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향교 : 전북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39 (교동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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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 하절기 매일 09:00-18:00 / 동절기 09:00-17:00
무료 관람
주차는 완판본 문화관 담벼락에 했다. 평일 아침이라 주차공간이 다행히 있었고...
숙소가 가까워서 차는 이곳에 두고 한옥마을은 걸어서 돌아다니기로...
"선비와 길을 걷다" 선비정신을 본받고...
선비길 "선비에게 길을 묻다" 선비정신을 지켜나갈 방법에 대해 고찰한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에 설치한 국립 교육기관으로 유교가 전래되었을 때부터 원시적인 유교 교육기관이 존재했지만,
향교라는 이름과 형태로 설립된 것은 숭유억불과 유교문화이념을 정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시대부터였다.
중앙의 성균관과 함께 지방 유교 교육의 산실로, 중앙 정부의 관심 아래 지방 수령에 의해 운영이 지원되었다.
[다음백과]
전주향교(全州鄕校)는 고려 공민왕 3년(서기 1354년) 풍남동 경기전 북편에 건립되었다가
조선 태종 10년(서기 1410년)에 태조 영정을 봉안할 경기전(慶基殿) 건립으로 부(府) 서쪽 화산동으로 옮겨졌다.
약 139년 후 성내에서 거리가 멀고 전주천을 넘나들기가 불편하고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 우측에 사직단이 자리하여야 한다는 고제에 의하여
선조 36년(서기 1603년) 관찰사 장만의 상계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재이건하였다.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앞의 건물이 만화루다.
만화루의 어원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 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뜻은 공자님의 도로 만물이 교화된다는 말이다.
다양화 영화가 촬영되었던 장소인듯...
전주향교는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는 풍남동(경기전 북편)에 있었다가
1603년(선조 36) 좌묘우사(左廟右社), 즉 객사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고자의 사당), 우측에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는 옛 법도에 어긋난다하여
부성 밖 동편인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전하였다.
전주향교의 구조는 전묘후학으로 배향공간이 앞에 있는데, 대성전 중앙에 공자와 4성,
그 좌우로 공자문인 10철과 송조(宋朝) 6현을 배향하였고,
동무와 서무에 중국 7현과 동방 18현이 배향되어 있다.
대성전 뒤는 강학공간으로, 명륜당이 중앙에 있고 그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앞뜰에 400여년이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각각 2그루씩 있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상징적 나무로,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이,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만화루의 건축유래는 왕비와 정승 등 높은 사람이 출생한 곳에 세워졌으나,
본 건물은 전주향교의 정문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의 여름철 강학과 향시(鄕試,시험) 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 2층이며, 건평은 73.4m²로, 중층 팔작지붕에 이익공 구조이며,
2층은 우물마루로 깔리고 계자난간으로 둘러있다.
만화루 2층도 올라가보고...
단지 2층에 올라왔을 뿐인데... 생각보다 조망이 꽤 괜찮다.
2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나오는 출구쪽에 있다.
2층 누각은 강학을 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고 향시(鄕試)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향시(鄕試)는 고려시대 과거제도의 1차시험으로 2차시험인 국자감시(사마시)의 전단계로 계수관시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의 설치를 통해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국가는 모든 향교에 유학을 교수하는 관리인 교관(敎官)을 임명·파견했다.
교관은 유학에 소양이 있는 지식인으로 선임하고, 수령과 함께 파견되도록 법제화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교관을 교수(敎授:종6품)·훈도(訓導:종9품)로 구분,
군·현에는 훈도를, 부(府)·목(牧) 이상은 교수를 파견하도록 법제화했다.
