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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필 스승을 기리며
1990.01.06. 김준호 선생
우리들이 자주 기억했던 말씀은 10절, 20절 말씀 이지요. 내가 내 아버지와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다시 보겠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20절.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10절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20절에는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여기는 말이 바꿔지지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우리들이 예수님 품안에 있고 예수님의 마음 안에 있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 품에 계시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계시고, 두 번째는 내가 너희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말을 들었습니다.
하와 할머니의 배 속에는 그때 우리가 다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씨앗이 하와 할머니의 배 속에는 현재 50억 인류가 다 들어 있었어요. 지금 나뭇가지가 아무것도 없지만 내년에 배가 연다든지 십년 후에 배가 열 배꽃이 다 들어 있어요. 그런 이치가 있답니다. 그 뿌리 속에는 영원한 나라 후에, 후에 뻗어날 가지가 눈에 보이지 않도록 거기에 들어 있답니다. 오늘 밤에도 이 선생님의 글을 제가 읽을 텐데요. 그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그럼 예수님 속에는 우리가 잘 아는 이 선생님도 계셨지요? 그분은 하늘나라 가고 안 계십니다. 그러나 그 분들 안에 예수님과 이 선생님 안에도 멀리 본다면 이 선생님을 아직 못 본 사람들도 여기 많이 와서 살지요? 그런 식구까지도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영적으로는 한 씨앗에서 난 자손이다. 그 사랑 안에 눈에 안보였지만 벌써 같이 잉태 되었던 그 씨앗들이다. 그렇게 생각 됩니다. 오늘 저는 그런 말 들었습니다. 이리 이사 오기 전에 옛날 예배 보던 자리지요? 저쪽 강당이 있었습니다. 그 집을 뜯어버리고 교육관을 세웠는데 그 집의 내력이, 거기 친척집이 전지요양 한다고 햇볕과 물을 바꿔가지고 요양하기 위해서 어린 시절에 가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 섬이 가난한 빈촌인데 가을이 되어도 섬에는 항상 물이 좋지 않았던지 나락이 안 되어 버렸던지 흉년이 들어버렸던지 집집마다 짚을 못 여우고 집이 새더랍니다. 어린 나이에 보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배에다가 짚을 싫고 와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엉을 엮어가지고 지붕을 이되 한 집도 빼놓지 않고 전부 그 마을에 못 이은 집을 다 이어주고 떠나더랍니다.
그러니까 집 주인들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요 어떻게 당신이 내 집을 이어주고 이렇게 비가 새는 집을 이어주고 가십니까? 인사를 하면 우리는 모릅니다. 어느 중이 이 우리더러 삯을 주면서 아 해서 우리가 삯 받고 이 일을 했습니다, 이 짚은 그 중이 사서 싫고 온 짚이요 그러고 떠나버렸답니다. 그 어린 소년시절에 그것을 보고 그 중이 누구인지 전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집을 깨끗이 이어주고 갈 때에 느끼던 그 어린 소년의 감격, 그 감화 그 어린 나이에 각심하기를 나는 커서 그 스님과 같이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둘도 모르게 사람을 도와주고 좋은 일 해야겠다. 어린 시절에 그런 서원을 해가지고 현 선생님은 일평생 오나가나 그렇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아무도 모르게 음덕을 숨어서 적선을 하신 분이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그러면 현 선생님이 감화를 받을 때에는 그 중한테 감화를 받았으니까 이 예배당이 지어진 것은 불교 신자 중의 은혜를 안 받았다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 하시더라 그래요.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보고 이렇게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고 있지만 이 집이 지어지게 된 경위는 어느 중의 감화를 받은 청년이 커서 이렇게 우리 한국에 현 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셔가지고 오늘날 이렇게 여기까지도 그 자금을 모아가지고 성인을 기념하는 교회 집을 지으라고 보내진 사연을 깊이 파고들면 그 부처님의 감화를 받고 믿었던 중의 감화를 또 받은 소년이 나중에 예수 믿고 이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깊은 속에는 부처님의 은덕이 없다할 수 없다. 그렇게 깊은 뿌리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오후에 그 말씀 들었어요.
