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 없는 새 >> 정찬 지음. 창비출판사
/패왕별이/ /동사서독/ /아비장전/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다른 것은 전부 제쳐두더라도 소설은 이 세 편의 영화를 재미있게 감상하는 데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god)이 있었다. 이 신은 인간의 행복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개별 인간의 행복에 봉사하는 신이라면 그를 차라리 서비스 종사자라 불러야 한다. 신은 거기에 존재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네 삶과 무관하게 금강은 흐르고 지리산은 유구하다. 신과 강과 산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고 불필요한 것일까?
모든 어둠이 사라지고 가장 찬란한 빛만 남아 세상의 그림자와 구석을 다 정복해버리면 세상은 그야말로 빛(행복)으로 충만해질까? 빛은 백두산까지 시각을 확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청각과 후각과 마음의 눈을 퇴화시키거나 움츠려들게 하지 않을까? 내가 주로 보는 영화가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아파트 거주자가 70퍼센트를 넘는다는데 그 비율만큼 아파트가 영화의 배경이나 무대로 사용되는 빈도수는 턱없이 모자라 보인다. 그곳에는 편리와 안락과 효율성이 있고 빛나지만, 그 대신 그림자와 어둠과 음습한 악이 없어 이야기를 만들기가 어려워서가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해보았다. 이야기가 관계에서 나오는 무엇이 아닐까? 관계가 단절된 아파트라는 장소에서 이야기가 힘을 쓰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하얀 빛은 우리의 눈을 확장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새장 속에 갇힌 새로 만드는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닐까? 슬픔과, 분노와 고통은 극복하여 행복으로 바꾸어야 하는 장애물일까? 슬픔과 고통이 기쁨으로 가는 길의 장애가 아니라, 기쁨과 같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기쁨의 미학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슬픔의 미학도 그만큼 탐구되고 소중히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슬픔과 깊은 절망에서 미학을 발견할 수는 없는 걸까? 빛에 눈 먼 새처럼, 기쁨에 눈 먼 동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정찬은 소설에서 자유와 예술을 등치시킨다. 예술의 목적은 자유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가치는 ‘행복’이 아닐까 싶다. 자유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면 불행하게 하는가? 자유는 행과 불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고 싶다. 그 둘은 다른 문제이기도 하지만, 자유는 행복감보다 더 위대한 가치일지 모른다. 자유는 행복의 기준으로 결정될 운명이 아니다. 행복과 안락을 위해 전 인생을 바칠 수 있다면 다른 누군가는 자유을 위해 슬픔과 고뇌를 위해 그렇게 하기도 하지 않을까? 계절이 변화하여 바뀌 듯, 희노애락은 그렇게 운행한다.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여백에 몇 번이고 낙서하였다. 동아시아 3국 한국, 중국, 일본이, 판소리, 경극. 노, 난징대학살이, 가해자와 희생자가,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은 어머니의 태, 개인의 가장 원초적이고 내밀한 존재에까지 닿아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여섯 명의 등장 인물 중 세 명은 자살을 하고, 세 명은 살아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정찬도 자살을 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 되었다. 소설에서의 자살은 삶의 완성이자, 죽음의 완성 같아 보이기도 한다. 삶에서 내처지고 밀려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마침이나 완성, 아니아니 죽음의 완성으로서 자살. 죽음을 피해야 할 것이고 삶은 붙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죽음과 삶이 대등한 양식이라면, 만남과 헤어짐이 같다면, 만남은 장려하고 이별은 피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둘 다 대등한 가치가 있다면, 만남도 우아해야 하지만, 이별도 우아해야 하지 않을까? 이별이 만남의 완성이 아니 듯 이별도 만남의 불행이 아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만남의 미학이 있다면 이별의 미학도 있어야 한다. 아직 살아남은 세 명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 그렇게 모든 존재는 무너지고 사라지고 만다. 모든 존재는 그 사라짐이 있기에 존재가 아닐까?
/지금 세계는 새로운 아비규환으로 뒤덮이고 있소. 그 신의 정체가 무엇이겠소, 자본이오. 놀랍지 않소? 신의 실체가 물질이라는 사실이, 지금 인류는 새로운 신이 뿜어내는 휘황한 광채에 싸여 있소. 새로운 신의 시대가 절망스러운 것은 어떤 신의 시대보다 폭력의 형태가 깊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에 있소/ 오! 신이시여 나를 자본, 물질의 신으로부터 지켜주소서.
/실재와 허구, 있음과 없음의 구분이 지워져 있다. 실재가 허구로 될 때 허구는 실재가 되고. 있음이 없음이 될 때 없음은 있음이 된다/ 불교의 반야심경을 그대로 옮긴 듯도 하고 장자의 나비의 꿈을 추상화 시킨 듯도 하다. 워낙 난해한 말이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자본이라는 신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인간/의 반항이 아닐까도 싶다.
아무리 /참 나/를 찾는다고 내 마음을 뒤져보아라. 고배율의 현미경과 망원경을 가지고 내 마음을 샅샅이 조사해 보라. 그 노력에 비해 성과물은 보잘 것이 없거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존재란 고립되어 단독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나의 생명은 어머니의 태와 연결되어 있고, 어머니의 태는 또 다른 존재와 연결되어 있고, 태를 박차고 나온 생명은 또 다른 태와 연결되어 있고 그 태는 또 다른 태와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건 없건 우리는 어쩌면 태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난징대학살에서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어머니가 나를 낳았고, 그 강간당한 사실을 견딜 수 없었던 어머니는 자살을 하고 그 태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는 예술과 술과 고독을 운명으로 삼는다. 그리고 /실재가 허구로 될 때 허구는 실재가 되고, 있음이 없음이 될 때 없음은 있음이 된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아름다운 사라짐을 선택한다. 존재의 완성을 이룬다. 존재는 있음에도 없음에도 있지 않고 있음과 없음의 경계를 넘어설 때, 아니 그 경계가 사라질 때가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본이라는 물질이 신이 된 시대다. 저자에 의하면 인류 역사에 물질을 신으로 모신 시대는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알라를 믿는 이슬람 테러단체를 비난한다. 하지만 인류는 아리아족의 피의 순수성을 신으로 격상하여 6백만을 가스실에서 절멸하고, 천황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난징대학살을, 마오져둥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2천만의 아사자를 혹은 기독교 신의 아름으로 십자군 전쟁을 식민지인을 학살하여 왔지 않는가? 지금은 자본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폭력과 불평등과 차별을. 자본이라는 신을 위해 우정과 의리와 약속을 팽개치고, 자본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과 폭력과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있지는 않는걸까? 나는 자본이라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나의 선택은 개인의 선택이란 사실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추인하는 선택일 뿐이지는 않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 뿐이지 않을까? 무시와 무지 전략이다. 모두가 다 개체로서의 개인에 천착할 때 모든 것으로서 개인에 천착하는 몇 안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첫댓글 난징대학살,
6주 동안 일본군에게 2~30만 명의 중국인이 잔인하게 학살되었으며, 강간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도 2~8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추천 덕분에 소설을 읽고, 영화를 통하여 전쟁과 학살을 간접체험하고 죽는 인간, 살아 난
남은 인간, 죽는 가치, 살아난 가치를 한 눈에 느껴볼 수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