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魚生一角(어생일각) ♣
- 法門(법문). 田岡(전강) 禪師(선사) -
古佛未生前(고불미생전)에,
凝然一相圓(응연일상원)이라.
釋迦猶未會(석가유미회)거니,
迦葉豈能傳(가섭기능전)가.
『옛 부처 나기 前(전)에,
한 相(상)이 뚜렷이 밝았도다.
釋迦(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니,
迦葉(가섭)이, 어찌 傳(전)할손가.』
六祖(육조) 스님의 嫡孫(적손)이신,
馬祖(마조) 스님은,
南岳(남악) 會上(회상)에서,
坐禪(좌선)만 하면서,
坐服(좌복)을 일곱 個(개)나 뚫었다.
坐(좌)에 執着(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木石(목석)으로 만든 等像(등상)같았다.
그때,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께서는,
조금도 進展(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니,
馬祖(마조) 스님이 答(답)하기를,
"坐禪(좌선)합니다."
또,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께서 묻기를,
"坐禪(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馬祖(마조) 스님의 答(답)이,
"부처가 되려고 坐禪(좌선)합니다." 라고,
하였다.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께서는,
庵子(암자) 앞의 바위(巖) 위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馬祖(마조) 스님은,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에게 그 까닭을 묻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
하니,
"거울(鏡)을 만들려고 한다." 라고,
對答(대답)하였다.
馬祖(마조) 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鏡)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또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鏡)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鏡)이 안 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
하시니,
馬祖(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牛車(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牛)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車)를 때려야 되겠는가?"
하는,
言下(언하)에,
馬祖(마조) 스님은, 確徹大悟(확철대오)하였다.
이것이, 바로【言下大悟(언하대오)】인 것이다.
南岳懷讓(남악회양) 禪師(선사)의 一句((일구)는,
그대로 生死解脫(생사해탈)을 할 수 있는,
活句(활구)인 것이다.
참다운 禪(선)을 하려면,
一切(일체) 善惡(선악) 境界(경계)에,
分別(분별)이 없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아니해야 하며,
반드시 看話禪(간화선)을 하여야 한다.
話頭(화두)를 參究(참구)하는 데는,
들어서 알 수 없고, 생각하여 알 수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는 話頭(화두)를,
勇猛(용맹)스럽게 꼭 잡고,
疑心(의심)을 寐(매)하지 말아야,
畢竟(필경)에는, 그 疑心(의심)이 잡혀 들어와,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 疑心(의심) 全體(전체)가 한 덩어리 되어,
內外(내외)가 없고, 東西(동서)가 없으며,
또한, 百萬人(백만인) 中(중)에 있더라도,
한 사람도 있는 줄을 모른다.
이렇게 疑團(의단)이 차면,
言下(언하)에 大悟(대오)하여,
生死(생사) 없는 解脫樂(해탈락)을 얻게 된다.
急(급)히 스승을 찾지 않으면,
一生(일생)을 헛되이 보내리라.
모름지기 最上乘法(최상승법)을 깨달은,
善知識(선지식)을 찾아서,
바른 길을 指示(지시)받도록 할 것이다.
만일, 스승을 잘못 만나면,
外道(외도) 所見(소견)만 듣고,
그것을 말(言)하기까지 하니,
外道(외도)가 繁盛(번성)하는 것이다.
外道知見(외도지견)은,
八萬四千(팔만사천) 가지나 되니,
얼마나 잘 繁盛(번성)하겠는가?
그러니 옳은 스승을 찾아서,
證得(증득)한 바를,
똑바로 點檢(점검)을 받아야 하느니라.
大衆(대중)들이여!
이, 三界火宅(삼계화택)이,
無常(무상)하고, 괴로운 것인데,
達磨(달마) 大師(대사)가,
부처님의 正法(정법)을,
東土(동토)에 傳(전)한 道理(도리)를 깨닫지 못하면,
衆生見(중생견)에 빠져서,
事後(사후)에는,
三惡道(삼악도)밖에 갈 길이 없다.
