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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선교의 밀알이 된 선구자, 남장로교 전킨 선교사 (1892년 ~ 1908년)
조선에서의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선교사들은 한민족(韓民族)이 사천여 년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는 방식으로 조선인들에게 다가갔다.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입고 종자를 거느리며 점잖게 위세를 부리며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양반의 나라 조선인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참으로 기이하였다.
선교사들은 거룩하지 않고 고고하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고 신비하지도 않은 점잔하지 않은 방법으로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며 나팔을 불며 노방전도를 하였다. 그들은 천박하게 장날 장터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으며 쪽 복음서와 달력을 판매하였다. 그들은 거지처럼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축호전도를 하였다. 그들은 조선 오백년이 형성한 가문과 족벌, 출신 성분과 지위 고하와 빈부귀천의 신분사회에 휘둘리지 않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며 생명 그 자체에 주목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여성, 고아, 과부, 걸인, 병든 자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을 향하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였다. 고난과 불편, 풍토병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도보로, 말로, 배편으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사람들과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망국 백성에게 위로와 부활의 소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1883년 황해도 솔내에 교회가 세워지고 1884년 알랜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30년 동안 한반도에 2,00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선교부와 교회들은 학교와 병원을 통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견인하였고 급기야 삼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한민족의 독립 염원과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
30여년 이라는 짧은 선교 역사 속에서 복음이 신속하게 전파된 것은 조선의 멸망과 일본의 악랄하고 비열한 식민지 경영과 탄압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이 크게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혁명적 사건과 상황이 더해졌다. 유교윤리의 계급적 조선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양반이 개종한 상놈과 여성들과 아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상황이 있다고 해서 복음이 절로 꽃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희생한 선교사들의 죽음이 있어 많은 열매를 거둔 것이다.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의 저서 ⎾호남 선교 초기 역사⏌에 의하면 1892년에서 1919년 11월 말까지 조선에 와서 선교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모두 108명이었다. 그 중 9분의 선교사님들이 사역 중에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그들의 피와 눈물은 호남 선교 초창기에 호남의 대지와 산, 전라도 개땅쇠들의 가슴에 관제처럼 부어졌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호남지역에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선교부가 세워졌으며 복음이 들불처럼 퍼졌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된 아홉 분들은 1902년 6월 20일 전주에서 사망한 린니 데이비스(해리슨 부인) 선교사, 역시 전주에서 1908년 1월 2일에 사망한 전킨 선교사, 오웬 선교사를 필두로 해서 유진 벨 부인 선교사, 마가렛( 유진 벨의 두 번째 부인) 선교사, 존 커티스 선교사, 폴 사케트 선교사, 피츠 선교사, 랭킨 선교사 등이다.
본 글은 군산선교부를 개척하는 중에 두 아들을 잃고 편도선 절제수술을 받는 등 인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 1904년에 전주선교부로 발령을 받아 서문밖교회를 건축하고 전주선교부를 완산에서 화산으로 옮기면서 과로가 원인이 되어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호남선교의 밀알이 된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 선교사의 히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며 추모하는 글이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7명의 선교사
1865년 12월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난 전킨( William M. Junkin, 전위렴)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회가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7인 선교사 중의 1인이다.
남장로교 최초의 7인 선교사는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그의 부인 팻시 볼링(Pasty Bolling), 전킨(Junkin, William McCleery)과 그의 부인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테이트(Lewis Boyd Tate)와 그의 여동생 매티(Mattie Tate) 그리고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Harrison) 이다.
