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테로 오는 봄
설과 입춘은 넘긴 이월 중순이다. 예년보다 이르게 여기저기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레도 봄은 금방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며칠째 아침 최저기온이 빙점 아래서 맴돌았다. 분명 일찍 온 꽃 소식을 시샘하는 듯했다. 나는 지난 주 서북산 부재골 볕이 바른 데서 쑥을 몇 줌 캐 오기도 했다. 그 쑥은 올 겨울이 포근했기에 겨울을 나면서 시나브로 움이 터 자란 것이었다.
이월 둘째 월요일 아침나절 구산면 갯가로 나가보기 위해 어시장 앞으로 나갔다. 이틀 전 정월대보름이 자나서인지 어시장 노점은 한산한 편이었다. 버스 정류소에는 진동과 구산으로 가는 몇몇 촌로들이 제 각각 노선 따라 버스가 도착하니 차에 올라 떠났다. 내가 가는 버스는 낚시터로 유명한 원전 종점으로 가는 62번이었다. 그 버스를 타서 종점 못 미친 옥계에 내릴 참이었다.
어시장에서 마산역을 출발해 오는 원전으로 가는 62번 농어촌버스를 탔다. 댓거리에서 밤밭고개를 넘어 현동으로 갔다. 유산삼거리에서 수정으로 갔다. 수정은 구산면 면소재지였다. 버스는 장문안삼거리에서 안녕마을을 지나 길게 이어진 해안선을 따라 옥계로 갔다. 옥계는 한적한 포구로 농사보다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는 어촌이었다. 포구엔 조업을 나가지 않은 어선들이 보였다.
옥계 앞 바다는 겨울이면 대구가 많이 잡히는데 지금은 철이 아닌 듯했다. 예전엔 초등학교 분교가 있을 만큼 마을이 컸으나 이제는 젊은 층이 없어 학교가 폐고 된 지 오래였다. 폐교 부지엔 이승복상이나 기린 같은 동물 모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원호를 그린 포구의 왼쪽 방파제로 나가 보았다. 바닷가 경남대학 연수원은 문이 잠겨 있고 방파제 끝엔 낚시꾼이 둘 있었다.
방파제에서 되돌아 나와 아까 버스를 타고 왔던 해안도로를 따라 올랐다. 그 즈음 길섶 언덕에서 달래를 발견했다. 가져간 호미나 꽃삽이 없었던지라 나무 꼬챙이를 마련해 달래를 캤다. 달래는 파릇한 줄기에 동글동글한 뿌리가 달려 있었다. 달래는 마늘이나 파처럼 뿌리에 향이나 영양가가 많다. 나는 나무 꼬챙이로 조심스레 달래 포기 주변 흙을 파내어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캤다.
그렇게 힘들이지 않고 캔 달래가 몇 줌 되었다. 마트나 할인매장 신선채소 코너의 달래보다 훨씬 강했다. 그런 달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운 달래지만 내가 캔 달래는 갯바람을 맞고 언덕에서 절로 자란 달래였다. 달래를 캐고 나선 산모롱이를 따라 오르니 산불감시원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만치 합포만에는 마창대교 교각이 드러나고 진해 군항과 시가지가 드러났다.
푸른 바다엔 하얀 부표가 줄지어 떠 있었다. 어민들의 주 소득원인 어촌계 홍합양식장이었다. 부포 사이사이에 배들이 끼어 있었다. 아마 바닷물 속에 드리워 키운 홍합을 건져 올리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까 버스가 지나온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서 볕이 바른 길섶에 자라는 쑥을 캐 모았다. 비록 길가였지만 차량 통행이 워낙 뜸해 매연과 분진으로부터 걱정 없는 청정지역 쑥이었다.
마을 식수를 공급하는 집수장 근처에 이르자 갈림길이었다. 옥계마을 입구로 나가 내포를 거쳐 반동 삼거리로 나가는 길이었다. 내가 타고 왔던 버스가 지나난 길이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질 않고 해안선 따라 걸었다. 독립가옥처럼 수산물을 가공하는 공장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풍광 좋은 곳에는 펜션과 찻집도 보였다. 참선 도량 금호산 청평선원은 문간이 닫힌 채 풍경만 걸렸다.
안녕마을을 돌아갈 때까지 캐 보탠 쑥은 몇 줌 되었다. 마을 앞 포구엔 물살을 가르면서 다가온 배가 있었다. 어부는 부지런히 뗏목에다 홍합이 가득 든 상자를 부려 놓았다. 안녕마을에서 장문안 삼거리로 나갔다. 면소재지 수정마을이 가까운 곳이었다. 점심나절이 늦은 때였다. 시장기가 느껴져 분식점에 들어 국수를 시켜 들었다.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더니 봄이 나를 따라 왔다. 17.02.13