그러니 生死解脫(생사해탈)의,
參禪法(참선법)을 배우는 大衆(대중)들은,
이 몸(身)을 잃은 後(후)에는,
도저히 正法(정법)을 만나기 어려운 것이니,
勇猛精進(용맹정진)을 하여,
肉身(육신)을 가진 이 幾回(기회)에,
기어코 우리의 本來面目(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하느니라.
十年端坐擁心城(십년단좌옹심성)하니,
慣得深林鳥不驚(관득심림조불경)이라.
昨夜松潭風雨惡(작야송담풍우악)터니,
魚生一角鶴三聲(어생일각학삼성)이로다.
『十年(십년)을 端正(단정)히 앉아,
마음의 城(성)을 지키니,
깊은 숲(林)의 새(鳥)가,
놀라지 않게 길들었구나.
어젯밤 松潭(송담)에,
風雨(풍우)가 사납더니,
고기(魚)는, 한 뿔(角)이 남이요,
鶴(학)은, 세 소리(三聲)더라.』
이것이, 西山(서산) 스님의 偈頌(게송)이다.
疑心(의심)이 많고, 놀라기 잘 하는 새(鳥)가,
이제는 사람이 와도, 놀라지 않는다고 하니,
그 얼마나 如如不動(여여부동)한 境界(경계)인가.
分別(분별), 妄想(망상),
散亂心(산란심), 無記心(무기심)이,
皆是妙法(개시묘법)이요,
그대로 眞如佛性(진여불성)이요,
解脫大覺(해탈대각)인 것이다.
말(言)하자면,
그 속에서 옷을 입고, 밥을 먹지만,
分別(분별)이 없고, 山河大地(산하대지),
行住坐臥(행주좌와), 語默動靜(어묵동정)의,
온갖 것이, 그대로 解脫(해탈)인 것이다.
바로【魚生一角(어생일각)】이,
그대로 覺(각)인 것이다.
이 道理(도리)는 속일 수 없고,
【魚生一角(어생일각)】이란,
말(言)로는,
아무리 하여도 안 된다.
人間(인간) 是非(시비), 愛着(애착),
生老病死(생로병사)가 다 끊어진 곳이니,
分別(분별)로는, 도저히 말(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고기(魚)가, 뿔(角)이 하나 난 道理(도리)』란,
무엇인가?
이 道理(도리)는,
言下(언하)에,
時間(시간)도, 空間(공간)도 없는,
本(본) 마음을 바로 깨닫고,
生滅(생멸)이 없는,
本(본) 性品(성품)을 바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道理(도리)를,
나, 田岡(전강)이 이르되,
"魚生一角(어생일각)이,
그대로 鶴三聲(학삼성)이니라."
大衆(대중)들이여!
言下(언하)에, 大悟(대오)할지어다.
今日(금일) 내가 參禪法(참선법)을 닦는,
正法(정법) 學者(학자)에게 勸(권)하노니,
平時(평시)에 口頭禪(구두선)만 익혀서,
道(도)를 通達(통달)한 것처럼 말(言)하나,
境界(경계)를 당해서는 아무 所用(소용)이 없다.
忽然(홀연) 죽음이 닥치면,
무엇으로 生死(생사)를 對敵(대적)하겠는가.
다만 남(他人)을 속여 왔으나,
이때를 當(당)하여,
어찌 自己(자기)마저 속일 수 있으랴.
몸(身)이 잠(眠)을 자는데,
또, 다시 몸(身)이 생겨서,
別別(별별) 일을 다 하면서,
分別(분별), 妄想(망상), 싸움을 하였던 것인데,
꿈(夢)을 깬 後(후),
잠(眠)잘 때 생겼던 몸(身)은,
어디에 있는가.
