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01/01/IBLZ25XLQBHEHK3PXU7ZNIUSWY/
[2025 신춘문예 조선일보]
시조 당선작
취급주의 / 한승남
계단을 오르내리며 슬픔을 운구한다
얼굴 없는 수취인 이름도 희미해졌다
똑똑똑 대답 없는 곳
긴 복도가 느려진다
저 많은 유품들은 누가 보내는 걸까
주문을 외우면 외로운 착각의 세계
반품도 괜찮을까요
열지 못한 사연들
상자도 사람도 구석에서 자라고 있다
유리 같은 마음입니다 던지지 마세요
날마다 포장된 시간
기적을 쌓는다
<당선 소감>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 정보통신대학원 졸업
-고려아트컴퓨터학원 원장
-2022년 3월.2023년 5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붉은색 바탕에 '취급주의' 문구가 붙은 택배 상자가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합니다. "절대 던지지 마세요. 밟지 마세요."는 누구를 향한 외침일까요? '택배기사의 과로사가 올해만 벌써 10번째... 기사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택배를 받을 때면 낮은 곳에서 애쓰는 이들의 땀내가 느껴집니다. 우리의 일상이 때로 거대한 담론이 되어 다가옵니다. 열지 못한 사연이 유리같은 아픔으로 전해집니다. 하루를 천 년처럼 사는 그들이 있어 나의 아침이 있습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길고 거대하고 이성적인 착란을 통해 견자가 된다."라는 랭보의 말이 떠오릅니다. 시조는 저에게 많은 숙제를 던집니다. 시조를 쓰는 '견자'로서 하루하루 성찰해 봅니다.
문학은 삶의 무게와 아픔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됩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도록 지도해 주신 조경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인의 길에 동행해 준 남편, 시란 동인, 볼륨 동인 모두 고맙습니다. 시조의 길을 열어 주신 심사위원님과 조선일보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제 시의 씨앗이신 아버지 영전에 이 운문을 바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자매들, 아들딸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가장 안쪽에서 세상의 가장 바깥쪽을 향해 써 나가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조금씩 나아가는 응모작 속의 걸음들이 보였다. 익숙한 작풍의 탈피가 오늘의 정형시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졌다. 형식적 안정감 위에 어떤 새로움을 발굴해야 오늘의 정형시로 거듭날지, 분투한 흔적들이다. 그럼에도 작품을 거듭 읽다 보면 피상적 인식을 드러내는 성급한 종결이나 시상의 서두른 봉합, 각 수 사이의 작위적인 연결 같은 것들이 더 드러났다.
그 중 '신발 애너그램', '꽃 긷는 중', '겨울 매미', '블라인드', '취급주의' 등이 남았다. 꽃 긷는 중'과 신발 애너그램' 그리고 겨울 매미'는 일상 속의 발견을 장식적 수사 없이 담아내는 발성과 형식의 구조화가 돋보였다. '블라인드'는 형식과 가락을 유려하게 타는 능숙함을 여러 편에서 균질감 있게 보여줬다. 하지만 구체성이나 핍진성 등에서 다소 떨어지는 안이한 완결 등이 보였고, 이런 인식과 편차를 넘어서는 '취급주의'가 당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취급주의'에는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극화하는 직조력으로 주의를 일깨우는 힘이 있다. 택배와 함께 나날을 사는 현 세상의 면목을 '취급주의'로 집어낸 발상과 이면의 성찰이 울림을 지닌다. 이사 때 요주의 물품에 붙이던 취급주의를 통해 요즘 도처의 경고로 봐도 좋을 만큼 함의를 넓힌다. '슬픔을 운구한다'는 대목과 유품'의 연결, '반품'과 '열지 못한 사연들'의 조합은 '구석에서 자라는'또 다른 우리 현실의 면면을 환기한다.동봉한 작품에서도 한 단어, 한 구절을 허투루 놓을 수 없는 시조에 허사나 과잉 없는 구조화를 보이며 이곳의 현실을 되짚는 발견도 묵직하다.
한승남씨에게 축하와 기대를 보낸다. 도전할 분들의 앞길에도 큰 바람을 보낸다.
정수자: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