그렇다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이 이천년 전에 하신 말씀 이지요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이 있고 그때 이천년 전에 제자들 이지요. 베드로 가사 요한 그런 열두 제자 그분들한테 하신 그 말 이지요. 그러나 그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있어요. 예수님은 그 제자들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는 여러분들이 알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만 저 혼자 밤중에 방에서 혼자기도 할 때는 어느 때든지 예수님께 감사할 때, 물론 이 선생님도 부르지요. 그러나 현 선생님 유 영모 선생님 최 흥종 목사님 또 이공 선생님 이 현필 선생님을 부릅니다. 어른들의 사랑으로 이렇게 잘 살아가니 감사 합니다. 예수님, 그 어른들도 땅 위에서는 죄가 있을 테니까 예수님 피로 닦아 주시고 하늘나라 가서 편히 쉬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꼭 빼지 않고 그런 기도를 아니 할 수 없어요. 왜? 우리가 우연히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 어른들이 예수 사랑으로 우리를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어가지고 이것을 우리가 살 수 있는 터전을 마음으로, 영으로, 눈물로, 혹은 재산으로, 지성으로, 땀으로 밀어주신 분들이거든요. 땀으로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 까지는 기억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눈으로 저는 안 봤어요.
예수 믿습니다. 그렇게 말만 하고는 실제 느끼는 것은 그 어른들을 봤기 때문에 아주 실제 감사가 있어요. 입에 붙은 말이 아니고 야, 그 분들이 아니었으면 여기 모여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어른들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여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면 너희 안에 우리들 안에 예수가 있다. 그러면 베드로 선생님 안에 세계 교회가 들어 있었지요. 인류 동서양에 있는, 예수 안에 인류가 들어있고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런 책도 보고 그러지만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평소 우리 이야기이고 직접 우리를 살려준 분들의 이야기에요. 먼 누구 이야기가 아니야. 직접 잠자게 해주고 밥 먹게 해주고 따뜻하게 옷 입게 해주고 직접 어른들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분들의 은덕이 있어서 우리 이 책도 보고 늘 그럽니다. 그러니까 천리만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절 한번 따라 읽읍시다. ‘그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 그렇게 우리가 정을 느끼면서 지금 이 선생님이 남기고 가신 말씀을 저녁에 읽을 때 들어 보십시오.
인격적인 생활이라는 제목입니다. 자기를 먼저 이기시기 바랍니다. 얌전타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장사 비린내 모릅니다.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 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마시고 죄 찾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플려고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에 옷을 입으심을 깨달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어들어 오는 시간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대로 못 해 입고 살고 싶은데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복 받는 이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가고 싶은 곳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듣고 그렇게 생활 하는 것이야 말로 아 얼마나 영적 자유함의 생활인지요?