대사가 이 산에서 왕기를 보았다고 한다.
우연일까. 현대사가 말해 주고 있으니 금오산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태양의 정기를 받은 특별한 산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금오동학(金烏洞壑) 암각서를 지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박에 붓을 크게 휘둘러 썼다. 초서의 대형 필체가 활달한 기운을 준다.
글자마다 만학동천이다. 안내문에 초성(草聖)이라고 일컬어졌던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글씨라고 적혀 있다.
해운사로 간다. 케이블카가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문명의 길은 직선을 고집하고 자연의 길은 곡선을 지키려 한다.
대혜문을 지난다. 수양벚나무가 연방. 대혜문은 그럴수록 탄탄한 성곽의 팔을 펼쳐 나무들을 그느르고 있다.
해운사 마당에 선다. 칼다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능선 아래로 급박하게 내지른 절벽들이 절을 에워싸고 있다.
그 중간쯤 길 없는 곳에 도선굴이 보인다. 곧장 굴로 향한다. 길은 벼랑이다. 이런 길로 가는 도선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깨치지 못하면 깨지고 마는 절박하고도 비장한 그 발길을 생각한다.
우리는 구도자가 아니어도 때로 외통수에 걸려 무언가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무엇을 걸 것인가. 그 무엇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굴의 내부는 생각보다 넓다. 큰 반달 모양의 굴은 고요하다. 갇히는 곳이 아니라 나아가고 열어 새로운 세계를 보는 그런 적적(寂寂)의 공간이다.
눈을 감고 앉아 있어 보니 알겠다. 도선굴은 하나의 눈이다. 밖으로 노출되기보다는 항상 무명의 심처에서 빛의 세계를 탐조하는 눈이다.
주체로서보다는 객체가 되어 사물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기 위한 심안이다. 도선은 돌아설 수 없는 절벽의 그 길을 스스로 선택했던 것이다.
켜놓은 촛불들은 미세한 숨결로 떨며 빛을 발하고,있다
반질반질한 협로를 따라 도선굴을 나선다. 곧 대혜폭포다.
할딱고개와 오형돌탑 마애여래입상
할딱고개’를 오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금오지와 구미시를 바라보다 오형돌탑에 이른다. 마침 이 돌탑들의 사연을 잘 아는 현지인을 만나 생생한 이야기를 들었다.
뇌성마비로 태어난 손자를 위하여 할아버지 혼자서 쌓아온 돌탑이다.
안타깝게도 손자는 열 살 때 세상을 떴지만 돌탑을 쌓는 일은 이어져 올해가 11년째라고 한다.
‘큰 돌 작은 돌/ 잘생긴 돌 못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못다 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고 싶다/ 석아’
돌탑의 글을 읽고 있노라니 숙연해진다. 애틋해진다. 눈이 매워진다.
사랑은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흘러 우리의 핏속에 영원히 전해지고 우리를 지키는 것이구나.
오형돌탑에서 얼마 가지 않으면 마애여래입상이 나온다. 보물 제490호다.
특이하게도 바위의 모서리 부분에 새겼다. 양감이 풍성하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이 흘러 자연미와 생동감을 더한다.
상체의 형태미는 뛰어나다. 다만 아래로 내려오며 팔의 길이나 크기 등이 비례를 벗어났다. 그렇지만 볼수록 조형미가 살아나 오래 보게 된다.
약사암과 정상 헌월봉
바위 모퉁이를 돌아서 가풀막을 기어오르면 약사암이다. 암자 바로 뒤의 거대한 암봉이 세상을 압도한다.
약사전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바위 사이의 협로를 따라 동국제일문을 지나 현월봉에 올라선다.
구미시를 품고 흐르는 낙동강이 유유하다. 약사암 전경은 정상보다는 바로 오른쪽 아래 돌탑이 있는 봉우리에서 봐야 가장 잘 보인다.
약사암은 천애절벽에 있다. 거대한 바위봉우리에 기댄 것이 아니라 바위 자체를 입고 있다.
대오의 단추 하나 풀면 바위는 암자의 날개가 되어 누군가에게 또 저 태허의 자유를 줄 것이다.
바위를 입기도 어렵지만 벗지 못하면 죽는 바로 저기서 의상이 선녀의 천공(天供)을 받으며 득도했다 하여 유래된 암자다.
첫댓글 약사암 종치러 가기 무섭겄네..맨 집밥만 먹다가 경상도 특식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하신가?
토욜 모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