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힘이 세다 / 박미숙
큰딸은 철저한 채식주의자다. 우유도, 달걀도, 멸치를 우려내 끓인 된장, 젓갈이 들어간 김치조차도 먹지 않는다. 가죽으로 된 신발이나 가방을 쓰지 않고, 동물 털이 들어간 옷도 피한다. 이렇게 지낸 지 10년쯤 되었다.
모두 모이면 큰딸의 음식은 따로 마련했다. 가족 외식 때도 자기 음식을 준비해 가서 그것만 먹었다. 손이 많이 가는 것도 그렇지만, 잘 먹지 못해 건강을 해칠까 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빈혈로 쓰러지기도 해서 골고루 먹으면 좋겠다고 했다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며 다툰 적도 여러 번이다. 생각해서 하는 말도 참견으로 받아들이니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장어 잡는 날에 아무리 바빠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다. 아빠가 살아있는 생명을 잡아 돈을 버는 게 싫다고 했다. 건져낸 양이 얼마나 되는지만 적어 달라고 부탁해도 말없이 청소만 열심히 했다. 이해하면서도 서운했다. 작은딸은 늘, “언니는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자.”라며 나를 달랬다.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고 했지만, 매사에 자기 기준이 뚜렷하니 맞는 사람이 있으려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좀 유연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드디어 좋은 인연이 생겼다. 딸은 교직 생활이 힘들어 지금 휴직 중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명상 모임을 찾아다니는데, 그곳에서 결이 비슷한 ㅅ을 만났다. 그의 어머니도 참석하셔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집에 가서 밥도 얻어먹고 아버님까지 뵈었다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보니 ㅅ뿐 아니라 부모님도 반기는 듯했다.
딸의 표정이 밝아졌다. 혼자서도 노래를 자주 부르고 무슨 일이든 즐겁게 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집안일을 거들기 시작한 점이다. 추석 무렵, 우리 장어가 ‘언니네 산지 직송’에 소개되면서 주문이 엄청나게 밀려들어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그때부터 큰딸이 팔을 걷어붙였다. 집에 가서 도와드리는 게 어떻겠냐는 ㅅ의 권유를 받아들여서였다. 워낙 꼼꼼해서 맡겨 두면 실수가 없으니 든든했다.
한창 바빠 밥 먹을 틈도 없는데, 남자 친구를 데리고 오겠단다. 지금은 챙겨줄 수 없으니 한가할 때 하자고 했지만, 일손을 보태러 오는 것이라며 굽히지 않았다. 꾸준히 거들어 주는 것도 고맙고 밝아진 모습도 보기 좋아서 남편과 의논 끝에 허락했다.
ㅅ은 처음 온 집인데도 익숙한 사이였던 것처럼, 도착해서 갈 때까지 일을 했다. 택배 상자를 종류별로 분류하여 차에 싣고, 전단지를 비닐에 넣거나 상자에 넣을 얼음을 만드는 것까지. 딸과 함께 여러 가지를 해주어서 훨씬 수월했다.
2박 3일을 지내며 찬찬히 살펴봤는데, 예의 바르고 단단한 청년이었다. 작은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니, 딸이 힘들어하면 중심을 잘 잡아줄 수 있겠다 싶었다. 먹거리를 조심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몸과 마음을 잘 살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둘은 주말이면 암 환자가 있는 한방 병원에서 아로마 테라피(aroma therapy) 봉사 활동을 한다. 그 병원 원장님이 딸의 진료를 보고 침과 뜸 치료도 해 주셨는데, 목(木) 체질에는 고기를 먹어야 기운이 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했단다. 그분이 약에 기대기보다 자연 치유력을 중히 여기고 환자를 존중하는 분이라는 걸 봐와서인지, 그 조언이 바로 와닿은 둣했다.
집에 돌아와서 장어를 먹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점 먹이고 싶어도 응하지 않더니.... 작은딸이 “내가 구워준 것을 언니가 맛있게 먹었다.”라며 사진을 보내왔다.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 건강이 더 나아질 것은 물론이고,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아져서 함께 밥 먹는 시간이 편해지겠다 싶었다.
생각해 보면 이 모두가 ㅅ 덕분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카카오톡(Kakao Talk)을 보냈다. 우리 ㅎ의 가치를 알아준 이가 ㅅ이라서 참 좋다고, 흔들릴 때 곁을 지켜주고 안에 품은 좋은 점을 잘 끌어내 줄 것 같다면서, 서로 의지하며 함께 성장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ㅅ은 ㅎ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인정해 주고, 앞으로 펼쳐갈 미래를 지지해 주어서 무척 든든하고 즐겁다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좋은 것은 함께 키워 나가겠다고 답해 왔다.
돌이켜보면 딸을 걱정한다는 이유로 내 생각대로 바꾸려 했던 적이 많았다. 잘 먹고 건강하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본인이 지키고 싶어 한 생각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 아무리 말해도 꿈쩍하지 않던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스스로 마음을 열고, 가족의 일을 거들고, 전에는 하지 않던 선택을 했다. 잔소리와 걱정으로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좋은 점은 북돋우고 모자란 곳은 가만히 받쳐 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배운다. 사랑은 누군가를 내 뜻대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제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곁을 내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다행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역시 사랑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덕분에 요즘 사는 재미가 솔솔하시겠네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