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절약해서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한 영적 기쁨을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땔 때에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한 것이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 집니다. 시간을 특히 아껴 써야겠습니다. 값없는 세월이라 생각지 마시고 손 한번 놀리는 것 발 한발자국 옮겨 놓는 일 말 한마디를 무심코 하시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말씀 한마디를 생명의 씨로 받아서 간직하는 것과 무심히 들어 항상 돌아다니는 말로 허술히 알아듣는 것과는 영원한 세계를 두고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노력의 효과를 잘 나타내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이가 한 일보다 훨씬 귀한 가치를 나타 내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서 인격을 압니다. 배추 한 포기라도 정성으로 가꾸는 일 속에 자기 인격 전부가 반영이 됩니다. 지금 종자 하나를 잘 가꾸면 허술히 한 것과는 헤아릴 수 없는 큰 차이를 발생하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두고 시시각각 크고 작은 일 까지 정성스레 생각하는 것과 허술히 생각하는 것과의 결과를 종합해서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놀랄 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그 결과가 최후로 그 사람의 일생을 결산 지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두려움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어디를 가서나 무엇을 하시던지 무슨 말씀이던지 예사로이 하시는 일이 없도록 극히 주의 하시어 유여한 인격을 빛내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한번 제가 말씀 드리는데요. 한 예로요. 가사 굶기를 며칠 전 부터 굶고 광주서 걸어갔으면 며칠 굶고 도곡면, 도곡면을 거쳐서 죽곡면 원달 상달 올라가는 길이시던가 보지요. 그때 제가 따라 붙었지요. 그런데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 동록 씨가 옛날에는 전도사직을 하셨고 지금은 전도사직을 안하고 계십니다. 이 평교우신지 그렇게 교우로 지내시지요. 그 분의 어머니께서 그 지점에 사셨든가 봅니다. 거기 도곡면 산골짜기에, 그 댁을 찾아가십니다. 가는 길 터에 심방 하시고 이제 위로하시고 가실 량으로 그 댁에 들였는데 십리 밖에서 부잣집 아주 부잣집 후실이 예수를 믿었어요. 그 후실이 이 선생님 보기가 부끄러우니까 얼굴을 내 놓지 못했지요. 선생님 오셨다는 말씀을 듣고 눈물겹게 밤새도록 몰래 떡을 해 가지고 찰떡이지요. 밤새도록 십리밖에 있는 거기 그 어머니 집에다 떡을 가져다 놓으면서 내일 선생님이 여기 지나가실 때 이 떡을 꼭 대접 하십시오. 위탁 했단 말이에요. 위탁해서 둔 떡을 수레기 어머니 한나 씨 어머니 이 선생님 세분이 가신 길에 제가 따라 갔으니까 네 사람이지요. 그러니까 새벽부터 갔지만 거기가 어느 지점인지 몰라도 아침밥은 넘어 버렸고 점심은 빠르고 한 열시나 아홉시 사이에요. 그 집에 들어가서 손님이니까 방으로 모두 들어갔지요. 그러니까 거기 계신 분이 그날 밤에 부탁하고 가신 그 분의 부탁대로 그 다시 따뜻하게 했는지 몰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요. 찰떡 그득히 하고 쑥떡 그득히 해가지고 상에 내 왔어요. 이 선생님이, 그럼 제가 뒤 따라 갔으니까 누구 사람 만난 시간 없었거든요. 전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어요. 그 집에 들어가서 큰 방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찰떡이 나오거든요. 우리 기도합시다.