그러나 수령의 적임자조차 부족한 상황하에서 교관까지 선임한다는 것은 여의치 않았으므로,
교관의 파견이 법제도대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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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지방 지식인들의 구심처였으므로 지방 단위의 문화행사, 특히 유교문화이념에 따른 행사가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춘추의 석전례(釋奠禮)와 삭망의 분향이 향교의 문묘에서 이루어지고,
사직제·성황제·기우제·여제 등도 향교를 중심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기원이 이곳에서 규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향교가 향약의 운영도 주관했으며,
향사례(鄕射禮)·향음례(鄕飮禮)·양로례(養老禮)도 여기에서 중심이 되어 집행되었다.
또한 향교는 왕의 윤음을 비롯한 중대한 정치적 내용을 직접 지방민들에게 전달하는 공식적인 장소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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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출발에서부터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즉 향교에서 유학을 교육받은 지방민은 생원·진사 시험을 거쳐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고 문과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중앙의 정치권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지방민의 입장에서는 중앙정치권에 진입하기 위한 합법적이고 개방된 절차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지방 지식인들에게는 극히 좁은 문이 되었으나,
전체 지방 지식인들이 갖는 정치력이야말로 중앙의 세력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앙세력의 대표격인 수령은
호구의 조사, 조세의 부과, 군적의 편성 등 정치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지방 지식인들의 협조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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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중앙정치력과 지방 지식인 사이에 정치력의 긴장이 존재했는데,
그런 양상은 결국 재정적 투자 형태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우선 중앙정치력은 지방침투를 위하여 학전(學田)·학노(學奴)라는 이름의 재정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수령들이 때때로 전곡(錢穀)을 내어 향교의 중수·중건·비용 등을 마련하거나,
향교전의 설치를 위해 토지를 매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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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지식인들은 향교의 운영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향교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인정되는 면역의 특권을 누리거나 지방정치에의 구심세력이 될 수 있었다.
즉 조선 후기 향교의 운영을 위해 교생의 면강첩(고강을 면제받으면서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증명서)을 발매한다든지,
교촌(校村)·교보(校保)라는 향교 주변마을을 국가의 일반 역에서 제외시키는 대신 향교만을 위해 사역하도록 조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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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루를 지나면 바로 일월문(日月門)이 나온다.
일월문은 바깥채의 안쪽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인 내삼문에 해당한다.
일월문은 전면 3간으로 입구와 출구가 있고 중앙에 왕이 다녔다는 신도가 있어 양 옆으로만 다닐 수 있다.
일월문을 지나면 정면으로 대성전(大成殿)이 있으며 좌측으로 서무(西廡)가 있고 우측으로 동무(東廡)가 있다.
동무(東廡)와 서무(西廡)는 대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유현(儒賢)의 위패를 모신 건물로
대성전의 단하에 동서 양측에 있는 건물이다.
전주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향교라는 평을 받는 곳으로,
제례(제향 공간, 대성전‧동무‧서무)와 교육(강학 공간, 명륜당‧동재‧서재)의 기능을 겸한다.
동무 전면 9간 측면 2간 홀처마 맛배지붕
커다란 은행나무가 동무 앞에 자리잡고 있고...
서무 전면 9간 측면 2간 홀처마 맛배지붕
서무 앞에도 역시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은 문묘의 시설 가운데 공자의 위패를 봉안 향사하는 건물이다.
대성전은 전면 3간 측면 3간 겹처마 맛배지붕에 일익공 형식이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상징적 나무로, 은행나무가 벌레를 타지 않듯이,
유생들도 건전하게 자라 바른 사람이 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는데...
은행 똥 냄새는 어떡할껴? 상당한 수의 몰지각한 정치인들이 구린내가 나는 이유가 이런 거 였어?
어떤 나무도 오래되고 귀해지면 너무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은행나무가 있다니... 놀랍다.
전주향교의 대성전 중앙은 공자와 4성, 그 좌우로 공자문인 10철과 송조 6현을 배향하였고,
대성전 앞 좌우 건물인 동무와 서무에는 중국 7현과 우리나라 18현이 모셔져 있다.
은행나무 뿐만 아니라 대성전 왼편으로 산수유 나무도 자리하고 있다.