1891년 10월 내쉬빌에 있었던 SVM(세계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 집회에 유니온신학교의 레이놀즈와 카메론 존슨, 매코믹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가 참석을 하였다. 당시 집회의 강사는 주 강사는 안식년으로 돌라온 호러스 언더우드와 반더빌트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였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의 선교보고와 윤치호의 ‘복음이 필요한 조선’에 대한 강력한 호소에 감명을 받은 테이트와 레이놀즈, 존슨은 조선 선교에의 소명을 확인하며 함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나누었다. 테이트는 돌아가자마자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를 신청하였다. 존슨은 한국 관련 서적을 구입해서 보고 친구인 전킨과 레이놀즈에게 빌려주었다. 전킨은 비록 내쉬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1891년 12월 레이놀즈, 존슨과 함께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조선 선교사 파송이 불가능하다’는 회신과 함께 선교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로 선교 지망을 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매일 함께 모여 조선을 위해 기도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기다리지 않았다. 내쉬빌 집회 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유니온신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영접하였으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남장로교 산하의 교회에 알리기로 하였다. 그들은 언더우드 부부가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와 버지니아의 주요 교회들을 방문하여 환등기를 사용하여 한국을 소개하게 하였으며 교회 기관지에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자신들의 소명을 알렸다. 그들의 노력은 남장로교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한 달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남장로교가 지원하고 있던 그리스 선교가 정치적 불안으로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친 형인 존 언더우드가 재정 부족으로 한국 선교를 할 수 없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형편을 듣고 2,000달러를 기증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또한 남장로회의 한국 선교를 염원하며 500달러를 기부하였다. 두 가지 잇단 사건 후에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는 전킨과 레이놀즈, 테이트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1)그들은 믿음으로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어서 다른 4명의 여성이 한국 선교로 부름을 받았다. 팻시 볼링은 5월에 레이놀즈와 결혼하여 남장로교 최초 선교사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메리 레이번 또한 6월에 전킨과 결혼을 하여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테이트 선교사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는 신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6월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오지 선교사가 희망이었던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콩고 선교사를 자원하였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를 당하였다가 당시 오지나 다름없는 한국 선교사를 지망하게 되었다.
7인의 선교사는 1892년 9월 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 센트럴장로교회와 그랜드애비뉴장로교회가 주최한 환송 예배에 참석하였다. 전킨은 일행과 함께 한국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도중에 캔자스시티에서 편도선염을 앓았다. 결국 덴버에 남아서 1주일간 치료를 받고 자신을 기다려준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와 함께 9월 27일 “Empire of China’호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먼저 도착한 테이트 남매를 만나 1892년 11월 3일에 기도하며 염원하였던 조선 땅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제물포에 함께 도착한 선교사가 6명인 것은 7명 중의 1명인 린니 데이비스는 한국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채연의 부인을 따라서 10월 17일에 서울에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킨 선교사를 비롯한 7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선교사들의 집에 머물렀다. 후에 서대문에 있던 전 독일 공사의 저택을 2) 1,500달러에 구입하여 공동으로 다섯 명이 함께 살았으며 테이트 남매만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서울에 체류하며 조선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93년 1월 그들은 장로교공의회에서 결정대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그리고 충청남도의 6개 군을 선교지역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선교구역이 정해졌음에도 그들은 선교지로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계속 체류하며 호남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한국 언어와 문화, 지리와 역사를 배우며 선배 선교사들이 터득한 선교 노하우를 공유하며 선교부지 마련 등의 일로 서울에 1년 이상을 머무르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전주 및 전라도 지역 탐색과 후퇴( 1893년 ~ 1895년)
레이놀즈는 1892년 12월 선교 구역이 결정되기 전에 마펫 선교사를 따라서 공주와 전주를 돌아보았다. 그는 침구와 짐들 그리고 구리 동전을 조랑말에 한 가득 싣고 다니면서 생명의 위협과 공포를 체험하였다고 하였다.3)그러나 본격적인 그들의 지역 탐색은 그들이 파송한 조사 정해원이 전주 은송리에 26달러를 주고 선교부로 사용할 초가집을 매입한 후부터였다.
1893년 9월에 전킨 선교사는 테이트 선교사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하루에 56km씩 달려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를 방문하였다. 마침 늦가을 장마로 개울물이 불어나서 건너기가 어려웠다. 전킨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져 한국인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들은 두주 정도 전주에 머물며 로나 가톨릭 신부를 방문하였고 전주부와 인근을 답사하였다. 정해원이 선교부지로 구입한 성문 밖의 초가집을 확인하고 감사드렸으며 서울로 돌아가서 동료 선교사들에게 전주를 ‘산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인구 5만의 도시’라고 보고하였다.