이 선생님 기도 잘 하시는데 처음 기도하는 것 들어봤거든요. ‘하나님 아버지 이 죄 많은 이놈이 찰떡을 얻어먹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면 이 죄인 놈의 이빨이 썩어 내려앉게 해 주시고 목구멍이 썩어서 내려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림니다.’ 한나 어머니나 수레기 어머니 보고 ‘떡 잡수시지요.’ 하니까 뛰뛰 하고 다 물러나버려요. 그래 저는 보고 의례 먹을 줄 알고 버쩍 바짝 옆으로 갔지요. 상 옆으로, 어머니들 뛰뛰 하고 뒤로 물러앉으니 먹을 수가 있어야지요. 눈치를 보니까 먹어서는 안 되겠어요. 뒤로 쭉 물러났지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어요. 막 김은 나는데 김이 올라와요. 그러니까 참 이분들 묘한 사람들이다. 왜 이럴까? 저는 처음으로 그때 따라갔거든요. 처음으로 참 기이한 일이다 싶었어요. 그 다음에야 알았어요. 한 2년 후에야 그 영문을 3년 후에 누가 가르쳐 줍디다. 그 떡이 다른 떡이 아니라 알고 보니까 십리밖에 있던 어느 부잣집 후실인데 예수 믿고 회개하는 뜻으로 그렇게 떡을 해다 주신 것이라고, 그럼 이 선생님이 그걸 절대 몰랐을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는 직감으로 느낀 거예요. 어떤 영감으로 느낀 것이지 그 사건을 안 것은 아니라고요. 그런걸 보면 역시 명철하시기도 하고, 영의 사람이지요. 그러나 그때, 그때 잠깐 잠깐 일어나는 일이지만 여간 실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 떡을 영문 없이 먹을 수 있지 않아요? 배는 고프고 감사해서 그러나 그렇게 무슨 일을 깊이 생각하시고 그렇게 틀림없이 하셨기 때문에 그 감화력에 의해서,
요사이 들어보니까요. 열한 살 먹어서 이 선생님께 나간 애기들이 열세 살 먹어서 열네 살 먹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년 5학년 때 이 선생을 본 분들이 여기 한 오십대 되거든요. 그 어린 소녀시절에 이 선생님을 눈에서 감화를 받고 눈을 떠보실 때 밥을 차려드리면 안 잡수시고 가신다던지 옷은 다 떨어지고 살이 보인다던지 거기서 이 선생님에 대한 인격적인 감화를 받은 분 들이 자기 고향과 부모와 친척을 버리고 돌아와서 사시고 계신 것을 발견했어요. 요사이 요사이에서야 몇 분 말 들어보니까 그렇더라고요. 남녀 분별이 강해가지고 우리가 서로 반말을 못해봤거든요 지금은 백발이 났으니까 그래도 고개 숙이고 땅만 보고 이야기 하면 듣고 그랬거든요. 야, 그랬구나. 그런 게 느껴져요. 심사숙고 하라고 물 한 모금 마시는 거 찬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깊이 생각하라고 부탁을 해. 본인 생활도 그렇고 글이 그런 거지요. 글이 그런 내용의 글이시고 가사 찬물 한 그릇 떠드리지요 찬물 한 그릇 떠다가 준 것만 봐도 그 사람 다 알아버려요 이 선생님 속도 모르고 이 선생님은 남의 깊은 비밀을 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찬물 한 그릇 떠다 주고 나가는 것 보면 아 저 사람은 이렇구나. 짐작이 간다고요. 마음이 괴로운지 서러운지 기쁜지 평화스러운지 그거 직감으로 알 수 있어요 이 선생님 아니더라도 또 물을 대접 해봐요. 찬 물 한 그릇 잡수시라고 드려봐 그럼 먹는것 보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지 않아요? 이 선생님은 김이 뭉게뭉게 나는 찰떡을 드려보니까 속을 알아 아 이 선생님이 그런 분이다 안 먹을 떡은 목구멍이 썩어 내려앉아 버리라고 그러고 안 먹는다. 먹을 떡은 그분이 자시거든요. 어디 가서 누가 안주면 달라고 그분은 달라고 해서 잡수시는 분이니까 그전에 그 말씀 하십디다. 그 한나 어머니께서 능주 교회 종을 치던 과부 집사님이시거든요. 옛날에 그 댁이 교회 3일 동안 빌려가지고 우리가 말하면 성경공부 했어요. 해방 막 그 이듬해요. 그때도 한번 참석해 봤습니다. 그때는 개인 개인 공동생활 아니니까요. 개인 개인이 소문 듣고 찾아가서 만나면 성경공부 할 때 옆에 앉아있었지요. 그런데 광주에서 가신다. 그래서 돌아가신 박공님하고 이 선생님 (끊김)
