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에 관한 시 모음> 오정방의 '김치' 외
+ 김치
일일이
종류를 가릴 것 없이
하나하나
이름을 댈 것도 없이
평생을 먹고도
물리지 않는
김치, 김치
요, 밥도둑님!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김치
하얀 속살 뽀드득 씻은 알몸의
여리던 가슴
예리한 칼끝에 쪼개져
쑤셔 박히던 짜디짠 소금물통
간이 배어 적당히 세상맛이 들고
뻣뻣하던 줄기
부들부들 연해지거들랑
고춧가루 푼 비린 젓갈에 묻혀
숨막히는 항아리 속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끌어안고
사근사근 익어
한 겹 한 겹 쓰린 살을 비비며
새콤달콤 살다가
군내 나기 전에
빈 항아리만 남기고는 가는 거라고
사시사철 밥상 위에 올라
삶의 입맛을 돋군다.
(김기덕·시인)
+ 김치
무김치 아버지와
배추김치 어머니 사이에
총각김치 아들과
열무김치 딸이 태어나
국물김치에 목 축여 외치오니
우리는 자랑스런 토종
김치 가족이라오.
(전병철·시인, 1958-)
+ 깍두기
미끈한 놈을 골라잡아
네모 반듯 잘라내어
한바탕 물세례를 시켰더니
허벅지 살이
훤히 내비친다.
부끄러워
한줌 눈물을 흘리는 놈들만
골라잡아 서럽도록 끌어안고
살아가도록
짠 내 한 바가지 들이분다.
이제 체면은
남지 않았다.
하얀 속살 안으로
한없는 치욕이 스민다.
눈 시리도록 매운 것들로만
옷을 덮어 주었다.
눈물겹도록 짠 내 나는 것들로만
이불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는 살짝 감싸주었다.
이제
또 하나의 놈들이
태어난다.
(이준호·시인)
+ 깍두기와 나의 신경전
식사를 하다가
유독 하나 남은 깍두기가
눈앞에 보여
날카로운 포크로
깍두기를 밀어보았다
툭 치면 친만큼 뒤로 물러서는 너
아프면 아프다고
싫으면 싫다고 내색도 않고
아무런 반응 없이 물러만 가는 깍두기를
보며 눈물이 났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다가서면 그만큼 뒤로 물러서는 너
포크보다 날카로운 마음으로 다가가
찔러보아도,
아픈 소리 없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너
아,
깍두기는 장난 삼아 밀었는데
눈물은
장난 아니게 흐른다
(김종원·시인, 1949-)
+ 열무김치
나를 가둔 세상, 푸름뿐인 세상
비와 바람은 고독을 가르치며
통통한 초록대 만들었지만
어느 날 너를 만나고부터
나만의 색깔을 지워야 했다
물 속에 빠져 정신을 잃고
나의 의지를 졸도시키면서
소금물 속에서 가볍게 다시 태어난 몸
붉은 양념과 부대끼며
뜨겁도록 애무를 했다
보리밥과 어우러져 구수한 삶에 취하고
시골집 긴긴 밤에 고구마 만나
열정과 희열을 알게 되었다
조상 대대로 내림 속에 키운 사랑
부대끼며 달아오르는 감칠맛
이제, 너에게 그 맛을 길이 새겨주마
(정아지·시인)
+ 파김치
퇴근 때마다 촐싹대는 강아지 앞에
줏대마저 세울 수 없게
녹초가 된 육신
변변치 못한 영혼 만나
한평생 땀에 절어 골진 몰골
추스를 수 없는 희망을 씹고 있다
젓가락으로 대가리 잡혀 거꾸로 승천한
네 마음 내 마음 싸잡아
막걸리 한 보시기로 달래며
(권오범·시인)
+ 동치미
동치미는
만병을 통치하는 약이다
연탄가스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생사의 갈림길에도
힘겨루기로 머리 자근거려
골치 썩는 고부갈등도
한 사발 복용하기만 하면
위력적으로 퇴치한다
허구한 날 배가 고파
흙이라도 퍼먹던 시절
뒷간을 수시로 드나드는
원인 모를 생배앓이도
뱃속 회충의 요동조차
간단히 잠재우는 약
당당히 약방 선반 위 자리잡아야 할
신비의 명약이다
(공석진·시인)
+ 동치미
긴긴 동지섣달 밤에 배가 아려올 때
동치미 뚝딱 잘라
빈배를 채우던 엄마표 동치미가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정성으로 기르고 담은
동치미 무는 달콤한 겨울의 보약이었지
아내에게 동치미 투정을 했더니
핀잔 아닌 핀잔을 한다
행여나 처형께서 담갔을까
탐문해 보아도 보물처럼 찾을 수 없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동치미 맛
이제 영영 찾을 수 없는 수수께끼
(윤용기·시인, 1959-)
+ 김치 담그는 날
쓰윽쓱 양념을 칠하시는
엄마 손도 빨갛고
버무려진 배추들도 빨갛고
한 포기 두 포기
배추김치가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코 훌쩍이며 소매로 땀 훔치시던
엄마 볼도 빨갛고
찔끔찔끔 맛보던
내 혓바닥도 빨갛다.
하아, 하아
부엌은 온통 불바다
온 집안이
고추 냄새로 포위됐다.
(오지연·아동문학가, 1968-)
+ 김치 예찬
늦가을도 지나 초겨울이 시작될 때쯤이면
동네 아낙네들이 함께 모여서 김장을 하던
이젠 점차 사라져가는 정겨운 그 시절 추억
더군다나 김치냉장고가 나온 이후로는
땅을 파고서 김칫독을 묻어서 보관하던
그런 모습조차 사라져버린 아쉬운 풍경
더욱 가족 수가 적고 반찬 종류마저 다양해져
비록 김장하는 양과 그 보관방법이 다를지라도
한겨울 내내 꺼내어 먹게 될 대표적인 발효식품
(손병흥·시인)
+ 배추밭에서
죽을 때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속 이야기도
배추밭에선
다 쏟아놓게 되네
싱싱함
냉정함
거룩함
표정도 다양한
겨울 배추들
나에게 손 내밀며
삶은 희망이라고
묻지도 않는데
자꾸만
이야기하네
함께 누워
하늘을 보자 하네
죽어서 행복한
월동 준비도
서두르자 하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배추에 대한 경배
풀어헤친 너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지난 삶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하는 것 같구나
컴컴한 땅에 뿌리박고
온갖 풍상 겪고 난
든든한 몸통으로
꽉 찬 살가운 자태로
살포시 누워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구나
먹거리를 위하여
버텨 온 너의 희생이
잃었던 구미를 당기게 하고
없는 살림 짭짜름하게 계획 세우며
살게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름답구나
소금으로 살짝 절이면
왕성했던 기운이 부들부들해지고
갖은 양념으로 속속들이 가득 채우면
포기 김치가 되어 밥상을 풍요롭게 하고
미각을 돋우니 겨우내 즐겁구나
포기배추마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버틴 푸른 일생이 다소곳하구나
(반기룡·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첫댓글 보낸사람 :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운영자
보낸날짜 : 2011년 5월 26일 목요일, 16시 02분 38초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