테이트는 그 해 11월에 다시 은송리 선교 거점을 방문하여 보름 동안 머물며 선교부 개설 준비를 하였다.
1894년 2월 제 3회 선교회 연례회의에서 그들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메티를 봄에 전주에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들이 전주에 무사히 적응하면 가을에 전주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테이트 남매는 3월 19일에 전주로 향해 떠났으며 지난해에 구입한 집에서 6주간을 지냈다. 매티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찾아오는 여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고 테이트선교사는 한국어 선생과 시장과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처음부터 5~ 8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그들은 세례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공사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동학농민운동으로 치안이 마비된 전주에서 5월 초에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테이트 남매가 전주로 떠난 8일 후에 3월 27일에 남장로회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드루는 레이놀즈와 함께 6주 동안 전라도 탐험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인천에서 일본 증기선을 타고 스물네 시간 만에 금강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군산이 미래 선교부의 자리로 가망성이 좋다고 점을 찍었다. 그들은 3월 31일에 전주 은송리 선교 주택에 여장을 풀고 테이트 남매와 조사 정해원을 만났다. 그 후 드루는 목포를 거쳐 벌교에서 발의 병으로 말미암아 여행을 중단하였고 레이놀즈는 순천을 거쳐 5월 7일 부산에서 베어드 선교사를 만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배편으로 인천을 통해 5월 12일에 서울로 돌아 왔다.
전킨과 드루의 서소문 선교
레이놀즈와 드루, 테이트 남매가 전라도에 있는 동안 전킨은 안성 일대에서 2주간의 일정으로 전도하고 있었다. 기간은 대략 4월 말에서 5월 초였다. 경기도에도 동학으로 인한 혼란이 밀려들자 그는 미국 영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철수하였다.4)미국 공사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서울로 소환하였다. 지방에서의 모든 선교 활동은 금지되었으나 서울에서의 선교활동은 계속 되었다.
전킨은 동학농민운동을 지켜보면서 ‘동학’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아래는 그가 “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글이다.
동학은 1865년 경상도 상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경주는 부산에서 4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동학의 시조인 최제우는 학자였는데, 몇 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파 과정을 눈여겨 본 결과 그는 그것이 참 종교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만 앓아 눕게 된 그는 백방으로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별 무소용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동쪽에 떠오르기 시작한 어느 날 아침. 그는 무아지경 가운데 초자연적인 존재와 조우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상제이다. 나를 경배하라. 그러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최제우는 이때 평소에 갖고 있었던 생각을 질문합니다. “가톨릭은 참 종교입니까?” “아니다. 말과 시간은 같을지라도 생각과 영혼은 찬된 진리와 거리가 멀다.” 최제우는 이때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성경대전❯이라는 동학의 경전을 쓰게 되는데. 유교에서는 오륜(五倫)을, 불교에서는 수양을, 도교에서는 신선사상을 채택하였습니다. 유불선 삼도를 조합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천주(天主)는 가톨릭의 일 것입니다. 가톨릭은 간접적으로 동학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서학으로서의 가톨릭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5)
이런 글을 한국에 입국한 지 1년 반이 조금 지난 선교사가 썼다는 것은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어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6월 전킨 선교사는 동학으로 현장에 내려갈 수 없게 되자 서대문 자기 집에서 직접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랑방을 개방하였으며 한국인들을 초청하였다. 전킨의 사랑방은 금방 소문이 났으며 하루에 8-10명이 그곳에 들려 전킨의 전도를 받았다. 한 불교 승려는 3차례 정도 사랑방을 방문하여 그를 만난 후에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승려복을 벗어 전킨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전킨의 서소문 전도는 7월에 드루 선교사의 진료가 더해지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드루는 매일 오후 내내 전킨의 사랑방에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전킨은 환자들을 위해 통역하면서 직접전도를 하였고 그의 조사들도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며 환자들에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여성 환자들을 위해 매티가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3월 전킨의 사랑방은 단순히 전도거점을 넘어서 예배를 드리는 처소가 되었다. 