이 선생님을 고맙게 봐버리고 꼭 애기 같아요. 그때는 법도 없고 엄하지도 않고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그러십디다. 그래 손님이 오신다고 하니까 무서워요. 무릎을 꿇고 아주 무섭대요. 그렇게 짱짱하게 하실 때가 있지만 마음을 놓고 허물이 없는 사이에는 애기 같아요. 아주 애기 같아요. 부드럽고, 그것도 목격했어요. 그러니까 몸가짐이 그렇더라 그 말씀입니다. 성경도 그때는 몰라요.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겠고 이 선생님이 어떻게 밥 먹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면 무릎 꿇는가 보자. 그것도 봤고 어디가 무릎 어떻게 풀어버리는가 보자. 그걸 주목할 때거든요. 그렇게 인격적으로 사신 분은 그렇게 지내신 것이 지금 회상이 됩니다. 그래서 아까 하신 말씀이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다시 말하면 절제하면 아껴 쓰면 얼마나 절제의 생활 모든 것이 풍부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처럼 거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처럼 아껴 쓰고 절약해 쓰고 아끼는 생활 그것은 모든 것에 풍부를 불러일으킵니다. 아껴 쓰는 이에게 모든 좋은 것이 넘치도록 쌓입니다. 없는 것이 없고 부족된 것도 없습니다. 물 한 방울을 아껴 쓰고 나무 한 부스러기를 아껴 때는 그 모습은 그대로가 바로 풍부와 만족한 생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지요? 존귀보다 겸손이 먼저 있고 풍부가 있기 전에 절약이 먼저 있습니다. 빈핍이 있기 전에 낭비가 있습니다. 가난했다 그 말은 낭비 했다. 그런 결론이라는 말이에요. 패망이 오기 전에 천박한 인생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망했다. 그 집안이 망했다. 평소에 천박하게 살았다. 이 말이에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나 돌이나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긴 만큼 자기가 천해집니다. 돌 하나 풀 한포기 채소 한 가닥을 천히 보면 자기 자신이 천해 진다. 저는 그렇게 생각 됩디다. 제가 또 한 번은 아침 해가 뜰 때부터 해가 툭 뜰 때까지 남원에서요. 몇 집 어머니들이 갈 때 따라간 일이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는 그 이튼 날 선생님이 오신다는 기별이 오셨던가 봐요. 그러니까 밤새도록 잠을 안자고요. 이렇게 큰상에, 자기 평생에 못 먹은 거 다 차려 놨어요. 식혜도 해놓고 떡도 해놓고 과일도 깎아놓고 고기는 안 잡수시니까 나물 해놓고 밥을 해놓고 국 끓이고 미역국 끓이고 김이 뭉게뭉게 나요. 그럼 딱 일어서요. 식사 하실까보다 안심하고 부엌에 어머니가 계신데 딱 일어나 나가버리면, 울어요. 울어, 아 밤새도록 지성을 다했는데 입을 안대고 나오시면요. 그럼 그 다음 집에 가지요. 조금 거리 있으면 인제 거기서도 알고요. 또 밥상이 나와요. 그럼 저기서 먹어버렸으면 이 집은 얼마나 섭섭할까요? 또 들어가 조금 앉아 있다가 그냥 나와 버려요. 그 어머니 또 울어요. 참 살과 같이 피와 같이 정성을 다해 차려 놓은 음식인데 안 잡수세요. 그러니까 한 세집이 네 집이 가면 이제 해가 낯 되어버리지요. 한집에서도 밥은 안 잡수셨지만 배가 불러요. 영적으로 배불러요. 그럼 누구 집에서든지 음식은 입에 안 댔어요.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보고 잡수시고 가시면 육적으로 만족하셨겠지요? 그러나 안 잡수시고 갈 때 영으로 그 천상의 위로를 받았지요? 천상의 위로를 받아가지고 생명도 자식도 재산도 아깝지 않아요. 모든 재산 모든 자녀를 이 선생님 뜻대로 해 달라고 던져버린 거예요. 이 선생님 앞에 던져버려. 애기가 한 살 먹어서 주고 두 살 먹어서 주고 내가 키운 것 보다 당신은 내 자식을 맡을 만한 인격이 있다. 믿음직하다. 내 자식을 맡아 주시오. 그런 애기들이 모인 곳이 양육원 애기들, 그런 소년이 모인 곳이 고아원, 그런 어머니 할머니가 모인 곳이 양로원 그랬지요. 처음에 절대 양녀도 아니고 고아도 그 집 어린 애기들 유치만 그 집 조금 큰 애기들 고아 반 그 집 시어머니는 할머니 반 그 집 시아버지는 할아버지만 그렇게, 그렇게 나중에 형성이 되었지요. 그 식구들이 그러니까 집집이 가서 맛이라도 보고 냉수를 마셨어요. 네 것 내 것 따로 있고 내 재산 내가 지키고 내 자식 내가 키우고 그럼 이 공동체 형성이 안 되어요. 동광원이라는 울타리 형성이 안 되어요. 울타리 그 생명을 줘도 아깝지 않은 것을 이 선생님의 생활에서 감화를 받았다고요. 생활에서, 뭐 성경말씀은 그 분은 별로 말 안했지요. 