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23일 부활 제3주일>
개인(Individual)과 부활 그리고 신앙
과거는 살아있다. 우리가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억압하게 되면 신체감각으로 몸의 기억이 된다. 그렇게 되면 몸과 마음은 분열되어 “과거에 있었던 일로 기억하는 대신 현재 경험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면 기억은 기억나지 않는 기억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으로 재생산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사람의 반복되는 행동은 그 사람의 기억하는 방식이다. 사람은 내적으로 안전하고 평온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다. (트라우마와 기억, 피터 르빈, 학지사, 추천 글에서)
많은 사람이 과거 속에 살아가고 있다. 개인(Individual)이라 말할 때 ‘지금-여기’라는 현실성(현실검증력)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어디에 있는가?’ 또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고 할 때 개인의 존재성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라는 것이 어느 고정된 실체로 제한시킬 수 없지만 이를 다른 말로 풀어보면 많은 사람이 과거 기억을 반복하는 행동을 할 뿐 ‘지금-여기’를 살지 못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이 ‘제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개인(Individual)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유일무이한 ‘나’ 곧 우리 자신이다.
사람은 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까? 또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며 평가할까? 이는 나르시스적 전능함에 빠진 인간의 원죄적 교만함이라고 생각한다. 비교는 평가와 판단을 위한 전 단계로서 비교 평가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전능하게 여기고 있음을 방증한다. 열심히 자기 수련과 성찰을 통해 자기와 충분히 만난 사람, 한 인격체로서 성숙한 성품을 갖춘 사람은 ‘비교’라는 나르시스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한 인격체로서 개인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자신의 소중함과 귀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특징은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삶은 감사하는 삶이요, 힘들고 고통스러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간직하고 밝고 낙천적이다. 이들은 신기하게도 어둠 속에서도 의미를 읽어내고 고난 속에서도 가치를 발견한다.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확신이 들더라도 자기 자신을 아는 일에 게을리하지 마십시오!’라는 말씀이다. 많은 영성가의 난제였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조언이 신앙생활, 영성 생활에서 ‘자기를 아는 일’이다. 지나치게 비약적인 측면이 있겠지만, ‘자기를 아는 일’은 곧 ‘하느님을 아는 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자기를 아는 일’은 ‘너(타인)를 아는 일’이요, ‘세상을 아는 일’과 또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 아닐까? 왜냐하면, 나를 아는 일의 여정을 위해서 나는 ‘지금-여기’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 과거를 반복하는 삶을 살면서 나를 아는 여정에 들어갈 수 없지 않을까? 많은 사람이 이 여정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을 슬프게 하지 않아야 할 텐데,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도 ‘나’(Individual)와의 랑데부를 기다리실 텐데, 눈을 뜨고도 못 보고, 귀가 멀쩡함에도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나’(Individual)에게 있어서는 ‘진실성’이 중요하지 ‘완벽성’은 중요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나’(Individual)라는 진실한 존재성을 조금이라도 생활 안에서 실현하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나’(Individual)라는 존재성을 완벽하게 해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 하느님께서는 나만의 ‘개인(Individual)’을 주셨고 그것은 유일무이한 독창적인 존재다. 남을 흉내 내지 말고 ‘너’가 되어라! 남이 잘하는 것, 남들이 칭송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자신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라. 비록 주변 사람들로부터 별 인기 없고 때로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진정 그것이 ‘자신’이라면 너 스스로라도 ‘소중히’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당신의 진정성을 보고 ‘너’를 알아볼 것이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예수님의 ‘개인’(Individual)은 부활을 통해서 모든 ‘나’(Individual)를 통합, 완성해주신다. 성자께서 성부와 성령과 하나이시듯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로 통합되어 나가는 것이 곧 부활이 아닐까? ‘하느님께 일치되어 감’이라는 것은 우리의 ‘나’(Individual)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나’(Individual)를 통해서 나를 만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고 하느님 창조의 신비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부활은 이런 만남이 있다는 것,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삶은 통합되고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삶은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한 까닭이다.
자신의 ‘개인’(Individual)을 피워라! 마치 장미꽃이 곱게 자신의 ‘개인’(Individual)을 피워내듯이 당신은 당신의 ‘개인’(Individual)을 피워라! 진정한 너는 수많은 다른 너와 모순되지 않으며 화합하고 조화로울 수 있으니 누구처럼 되지 못한 것에 불안해하지 말고 너 자신이 되어라. 참된 너는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것이다. 진실하고 성숙한 ‘개인’(Individual)은 가족들에게 사랑과 행복의 원천이 되고 벗들에게는 우정이 되며 사회에는 공번된 존재가 될 것이다.
‘개인’(Individual)은 우리 각자의 진실을 통해 현실 세계에 나타날 것이며 그 어떤 거짓으로도 피워낼 수 없는 우리 자신이다.
첫댓글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은
무한한 통찰의 연속이며
현실을 살아가면서
꾸준히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라는 말씀이시네요.
감사합니다~ ^ ^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 나를 궁금해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