전킨은 군산 1차 답사를 다녀온 뒤에 4월 2일, 두 사람의 신도에게 세례를 주었다.6)그들은 남장로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며 그 세례식은 한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치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1895년 여름, 전킨과 드루는 서울의 콜레라 대유행 때문에 여름휴가를 중단하고 서울 도심으로 가서 전염병 구호활동에 나섰다. 상황은 심각하였고 8월 8일 하루 동안 서울 도성의 한 출입문 근처에서 22명이 콜레라로 죽었고 또 다른 관문에서는 50명이 사망을 하였다. 드루는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환자를 진료하였고 전킨 또한 물자 보급과 구호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의 국왕 고종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은으로 된 잉크스탠드를 받았다.7)
전킨 선교사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서울 선교본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어를 학습하며 서대문 밖과 은성부재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호남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레이놀즈의 아들과 전킨의 아들이 죽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러는 사이에 1894년 3월 드루 선교사 부부, 1895년 4월 유진 벨 선교사 부부가 도착하였고 1896년 2월에 해리슨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1895년 2월, 테이트와 레이놀즈는 전주로 와서 선교부 설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전주의 1/3이 황폐해졌으며 예전에 구입했던 집도 폐허가 되어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전의 집보다 조금 높은 완산의 언덕에 땅을 더 사고 두 채의 초가집을 구입하여 수리를 하였다. 레이놀즈는 아내의 병환으로 한 달 만에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테이트는 좀 더 오래 머물렀다.
1895년 성탄주간에 테이트는 여동생 메티와 함께 군산을 거쳐 전주로 이사를 하였다. 내한한 지 3년 2개월 만에 본격적인 호남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집을 정돈하고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주일이면 테이트 방에는 남자 아이들이, 매티의 방에는 여자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그 당시 테이트는 조사와 함께 문밖 입구에 서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사랑에서 예배를 드렸다.
1896년 11월에 해리슨 선교사, 1897년 6월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전주선교부에 도착하여 선교부의 얼개를 갖추었다.
1년 반이 지난 1897년 7월 17일 테이트의 집에서 5명이 세례를 받았다.
테이트의 사환 김내윤, 김창국(옥와), 김창국의 모친 강씨,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씨부인 (김성희)가 전주 교회의 첫 열매가 되었다.
전킨과 두루 선교사의 군산 선교부 설립
1895년 3월, 전주 선교부 설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남장로교 선교부는 두 번째 선교부를 열기로 하여 전킨과 드루 두 내외에게 군산선교부를 개척할 사명을 주었다.
1895년 3월, 그들은 군산을 답사하가 위해 떠났다. 그들은 네 명의 선원이 운행하는 삼판호를 세내서 약과 책, 생필품을 적재하고 인천을 출발하여 120마일의 해안 여행을 떠났다. 평소 나흘쯤 걸리는 여행이었으나 그들은 비와 안개로 인하여 열하루 만에 금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수주일 동안 군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매일 아친 9시에서 10시 반까지 설교를 하고 그 뒤로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때로는 50명에 달하는 환자를 돌보았는데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생선, 굴, 달걀과 미역 등을 감사의 표시로 가져왔다. 답사여행으로 그들은 주민들과 친밀해졌으며 군산선교부를 열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8)
1895년 가을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다시 군산을 방문하여 군산 해변에 인접하고 있는 수덕산 자락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 2채와 땅을 구입하였다.
1896년 4월 5일에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료선교사는 함께 작은 일본 돛배를 타고 군산으로 이주하였다. 얼마 후에 린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합류를 해서 군산은 호남선교의 두 번째 거점이 되었다.
조지 톰슨은 ⎾한국 선교 이야기⏌의 70쪽에서 당시 군산을 이렿게 묘사하고 있다.