대성전 뒷편으로 협문인 성전중문(聖殿中門)을 통과하면 명륜당과 동재, 서재로 이어진다.
정면으로 명륜당이 자리하고 있고 역시 아름드리 커다란 은행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전주향교의 명륜당은 당시 중학 과정의 학동들의 교육을 하던 교육기관으로 전면 5간 측면 3간 일익공 맛배 부설지붕에
전문은 우무늬 창살 문에 눈썹지붕의 도리가 뺄목으로 길게 뻗어 나와 타 향교건물 구조와는 다른 특수성이 있다.
정면의 강학을 하는 명륜당 앞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전면 6간 측면 2간 홀처마 맛배지붕으로 학동들의 기숙사로 사용하던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든 은행나무의 자태에 시선이 쏠릴 수 밖에 없고... 너도나도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서제에 잠깐 앉아서 쉬기로 하고... 옆에 향교현황이라는 전주향교 안내책자가 있어서 읽어봤다.
안내책자 표지에 적혀있는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더 큰 미래를 열어가는 천년전주의 원동력이 되자!"
백제 부흥을 꿈꾸던 성왕의 뒤를 이은 무왕은 왕도를 익산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미륵의 땅 천년고도 익산
문화재청은 삼국시대의 수도였던 경주, 공주, 부여, 익산을 4대 고도로 지정했다.
전주향교는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고 있는 듯하다.
전주향교 서재 뒤편에 위치한 장판각(藏版閣)은
조선시대 전주감영에서 발행했든 여러가지 책들을 출판했던 목판등을 보관했던 곳으로
지금은 전북대학교박물관 수장고에 수탁된 후 영상시쓰템으로 변모하여
방문객들에게 책판으로 책을 출판하는 체험장으로 교육적인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
계성중문(啓聖中門)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계성사(啓聖祠)가 위치해 있다.
계성사는 전면 3간 측면 2간 전국에서 제주도와 함께 유일하게 대성전 5성현의 고위를 모시고
석전대제 직전에 계성사제를 봉행하고 있다.
계성중문 오른편에 계성문(啓聖門)의 모습이 보이나 굳게 닫혀져 있고 통행하고 있지 않다.
다시 계성중문을 지나면 오른편에 입덕문(入德門)이 위치해 있다.
입덕문을 통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입덕문을 나서면 전주동헌의 모습이 보이고...
입덕문 앞 넑직한 길의 왼편담장이 전주향교이고 우측담장이 전주동헌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박진 효자비를 만날 수 있다.
박진 효자비(朴晋 孝子碑)는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139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석이다.
2009년 10월 30일 전주싱의 향토문화유산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1398년(홍무 31)에 세워진 것을 1724년(경종 4)에 중각한 것이다.
비각 안에는 1805년(순조 5)에 후손 필성(必晟)이 지은 '전주부 효자박진정려기(全州府 孝子朴晋旌閭記)'가 걸려 있다.
박진의 자(字)는 내신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완산지'에 박진은 아버지가 병환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시중들면서,
낮에서 곁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허리띠를 풀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예법에 따라 장사(葬事)와 제사를 모셨으며,
3년 동안을 여모(廬墓)살이 하여 마을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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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시에 그런 효자가 흔치 않아서 이렇게 비석까지 세워서 장려하려던 거라면...
밝혀지지 않았을 뿐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교윤리를 지키며 살았겠지 뭐....
어쨋든 내가 아는 외국인들은 한국의 신유교윤리에 대해서 굉장히 놀라워한다.
명절날에 종교가 다른 형제자매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외국에서는 종교가 다르면 아무리 형제라도 싸우고 죽이고 전쟁도 한다고...
한국인들의 유교이념은 종교를 뛰어넘었다고... 대단한거라고... 나는 몰랐는데...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무척 놀라워한다.
자 이제 전주 완판본 문화관 담벼락에 차를 주차해 놓고... 걸어서 오목대로 가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