신령한 말도 별로 안하고 기적도 없고 그 인격적인 그 사랑 그 무엇인지 모르게 먹는 것도 아니고 입는 것도 아니고 영적으로 느껴지는 평화, 영성으로 느껴지는 감화 영성적으로 느껴지는 그 어떠한 인력 끄는 힘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기 부모형제 친척 고향 모든 것을 이 선생님께 위탁하고는 일체 의심을 안했지요. 조금도 의심 안 해버렸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고 아까 글을 다시 읽어보고 들어보세요. 자기 길을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배고픈 것만 생각하면 한 3일 굶고 쑥떡 찰떡이 김이 뭉게뭉게 나는 게 그렇게 기도하고 딱 그럴 수 없어요. 자기를 생각했다면 자기는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다른 영혼 그 영혼들을 사랑하는 자비가 가슴에 꽉 찼었지요. 그러면 아까 그 후실이라는 부잣집 부인은요. 그 떡을 안 먹고 갔다고 얼마나 대성통곡을 하고 울고 내가 죄를 지어서 안 잡수시고 가셨다. 싶어서 못내 대성통곡 하다가 후실이라는 가문에서 뛰어나와 버렸거든 살수가 없어 불안해서, 그래 광주에 와서 양림교회 앞에 집짓고 사신다는 말 들었어요. 독립해 가지고, 그때 떡을 먹어버렸으면 안심하고 살 텐데요. 소실로 그렇지 않아요? 만나가지고 말로 후실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시오. 그러지 않았거든, 마음으로 영으로 하셨지, 자기를 먼저 잊으시기 바랍니다. 얌전타는 생각 잊으셔야 합니다. 양반 생각이 너무 짙으면 고기 장사 비린내 모르듯이 모릅니다. 허례허식 양반 껍질로 얌전한 것 천국의 사람이 되려면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하여간 다른 일마시고 죄 찾는 일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자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쳐흐름을 깨닫는 일을 해야 합니다. 자기 선을 베풀려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의로운 사람 되려 마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의의 옷 입으심을 깨달아 알려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믿는 일입니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 없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온순한 심령으로 부족한 것이 참 행복이라고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자유 방종 않는 일은 참 자유 얻는 방도입니다. 자유 없는 생활 주를 생각하는 시간 아 그 얼마나 자유와 참 자유와 참 만족과 참 위안이 마음속에 새겨들어 오는 것인지요? 물 한 그릇을 자유로 못 마시고 먹을 것을 하나 못 먹고 입고 싶은 옷을 못해 입고 살고 싶은데서 못살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부자유, 그를 불러서 참 행복은 이 사람들의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자유라 하겠습니다. 주님을 기억하시고 갈 데도 못가고 보고 싶은 것도 못보고 듣고 싶은 것도 못 듣고 마음대로 못하는 생활이야 말로 아 얼마나 참 자유로운 행복 된 생활인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던 정경은 생활로 우리가 더듬어볼 때 이 말씀의 흐름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여기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러운 이들의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육이오가 나기 전 전해 이지요. 서울 어머니가 살던 문바위 집터가 비어있었습니다. 그해는 금남 언니도 해방 후에 한 일 년 있다 내려가 버리고 동구씨도 내려가 버리고 서울 어머니도 하산해 버리고 집이 텅텅 비어 있습디다요. ‘준호,’ 그러니까 ‘예’ ‘오늘 문바위에 가봅시다.’ ‘예,’ 따라갔어요. 방에 들어 가 보니 해는 집니다. ‘준호, 준호는 여기 남으시오.’ 그리고 혼자 내려가 버리세요.