1896년 당시 군산은 약 100채 정도의 초가로 구성된 작은 어촌이었다. 부두도 없었고 우체국, 진신국도 없었다. 길은 좁고 구부러졌으며 더러웠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을 숭배하여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노름에 빠져 있었으며 여자들은 다투기나 하고 영혼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1896년 여름은 군산 가족들에게 길고 덥고 먼지투성이 시련의 시기였다. 언덕에는 나무가 없었으며 들에는 풀이 없었고 집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전킨이 살고 있는 집은 해변에 가까웠기 때문에 끊임없이 홍수가 났다. 증기선들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서울에서 가져오는 공급물자가 끊겼다. 그들의 음식은 고기, 살, 닭고기와 달걀 등 지방에서 살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요리는 숯불 화로에서 해야 했다. 이것이 군산 가족들이 보낸 그 뒤 삼년 동안의 일과였다.
전킨 선교사는 그는 이사 온 다음 날인 4월 6일에 송영도와 김봉래, 차일선 등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1895년 군산 방문 시 만났던 사람들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전킨은 수세를 원하는 예비신자 훈련을 3개월 동안 주제별로 시켰으며 드루 선교사는 두 달 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6월부터 훗날 군산 예수병원이 되는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896년 7월 20일 전킨은 김봉래와 송영도에게 세례를 베풀며 군산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남장로교의 선교지인 호남에서 결실한 최초의 열매가 되었다.
그런데 1896년 가을 제5회 남장로회 선교부가 연례대회에서 군산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쪽에 보다 나은 선교부의 땅을 찾기로 결의를 하였다. 당시 선교부는 나주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지목하였으나 드루 선교사의 맹렬한 반대로 군산선교부 폐쇄가 유예되었다.
전킨 선교사는 1896년 11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호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군산교회(개복교회)의 출발이다.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린니 데이비스가 군산으로 내려와 여성반 두 개와 소녀반 두 개 소년반 하나를 만들어 여성교육과 어린이 교육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성반은 군산교회 여신도들의 주축이 되었다.9)
같은 해 드루 선교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제물포에서 의료선교선으로 황포돛대 배를 구입하였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선교선을 타고 고군산열도의 섬들과 금강변의 위치한 충청도 서천, 화산, 한산, 옥포, 임포, 청송을 지나고 궁멀에서 서포, 나포, 웅포, 용안을 지나 강경과 부여까지 올라갔다. 또한 만경강 줄기를 타고 월포, 옥포, 동자포, 신창포구, 목천포, 남참나루터, 송지동까지 지경을 넓혀서 전도활동을 활발히 벌였다.10)
1897년 제 6회 남장로회 선교부는 연례 모임에서 군산선교부의 복음전도사역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확인하며 군산 선교부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전킨 선교사의 1897년 5월의 보고서에 의하면 군산선교부에는 주일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40명의 신도가 있었고 한 주 헌금이 530전이었으며 헌금을 위해 두 사람의 회계가 임명되었고 헌금은 가난한 사람과 설교하러 나가는 형제의 경비로 쓰기로 하였다. 헌금이 남을 경우에는 시골교회의 필요와 교회 건축 시 쓸 수 있도록 종자돈으로 모으기로 하였다고 한다.11)
군산선교부의 궁멀로 이전과 전천후 복음전도
전킨 선교사는 쪽 복음서를 돌리며 전도를 하였고 드루 선교사는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들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군산 앞 바다의 섬들과 금강 상류 변에 있는 충청도에 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러나 일본이 고종에게 요구한 군산항의 개항으로 수덕산(월명공원) 일대를 비롯하여 현재의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의 땅 약 17만 3천 평이 일본의 조계지가12)되어 그 중 10만 2천 평이 일본인들의 주거 용지가 되는 바람에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군산선교부를 수덕산(월명공원 일대)에서 군산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문제 직면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898년 제 7회 연례모임에서 군산선교부를 궁멀(구암동)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땅을 매입하였다. 그곳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주일학교를 시작한 궁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드루 선교사의 선교선을 띄우기 좋은 선창이 있었다.
전킨은 1899년 4월부터 선교부와 사택을 겸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궁멀선교부의 일자별 공사 상황을 이남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13)
4월 3일 일꾼들을 시켜 부지 정리 작업을 시작.
