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수양 / 봄바다
워낙 더웠던 여름을 보내서인지 잦은 비에 주변이 눅눅해져도 기온이 내려갈거라 기대하면 견딜만 하다. 아침 저녁 약간 서늘한 기운도, 낮의 화창한 햇볕도 다 기분 좋은 요즘이다. 가을 햇빛은 보약이라는 말이 아니더라도 습기가 가신 공기는 여름과 사뭇 달라 산뜻한 기운에 마냥 걷고 싶다. 이 좋은 계절에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1년 후배지만 몇 년은 위 선배처럼 듬직하고 진실하다. 특히 에두르지 않고 핵심을 콕 짚는 그녀의 말은 덜어 낼 것이 없다. 명예퇴직한 지 벌써 6년 째 접어들고 광주에 사니 만나기가 쉽지 않다. 퇴직해서 좀 여유롭게 살고자 했으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친정어머니 수발드느라 좀체 시간이 나지 않아 전화하는 것도 어렵단다. 사람살이가 맘 먹은 대로 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냐 했더니, 맞다며 헛웃음을 짓는 그녀 목소리에 힘이 없다.
그녀와는 2001년 ㅁ군 ㅁ초등학교에서 만났다. 2학년을 맡은 나는 2층, 3학년을 맡은 그녀는 3층에서 근무했다. 2학년 동학년 교사들은 거의 50대 후반이라 어려웠다. 그래서 그녀와 더 가까워진 듯싶다. 그녀 집은 학교 근처라 아침마다 간식거리를 챙겨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따뜻한 차를 끓여 놓고 나를 불렀다.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지금도 나를 부르는 그녀의 생기롭고 따뜻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녀와 더 가까워진 계기는 동기 ㅈ 때문이었다. ㅈ은 승진하려고 미리 등급 표창도 받고, 교과교육 연구회에 들어가 시범 수업도 하는 등,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하지만 섬에 발령 받아 5년을 시달리고서야 목포에 온 나는 다시는 오지로 가지 않겠다는 생각 외에는 없었으니 ㅈ과는 가는 방향이 달랐다. 하지만 생각하는 대로 삶이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으랴.
목포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 학교에서 내리 4년, 그것도 교육부 연구학교 2년까지 하다 보니 벽지점수에 연구학교까지, 이제 약간 부족한 연구학교와 연구 점수만 따면 나도 승진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4년을 함께한 교장 선생님은 ㅁ군 전근에도 신경을 써서 연구학교로 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벽지에서 산 5년이 아깝다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포기하면 되겠냐며 애써 주셨다. 이렇게 나도 승진을 바라보며 예정된 점수를 채우고자 애쓰는 이들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연구 점수가 많이 부족해서 대학원에 등록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서 도교육청에서 등급 표창을 주는 수업대회에도 도전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ㅈ도 나와 같은 과목으로 출전한 것이다. 늦게서야 나도 교과교육 연구회의 회원이 되어 열심히 참여했지만 그녀의 열정에는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막상 표창 대상이 내가 되자 ㅈ은 나와 친한 장학사의 편파적인 심사 때문에 자신이 떨어졌노라며 화를 냈다. 출근해서 막 실내화를 꺼내는 중이었는데 그런 소리를 듣고 성질 급한 내가 그냥 넘어 가겠는가? "심사에 불만이 있으면 문제 제기를 하든지!"라며 언성을 높이고 있는데 그녀가 나타나 나를 끌고 갔다. "오메나, 부끄러운지들 아시요들. 둘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네. 떨어진 마음도 헤아릴 줄 알아야제!"라며 눈을 크게 뜨고 어린 애들 바라보듯하며 웃었다.
좀 참을 걸. 하지만 엎지른 물을 어쩌랴. 하루 종일 부글거리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퇴근 길에 아침의 사건을 들은 다른 동기 ㄱ이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붙잡아서 ㅁ식당에 있는데 그녀도 왔다. 승진을 하려면 수양을 더 쌓아야지 그깟 일에 그렇게 화를 낼 일이냐며 성질 관리 잘 하라는 그녀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녀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관리자로서 가장 어려운 일이 빤히 보이는 잘못도 직선적으로 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퇴근 길에 늘 내게 하는 말도 "그래. 오늘도 잘 참았다."이다. 그러면서 가끔 그녀가 떠오른다. 직장은 갈등의 온상지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떨어진 사람의 심정도 헤아려 보라."던 그날의 그녀 충고는 내 가슴에 살아 있다. 오늘따라 그녀가 보고 싶다. 오늘은 내가 먼저 전화를 돌리리라.
첫댓글 선배님 글은 모두 스토리가 너무 재밌어요. 푹 빠져 재밌게 읽었습니다.
조언하는 후배나 받아들이는 선배나 다 훌륭합니다.
마지막 문장이 맘에 듭니다. 바로 제 맘이거든요.
"그래. 오늘도 잘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