참 그때 지금제가 복 있는 것을 느껴요. 그때 어떻게 믿었을까? 이 선생님의 말을 믿었을까? 무조건이에요. 이불이 있을까? 요가 있을까? 밥이 있을까? 옷이 있을까? 가사 나무가 있을까? 성냥이 있을까? 해만지면 추운 때거든요. 그러니까 혼자 내려가 버리시는데 해가 지니까 쓸쓸하고 처량 합디다요. 더듬어 보니까 성냥 하나가 있어요. 불을 탁 피워가지고 뒷산에 가 낙엽이 많지요. 가져다 불 때고 자고 그 이튼 날 어린 소년 둘이 그때 귀주 어머니가 어머니고요. 어린 소년 제가 5-6명 데리고 있었지요. 담요 하나 단지 하나 뭐 김치 조금하고 쌀 한 되하고 그냥 쭉 성냥 한 곽 하고 딱 부쳐줍디다. 그리고 애기들 가버렸지요. 이유는 없어요. 설명도 없어요. 거기 있으라. 하고는 양식이 와버리니 이제 오지 말라는 기별이거든, 짐작했지요. 오지 말라나보다. 거기서 한 일주일 있으니까 애기 하나를 보내줍디다. 혼자 있으면 적적하다고 애기 하고 둘이 살지요. 한 달이나, 그냥 한 달 후에는 어머니하고 애기들 다시 다 올라와 버려요. 청소 집에 있는 애기들이, 그래서 소문을 들으니까 광주에서 그때 무슨 라디오도 없고 깊은 산에 있으니까 육이오가 일어났든가 동광원이 출발 했던가 보지요. 동광원 식구 백 명이 왔다고 거기 있던 애기들은 전부 산으로 올려보냈어요. 얼마나 명철하세요? 거기 살던 사람이 하나만 남아도 안 되어요. 거기 그때는 밤손님 와서 물어보고 낯에는 순경이 와서 물어보고 거기 모든 일을 아는 사람이 남으면 안 되거든요. 유화래 여사가 오기 위해서 길을 닦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기 전에 세례요한이 길을 닦듯이 유화래 여사가 지나갈 길목에 있는 사람은 옛날에 살던 사람은 전부 비켜 버린 거예요. 미리서,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있도록 하고 그 길목으로 올라가실 수 있게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그 길목에 우리 아기들이 살았거든요. 우리 아기들을 전부 산으로 올려버려. 그 아기들은 동광원 애기들이 아니에요. 동광원보다 일 년 전에 살던 애기들 이지요. 그래 이 조금 있으니까 짐작이 가요. 뭔 난리가 일어났나보다. 그러면 육이오가 일어나기 전 몇 달 전에 왜 무슨 직감이 있냐? 그거에요. 예언적으로 아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어쩐 직감이 있어서 저를 미리 산으로 올려보내고 그 다음에 애기들이 다 올라오게 그렇게 착 착 착 됩디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요. 그럼 그때 저도 어린 애기들을 밤낮으로 데리고 살던 선생인데 애기들하고 저를 딱 분리했거든. 한 달 이상 애기들 옆에 못 가게하고 그런데 그 담에 보니까 육이오가 일어나고 애기들은 제가 데리고 산에 피신했거든요. 죽 광주서 온 애기들도요. 이왕 거기서 사는 애기들은 못 만나봤어요. 육이오가 끝나도록, 서로 왕래가 없어요. 서로 이쪽저쪽 비밀을 말할 수 없지 않아요? 과거에 있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이 왔다갔다 못하니까 서로 비밀이 보장되어요. 지리 모든 사정이요. 지금 보면 얼마나 참 지혜롭고 바로 된 것인지요? 그러면 그때 저도 청년 아닙니까? 어떻게 그 말씀에 무조건 순종 했을까? 그게 참 은혜롭고 복 있어요. 제가 순종한 것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지요. 말이 쉽지, 산속에 들어가기도, 보러 갑시다. 그리고는 ‘준호, 여기 남으십시오.’ 그러면 밤에 도망가 버린다고요. 화가 나서 이해가 안 되면요. 그렇게 안 됐어요.