4월 20일 일꾼들이 일을 하자 말고 가버림- 일종의 태업
4월 22일 일꾼들의 부주의로 기와를 운반하던 중 모두 박살남
5월 1일 일꾼 중의 리더가 작업을 거부하고 일을 중단시킴.
5월 3일 담장에 쓸 재료를 모두 잃어버림
5월 5일 목수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며 역시 작업을 거부
5월 22일 목수가 열흘 동안 쉰다며 집으로 가버림
6월 20일 창문을 도둑맞음
전킨 선교사는 일꾼들의 횡포와 외국인에 대한 괄시와 텃세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피 군수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장마철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자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선교부는 그에게 여름휴가를 일본으로 가도록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되고 12월 21일 군산선교부가 수락산에서 궁멀로 이사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킨은 구암동(궁멀)에서 다시 정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산교회는 곧 난관에 봉착을 하였다. 일본의 조차에 의해 항구 일대가 다 일본인들에게 장악되자 항구주변에 살던 신도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전도 활동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으나 뜨거운 반응이 도시 변두리와 시골에서 왔다. 시골에 사는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자 토요일 밤에 교회로 왔다. 그리하여 전킨 선교사는 그들을 따라서 신도들이 사는 마을로 순회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군산 선교부의 정규적인 예배 장소가 네 곳으로 늘어났다. 군산교회(현 개복교회), 궁멀교회(현 구암교회), 대야 만자산교회(현 지경교회), 김제 송지동교회(김제시 공덕면)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계속해서 전킨은 조사들과 함께 통사동교회(개정 통사리교회), 남차문교회(익산 남전리), 제석교회(웅포), 월성리교회(김제 봉남면), 대창교회(김제 죽산면), 입석리교회(월천면)를 개척하였다.
1899년경 군산, 전주, 목포 등 세 곳의 선교센터에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세워졌고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공간이 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시골로 전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3주나 4주 동안 집을 떠나서 규모가 작은 성도들의 모임을 방문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미전도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순회 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텐트, 침낭, 담요, 통조림, 빵, 커피, 또는 코코아, 음식을 담은 상자,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용기, 옷, 책, 소책자, 벌레약을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전킨 선교사는 순회전도, 거리 전도에 열심 하였지만 의료, 교육을 통한 선교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전킨 부부는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1902년에 세워진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아내인 메리 레이번이 시작한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가 되었다. 그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구암병원 (군산 예수병원)을 세우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순회하지 않고 선교센터 안에 있을 때는 드루 박사의 선교병원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고 이내 그들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궁멀(구암)을 중심으로 하여 대야, 익산, 전주, 장항, 서천, 논산, 부여, 김제 등을 순회하였으며 금강, 만경강, 동진강 뱃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안타깝게도 1901년, 서울 서대문밖에서부터 막역한 동지로 함께 헌신했던 드루 선교사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7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드루는 군산 예수병원 설립자였다. 외과의사로서 탁월했던 그는 ‘하루 종일 햇살이 한 줄도 비치지 않는 음침한 작은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일하였으며 아플 때도 있고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첫 두 해 동안 4천명의 환자를 돌볼 정도로 희생적이었다.14) 그는 병원에서 진료 뿐 만 아니라 자기가 치료한 환자들이 돌아가서 세운 교회를 돌보았으며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킨과 함께 금강을 오르내리며 섬과 내륙의 오지를 돌며 순회 진료를 하였으며 전도용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는 수년 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혹독한 사역으로 쇠약해진 결과로 선교부의 소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드루가 떠난 이후로 전킨은 심신이 아팠다. 그러나 불 선교사의 도움을 힘입어 순회선교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자신의 소진을 느꼈다.
군산 선교부를 연지 8년이 되었을 때 그의 몸은 열악한 환경과 과로로 허약해졌고 아내의 병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는 순회 중에 말이 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하였고 무리한 일정으로 편도선염이 악화되어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1899년 아들 시드니를 1903년에 프란시스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한 그 자신도 오랫동안 이질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될 대로 되었다. 아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전주선교부로 발령과 제한된 사역
1904년 남장로회 선교부는 연례회의에서 군산선교부의 전킨을 전주로 발령을 냈다. 이는 전킨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그가 안정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역지를 전주에서 5km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의 성품과 평소의 활동 방식으로 보아 그에게 지방 순회를 맡기면 계속 무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과로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전킨은 테이트, 매커첸과 함께 전주선교부의 사역을 책임져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선교부에서 전킨이 맡은 사역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전주교회 목회였다.