平常時(평상시)에,
猛烈(맹렬)히 情神(정신)을 차려,
話頭(화두)만 지켜 가면,
날(日)이 가고, 해(歲)가 가서,
話頭(화두)가, 打成一片(타성일편)이 되어서,
佛祖大機(불조대기)를 깨달으면,
天下(천하) 善知識(선지식)의 혀(舌) 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를 치리라.
禪(선)에 어찌 關門(관문)이 있으며,
道(도)에 內外(내외)가 있고, 出入(출입)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迷悟(미오)가 있으므로,
이에, 善知識(선지식)인 關門知己(관문지기)가,
不得不(부득불) 때에 따라,
關門(관문)을 열고, 닫으며,
열쇠를 잘 團束(단속)하며,
그것을, 嚴(엄)하게 다스려서,
或(혹),
말(言)과, 服色(복색)을 달리하여,
法道(법도)를 어기고, 넘어가려는 者(자)가 있으면,
그 奸計(간계)를 못 부리게 하니,
關門(관문)을 通(통)하기가 쉽지 않다.
만약에, 自己(자기)를 밝게 알지 못하거든,
모름지기 善知識(선지식)을 參禮(참예)하여,
生死根本(생사근본)을 마칠지어다.
工夫(공부)하다가,
겨우 心識(심식)이 좀 맑아져,
약간의 境界(경계)가 現前(현전)하면,
문득 偈頌(게송)을 읊으며,
스스로 큰일 다 마친 사람이라 自處(자처)하고,
혓뿌리(舌根)나 즐겨 놀리다가,
一生(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혓뿌리(舌根)의 氣運(기운)이 다하면,
將次(장차) 무엇을 가져,
生死(생사)를 當敵(당적)하겠는가?
우리 正法(정법) 學者(학자)들은,
應當(응당) 生死(생사)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工夫(공부)는 모름지기 참되어야 하고,
깨침도 實(실)다워야 하느니라.
오직 話頭(화두)만 단단히 잡아,
疑心(의심)이 純一(순일)해지면,
知覺心(지각심)을 내지 말라.
動靜(동정)이 一如(일여)하고,
寤寐(오매)가 惺惺(성성)하면,
忽然(홀연)히 本參公案(본참공안)을 打破(타파)하여,
自己(자기) 面目(면목)을 보리라.
이때에, 널리 善知識(선지식)을 參禮(참예)하여,
諸(제) 祖師(조사)의 重關(중관)을,
通過(통과)하여야 하느니라.
今日(금일) 大衆(대중)들에게,
分明(분명)히 이르노니,
百千萬劫(백천만겁)을,
몸(身)으로써 布施(보시)할지라도,
昭昭靈靈)(소소영영)한 主人公(주인공)인,
本覺(본각)을 얻은 것만 같지 못하리라.
九年小室自虛淹(구년소실자허엄)하니,
爭似當頭一句傳(쟁사당두일구전)이리오.
板齒生毛猶可事(판치생모유가사)인데,
石人踏破謝家船(석인답파사가선)이니라.
『九年(구년)을 少林(소림)에서,
헛되이 머무름이,
어찌 當初(당초)에,
一句(일구) 傳(전)한 것만 같으리오.
板齒生毛(판치생모)도,
오히려 可(가)히 일인데,
돌사람(石人)이,
사가(謝家)의 배(船)를,
踏破(답파)했느니라.』
이것이,
【板齒生毛(판치생모)】에,
對(대)한,
古人(고인)의 송구(頌句(송구)인데,
【祖師西來意(조사서래의)】에,
이 以上(이상), 더 가까운 偈頌(게송)은 없다.
今日(금일) 山僧(산승)은,
모든 허물을【板齒生毛(판치생모)】에,
붙이노니,
大衆(대중)들은,
오직【板齒生毛(판치생모)】만 붙잡고,
勇猛(용맹)을 다하여 疑心(의심)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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