무조건 산에 있으시오. 하니까 ‘예,’ 그만큼 이 선생님이 영력이 있었지요. 아무 설명 안 해도 산에 남으시오. 그러면 예, 그래도 아무 마음에 부담이 없어요. 이 선생님께 대해서 아무 의심이 없어 좋게 해 주시려고 그러시지 믿어버리는 거예요. 그랬어요. 지금도 그러란 뜻이에요. 우리 원장님이 어느 보모더러 이렇게 하시오. 그러면 무조건 예, 하는 것이지. 왜 날 이래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이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복종하는 행복스런 이들의 택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복종 한다는 것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의 택하신 길이란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이나 부족을 느끼지 않는 순종 어린양과 같은 순수한 순종, 어린 아기와 같이 순수한 심령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체험 했다는 보고 아닙니까? 지금 여러분도 꼭 언니가 위에 보모님이 이렇게 이것 하십시오. 가사 오늘 금식 하십시오. 찬물 잡수시오. 예, 그러고 먹고 그렇게 살아요. 왜 날 찬물 먹으라할까? 그러지 말라는 거지요. 자 따라 읽으십시오. 복종하는 길은 행복스런 이들이 택하신 길이라는 것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마음에 불만을 하거나 불평을 하지 말고 어린 양과 같이 순결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찬송 부르십시다.
(찬송)
이왕 모이셨으니까 이 선생님이 동산을 여시고 여기 사실 때 항상 여기 계시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모든 식구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를 읽으라. 그래서 예배시간에는 꼭 읽었지요. 모든 식구가 분원에서도 다 읽고요. 이 선생님 살아계실 때도 많이 보던 책인데 하늘나라 가신 다음에 더 안 봐요. 저도 안보지요. 오늘 저녁에 잠깐 한 장만 읽어 드릴게 듣고 가십시오. 이 글도 이 선생님이 참 우리들에게 장려하시고 읽으라. 하시고 권면하던 글이고 또 그분 말하고도 같지요. 꼭 그분이 다른 말 더는 안하거든요. 성경 말씀 하셨고 이렇게 좋은 책들 보라고 추천하셨고 보라 모든 것이 십자가에 있고 모든 것에 죽음이 있다 거룩한 십자가의 길 밖에 또 날마다 극기 하는 길 밖에는 생명으로 인도하고 참다운 마음의 평화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또 어디 있는가? 내 뜻대로 어디든지 가보고 네 원대로 무엇이든지 찾아보아도 위로는 거룩한 십자가의 길 보다 더 고상한 길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래로는 더 안전한 길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네 뜻과 네 생각대로 모든 것을 배치하고 마련해 보아도 네가 항상 좋던지 싫던지 무슨 곤란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또 이렇게 항상 십자가를 만날 것이다. 혹 네 육신이 괴롭던지 혹 네 영혼에 정신적 번민을 느끼던지 할 것이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요. 이런 말씀은 영성 생활 많이 한 사람은 좀 영적 체험일 거예요. 어떤 때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요. 어떤 때는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것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가끔 너 자신이 네게 괴로움이 될 것이다. 믿음이 오래된 사람들은 요 문제에 걸리지요. 원수가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자신이 내게 원수가 되는 것이지요. 가끔 너 자신에 네게 괴로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괴로움을 면하기 위하여서나 혹 감하기 위하여 는 약도 없고 위로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때까지 참을 수밖에 다른 길은 없다. 소화 테레사는 무미건조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정신 고통을 2년 이상 겪었다고 그러지요. 하나님의 뜻은 네가 위로 없이 고난을 받는 법을 배우시기를 바라시고 또는 오로지 너 자신을 당신께 맡기기를 바라시며 고난을 당하는데서 더욱 겸손한 마음을 바라도록 힘쓰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도 라마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니까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체험하라. 그 말이에요.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체험한 사람이 아니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깨닫지 못한다. 십자가는 항상 준비 되어 있고 사방에서 너를 기다린다. 네가 어디로 달아나던지 십자가를 피할 수 없으니 이는 어디로 가든지 너 자신과 같이 가고 너 자신을 항상 만나기 때문이다. 위로 오르고 아래로는 내려다보라. 밖으로 나가보고 안으로 들어가 보라. 이 모든 방면에서 십자가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누릴 마음이 있고 영원한 월계관을 얻을 마음이 있으면 어느 곳에 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