그는 전주교회(현재 서문교회)의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교우들의 숫자가 늘어나 예배장소가 비좁았으므로 그는 서문밖 780평의 대지에 57평의 반양식 예배당을 건축을 완성하였다. 총 공사비 3,500 냥 중에 2,300냥은 성도들이 헌금하였으며 건축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은송리에서 선교부 건물의 해체된 자재들을 이용하였다. 그래도 모자라는 부분은 은행에서 대출하였으나 미국 교우들의 헌금으로 이내 빚을 갚아 교회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교회 이름이 서문밖교회로 바뀌었다.15)
또한 그는 시내전도에 주력하였다. 주일 오후에는 교인들과 시장에 나가 전도지를 배포하며 직접 전도하였다. 수천 권의 소책자가 집중적으로 배포되었으며 신흥학교 학생들도 노방전도에 참여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 강의 차 평양에 머물면서 평양의 대부흥을 목격하였다. 그는 전주로 돌아와서 전주의 대부흥을 위하여 테이트, 매커첸 선교사와 함께 각 교회에서 모인 170명과 함께 4월 두 주간 동안 성경반 집회를 열어 정오기도회와 저녁 부흥집회를 가졌으며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를 경험하였다. 교인들은 전도 모임을 조직하여 주일 오후와 장날에 전도활동을 펼쳤으며 전도인 1명과 전도부인 1명을 두어 지속적으로 전도에 매진하게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 북문에서, 맥커첸 선교사는 동문에서 교인들과 전도활동을 벌였으며 매주 목요일 밤 기도회, 금요일 밤 주일학교 남교사 모임, 토요일 밤 주일학교 여교사 모임과 병원전도 등 다양한 교회의 사역이 전개되며 전킨의 전주선교부의 교회가 32개에서 60개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둘째는 김제-금구 지방 순회 사역이었다.
그가 전주선교부로 부임할 당시 그 지역에 8개 교회가 있었다. 전킨은 지방 순회 때 마다 환등기를 이용하여 전도하였다. 1904년 가을 김제군 선돌교회에서 4명이 세례를 받았고 금구의 성말교회에서는 7명이 세례를 받았다. 1907년에는 김제와 금구에서 287명을 문답하여 79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사이에 3개의 교회가 늘어 모두 11개가 되었다.16)
셋째는 전주 남학교(신흥학교) 교육선교였다.
전주 남학교는 1901년 해리슨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해리슨은 아내인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였다. 기도회와 성경, 지리는 데이비스가 산수, 역사, 성경은 해리슨이 가르쳤고 오후에는 한국인 교사가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전킨은 1904년부터 전주 남학교의 교장으로서 지리와 산수를 가르쳤다. 그가 맡은 3년 사이에 학생이 3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5년 남장로교 선교부 14회 연례회의는 전주에 근대식 학교를 세우기 위해 교사 양성이 급선무라는 논의를 하였고 1907년 연례회의에서는 전주에 증등 과정 즉 고등과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월에 넬리 랭킨 선교사, 3월에 니스벳 선교사 부부가 교육 선교사로 전주선교부에 합류를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킨이 염원하였던 고등과는 그의 사후, 12월 2일에 시작되었다.
넷째는 평양신학교 강의였다.
전킨은 남장로교의 대표로서 평양신학교에 출강하였다. 그는 1905년에는 총 12주간 의 학기 중 중후반기 6주간에 걸쳐 ‘여호수아’서와 ‘구원의 계획에 관한 철학’을 가르쳤다. 1906년, 1907년에도 남장로교 선교부 대표로서 신학교에 출강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걸식아동을 돌보며 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거리의 아동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적당한 일거리를 주었고 아이들의 자립능력을 키워주려고 선교부의 부지에서 농사를 짓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무리한 헌신은 전주에서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고 계속되었다.
