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는'이라든가 '내가'라든가 하는
말을 잊어야만 한다고
또한 '나의'라든가 '내'라는가 하는 말도 다 버려야만 한다고
바다처럼 푸른 식탁보가 깔린
작은 나무식탁 앞에서
하얀 접시에 올라온 하얀 가자미 토막들을 보면서
문득 생각나는 것이다
이 은은하고 도도한 광채 어린, 이 접시는 속삭인다
흰 살 가자미의 토막, 껍질, 지느러미, 빼낸 창자,
형제자매, 부모, 고향…… 그런 것을 다 복원해낼 수 있는가,
유언도 없이 잡혀 와 토막 난 가자미 한 마리,
내가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
나의 소유격도 결국은 다 파도 거품처럼 무의미하다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는 접시가 주어란 말인가?
실향의 접시가, 도마, 푸른 칼자루가 주어란 말인가?
오른쪽으로 두 눈이 쏠려 있는 가자미
껍질을 다 벗기우고 하얀 살만 토막으로 접시 위에 올라와 있다
희망의 현실적 근거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희망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갈 데까지 다 간 마음……
접시에 대한 좌절, 몸부림, 굴종이 오고
이 시대에 누가 장편소설, 대하소설을 쓰는가?
있는 것은 몽타주, 토막토막 단상밖에는,
이 은은하고도 도도한 광채
접시 하나가 세계 전체와 맞먹는 것일 수도
그런데 살짝 이가 빠진, 저도 막 금 간 접시 위의 토막,
외부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개개에게 관여한다
이 하얀 보이지 않게 막 금 간 접시 앞에 놓인 나이프와 포크
앞의 신경증
그런 식으로 그날 별이 칼집 난 내 가슴에 소롯이 들어왔다
첫댓글
<사진으로 시를 읽다>에서 최현주의 글을 옮깁니다.
‘내가 주어가 될 수 없’는 삶, 내가 주어가 되지 못하므로 나의 소유격도 무의미해진 삶, 그토록 중요한 형제자매라든가 부모, 고향 같은 것까지도 복원해내기 어려운 삶이 비단 ‘유언도 없이 잡혀 와 토막 난 가자미 한 마리’의 일이기만 할까요? 가자미처럼 토막 난 시인은 세계 전체와 맞먹는 것 같은 은은하고 도도한 광채어린 하얀 접시, 혹은 그 이전에 나를 칼질하고 토막 낸 도마와 푸른 칼자루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그 접시마저도 살짝 이가 빠지고 금이 간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외부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개개에게 관여하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정말 껍질도 지느러미도 창자도 다 빼내고 오직 흰 살 토막으로 하얀 접시에 올라온 가자미와 같이 내가 주어가 되지 못하고, 또 이 세상의 진짜 주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그 누군지 알 수 없는 주어 앞에서 좌절하고 몸부림치고 또 굴종하면서 이제는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 같은 것은 읽지도 못하고 오직 토막토막 단상밖에는 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저렇게 토막 내면서, 마침내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토막 내면서, 주어도 소유격도 무의하게.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글
이 글을 읽고 난 후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네요.ㅋ
김승희 시인은 1952년 생으로
시인이자 소설가입니다.
서강대학교 국제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인데
난해하면서도
깊이와 무게감이 있는
시를 쓰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