1907년 그는 평양산힉교 강의를 위해 평양에 한 달 머물렀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와서 성경반을 지도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 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는 쉴 틈이 없는 사역의 긴장과 과로로 말미암아 지쳐 있었다. 1907년 성탄절 행사를 마친 후, 다음해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가족들과 함께 밤늦게 까지 성탄의 기쁨을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오한을 느끼고 잉골드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군산의 오긍선과 다니엘이 달려왔고 레이번과 테이트와 코델이 번갈아 간호를 하였으나 고열에 시달리다가 1908년 1월 2일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17)
그의 죽음 전의 모습을 선교사 불(Bull)은 아래와 같이 기록에 남겼다.
그가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지 유언을 쓰고 그의 아내와 몇 가지 사업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들을 불러서 자기는 그들을 떠나야 하므로 더 이상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지만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하늘의 아버지가 계신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본향에 가서 매우 행복하다”는 것이었다.18)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는 군산 지역에 있는 섬들을 돌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전킨 선교사는 아마도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웅변 실력과 유창한 언어구사 그리고 따뜻하고 자비로운 성품과 한국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겸손하고 소박하고 기품이 있는 매너로 한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어필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한국인들의 스스럼없이 사랑방을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의 고초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복음의 본질로 선교에 임하였다.
아래는 니스벳 부인 선교사가 장례식에 목격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헌신한 이 병사를 하늘나라로 부르셨을 때 나는 선교 경험이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선교사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장례식 때 어떤 분이 해 주었던 인상적인 말을 잊을 수 없다. 전킨 선교사를 땅에 묻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일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었다.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와서 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남선교의 개척자가 되시는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전킨 선교사는 살아 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는 슬픔에 젖어 있는 눈으로 전킨 목사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에 전킨 선교사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으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고.19)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군산 구암 동산의 두 아들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가 현재 전주 선교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전주 선교사 묘역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남장로회 선교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전주여학교❯를 ‘전킨 기념학교’ 라고 명명하여 학교 이름을 ❮기전학교❯라고 명명하였다.20)
한국 선교사로서의 16년 동안의 그의 삶은 실로 초인적이었다. 나라를 잃고 헤매며 고난을 당하는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예수의 영에 사로잡힌 종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충성심으로 가슴이 화산처럼 타올라 과로와 피곤을 인정할 줄 몰랐다. 그는 다른 기후와 문화, 불편과 불안, 온갖 유행병과 풍토병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친구 삼아 지냈으며 끝내 조선을 사랑하여 관제처럼 부음이 되었다.
자신의 안일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삶을 일관한 전킨 선교사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2021.5.16.수, 목
우담초라하니
미주
1) 송현강 저,⎾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32, 33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류대영 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141, 142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45쪽
송현강은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39쪽에서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앨런이 소 유하고 있던 주택이라고 주장한다.
3)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48쪽
4) 송현강 저,⎾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50쪽
5) 같은 책, 51쪽
6)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57쪽, 동연, 2010
7) 같은 책, 57쪽
8) 같은 책, 69쪽
9) 송현강 저,⎾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70쪽
10) 전병호 저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179,180쪽
11)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72쪽
12) 전병호 저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139쪽
13) 같은 책 150쪽
14)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74쪽
15) 전병호 저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377,378쪽
16) 송현강 저,⎾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86쪽
17)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98쪽
18)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98쪽
19)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호남 선교 초기 역사⏌, 58,59쪽
20)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101쪽
참고서적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57쪽, 동연, 2010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호남 선교 초기 역사⏌, 도서출판 경건, 1998
*G. H. 존스 저, ⎾한국교회형성사⏌, 홍성사, 2013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군산시기독교연합회 전킨기념사업회, 2018
*송현강 저,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류대영 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
*디지털군산문화대전- 전킨
*블로그 hkmo1님의 블로그, 호남선교의 개척자 전킨 선교사와 전북 군산
*블로그 이성과 영성, 전킨, 군산 복음화의 선구자, 이 땅에 축구 보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